제29.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_법륜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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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금강경 17번째 마지막 시간이 되겠습니다.
제 29분 威儀寂靜分. 위의가 고요하다.
須菩提 若有人言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되,
如來 若來若去若坐若臥 여래가 오고 가고 앉고 눕는다 라고 말한다면
是人不解我所說義 이 사람은 내가 설한 바 그 뜻을 알지 못한다 이랬어. 만약에 어떤 사람이 여래가 가고, 오고, 앉고, 눕는다 라고 말하면 이 사람은 여래가 설한바 그 뜻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何以故 어찌한 까닭이냐
如來者 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 여래라는 것은, 여래라고 하는 것은. 조차 온 바도 없으며 또한 가는 바도 없을세. 이런 까닭으로 여래라 이름 한다. 누가 부처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 부처님께서 오신다, 부처님께서 가신다, 부처님께서 앉으셨다, 부처님께서 누우셨다. 이렇게 말하면 그것은 여래의 설하신 바 그 뜻을 모른다. 이런 얘기요. 왜 그러냐 하면 여래라고 하는 그 말이 여래라 하는 뜻은 조차 온 것이 없으며 또한 간 바도 없다. 오지도 않았고 가지도 않았다. 온 바도 없고 간 바도 없는 것을 이름하여 여래라고 한다.
온 바도 없고, 간 바도 없는 것을 다만 이름하여 여래라고 하는데. 여래가 왔느니, 여래가 갔느니 한다면 그것은 여래가 설한 그 뜻을 잘 모르는 까닭이다. 그러면 온 걸 왔다 그러고, 간걸 갔다 그러고, 앉은걸 앉았다 그러고, 누운 걸 누웠다 그러지. 그러면 앉은걸 섰다 그러고, 슨걸 앉았다 그럴까?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오고간다, 앉는다, 눕는다 하는 말은 그 말 그대로 오고, 가고, 앉고, 눕고를 포함하고 있는. 그러나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근본은 아니다.
우리는 분별을 합니다. 옳다, 그르다. 깨끗하다, 더럽다. 신성하다, 부정하다. 이렇게 갖가지 분별을 하게 된다. 이렇게 갖가지 분별을 해 놓고 그 다음에 거기에 선호를 하게 되죠. 깨끗한 것을 좋아해서 취하려 하고, 더러운 거는 싫어해서 버리려고 한다. 그러니까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면 일단 그 안에 있는 깨끗하고 더러운 것을 살펴서 더러운 거는 갖다 버리게 되고, 깨끗한 것은 한쪽으로 모으거나 바깥에 가서 깨끗한 것을 가지고 와서 거기에 채우게 된다. 그러니 뭔가 해야 되죠. 부지런히 해야 되요. 더러운 건 갖다 버리고, 깨끗한 건 갖다 채우고, 더러운 걸 닦아 깨끗하게 만들고 이렇게 해야 된다 이거야.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깨끗하다 더럽다하는 분별을 짓지 않는다 이거야. 깨끗하다, 더럽다 분별을 짓지 않으니, 거기에 싫어하고 좋아함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분별을 짓지 않으니 좋고 싫고 할 것도 없고, 설령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라 이름이 붙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이런 분별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싫다고 갖다 버릴 것도 없고, 또 깨끗하다고 좋다고 도로 가져올 것도 없다. 더러운 것을 닦아서 깨끗하게 만들 것도 없다. 왜? 더럽고 깨끗함이 둘이 아닌 줄을 알기 때문에. 그러니 거기에서는 버릴 것도 없고, 취할 것도 없고. A를 B로 만들 것도 없다. 그러니까 수고로울 게 하나도 없다. 아무런 함이 없다. 이런 얘기에요.
그것을 일러서 올 것도 없고 갈 것도 없다. 온 바도 없고, 간 바도 없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그러면 여래가 빨래를 한다. 빨래를 하는 건 뭐에요? 더러운 것을 빨아서 뭐하게 만드는 거요? 깨끗하게 만드는 거죠. 그러면 여래가 빨래를 할 때 우리가 보고 아~ 부처님도 분별을 하시네~. 더럽고 깨끗한 게 없으면 어때요? 그냥 입고 계시지 빨기는 무엇 때문에 빠냐 이거야. 빨래를 빤다는 것은 더럽고 깨끗한 것을 분별해서 더러운 건 버리고, 깨끗한 거를 취하니까 빨래를 하는 게 아니냐. 이렇게 우리가 보게 된다. 이거요.
그런데 사실은 어떠냐? 여래는 더럽고 깨끗한 분별이 없습니다. 그냥 입어도 되고 분별이 없으니까 여러분들은 더럽게만 입어야만 된다. 이렇게만 생각할 수가 있어요. 무슨 얘기인지 이해하시겠어요? 더럽고 깨끗한 게 없으니까 빨지 말아야 된다. 이 생각만 자꾸 해요. 더럽고 깨끗한 게 분별이 없으니까. 우리가 깨끗한 것은 우리는 선호하고 더러운 것은 멀리 하죠. 그러면 더럽고 깨끗한 것이 분별이 없다는 것은 어떤 것도 선호를 하지 않는다. 그냥 계속 더러운 상태로 입고 있다는 거는 뭘 선호하는 거요? 더러운 거를 선호하는 거 아니오. 제 말 무슨 얘기인지 이해하시겠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더러운 거를 싫어하는데. 더럽다 할 것이 없다. 이러면 금방 생각이 반대로 뒤집혀져 그러면 더러운 걸 좋아하느냐? 이렇게 생각해. 더럽고 깨끗한 것에 대한 분별이 없기 때문에 어떤 것을 취하고, 어떤 것을 버린다 할 것이 없다. 그러니까 여래가 빨래를 한다 해서 더러워서 못 입기 때문에 빨래를 하는 게 아니다. 그냥 빨래를 하는 거다. 싫어서 빨래를 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이 초기에는 다 대중들이 시체를 쌌던 옷을 그냥 벗겨서 입었습니다. 말린다든지 빨래한다든지 안했어요.
그런데 지바카라고 하는 의사가 부처님, 부처님. 이렇게 입으시면 병에 걸립니다. 그러니까 빨아서 햇빛에 말려서 소독을 해서 입으면 병에 안 걸립니다. 그러니까 옳은 소리요? 그른 소리요? 옳은 소리죠. 부처님께서 그러면 그렇게 해라. 이랬단 말이오. 그냥은 우리 같으면 도저히 못 입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 입는다? 빨아서 입어야 된다. 이러지만은 부처님께서는 그냥도 능히 입으시지 만은 그것이 더 쓰기에 좋다니까. 빨아서, 말려서, 햇빛에 소독을 해서 입어라. 그걸 부처님이 그렇게 아이디어를 낸 게 아니고 지바카라고 하는 의사가 그렇게 건의를 했을 때 부처님께서는 오~ 그거 좋겠다. 그렇게 하자. 이랬단 말이오.
그래서 부처님을 보고 가신다느니, 오신다느니, 앉는다느니, 눕는다느니 말한다면 그것은 여래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러니 빨래를 하시는 것을 보고 더럽고 깨끗한 것을 분별하시고 거기에 집착하셔서 빨래를 하시는 게 아니다. 수행자들은 다 이렇게 길거리에서 목욕을 했어요. 비구니가 됐을 때도 똑같았어요. 그런데 인도사회에서는 여자들은 남이 보는 밖에서 목욕을 하지 않는 습관이 있었데요. 그런데 다만 주인 없는 여자, 주인 없는 여자가 당시에 누구에요? 유녀. 창녀들이란 말이오. 창녀만 이렇게 냇가에서 목욕을 했다는 거요.
그러니 사람들이 비구니들이 냇가에서 목욕을 하니 사람들이 보기에 창녀들과 구분이 안돼서 여러 가지 오해가 생긴다. 그래서 한 여신도가 부처님, 부처님, 이렇게 해서 여수행자들이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과 이 오해를 받으니 여성들이 목욕을 할 때는 울타리를 친 안에서 목욕을 하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니 부처님이 오 그렇게 해라. 그랬단 말이오. 그러면 부처님이 비구니는 신성하고 창녀는 지저분한 여자들이니까. 창녀하고 비구니 하고 섞여 구분이 안 되면 안 된다. 이런 생각을 하셔서 구분하셨을까?
여자들은 몸이 신성하다든지, 또는 어떻니까. 남자 몸은 보여도 되고, 여자 몸은 바깥에 보이면 안 된다. 여자는 지 몸을 간수를 잘해야 되. 이렇게 해서 가려서 목욕하게 했을까? 아니다. 다만 처지와 상황이 그렇고 그런 건의를 하니 그것 또한 합당하다 하셔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다. 그러니 부처님의 이러한 일거수일투족, 하시는걸 보고 우리 생각으로 그거를 이러쿵저러쿵 하면 그것은 여래의 설하신바 뜻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세요? 네?
거 단순히 걸어가시고 걸어오시고 앉고 눕고 하는 걸 얘기 하시는 게 아니다. 이 말속에. 아시겠어요? 여래라는 말은 간 바도 없고, 온 바도 없다. 우리가 하나의 이 평면에서 선을 딱 그으면 어때요? 야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갔다?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왔다. 이런 말이 있지. 이 선이 없다면 갔다는 말도 없고, 왔다는 말도 필요가 없죠. 여래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는 이 분별의 경계선을 두니까. 갔다 왔다 이런 개념이 성립하지만은 이 분별의 경계선을 거둬버리면 움직이기는 하시지만은 갔다 할 수도 없고, 온다 살 수도 없다 이 말이오. 그래서 간 바도 없고, 온 바도 없다. 이것은 일체의 분별이 끊어졌다. 이런 얘기요.
須菩提 若有人 言 如來若來若去若坐若臥 수보리야 만약에 어떤 사람이 말하되 여래께서 부처님께서 이 말이죠? 온다, 간다, 앉는다, 눕는다, 라고 말하면
是人 不解我所說義 이 사람이 나의 말한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함이니
何以故 어찌한 연고인가?
如來者 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 여래라고 하는 것은 조차 온바가 없으면 또한 간 바도 없을세, 이런 까닭으로 여래라 이름하느니라.
그러니 부처님이 위(威), 위라는 것은 행동거지를 말하죠. 위가 늠름하다. 이런 말을 쓰잖아 그죠? 위가 어떻다? 고요하다. 이거야. 어떤 상태에서든 고요함 속에 있다. 그 고요함 속에서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하고,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한다 이 말이오. 그 정한법이 없는 가운데서 뭐다? 동이나오고, 서가 나오고, 북이 나오고, 남이 나오고. 갖가지 방향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앞에 몇 분(7분)인지 지금 기억이 안 나는데. 以無爲法으로 이 정함이 없는 법으로부터 以有差別, 갖가지 차별이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죠?
(16:00)
제30. 일합이상분(一合理相分)_법륜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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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 一合理相分 하나로 합친, 일합, 하나로 합한다 이 말이죠? 하나로 합한 이치의 모양, 하나로 합한 이치의 상. 이런 제목인데.
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以三千大千世界 碎爲微塵 삼천대천세계를, 쇄라는 건 간다 이 말이오. 부순다 이 말이죠. 갈아서 가는 티끌로 만든다고 하면
於意云何 어떻게 생각합니까?
是微塵衆 이 가는 티끌이
寧爲多不 매우 많습니까? 많지 않습니까?
須菩提言 甚多 世尊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삼천대천세계, 삼천세계만 해도 한량없이 많은데 그 삼천대천세계를 갈아가지고 잘게 부수어서 가는 티끌로 만들었다. 그러면 도대체 이 티끌의 수가 얼마나 되느냐? 많으냐? 많지 않느냐? 예. 한량없이 많습니다.
何以故 어찌한 까닭이냐
若是微塵衆 實有者 佛則不說是微塵衆 만약에 이 가는 티끌들이, 무리중자를 쓴 거는 들이라고 해야 되겠죠? 이 가는 티끌들이 실로 있는 것이라면, 가는 티끌이 그 티끌의 실체, 근본, 알갱이가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 곧 이 미진들, 이 가는 티끌들이라고 말씀하시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 가는 티끌들에게 티끌하나하나가 실체가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 티끌이라고 이름을 아니하실 것이다. 이 말이오.
所以者何 어찌한 까닭이냐
佛說微塵衆 부처님께서 가는 티끌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卽非微塵衆 가는 티끌이라고 할 것이 없을세.
是名微塵衆 그 이름이 가는 티끌들입니다. 이런 얘기요.
자~ 여기서 티끌이라는 말은 미진이라고 하는 말은 가장 작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것, 어떤 것을 부수고, 부수고, 부수고, 부수고, 부수어서 그것보다 더 작게 부술 수 없는 가장 작은 것을 말하여 뭐라고 한다? 미진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서양 같으면 원자다. 이런 말이에요. 만물의 근원.
우리가 희랍에서 보면 만물의 근원은 수다.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만물의 근원은 뭐다. 이런 여러 가지 말이 있죠? 그때 만물의 근원은 뭐다? 원자다. 이런 말이 있단 말이오. 그리고 최근 근대 과학에 와서 만물의 근원은 원자다 이랬단 말이오. 여기서 미진이라는 것은 원자라는 뜻과 같습니다. 티끌이 작은데 티끌 중에서도 가장 작은 티끌을 뭐라고 한다? 미진이다. 이렇게 부른단 말이오. 그다음에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이고 쌓이고 쌓이면 나중에 뭐가 될 수 있습니까? 태산이 될 수가 있죠?
또 태산이 쌓이고 쌓이고 쌓이고 이렇게 자꾸 쌓여서 더 이상 이것보다 크다 할 것이 없을 만큼 커진,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것을 이름을 뭐라고 하느냐? 세계다. 이런 말이오. 세계라는 건 적당한 걸 세계라고 하는 게 아니라, 세계다 하는 것은 온통, 전부다. 이런 말이에요. 이 세계에서 이럴 때는 온통, 내가 아는 것 그 범위 안에서 통틀어서 이런 의미란 말이오. 가장 큰 것을 세계다. 요즘은 세계라는 말보다는 더 범위가 커서 뭐라고 해요? 우주다. 이러죠. 우주. 그러니까 우주가운데는 세계가 여럿이 있죠.
요즘은 티끌보다 더 적어져서 어때요? 원자니 소립자니 이러죠? 원자가 적다하지만은 소립자에서 보면 어때요? 원자는 굉장히 큰 게 되죠? 그러니까 인식의 범위가 넓어져서 그런 말이 나왔지. 이 옛날의 인식의 범위 안에서는 가장 작고 작고 작고 작아서 가장 작은 것이 미진이라 불렀고, 크고 크고 크고 커서 가장 큰 것을 세계라 이름했다. 이 말이오. 그런데 더 세계는 세계 제일 사람들이 상상하는 세계보다 더 큰 세계가 있다. 그럴 때 그것, 가장 큰 것을 뭐라고 했다? 삼천대천세계다.
그러니까 세계라는 말이나 삼천대천세계라는 말이나 사실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가장 큰 게 세계인데 세계보다 더 크다 하는 말을 하고 싶어서 삼천대천세계라는 말이 붙었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가장 큰 것을 부수게 되면 뭐가 된다? 가장 잘게 부수면 그 가장 작은 것이 한량없이 많겠죠? 자 이럴 때 티끌이 많으냐? 많지 않느냐? 많다. 이 말이오. 왜 많다하느냐? 그것은 티끌이 티끌이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기 때문에 티끌이라 이름하는 거요.
만약에 티끌이라는 것이 티끌이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라면, 다시 말하면 더 이상 잘게 부술 수가 없다든지, 그것은 각각이 고요한 것이라든지,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티끌이라고 말씀을 하시지 아니하시련 만은 티끌이라 하지만은 티끌이라고 할 만한 영원한, 또 티끌이라고 할 만한 단독으로서의 어떤 실체,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뭐라고 한다? 티끌이라 이름한다. 이런 얘기요. 조금 더 설명을 읽고, 설명을 해 드릴게요. 왜 이런 말이 있는지.
世尊 세존이시여
如來所說 三千大千世界 卽非世界 是名世界 마찬가지로 여래가 말씀하시는 바 삼천대천세계, 즉 세계라고 하는 것도, 세계라는 것은 자장 큰 것을 의미하죠. 세계라고 하는 것도 세계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으므로 그 이름이 세계다. 이거야. 가장 적은 것도 가장 적다고 할 만한 실체가 없고, 가장 큰 것도 가장 크다고 할 만한 실체가 없다. 이런 얘기요. 지금.
何以故 어찌한 까닭이냐
若世界實有者 만약에 세계가 실로 있는 것이라면, 요게 세계다 할 항상하고 영원하고 단독으로 된 그런 세계가 있는 것이라면
則是一合相 곧 하나로 합한 모양이겠거니와
如來說 一合相 卽非一合相 여래가 일합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합상이라고 할 것이 없어서
是名一合相 그 이름이 일합상이니다.
須菩提一合相者 수보리야 하나로 합한 모양, 하나로 합한 모양이라고 하는 것은
則是不可說 곧 그렇게 말할 수가 없거늘
但凡夫之人 다만 범부의 사람들이
貪着其事 그것에 탐하고 그것에 집착을 할 뿐이니라, 이랬어.
아마 일반적인 사람들이 금강경을 읽을 때 아마 이 30분이 제일 어렵다 할 수도 있습니다. 말이 어렵다는 게 아니라 도대체 왜 갑자기 미진을 미진이라 하지 않고 세계를 세계라 할 것이 없으며, 그 이유가 하나로 합한 모양이다 하는데 하나로 합한 모양이다 할 것이 없다. 앞엣 것은 다 어떤 우리들의 마음가짐, 마음 씀씀이. 또는 어떤 고정관념, 이런 거에 대해서 주로 얘기니까 옛사람들이 해석하기가 비교적 쉬웠지만은. 사실은 이 부분은 어떤 일종의 과학입니다. 물질세계에 대한 얘기에요.
어떤 과학, 물질에 대한 또는 존재에 대한 우리들의 잘못된 관념에 대해서 지금 문제를 제기하는 거다. 이 문제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오히려 여러분들이 쉽게 이해하려면 오늘의 현대과학이 현대 과학적 지식이 있어야 이것은 쉽게 이해가 된다. 그렇지 않을 때는 이것을 윤리나 도덕으로 무슨 가치관으로 이해하려하면 이건 도대체 다른 말, 정토를 장엄하는데 장엄이 아니라, 내라 할 것이 없느니, 이런 말과 사실은 근본적으로 같지만. 이건 그래도 우리가 남편하고 자식하고 사람들에게 중생에게 어떻게 마음가지고 어떻게 행동해야 되느냐 하는 거를 잘 살펴보면 이해가 될 수 있지만은. 이 문제는 갑자기 티끌이 티끌이라 할 것이 없고, 세계가 세계라 할 것이 없다.
그 이유가 세계가 세계라고 할 것이 있다면 하나로 합한 모양이라고 해야 될 텐데. 하나로 합한 모양이라고 할 것이 없다. 이렇게 설명을 해 놨단 말이오. 여기서 우리가 하나하나 살펴보면 첫째 티끌이다 할 때는 가장 작은, 만물의 근원이라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돌멩이는 부수면 잘게 나누어진다 하는 것은 돌멩이는 무엇인가 다른 것들의 결합입니까? 아닙니까? 결합으로 돼 있다 이 말이죠? 잘게 나누어진다는 것은 뭔가가 같이 합해져 있다 이 말 아니오. 그죠?
그런데 더 이상 쪼갤 수가 없는 가장 작은 알갱이라는 것은 무언가로 합해져있어요? 단독으로 존재하는 거요? 단독으로 존재하는 거요. 그러니까 여리서 말하는 티끌은 만물의 근원이다. 그 말은 동시에 그것은 단독으로 존재하는 거다. 이런 의미에요. 우리가 쓸 때 그런 의미가 담겨 있다 이 말이오. 세상 사람들은 다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사용하고 있어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단독 자가 없다. 이거야. 미진이 만약에 단독자라면 제행이 무상이고, 제법이 무아가 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연기법도 이런 단독자를 인정하고 그 단독자가 이 만물을 구성할 때 서로 연관되어 져 있다. 이것을 말하는 거란 말이오. 그러니까 이 세계는 수많은 것들로 연관되어 있지만은 그 연관에 가장 작은 알갱이는 뭐라고 말 할 수 있다? 단독자다. 이렇게 말 할 수가 있죠? 그렇게 잘못 생각했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것은 실체가 없다. 나라고 하는 것은 오온의 결합이다. 다섯 가지의 모임에 불과하다. 하니까 소승불교에서는 요 색수상행식 이 다섯 가지는 더 이상 분리 할 수 없는 근본 알갱이다. 이렇게 의식이 흘러갔단 말이오. 제말 이해하시겠어요?
그런데 대승불교에서 다시 뭐라 그래요? 요 다섯 가지도 실체가 없는 거다. 공한 거다. 이렇게 지금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세계는 티끌로 이루어져있지만은 그 티끌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 알갱이, 만물의 근원, 단독자다. 그럼 티끌은 공한 거요? 안 공한 거요? 티끌은 공한 게 아니죠. 티끌은 실체가 있는 거다 이 말이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이거야. 이 티끌도 사실은 무엇인가의 뭐로 이루어져있다?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더 이상 쪼갤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이 만물의 근원이며 단독자가 아니다. 그것 또한 뭔가의 결합으로 돼 있어서 그것도 실체가 없는 거다. 티끌이라고 할 만한 어떤 실체가 없는 거다. 이거야.
옛날 사람은 이런 얘기하면 잘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건 다 이해가 되요? 안 되요? 되요. 오늘은 물의 가장 근원적인 알갱이. 여기서 미진에 해당되는 게 사실은 물 분자거든요. 그 물분자가 단독자가 아니고 원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면 그 원자는 단독자냐? 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한 100년 가까이를 그렇게 생각해 왔어요. 과학자들까지도. 이게 만물의 근원이다. 그런데 그 원자 또한 엄청나게 더 적은 소립자들의 뭐로 이루어져있다?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마치 우리가 고무풍선으로 가득 채우는 물질위에 앉아 있듯이 오늘 우리는 텅 빈, 원자속이 텅 빈 그런 껍데기의 모임, 원자들의 모임위에 우리가 앉아있고, 우리가 구성이 되 있단 말이오. 풍선으로 구성 돼 있는 거나 똑같애. 아주 미세한 소립자들의 결합으로 돼 있고, 사실은 텅 비어있다. 이 말이오. 그럼 이런 소립자는 단독자냐? 그것도 아니고, 또 쿼크로 이루어져있다. 지금 여기까지 갔기 때문에 물질세계에서는 그러한 시간과 그러한 공간의 조건에서는 그러한 존재를 인정하지만은. 그런 시간이나 그런 조건을 떠나서 영원히 어디에서나 고것은 고것이다라고 하는 존재는 이미 없다. 이 말이오.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할 언제나 어떤 조건에서나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할 그런 실체는 없다. 이거야. 그러니 여기서 뭐라고 그랬어요? 미진이 미진이라 할 것이 없다. 이 말이오. 그러나 그런 시간과 그런 공간, 그런 조건에서는 그런 역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 이거야. 그래서 미진이라 그 상황에서는 미진이라 이름한다. 서울 가는 길이 동이다 서다, 남이다, 북이다라고 이름 할 수가 없다 이거야. 그러나 인천사람에게는 다만 뭐라고 말한다? 동이다라고 이름한다.
산이 하나 있는데 그 산은 동산이다, 서산이다 하지만은 동산이다, 서산이다 할 것이 없다 이거야. 그러나 그 마을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시간과 그 공간의 그 조건에서는 동산이라고 이름 한다. 그런데 이 불법을 참 잘 알아야 되요. 우리들의 생각, 경험으로는 동산이다 하면 정말 그 산에 동산이라고 할 만한 실체가 있는 줄 착각하게 되고, 그 동산이라고 할 수 없고 그걸 공하다 그러면 그 산은 아무것도 아니다. 없는 거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느냐? 공한데 왜 눈에 보이노? 자꾸 이렇게 생각한다. 이게 바로 이게 단멸상에 빠진 거란 말이오.
동쪽에 가면 뭐다? 서산이고, 서쪽이게 가면 동산이고. 이 동네가면 동산이라 그러고, 저 동네 가면 서산이라 그러고. 이쪽 동네가면 북산이라고 불리는 거요. 그러니까 그러한 시간과 공간, 그러한 조건, 그러한 인연에서 그렇게 불린다 이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이름한다. 이것이 색이 공하고 공이 색한 도리다. 드러난 현상은 실체가 있는 거 같지만은 살펴보면 실체가 없고 텅 비어 있고.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는 줄 알지만은 거기로부터 갖가지 현상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니 부처님은 위 적정한, 적정한 고요 속에 계시지만은 갖가지 가기도 하고 뭐한다? 오기도 하고,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한다.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고,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하지만은 사실은 간 것도 아니고, 온 것도 아니고, 앉는 것도 아니고, 눕는 것도 아닌 그 제법이 공한 적정의 경지에 있다. 이런 얘기요. 그러니까 드러난 현상만을 보고 우리가 말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단멸상에 떨어져서, 없다 하는 생각에 떨어져서 봐도 안 된다. 우리들의 의식이 바깥세계로부터 영향 받아서 이루어집니다. 사실은.
여러분들이 김치맛을 좋아하고, 여러분들이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냄새를 좋아하고, 어떤 모양을 좋아하고, 어떤 소리를 좋아하는 것도 다 그렇게 영향 받아서 이루어진 거요. 그러한 조건이, 그러한 인연이 그러한 것을 만들었지. 여러분들이 그런 거를 선택한 것이 아니에요. 이것을 우리가 말하면 환경이, 조건이, 존재가 우리들의 의식을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또 반대로 우리가 어떤 의식을 각자가 갖고 있는냐에 따라서 바깥세계를 보는 눈이 어때요? 달라져요.
그러니까 내가 어떤 의식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바깥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데. 그러니까 자기를 중심에 놓고, 자기의식을 중심에 놓고 세계를 보면 세계의 모양이 마치 자기가 보는 것이 세계의 실제 모양인거 같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러니 그렇지 않는 것을 깨달아 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이 의식이 환경에 영향을 안 받게 되는 거요. 그러니까 우리들의 의식이 환경에 받는다는 말도 맞고, 우리들의 의식이 환경의 영향을 안 받는다는 말도 맞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일부 사회학자들은 의식이 환경과 떠나서 옛날 종교인들은 그랬어요.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이렇게 해서 정신이라는 것, 영혼이라는 것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의식이라는 게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고 이 바깥에 환경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되어진 거다. 또 이거 한 가지만 갖고 얘기한다. 이거 한 가지만 갖고 얘기한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의식이 형성된 사람이 사회주의적인 시각을 가질 수 없고, 사회주의적인 사회에서 의식이 형성된 사람은 자본주의적 시각을 가질 수가 없어야 되는데. 사회주의 사회에서 날 때부터 사회주의 교육을 시켰는데. 요즘 러시아하고 중국이고 다 자본주의적 생각을 해요? 안 해요? 하지.
그러니까 의식이 환경에 영향에 받는 것도 맞지만은 의식이 환경의 영향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 게 아니다. 형성된 의식은 다시 환경을 개선하고 그게 주체적으로 대응하는데. 이러한 법칙을 의식이 깨닫게 되면 주체적으로 대응이 되고, 깨닫지 못하게 되면 절대적으로 종속이 된다 이 말이오. 그래서 사람들은 의식의 독립성을 주장하거나, 또는 의식의 종속성만 주장하는 것은 그것은 늘 어떤 한 단면만을 보고 있는 거다. 한 면만을 보고 있는 거다. 그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환경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면도 있고,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의식이 있으면서도 환경에 또한 영향을 받고 있는 거다. 그런데 어느 한쪽만 자꾸 보게 되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전면적인 이해가 부족하다. 오늘 날 주로 종교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환경을 떠난 의식이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이런 생각에 거의 다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관계, 세상의 이치를 무시하고 그저 정신만 어떻게 하면 천당간다. 지옥간다. 행복해진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된다.
(39:29)
그래서 여기에서도 실천적인 차원에서 이렇게 영향을 받아서 늘 환경에 영향을 받고 있다 하는 이 생각만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의식이 환경에 관계없이 어떻게 이치를 깨닫게 되면 환경에 영향을 벗어나서 능동적으로 작용할 수 있느냐? 이걸 지금 여기서 쭉 가르치거든요. 그런데 이것을 잘 못 들으면 어때요? 아~ 지맘만 닦으면 되지,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필요가 없다. 이렇게 또 이해하면 사실이 아니다. 그러면 보살행, 보살도라는 게 나올 필요도 없는 얘기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행복이 남편이나, 부모나, 자식이나, 돈이나 이런 것에 의해서 자신의 행복이 주어진다고 하는 한 가지 생각만 하고 있다 이 말이야. 그러니 제가 여러분께 말씀 드리는 것은 자신의 행복이 그런 거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게 아니다. 지금 당신이 생각을 어떻게, 사물을 보는 관점을 어떻게 바꾸느냐에 따라서 똑같은 조건인데도 전혀 다른 세계, 다른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노예처럼 살지 말고 주인으로서 그 환경에 여러분들이 적극적으로 대응을 하는 게 좋다. 그런 길이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을 바꿔서 대응을 하게 되면 나도 좋아지고 남도 좋아진다. 이거야. 나도 변하고 세계도 변한다. 그러기 때문에 산속에서 자기마음만 바꾸는 게 그게 도인 것처럼 생각을 하는데. 그게 또 한쪽으로 흘러갔다 이거야. 다 끊어 버리고 자기 마음만 바꾸면 세상이 좋아진다. 할 때는 세상에 대해서 영향을, 어떤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이오. 그러나 대승불교는 이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세상과 떠나서가 아니고 세상을 향해서 마음을 바꾼는다 이 말이오.
남편이 이래서 내가 괴롭다 이렇게 내가 생각을 했잖아요. 그러니 남편이 없으면 어때요? 지금 세속에 살면서 남편이 이렇게 바뀌어줬으면 나는 좋겠다 하는데 그건 안 바뀌잖아. 그러니 수행은 남편을 끊어버리고 숲속에 들어가 버리면 내 마음이 고요해진다. 이게 소승의 길이란 말이오. 대승은 그게 아니란 말이오. 남편에게 향해서 남편으로부터 얻으려 하는 생각을 남편에게 주려는 생각으로 바뀌 버리면 내 마음도 고요해지고 남편도 좋아져버린단 말이오. 그러니 내가 행복해지는 것과 세계가 좋아지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 실천적 차원에서는 자기로부터 출발하자. 이렇게 많은 요즘 젊은 사람들이 저를 찾아와서 그러면 스님은 세상을 바꾸지 말자는 얘기 아니냐? 세상은 놔 놓고 그저 두드려 패든지, 맞든지, 강간을 하든지 관계없이 어떻게 하자? 지만 마음을 독하게 먹고 바꾸자. 결국 이 얘기 아니냐. 자꾸 또 이렇게 오해를 한다. 왜 그러냐? 많은 불자들이 그렇게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사회적인 실천 활동을 안하고 이런 법문을 하면 100% 그렇게 규정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하는 짓은 또 그렇게 안하고 있으니 자꾸 그렇게 묻는 이유는. 당신 하는 짓을 보니 안하고 있으니 의문이 간다 이거야. 내가 만약 이런 짓을 안 하고 있으면 100% 아예 묻지도 않죠. 저놈의 자식은 원래 그런 놈이다 하고 규정을 해 버리고 말텐데. 그러니까 자기로부터 출발해서 세계가 바뀐다 이거야. 자기를 놔 놓고 세계를 바꾸겠다는 생각이 잘못됐다는 거죠. 세계를 놔 놓고 자기만 바꾸는 다는 것도 잘못 됐다는 거요. 자기의 마음을 세계를 향해서 옮겨버리면 어떠냐? 자기와 세계가 동시에 바뀐다. 지금 이런 얘기요.
자~ 미진이라 하지만은 미진이라 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인연을 따라서는 어때요? 그런 역할을 그것이 그 변화 속에서는 최소단위로 변한다 이거야. 즉 물이 얼음이 되고 수증기가 되는 그 과정에서는 물 분자가 단독자의 역할을 일시적으로 한다 이거야. 물이 수소가 되고 산소가 되는 화학변화를 할 때는 원자가 단독자의 역할을 미진의 역할을 일시적으로 한다 이거야. 그러니까 그것이 그러한 인연에서 그렇게 이름한다. 그런 작용을 한다.
그러면 이런 가는 티끌이 모여서 한 덩이라가 됐다. 그게 뭐요? 세계다. 이거요. 세계는 하나에요? 여러 개에요? 단 하나죠. 그죠? 세계는 하나다. 그러면 여기서 세계가 하나라면 둘이 될 수가 없어야죠. 하나라고 하는 실체가 단독자가 있는 거라면 그건 둘이 될 수가 있어야 되? 없어야 되? 없어야 되. 세계가 단독으로 근본의 요인이라면 그건 다른 것이 될 수가 없어야 됩니다. 하나라고 하는 실체가 있으면 둘이 될 수가 없어야 되는데. 세계가 하나라면 세계를 부수면 수많은 뭐가 됩니까? 티끌이 되잖아...
세계가 세계가 아닌 것이 되고. 하나가 하나가 아닌 것이 되니. 세계라고 하는 것은 세계로 갈 실체가 없고, 하나라고 하지만은 하나라고 할 실체가 없다. 티끌이 각각가각 티끌의 고유성이 있는 것이라면 티끌은 아무리 모아도 뭐밖에 안 된다. 티끌밖에 안 되야지. 티끌이 어떻게 왜 세계가 되느냐? 하나하나가 따로따로라면 하나하나가 만이 모이면 만이고, 하나하나가 억이 모이면 그냥 억이지. 하나하나를 수도 없이 모였는데 어떻게 하나의 세계가 되느냐 이거야. 그러니 하나라고 하지만은 하나의 실체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고. 세계라고 하지만은 세계의 실체가 없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아편을 어떤 사람이 먹고 독이 되고, 어떤 사람이 먹고 약이 되니, 아편은 두 가지 성질이 있다. 독의 성질도 있고 약의 성질도 있다. 우리 이렇게 생각한다. 이게 잘못된 생각이다. 독의 성질이 있으면 절대 약의 성질이 될 수가 없고, 약이라고 하는 성품이 있으면 독이 될 수가 없는 거요. 그것은 약이라고 할 성품도, 독이라 할 성품도 없다 이거야. 그냥 그것일 뿐이다. 그것이 이런 인연을 따라서 거기에 어떤 작용을 한다? 약의 작용을 하고. 저런 인연을 따라서 독의 작용을 할 뿐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불릴 때는 독이라고 불리고, 이쪽에서 불릴 때는 약이라고 불린다. 아편이 약이라고 하지만은 약이라고 할 성품이 없을세, 약이라고 이름하며. 아편이 독이라고 하지만은 독이라고 할 성품이 없을세, 독이라고 이름한다. 이런 말이오. 어려운거 같지만은 사실이오? 사실이 아니오? 그러니 천사라 하지만은 천사라고 할 성품이 없고, 악마라 하지만은 악마라고 할 성품이 없어. 그러니 어떤 사람의 행동을 이쪽에서 본 사람들은 악마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니 악마라고 부르고. 저쪽 편에서 보면 뭐라고 부른다? 천사라고 불린다.
소똥을 우리가 볼 때는 더러운 걸로 보이지만은 인도사람이 볼 때는 어떻다? 좋은 것으로 보인다. 그럼 소똥이 좋고 더러운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란 말이오. 그냥 다만 그것일 뿐이란 말이오.
자~ 여기서 우선 그렇게 실체가 없다는 얘기. 이러한 물질의 존재,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더럽다 깨끗하다는 거는 실체가 없고, 우리들의 관념이다라는 거는 비교적 그래도 받아들이기가 쉬운데. 작다하는데 작다의 실체가 없고, 크다하는데 크다의 실체가 없다하는 것은 얼핏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왜? 우리는 더럽다 깨끗하다라는 것은 주관이라고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아~ 이건 내 마음이 만든 거라는 걸 쉽게 받아들이는데. 작다느니 크다느니 객관이라 하는 인식이 우리 학교 교육에서 있단 말이오.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습니까? 그건 내 마음이 만든 게 아니고 이건 객관이라 하기 때문에 객관에는 실체가 있는 거다 한단 말이오. 그렇지 않다. 거기도 실체가 없다. 제법에 주관이고 객관이고 그 어떤 것에도 실체가 없다.
여기서 이제 티끌이 모여서 세계가 되는 이 이치에 대한 설명이 사실은 여기서 핵심이에요. 일합상이라는 말이 핵심인데. 티끌티끌이 다 별개라면 티끌티끌이 모여도 뭐밖에 안 된다. 티끌밖에 안되지. 티끌이 모여 세계가 될 수가 없고. 세계가 세계라면 세계를 아무리 때려 부숴도 그냥 세계지. 세계가 티끌이 될 수가 없다. 그런데 티끌이 모여서 세계가 되고, 티끌이 부수면 티끌이 된다는 것은 티끌이 티끌이라고 할 것이 없고, 세계도 세계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
수많은 것을 모아서 하나가 되고 하나를 부수면 다시 수많은 것이 된다는 것은 우리들의 상식의 수의 개념에서는 다수가 모여서 작은 것들이 모여서 다수가 되죠. 하나하나가 모여서 다수, 다수 속에 하나하나가 있다 이 말이오. 그게 상식이란 말이오. 그런데 하나하나가 모여서 다수가 된다는 것은 이해하는데 다수가 다시 하나 속에 있다. 다수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하나 속에 뭐가 있다?, 다수가 있다 이 말이오.
그러니 수의 개념도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들의 상식을 여기서 깨뜨리고 있다. 요것이 고대로 법성게 쪽으로 옮겨가는 게 뭐다?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하나의 티끌가운데 이 세계가 있다는 말도 있고,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하나가운데 많은 것이 있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가 있다.
※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 “먼지 한 톨 속에 온 우주가 모두 담겨 있다.”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다”라 는 뜻으로 ≪화엄경≫의 가르침을 210자로 요약한 의상(義湘: 625~702) 스님의 ≪법성게≫ 가운데 한 구절이다.
자~ 여기 손을 한 번 보세요. 손가락 다섯 개가 같아요? 달라요? 다르죠. 손가락 다섯 개가 다른 것이라면 다른 것들이 모여서 한 손이 될 수가 없죠. 제 말 이해하시겠어요?
손가락 다섯 개가 다른 것이라면 다른 것이 모여서 한 손이 될 수가 없다. 이거야. 한 손이 한 덩어리라면 한손이 다섯 손가락이 될 수가 없는 거요. 그런데 다섯 손가락이 다르다 할 때도 다르다 할 때, 다르다는 이름이지 개별적 존재는 아니죠. 제 말 이해하시겠어요? 우리가 다르다 할 때는 뭐냐? 각각이 개체다 이런 얘기요. 단독자다. 손가락 다섯 개가 다르다 해도 다르다고 이름 할 뿐이지 단독의 존재라는 뜻은 아니다. 실로 각각 손가락의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이오.
또 한 손이라 하지만은 하나라고해서 그냥 분리할 수 없는 한 덩이라는 말은 아니다. 이 말이오. 하나에도 실체가 없고. 그러니까 한 손이라는 말은 같은 손이라는 말이죠. 같다 해도 같은 것의 실체가 없고, 다르다 해도 다른 것의 실체가 없다. 이 얘기에요. 그러니 이 만물의 존재는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이게 불일불이(不一不異)입니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둘이 자를 쓰는 게 아니라 다를 이자를 써요.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이 말이 불이불이. 이 하나라는 말은 같다라는 뜻이에요.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불일불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할 때 뭐라 그래요? 무시무종이다. 깨끗한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도 아니다 할 때 뭐라 한다? 불구부정이다.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다 할 때 불생불멸이다 하는 것처럼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할 때 뭐라고 한다? 불일불이다. 이리 말해요. 이것이 세계의 모습이에요. 우리는 세계가 하나다. 하면 한 덩어리다. 이런 생각을 갖기 쉽고. 만물의 결합이다. 세계는 만상이다 하면 각각 다른 것들의 뭐다? 독립된 개체, 각각 다 독립 되있다 이런 생각을 한다. 그렇지가 않다.
마치 자동차와 같은 거다. 자동차가 부속이 부속으로 되어 있다 하면 부속을 똑같은 자동차 부속을 바구니에다 담아 놓으면 자동차가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지. 그러면 자동차가 한 덩어리다 하면 그것이 한 덩어리로 되어 있습니까? 하나다 하면? 아니란 말이오. 수많은 것들의 결합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손가락은 서로 다른 것 같지만은 서로 뭐 돼 있고? 연관 되 있고. 한손이라 하지만은 한 덩어리가 아니라 여러 것의 뭐로 돼 있다? 결합으로 돼 있다. 하나 속에도 여러 개의 결합으로 돼 있고, 여러 개도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게 뭐다? 연기다. 이 말이오.
그래서 하나에도 실체가 없고, 다르다 할 때도 각각에도 실체가 없다. 이것이 오온이 공하다의 의미에요. 이것이 이 세계의 모습이다. 이거야.
여기 팥이 있습니다. 여기 콩이 있어. 이 콩을 보고 내가 뭐라 그러냐? 콩끼리 볼 때는 이래요. 아이고~ 콩이 다 다르네. 이래요. 콩하고 팥을 이래 같이 볼 때는 뭐래요? 야~ 이거는 같은 콩이네 이래요. 그렇게 말 써요 안 써요? 쓰지. 금방 같은 콩이네, 오 이거 다른 콩이네, 이래요. 똑같은 콩을 놔 놓고, 한번은 같은 콩이네. 또 한 번은 뭐라 그래요? 오~ 이거 다른 콩이네 이래요.
제가 사람을 보고 어~ 다른 사람이네 이러고. 개하고 비교할 때는 오~ 이건 같은 사람들이네 이래. 그러니까 존재는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같으니 다르니 하는 것은 존재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들의 우리의 마음이 분별을 지으면서 같다느니 다르다느니 이렇게 말한다.
이해가 되세요? 그래서 불일불이,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우리는 다르다 하면 개별적 존재라고 상이 지어지고. 같다하면 같은 덩어리로 상을 짓는다. 존재는 서로 연관되어 있어. 그래서 한 덩어리도 아니고 별개도 아니다. 서로 연관되어 있다.
한 손이지만은 다섯 손가락이 있고, 다섯 손가락이라 하지만은 그것은 한 손이다. 그러니까 전체의 연관을 못 보면 다섯 손가락 할 때는 개별적 존재로 이해하게 되고. 한 손이다 할 때는 그것이 다섯 손가락으로 모여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면 마치 주먹처럼 한 덩어리로만 이해한다.
자~
若世界實有者 만약에 세계가 실로 있는 것이라면, 세계라고 하는 실체가 있는 것이라면
則是一合相 그것은 하나로 합한 모양이다 이 말이오. 한 덩어리다 이 말이오. 한 덩어리.
如來說一合相 卽非一合相 그런데 여래가 일합상이다. 하나로 합해졌다고 말할 때 그것은 일합상이라고 할 실체가 없다. 한 덩어리라고 할 실체가 없이
是名一合相 그 다만 그 이름이 일합상이다. 하나로 합해졌다 말이 있지 실제로 하나로 합해진건 아니에요. 하나로 합해지면 그것이 부서질 수가 없다 이 말이오.
須菩提 一合相者 수보리야 하나로 합해진 모양이라는 합상이라 하는 것도
則是不可說 貪着其事 그렇게 말할 수 없다. 한 덩어리라 말할 수가 없다.
但凡夫之人 그러나 다만 범부들은 어때요? 거기에 탐하고 집착해서 하나의 상이다.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거기에도 실체가 없다.
자~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면 아까 말씀하신대로 이 우리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절대성도 바로 우리들의 관념의 산물이다. 실제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도 별개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이것이 오늘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이미 밝혀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분리시키는 관념 속에 갇혀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어느 골짜기에 갇혀 살므로 해서 그 산이 동산이다 하는 것처럼.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 분리된 세계에 지금 갇혀 살기 때문에 시간 따로 공간 따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로부터 탈출하게 되면 즉 시간과 공간의 절대성으로부터 벗어나 버린 게 뭐다? 시공의 탈출이라 그래.
여기서 벗어나버리면 어떠냐? 우리는 시간공간이 분리되지 않는, 시간이 멈춰진 세계에 갈 수가 있다. 시간의 울타리에 갇혀있으면서 변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 변화하기 때문에 시간이라는 관념이 생겨났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요즘 만화나 여러 가지 애들의 얘기 중에 잘 귀담아 들으면 앞으로 미래에 우리들의 인식의 폭이 넓어지면 어떤 것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을 여러분들은 자꾸 볼 수 있게 된다.
(60:30)
제31. 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_법륜스님
buddhastudy.egloos.com/3704397
제31 知見不生 아는 견해다. 아는 견해가 지견이죠. 어떤 지견도 내서는 안 된다. 어떤 아는 견해, 아는 견해를 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한 생각도 뭐하지 마라? 일으키지 마라. 이런 얘기요.
須菩提 若人言 수보리야 어떤 사람이 말하되
佛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부처님께서 나라는 견해, 사람이라는 견해, 중생이라는 견해. 존재라는 견해를 말한다 하면
須菩提 於意云何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是人 解我所說義不 이 사람은 내가 설한 바 그 뜻을 이해하고 있느냐, 이해하지 못하느냐?
不也 世尊 이해하지 못하옵니다. 세존이시여
是人 不解如來所說義 이 사람은 여래가 설하신 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나니
何以故 어찌한 까닭인가 하오면
世尊 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세존께서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을 말씀하심은
卽非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라 할 것이 아닐세.
是名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그 이름이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니이다.
부처님께서 불성이다.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다 하면 사실은 불성이라 할 것이 없을세. 그 이름이 불성이다. 이렇게 알아야 되. 그런데 여래가 불성이 있다 하니 우리 몸속에 마음속에 어디가 부처의 불성이라는 어떤 반짝반짝한 진주 같은 구슬이 있는 줄 알고 찾아 헤맨다면 이것은 여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이렇게 된다 이 말이오. 아시겠습니까?
조사님께서 불립 문자라 하니 불립 문자라 할 것이 있어서 불립 문자라 하는 줄 알면 이것 또한 조사의 뜻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불립 문자라 할 것이 없을세. 불립 문자라 이름 한다. 이렇게 알아야 우리가 형상에 집착하지 않는 거다. 그러니까 어떤 견해, 어떤 집착, 어떤 상도 지어서는 안 된다. 이런 얘기요.
須菩提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자는, 최상의 깨달음을 얻겠다고 마음을 낸 자는, 그렇게 마음을 낸 자는
於一切法 저 일체법에 저 모든 것들에
應 如是知 如是見 如是信解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믿고 이해해야 된다. 어떻게? 어떤 견해도 내서는 안 된다. 이러느니, 저러느니 하는 어떤 단정적 견해를 내어서도 안 된다. 어떤 상을 지어서도 안 되고, 어떤 견해를 집착해서도 안 된다. 즉 어떻게 해야 된다? 범소유상이 개시허망한 줄을 알아야 되. 허망한 줄을 알아야지 허망해야 된다고 견해를 내면 안 된다.
집착을 놔라하면 집착을 탁 놓으면 끝나는데 집착을 놔야 된다 하는 견해를 일으키면 안 된다. 집착을 놔야 된다하는 견해를 일으키면 금방 괴로움이 생긴다. 왜? 집착을 놓지 못하는 자기를 보고 또 미워하게 되고 남편을 보니 집착을 못 놓는 거 같아서 미워하게 되고. 아이고 바보같이 그것도 못 놔가지고. 그것만 놓으면 되는데. 이렇게 또 분별이 생긴다. 집착을 놔라하면 그냥 놔야지 놔라 하는 견해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 이거요. 그럼 병이 뭔지 알겠어요? 병이?
남편을 미워하지 마라 이러면 미워하지 않아야 되는데 미워안해야 된다하는 뭐를 일으킨다? 견해를 일으키니 마음은 미워지고, 미워는 안하려니까 안할 수가 없고 이래가지고 또 공연히 절에 와서 미워할 때는 미워한 것만 괴로웠는데 이제는 미워하지 안 해야 되는데 미워하는 그것까지 또 하나의 짐이 돼서 또 괴로워한다. 그러니 우리가 수행한다고 절에 들어왔다고 해서 견해를, 상을 놓는 걸 배워야 되는데 겨우 절에 와서 배운 건 뭐다? 상을 놔야 된다하는 상만 하나 짓는 걸 배운단 말이오. 그래서 그 잣대를 가지고 천지를 돌아다니면서 시비를 하는 거요. 상을 놔야 되는데 니 놨나? 못 놨나? 이래가지고.
如是見 如是信解 마땅히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고, 이렇게 믿고 이해를 해야 된다. 이해를 하여
不生法相 법이라고 하는 상도 뭐해서는 안 된다? 내어서는 안 된다. 법이라 하는 상도 내지마라. 이것이 진리다 하는 잣대도 만들지 마라. 그냥 보지 앞으로 뭘 잣대를 하나 정해서 탁 갖다 대지 마라 이 말이오. 그래 술 먹어야 된다는 잣대도, 술 먹지 말아야 된다는 잣대도 다 버려라 이 말이오. 버려라 이러니까 또 뭐라 한다? 버려라 하는 잣대를 만들어가지고 갖고 다니면서 스님이 뭐라고 하면 스님 버리세요. 스님 버리세요. 이래 또 잣대를 가지고 다녀.
須菩提 所言法相者 수보리야 법이라고 하는 상을 말함도
如來說卽非法相 是名法相 여래가 말하되 법이라고 하는 상도 아니할세. 그 이름이 법상이다. 그러니까 법이라는 상도 내지 마라하니까 그럼 법이라는 상은 있는 거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법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법상이라고 할 상도 없다. ‘이것이 진리다’라고 고집을 하니 이름하여 뭐라고 한다? 법상이라고 하지 법이라고 하는 상도 실체가 없다. 이런 얘기요. 자~ 그러니 한마디로 말하면 어떤 지견, 안다, 이거다, 저거다 하는 견해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
(68:40)
제32.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_법륜스님
buddhastudy.egloos.com/3704397
제32 應化非眞分 응신과 화신은 진실이 아니다. 그러니까 드러난 현상에 사로잡히거나 집착하는 것은 존재의 실상을 보지 못한다. 이런 얘기에요.
須菩提 若有人 수보리야,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있어서
以滿無量阿僧祗 世界七寶 持用布施 무량 아승지는 어마어마한 수라고 제가 말씀을 드렸죠? 10의 7승, 즉 일천만을 제곱하고 제곱하고 제곱하고 제곱하고 이래서 제곱을 몇 번한다? 104번, 105번 했던 숫자가 뭐다? 무량이고 아승지다. 한량없는 세계에. 지금 우리가 여기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세계에 칠보로 가득히 채워서 보시를 행하더라도
若有善男子善女人 만약에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서
發菩薩心者 깨닫겠다는 마음, 보리심을 발하여. 발보리심자는 뭐가 약해졌다 그랬죠? 뭐?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입니다.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약하면 발보리심이 되고, 다시 약하면 발심. 이렇게 해요. 발심. 마음을 낸다. 어떤 마음을 내느냐? 깨닫겠다고 마음을 낸다. 어떤 깨달음을 얻겠다고 마음을 내느냐? 최상의 깨달음을 얻겠다고 마음을 낸다. 이 말이오.
持於此經 乃至四句偈等 受持讀誦 어떤 사람이 있어서 깨닫겠다는 마음을 일으켜서 이 경을 지니되 이 경을 딱 간직하되, 사구게 같은 것들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고.
爲人演說 其福勝彼 남을 위하여 설하여 준다면 그 복은 저 복보다 더 뛰어나다. 승하다. 이 말이오. 그러니 유위의 행, 함이 있는 행, 유위법, 갖가지 집착해서 형성하는 그러한 세계, 그러한 것으로서 행한 것으로는 아무리 행하더라도 바로 무위의 행, 함이 없는 행, 마음에 아무런 집착 없고, 걸림 없는 그런 것을 행하는 사람의 공덕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云何爲人演說 남을 위해서 연설한다 하니까 어떻게 연설해야 되는가 이 말이오. 어떻게 사람을 위하여 연설하는고. 어떻게 법을 설하는고. 법을 설하면 이것을 수지독송하고 남을 위하여 연설을 하면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니 남을 위해서 연설을 한다 할 때 어떻게 설하는고? 이 말이오.
不取於相 저 상을 취하지 아니하여, 어떤 상도 취하면 안 된다. 이거야. 법이라는 상도 취하면 안 된다 이 말이오. 어떤 상도 취하지 아니하여
如如不動 여여하여 움직이지 마라. 여여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라. 그러니까 법을 설할 때는 그 어떤 상도 취해서는 아니 된다. 여여하여 부동하라. 그러니까 법성게에 보면 제일 처음에 보면 뭐라 그래요? 법성원융무위상, 법의 성품은 둥글고 두루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다. 그러니까 모양을 취하라는 거요? 취하지마라는 거요? 취하지마라 이 얘기죠?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이렇게 되 있죠?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로부터 고요하다. 지금 고 말이 그대로 정리된 게 뭐다? 불취어상 여여부동이란 말이오.
※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법의 성품 원융하여 두 모양이 본래 없고, 모든 법이 부동하여 본래부터 고요하네.
모든 법은 법의 성품은 둥글고 두루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다. 그러니까 어떤 상도 취하지 마라. 이 얘기죠. 어떤 상도 취하지 않으면 어떠냐? 제법은 본래 움직이지 않는다. 존재자체는 우리가 움직인다는 게 여기서 뭘 말해요? 깨끗하니 더럽니 해서 더러운 걸 깨끗한 걸로 만든다. 깨끗한데 더러운 때가 묻었다. 이런 게 움직이는 거요. 그러나 법 자체는 본래로 고요하기 때문에, 본래로 청정하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아. 본래로부터 고요하다 이런 얘기요.
그러니 이제 다음 시간에 육조단경 배우지만은 우리들의 마음은 거울과 같아서 맑고 깨끗한데 그런데 가만 놔놓으니까 먼지가 날고 때가 묻어서 지금 흐려졌으니 매일 때 묻지 않도록 어때요? 잘 닦아 내면 밝은 거울을 보듯이 우리가 매일매일 수행을 해야 된다. 요렇게 말하니 얼마나 그럴 듯 합니까? 누가 이렇게 읊었다? 신수대사가. 그러니 육조혜능대사가 거울이라 할 것도 없고, 때라고 할 것도 없고, 본래 텅 비었는데 무슨 때가 묻고 뭘 닦는다는 말이냐? 이렇게 말했단 말이오.
불취어상 여여부동이라. 저 상을 취하지 아니하며 부동, 여여라는 것은 본래로부터 고요해서 똑같아서. 그러니까 깨닫기 전이나, 깨달은 후나, 부처님이 가나 오나, 앉으나 누우나, 번뇌를 일으키나 번뇌가 없으나, 더 근원적으로 말하면 생사의 바다에 나오나 생사의 바다를 떠나나 할 것 없이 본래로 여여하다. 똑같다.
何以故 어찌한 까닭이냐
一切有爲法 일체의 함이 있는 법은
如夢幻泡影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 꿈은 꿈속에서 보면 갖가지 놀라고 기뻐하고 괴로워하고 슬플 일이 있어요? 없어요? 있다 이거야. 그러나 사실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어떤 환영을 보게 되면 귀신도 보고, 환상도 보고, 온갖 걸 보고, 놀라고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두려워하지만은 사실은 아무것도 없다. 물거품은 가득찬 거 같지만 사실은 텅 비어있고. 그림자는 뭔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없다.
如露亦如電 여로, 로, 이슬로죠?, 이슬 같다. 아침이슬은 보면 나뭇잎사이마다 꽉 있는 거 같은데 조금 있다 보면 없다. 있는 것 같은데 사실은 없다. 번갯불은 번쩍번쩍 하지만, 있는 것 같지만은 금방 사라지죠. 앞에 비유를 든 거는 굳이 말한다면 제법무아. 실체가 없고, 텅 비었다는 뜻이고. 뒤에는 금방 없어져버린 무상이다. 이런 얘기요. 합하면 뭐다? 공이다. 이 말이오.
이것을 앞에 끌어다 쓰면 어떻게 되요? 허망하다. 이 말이죠? 범소유상은 일체유위법. 이 말이 뭐요? 범소유상은 이 말이죠? 뭐다? 개시허망하다. 모두 다 허망하다. 이 말을 정확하게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게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꿈같고, 환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아침이슬 같고 번갯불 같다.
應作如是觀 마땅히 이렇게 관하라. 이와 같이 봐라. 요것을 간단하게 추린 게 5분에 뭐요? 약견, 요렇게 봐라. 이 말이죠?. 보라. 이 말이오. 견, 관, 견. 어떻게? 제상이 비상인줄을, 여기서 제상이 뭐요? 일체유의법이 제상이고, 여로환포영 여로역여전이 뭐다? 비상이란 말이오. 상이 아니다. 이 말이죠? 제상이 비상인줄 알면 뭐다? 즉견여래다. 그게 바로 깨달음을 얻는 거다. 약견제상비상 이 말이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꿈같고, 환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으며 아침이슬 같고 번갯불 같다. 이거는 뭐를? 이것은 허망한 것을 공한 것을 비유를 들어서 어때요? 설명한 거다. 이 말이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어떤 비유를 들어서 설명한 거요. 그러니까 꿈속에 있을 때는 누가 죽었다고 울고, 도둑놈이 왔다고 도망가고, 부도났다고 얄리고, 애가 말 안 듣고 애가 죽었다고 난리고. 그런데 눈을 딱 뜨니까 ‘아이고 꿈이구나.’ ‘아이고 꿈이 구나’ 할 때 이미 끝났다 이거야. 사실이 아니다. 우리의 이 의식이 망상이 만들어낸 거다. 이거야.
환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아침이슬 같고, 번갯불 같다 하는 것은 다 그것을 말하는 겁니다. 범소유상이 개시허망하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이런 법문을 들을 때 확연하게 탁 악몽을 꾸다 깬 것 같은 그런 기분을 아직 제대로 못 느껴보니까 아직도 긴가? 민가? 해. 그러니까 6월 30일까지 강의가 끝나거나 아니면 6월중에 6월 15일부터 문경의 깨달음의 장, 나눔의 장, 같은 게 있으니까. 거기 깨달음 장에 참여를 해 보세요. 시간을 내셔서. 꼭 한 번씩은 참여를 해야 돼.
해보면 자기가 어느 순간에 ‘와~ 내가 완전히 지난 30년 동안 꿈속에서 살은거 같구나. 완전히 한마디로 말하면 완전히 미쳐가지고 살았구나. 내가. 제정신으로 살았나? 완전히 미쳐가지고 살았구나.’ 이런 것을 깨닫게 되. 그래서 꿈을 딱 깨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면 집에 와서 다 똑같은 남편, 똑같은 자식, 똑같은 셋방에 사는데도 인생이 즐겁고 휘파람 입에 소리가 나고 싱글벙글하고 남편이 술 먹고 늦게 들어와도 탁 절을 하면서 이제 오시냐. 이러고.
그런데 이게 며칠 가냐 이게 문제요. 그래 이게 열흘가고 없어지고, 한 달 가고 없어지고, 석 달 만에 없어지고, 가다가 헷가닥 하죠. 또 꿈속에 들거든요. 그런데 자기가 꿈속에 들면 자기가 꿈속에 든 줄을 알아? 몰라? 모르니까 이제 뭐라고 하느냐? 하이고 약효가 떨어졌나? 약효가 아니에요. 그러니 그런 것을 깨달은 세계가 무슨 부처님 약이나 무슨 투약을 받아서 아편피우거나, 히로뽕 주사 맞아 잠시 기분 좋은 거 같고 이 괴로운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자꾸 이해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지금 여러분들이 마약에 중독된 거와 같다. 그래서 잠시 그 중독에서 벗어나면 바로 건강한 생활을 하다가 여기서 산다는 게 경계에 팔리는 게 뭐다? 중독이 드는 거란 말이오. 아시겠어요? 경계에 딱 팔려서 주객이 전도돼서 거기에 톡 빠져 버린단 말이오. 여러분들이 잘 때 꿈속에서 ‘아이고, 내가 잠들었더니 꿈인가보다.’ 이런 생각하는 사람 누가 있어? 그냥 딱 잠들어 꿈을 꾸면 꿈속에 딱 빠져 꿈이 현실이 되 버린다. 이런 얘기해도 뭐 소용이 없죠.
여기서 앞에서 여여부동하다 할 때 말이에요. 이 여여부동이라는 게 깨달은 세계에서만 여여부동한 게 아니라. 사실은 깨닫지 못한 세계에서도 여여부동하다. 그것은 잠을 깼을 때만 두려움이 없고 괴로움이 없는 게 아니라. 괴로워하고 있는 중에도 사실은 괴로워할 일이 없어요. 잠꼬대를 하고 막 해도 그 꿈꾸는 사람은 괴롭지만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은 괴롭다고 막 고함을 지대도 싱글싱글 웃으면서 뭐라고 한다? ‘그 놈의 자식, 잠꼬대 심하다.’ 이런단 말이오.
그러니 괴로워할 일이 있어서 괴로운 게 아니고 괴로워할 일이 없지만은 미망에 가려서 전도몽상으로 해서 괴로워하는 거요. 지금 여러분들이 괴로운 게 다 그렇다 이 말이오. 동의가 안 되겠죠. ‘니 와서 함 살아봐라.’ 그런 소리 하는가? 이런 게 입에 아마 입에서 맴돌 거요.
자~ 그러니까 이렇게 4가지 문구로 여러 가지 깨달음에 대한 말이 나왔습니다. 우선 제일 앞에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고 마음을 내라. 그러나 일체중생을 구제해 마쳤다 하더라도 실로는 한 중생도 구제를 얻은바가 없다. 왜냐하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 이런 말 자체도 뭐다? 다 이게 사구게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보통 우리가 사구게라고 할 때는 범소유상이 게시허망이오,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다. 이걸 많이 쓰죠
그 뒤에도 무주상 보시의 공덕은 한량이 없다. 어떤 형상에도 집착하지 말고 보시하라. 어떤 형상에도 집착하지 말고 행하라. 어떤 형상에도 집착하지 말고 마음을 내라. 이런 말이 있죠?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다. 무주상보시다. 이런 것도 있고. 부처님의 가르침은 뗏목과 같다. 법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되는데 하물며 법아닌거에야. 이런 것도 있고. 법법하지만은 법이라 할 것이 없다. 무유정법이다 하는 이런 말도 있고, 여러 말들이 다 사구게라고 할 수가 있다. 이거야.
그러나 우리가 보통은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를 사구게라고 많이 하죠. 그런데 뒤에 오면 뭐가 있습니까?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라. 또 여기와서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역전, 응작여시관. 그러니 굉장히 분명하게 진실이 무언지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무엇이 진실인지를 말하고 있으면서 그 진실이다 하는 것도 그냥 진실을 깨달아야지 이것이 진실이다 하는 견해를 내거나 상을 만들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불법은 깨달음의 가르침이지만 우리는 ‘깨달음의 가르침이다’라고 하는 상을 지어서 너희는 깨닫지 못한 가르침이니까 너희 종교는 필요가 없고 우리종교가 최고다. 이러면 이미 뭐다? 이것은 법에 집착하는 거고 불교라는 상을 지은 거다. 이거야. 여러분들이 바른 법으로 깨달음의 눈이 열리면 전에는 어리석은 눈을 가지고 있을 때는 부모도 이해 못하고 형제도 이해 못하고 자식도 이해 못하고 남편도 이해 못했는데. 깨달음의 눈이 열리면 이해를 하게 되요? 안하게 되요? 술 먹는 것도 이해하게 되고, 공부안하는 것도 이해하게 되고, 다 이해하게 되.
이해한다는 말은 그게 옳다는 얘기에요? 아니에요. 왜 그렇게 되느냐하는 거를 바르게 이해하니까. 첫째는 그냥 놔놓고도 내가 괴롭지 않고, 그걸 어떻게 조금 조정을 해보려면 이해를 하는 선상에서가 조정하기가 쉬워요? 모를 때가 조정하기가 쉬워요? 이해할 때가 조정하기가 쉽다. 남편이 왜 그 짓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이럴 때 그를 고치기가 어렵지. 왜 그렇게 하는지 충분하게 이해가 된다. 아이고~ 나라도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겠다.
이렇게 되면 고치지 않아도 좋고. 고칠 수 있을 때도 고치려고 할 때도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다. 이런 말도 있잖아 그죠? 고치기도 쉽다. 이거야. 그러니 우리가 이와 같이, 깨달음을 얻으면 그 동안에 할머니가 왜 절에 가서 저렇게 무당처럼 행하느냐?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하는게 도리어 어때요? 아~ 그러셔서 그렇게 하구나. 무당은 그래서 저렇게 하구나. 아이고 전에는 기독교인들 하는 짓 보고 예수쟁이들 저 미쳐가지고 이랬는데. 오히려 아~ 저 사람들 저렇게 해서 저렇게 하구나. 그것이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이해를 하게 된다.
그러니 마음이 넓어지니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어진다. 그 포용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만약에 조금이라도 개선할 필요가 있다면 개선하기도 쉬워진다. 안 해도 좋고. 개선해도 좋고. 그게 법이란 말이오. 내가 정법으로 가는지 안 가는지는 보면 알아. 그런데 스님한테 와서 정법을 배웠다 해서 자기 다니던 절에 가서 ‘우리 절에도 산신각 저거 없애지. 이거 없애지? 왜? 부처님 말씀에 그건 법이 아니래. 이래가지고 가고. 이제까지 이웃집에 교회 다니는 사람하고 친구하고 잘 지내다가 여기 나와서 법문 듣고 어때요? 에이 귀신 섬기는 놈들. 너희하고 같이 못산다.
이렇게 하면 이거는 또 법이라는 상, 진리라는 상, 깨달음이라는 상에 빠져서 이렇게 시비가 일어나게 된다. 아시겠어요? 다른 절에 다니시는 신도님들이 계시면 말이에요. 여기 법문을 듣고 그 절에 가서 시비거리가 되면 법문을 잘못 들었다. 정토포교원에 다니면서 법문을 제대로 들은 사람은 다른 절에 다니는 신도에게 뭔가 우월의식을 갖가지고 폼을 잡고 이러면 그것도 또한 법문을 잘못 들었다. 여기 다니는 사람이 법륜스님은 존경하고 딴 스님은 존경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법문을 잘못 들은 거다. 일체상을 떠나는 거다.
그러기 때문에 전에는 오해를 했다가도 법을 바르게 깨치면 오해가 사라져야 된다. 전에는 수용을 못했다가도 수용하는 힘이 생겨야 된다. 그런데 법문을 듣고 가서 오히려 시비가 되는 게 많다 이거야. 거 왜 그럴까? 그것은 법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상을 짓고, 전법이라고 하는 칼을 들고 사람을 치러 다닌다. 이거야. 그래서 불법은 남에게 적용을 하지 마라. 제가 이렇게 수도 없이 주는거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기에게 받아들이면 100% 진실이다. 그것을 남에게 적용하는 것 자체가 뭐냐? 이미 객관화 시켰다. 상을 짓는다. 이런 얘기요.
일체유의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이다. 일체함이 있는 모든 법은 다 꿈과 같고, 환상 같고, 물거품 같고. 아지랑이 같은 것이다. 아침 이슬 같고 번갯불 같은 것이니라. 응당히 이와 같이 봐야 한다. 이걸 한마디로 말하면 뭐요? 제법이 다 공하다. 이 말이 되겠죠? 근본 교설로 말하면 무상이 곧 무아다. 무상이 곧 무아인 줄을 모르니 어떻게 됩니까? 일체가 괴고, 괴로움이고, 법이 무상이고 무아인 줄을 깨닫게 되면 뭐다? 열반적정이 된다. 이것이 바로 삼법인의 가르침이다. 모든 법이 다 공인 줄을 깨닫게 되면, 오온이 모두 공한 줄을 조견하게 되면 어떻게 된다? 도일체고액이 된다. 원리전도몽상, 뒤집어진 잘못된 생각, 이 환영을 떠나게 되면 구경열반에 이르게 된다.
佛說是經已 부처님께서 이 경 설하심을 마치시니
長老須菩提 及諸比丘比丘尼優婆塞優婆尼 一切世間天人阿修羅 장로 수보리와 질문을 한 장로 수보리와 모든 비구들과 비구니들과 거기에 있는 우바새 남자신도와 여자신도. 그걸 넘어서서 일체 세간에 있는 하늘의 신들과 수많은 인간들과 아수라들에 이르기까지 앞에 급은 이르게까지 이 말이에요. 그 모든 사람들이
聞佛所說 부처님의 설하신 바를 듣고
皆大歡喜 모두 크게 환희하여, 환호하고 기뻐하여
信受奉行 믿고 받아 받들어 행하리라.
그러니까 믿고 받아, 받들어 행하리라. 그러니까 믿고 받아 가지는 것만이 아니라 어떻게 한다? 행한다. 이 말이오. 그대로 행하더라. 이렇게 해서 이 법문을 듣고 그 뒤에 대중이 다 하나같이 환호를 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지녀, 그것을 행하더라. 이렇게 해서 이 금강경의 내용이 전체적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93:18)
□ 금강경을 마치며_법륜스님
buddhastudy.egloos.com/3704402
우리가 이렇게 앉아서 금강경 공부를 했는데. 결국은 우리가 금강경 공부를 하면서 첫째는 이 경을 설하신 부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된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구구절절이 갖가지 의심 망상을 내 가지고 수보리가 질문을 했기에 우리가 이렇게 알 수가 있죠. 수보리가 담박에 자기 알아듣고 끝내버렸으면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세세하게 알 수 있겠느냐? 그러니 수보리가 미래중생을 위하여 갖가지 중생을 대신하여 갖가지 의심을 일으켜준 것이 큰 은혜고, 그것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하나하나 해설을 다 해주신 부처님의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하고.
이 경을 편집하고 이 경을 수지독송해서 미래세로 미래세로 전해주는 수많은 선지식의 은혜가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이 경을 접할 수가 없고, 이 경을 짊어지고 히말리야 산을 넘고 탁클라마 사막을 건너서 중국에 와서 갖가지 탄압 속에서 이 경을 번역하고 유포한 구마라십대사등. 그 수많은 선지식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경을 알 수가 있겠느냐? 이거야. 또한 이경을 지금은 금강경이 수없이 번역이 되 있지만은 일제가 이 나라를 지배하는 그런 시기에 기독교인들은 다 자기 말로 된 성경을 감옥에 갇혔어도 읽는데 용성 큰스님께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다른 종교인들은 다 제나라 된 말로 읽고 있는데 우리는 제나라 말로 된 경전하나 없는 걸 보시고 이 경을 감옥 안에서 번역을 하셨다.
그러니 우리가 많은 요즘 새로 번역된 것은 용성스님이 번역한 거보다 더 좋은 게 많습니다. 여기는 읽어보면 한국말이 좀 앞뒤가 매끄럽지 않는 것도 굉장히 많다. 그러나 우리가 굳이 이것을 교본으로 선택한 것은 같은 글이지만은 그런 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또 그 법을 계승한 동원스님과 용선 큰스님께서 이 경을 끊이지 않고 이미 오래전부터 유포를 하셔서 많은 사람을 위해서 이렇게 유포한 공로가 있기 때문에 어때요? 오늘 우리가 이 경을 들을 수 있었고.
제가 또 여러분께 부족하나마 이렇게 경을 해설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역대 선지식들의 가르침을 받아서 지금 제가 그것을 대신하기 때문이지. 제가 무슨 어떤 식견이 있어서가 아니다 이거야. 어려움 속에서도 어리석은 우리들을 두들겨 패가면서도 이런 것을 깨우쳐 주셨기에 우리 또한 이 경을 들을 수가 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마지막으로 이 경을 끝내면서 부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도록 모든 역대 선지식, 역대 전등제대조사의 은혜를 알아야 한다.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는 길은 뭐냐?
바로 이 가르침으로 해서 내 인생이 행복해 지고, 나와 인연을 맺고 있는 가족들이 또한 그 은혜를 입을 수 있어야 되고.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 경의 공덕을 입도록 하는 것이 뭐다? 우리가 불보살의 은혜를 갚는 길이다. 이거요. 그러니 우리가 이제 더 이상 이 경이 제법이 공하고 어떤 상도 경계도 지어서는 아니 된다고 여러분께서 배웠으니까 이제는 나와 남편 사이에 경계도 허물고, 우리 집과 이웃사이의 경계도 허물어야 되고, 불교와 기독교 사이의 경계도 허물어야 되고. 남한과 북한의 경계도 허물어 나가야 된다. 일본과 한국의 경계도 허물어 나가는 것이 이 경을 독송하는 자의 태도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모든 상을 깨뜨리고 이렇게 동시대에 살아가는 많은 인연 있는 중생들에게 공덕이 되도록 하는 거다. 불교가 불교인을 위한 불교라면 무슨 공덕이 있겠습니까? 불교를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그 공덕이 차별 없이 돌아가야 불법이라고 할 만하다 이거야. 더 나아가서는 아직 이 세상에 오지 않았지만은 이 세상에 올 미래 중생들을 위해서 우리는 이 경을 잘 지녀서 전할 의무가 있다. 우리의 신앙의 태도 수행의 태도가 잘못되면 우리들의 후손들은 우리 모습만 보고 이 부처님의 법을 외면하기가 쉽다. 그러니 정법이라는 것은 세계가 전부 다 그렇게 될 수는 없지만은 다만 몇 명이라도, 몇 그룹이라도 또는 몇 천 명이라도 바르게 정진하는 그 씨앗을 심어야 미래에 태어날 중생들도 어때요? 오늘 우리가 바른 법을 만날 수 있는 것처럼 그들도 바른 법을 만나서 해탈의 길을 갈 수가 있다.
그러니 우리가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길은 동시대에 있는 뭇 중생들에게 그리고 미래에 올 중생들에게 우리가 이 법을 널리 전하고 유포하는 것이 우리가 은혜를 갚는 길이다. 그런 다짐을 하면서 금강경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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