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금강경(법륜스님)

12 금강경 강의 제17. 구경무아분

seongsoo 2014. 10. 6. 07:14

 

 

17. 구경무아분(究境無我分)_법륜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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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금강경 열세 번째 시간이 되겠습니다. 17분 구경무아분입니다. 지금까지 금강경 상편을 공부하게 됐었는데요. ~ 큰 번뇌, 어떤 인생을 살아가는 어떤 그런 큰 줄거리는 상편에서 거의 잡았다. 이렇게 볼 수가 있어요. 다시 말씀드리면 여러분께서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야 잘 사는 게 아니냐? 하는 그 생각이 잘못됐다. 그래서 거의 거꾸로, 지금까지 우리가 갔던 길과는 거의 정 반대라고 할 만큼 어떤 사는 길, 생각하는 방식, 이걸 확 바꿔놨단 말이에요.

 

그러고 나서 이제는 소소한 번뇌까지 그 새로 들어선 그 길에 있어서 여러분들이 삶속에서 실천적으로 잘 극복되지 않으면서 남아 있는 그러한 소소한 번뇌들까지 점검해 가면서 해탈의 길, 깨달음의 길을 점검해 간다. 깨달음의 길로 나아간다. 이렇게 후반부를 바라 볼 수 있겠습니다. 잘 정신을 차려서 들으시고요. 수보리가 2분에서 願樂欲聞(원요욕문)이라 그랬죠? 기꺼이 즐거이 듣기를 원하옵니다. 하는 그런 마음으로. 참으로 내가 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해탈의 길이 있다 하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다시 한 번 간절한 마음으로 들으시면 아마 무거운 짐을 그래 오래도록 짊어지고 다니지 않고 바로 내려놓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爾時 須菩提白佛言 이 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되

世尊 善男子善女人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云何應住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이는 어떻게 그 마음을 가지며,

云何降伏其心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이랬어. 첫 번째 질문하고 똑같죠? . 쉽게 말씀드리면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여기 한 여인이 있다. 그는 성실한 사람입니다. 오늘, 바로 지금, 그는 마음을 냈습니다. 어떤 마음을 냈느냐? 깨달음을 얻겠다고. 참으로 행복해 지고 참으로 자유로워지는 그런 삶을 살겠다고 마음을 일으켰다 이거야.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가 있느냐? 이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고, 어떻게 가지면 참으로 자유롭고 참으로 행복한 그런 사람, 그런 삶을 살 수가 있겠느냐?

 

여러분도 다 이 질문과 같은 지금 마음이 듭니까? . 여러분도 이제 정말 이 묻는 질문과 같이 자신이 물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동안에 얼마나 많은 세월을 방황하면서 괴로워하면서 헤매고 다녔느냐 이거야. 이제 다시는 그러한 삶을 살고 싶지가 않다. 이제 나는 정말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 그런 것들이 이 마음의 밑바닥으로부터 간절하게 솟아나야 됩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둘러보면 나도 그래도 좋은 인생, 좋은 삶을 꿈꾸면서 살아왔는데. 살아오면서 학교를 다니고,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사업을 하고, 여기까지 오면서 내가 원했던 것이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다 이거야.

 

학교도 내가 원한 만큼 다니지 못했고, 남편이나 아내도 내가 원하는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 자식도 내가 원하는 만한 자식을 낳아 기르지 못했고, 결혼생활도 내가 원했던 바대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가 없다. 하는 일들, 사업들도 내가 꿈꾸는 대로 되지 않았다 이거야. 어떻게 어떻게 여기까지 오기는 왔지만은 참으로 내가 밝은 날 훤한 길을 보고 걸어가듯이 이렇게 살아온 게 아니고. 어두운 밤에 길을 헤매듯이 동서남북을 구분하지도 못하고. 살다 살다 살다 살다오니 와보니 지금 이 시점에 이르렀다.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사옵니다, 세존이여......

 

마치 밝은 대낮에 큰 신작로 길을 따라가면서 길을 가듯이 그러면서 주위를 내 보고 싶은 대로 살피면서 길을 가듯이 안심하고, 그렇게 확신에 차서, 그렇게 분명한 길을 살아가고 싶다. 어두운 밤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길을 더듬더듬 하면서 한발을 내딛은 게 이게 낭떠러지인지 가시밭길인지 진흙탕인지 그것도 모르고 조마조마하면서 이렇게 헤매이는 인생이 아니다 이 말이오. 울고 불고 괴로워하고 화내고 짜증내고 하는 이런 인생이 아니라. 참으로 맑고 밝은 마음으로 가벼운 걸음걸이를 걸어가듯이 그런 인생을 살고 싶다.

 

그런데 내 주위의 조건들은 갖가지로 얽히고 섥히고 해서, 참 탁 털어버리고 가볍게 살아가려해도 온갖 끈들이 묶여있고. 맑은 마음으로 마치 아침이슬을 맞고 생기가 난 꽃잎이나 나뭇잎이 아침햇살에 비치듯이. 그렇게 눈부시게 밝게 살고 싶은데. 그렇게 맑게 살고 싶은데. 오랜 세월 동안 인생살이에 찌들고 때가 묻어서 너무 마음이 무겁고 어둡고 탁해져있다. 그렇게 살기에는 참 어렵지 않느냐? 이런 시점에 현재에 이르러서도 그래도 부처님이시여. 저에게 새로운 희망이 있다면 저는 밝은 길을 걸어가고 싶고 맑고 밝게 살고 싶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정말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너무나 간절한 바램이다. 이거야. 뭐 큰 깨달음을 얻어서 대중 앞에서 사자후를 하는 그런 도승이 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신통 자재한 그런 도사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고. 바로 내 인생을 정말 보람되게 살고 싶다. 그런데 제가 이제까지 살아온 그 갖가지 깜냥으로는 그렇게 인생이 살아지지가 않는다 이거야. 그러니 세존이시여. 정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우러러 공경하며 간절히 청하옵나니.... 저희 같은 중생들이 어떻게 하면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그런 인생을 살 수가 있습니까? 이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고 어떻게 가져야 그런 인생살이를 살아 볼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부처님께 청했다.

 

佛告 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當生如是心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하되, 만약에 선남자 선여인이 참으로 행복한 참으로 자유로운 그런 인생을 살기를 간절히 원하는 자가 있다면 마땅히 이렇게 그 마음을 낼지니라. 이거요. 네가 물으니 내가 대답을 하는데. 너가 말한 대로 참으로 자유로운 인생, 행복한 인생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말이오. 마치 아침햇살에 이슬을 머금고 빛나는 꽃잎과 나뭇잎같이 그렇게 맑고 밝은 그런 인생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땅히 그 마음을 이렇게 내라. 이거요. 어떻게?

 

我應滅度 一切衆生 내가 마땅히 일체중생을 제도하리라. 내가 일체중생을 제도하리라 이렇게 마음을 내라 이거야. 내가 저 고통 받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리라. 이렇게 마음을 내라. 좀 더 가까이서 말씀드린다면 나는 이제까지 사랑받기를 원했는데 사랑받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나는 그들을 사랑하리라. 나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안온한 의지처를 찾았는데 내 이제부터는 뭇사람들의 의지처가 되어 주리라. 나는 많은 사람의 도움을 청하고 살았는데, 내 이제 도움을 청하는 뭇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리라. 이렇게 마음을 내라.

 

사랑받기를 원하는 나를 돌이켜 뭇 중생을 사랑하고, 도움받기를 원하는 내 마음을 돌이켜 뭇사람을 도와주며, 안온한 의지처를 구하는 내 마음을 돌이켜 뭇 중생의 의지처가 되리라. 이렇게 마음을 내라 이거요. 참으로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거들랑, 남편에게 구하든, 아내에게 구하든, 자식에게 구하든, 부모에게 구하든 그들에게 구하든 사랑을 도움을 의지처를 마음을 돌이켜서 내 그를 사랑하리라. 내 그를 도와주리라. 내 그를 보살피리라. 내 그의 의지처가 되어 주리라. 이렇게 마음을 내라.

 

滅度一切衆生已 일체중생을 멸도해 마쳤다 하여는

而無有一衆生 實滅度者 사실은 멸도를 얻은 중생은 한 사람도 없음이니라. 내가 그들을 사랑하고, 내가 그들을 도와주고, 내가 그들을 보살피고, 내가 그들의 의지처가 되어주어서 그 고통 받는 뭇 중생을 다 구제해 마쳤다 하더라도 사실은 정말은 한 사람도 나의 도움을 얻은 자도 없고, 나의 사랑을 받은 자도 없고, 나에게 의지한 자도 없고 나의 보살핌을 받은 자도 없느니라. 내가 고통 받는 뭇 중생의 뭇 중생을 도와주는 그런 마음을 내고 그런 행을 행해서 그 뭇 중생을 다 도와주고, 보살피고 사랑하고, 그래서 그들을 다 안온한 세계로 이끌었다 하더라도 사실은 정말은 나로부터 도움을 얻은 중생은 한 명도 없다 이거야.

(19:00)

 

何以故 하이고 어찌한 까닭이요.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수보리야 만약에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나다 하는 어떤 카테고리에 갖혀 있거나, 사람이다 하는 어떤 울타리를 치거나, 중생이다 하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거나, 존재다 하는 이런 망상을 갖고 있으면 그것은 보살이라고 할 수가 없느니라.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으면 여러분들은 뭇 중생을 사랑하라. 생명가진 모든 중생을 사랑하라. 그 생명을 존중하고, 그들의 재물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들의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여기고, 진실을 말하고 맑은 정신으로 대하라.

 

그것을 넘어서서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내고, 가난한 자하고 외로운 자를 보거든 그들을 보살피고 도우며, 모든 사람을 청정하게 대하고 진실을 말하고, 이렇게 해서 죽어가는 뭇 중생을 살리고 배고픈 중생을 배부르게 하고 아픈 중생을 치료해서 아픔을 낫게 하고, 외로운 중생을 위로해서 그 외로움을 달래주고. 이렇게 갖가지 행을 해서 모든 중생을 안온하게 보살펴라. 그렇게 하면 누가 자유롭고 행복해 진다고요? 내가. 그렇게 해서 그 모든 사람들이 죽음의 경우에 살아나고 가난을 벗어나고 외로움을 벗어나고 병이 쾌차되고. 갖가지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내가 그들에게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거야.

 

내가 그들을 도와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알아라. 왜 그러냐? 내가 너를 도운다하면 이미 내다 하는 상에 빠지고 도움을 받는 너는 불쌍한 사람이다 하는 상을 짓기 때문에. 이것은 이미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떨어져서 그것은 마치 꿈속에서 타인을 돕는 거와 같다. 실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공하다 이거야. 공하다는 말은 그것은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추한 것도 아니고. 그 갖가지 중생들은 그 갖가지 존재들은 본래 다 모든 것이 갖춰져 있다 이거야. 더럽다고 버릴 거도 없고 깨끗하다고 취할 것도 없다. 이미 다 구족해 있다 이거야.

 

그러니 내가 거기에 일물을 더 보탤 것도 없고 더 뺄 것도 없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한 바가 있겠느냐? 그가 배고프면 다만 음식이 필요해서 먹을 것을 먹었지. 음식이 부족하다고 중생이 아니다 이거야. 몸에 병이 났으니 약을 먹고 치료를 했을 뿐이지 몸이 좀 아프다고 그가 불쌍한 사람이 아니다 이거야. 부모가 없는 아이를 내가 좀 돌봤다고 해서 내가 그 아이에게 뭘 해줬다 할 것이 없다. ? 부모가 없다 해서 그 아이에게 일점 일획도 그것이 그 아이에게 흠이 될 수가 없다. 이거야. 남편이 죽고 혼자 사는 여인을, 아내가 죽고 혼자 사는 남편을, 부모가 죽고 버려진 아이들을, 아들이 없고 홀로 사는 늙은이를 돌봐줬다고 해서 그게 내가 뭘 한 게 없다. ?

그들은 그런 것이 없다해서 그 인생이 불쌍하냐? 아니다. 다만 그것이 없을 뿐이지. 그 인생자체는 일점일획도 부족한 게 없는 인생이다. 다만 그 중생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빠져서 괴로워 할 뿐이죠.

 

그러니 보살은 여기서 보살이라는 것은 참으로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 이 말이오. 그 마음을 맑고 밝고 가볍게 가지고 아침햇살처럼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중생을 사랑하고, 중생을 보살피고, 중생을 도와주고, 중생의 의지처가 되어주라. 그러나 여러분들은 내가 중생을 도와줬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왜 그러냐?

참으로 이 세상에 진실한 모습은 중생이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고 중생이랄 것도 없기 때문이다.

 

所以者何 須菩提 實無有法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수보리야, 사실은 법이라 할 것이 없을세. 최상의 깨달음을 낸 이를 최상의 깨달음을 얻겠다 마음을 낸다고 하느니라. 좀 더 쉽게 말하면 최상의 깨달음을 얻겠다고 마음을 낸 사람은 이것이 최상의 깨달음이다라고 할 만한 한 법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요.

 

27:50

여러분들은 행복한 인생,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하면 지금 여러분들이 지난 20, 30, 50, 70년간 해온 그 방식대로 또 최상의 깨달음을 구한다면 그것은 옳지가 않다 이거야. 여러분들이 살아온 그 방식으로는 그 어떻게 몸부림을 쳐도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거야. 거기에 도달했다면 이렇게 물을 필요도 없고 이런 것을 바랄 필요도 없다 이거야. 지금까지 살아온 그런 생각과 그런 행동, 그런 바람으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것을 원한다면 지금 부처님의 말씀에 진실하게 귀를 기울이고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삶의 방향을 바꾸면 즉시 거기에 도달할 수가 있다.

 

그것은 첫째는 얻으려고 하는 생각을 돌이켜서 줄려고 마음을 내어라. 사랑받으려는 것을 사랑 줄려하고, 도움 받으려는 것을 도움 주려하고. 의지처를 구하던 것을 남의 의지처가 되어 줄려하고. 이렇게 생각을 바꾸어라. 이거야. 그리고 그렇게 행동을 해라. 그렇게 마음을 내어 그렇게 행동을 해라. 그렇게 하면 금방 그곳에 도달할 수가 있다. 누구나 다 도달할 수가 있다. 뭇 중생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내면 여러분들은 누구나 다 해맑은 햇살처럼 온 세상을 밝히는 그런 인생이 될 수가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더라도 내가 그들을 보살폈다 하는 생각을 내게 되면 이것은 당치가 않다.

 

나다하면 이미 아상에 사로잡힌 거고. 중생이다, 너를 구제한다 하면 이미 이것은 허상을 짓는 거다. 이것은 이미 망상에 빠져드는 거다. 내가 너를 구제했다 하면 이미 이것은 다른 견해로부터 출발한 게 아니라 망상에 사로잡힌 거다. 또 사실은 이 세상에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공하기 때문에 그것은 일점일획도 보태거나 뺄 수 있는 게 아니다. 옛날에 나폴레옹이 희랍을 정복한 뒤에 어떤 유명한 철학자가 있다 해서 찾아갔어. 그랬더니 그는 조그마한 드럼통 같은 그런 통 속에서 살고 있었다. 이거야, 그래서 나폴레옹은 말했어요. 위대한 철학자가 이렇게 보잘것없이 살아서 되느냐 이거야. 나에게 말하라 이거야. 내 무엇이든지 너의 소원을 들어주겠다.

 

그랬더니 그 철학자가 말했어요. 대왕이시여, 나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으니 나의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그래 왕은 참으로 기고만장했다 이거야. 말하라, 내 무엇이든지 너의 소원을 들어주리라. 그랬더니 좀 비켜주십시오. 당신이 내 앞에 서서 햇빛을 가리고 있으니 좀 비켜서주시오. 이랬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 이 말이야. 남이 보기에 초라해 보이고, 불쌍해 보이고. 그러나 그에게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있다. 세상 사람들이 옷에 사로잡혀서 옷 없다고 자기를 불쌍히 여기거나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음식에 사로잡혀서 음식을 좀 못 먹는다고 그것을 가지고 불쌍하다 생각하고 또 남을 불쌍히 여기고. 집에 사로잡혀서 집이 크다고 좋아하고 집이 적거나 집이 없으면 불쌍하게 생각하고. 스스로 자기를 불쌍하게 여기고 남을 불쌍하게 여기고 그러죠.

 

그러나 옷도 음식도 집도 떠나버린, 그런 것에 사로잡히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은 아무것도 더 이상 바랄게 없다. 당신이 나에게 물으니, 물으니 뭘 하나 해 주겠다고 하니까. 해 줄게. 해주겠다고 나한테 하니까, 나를 도와주겠다고 하니 고마운 일이죠. 먼저 할 일이 뭐냐? 햇빛가리는 것부터 좀 비켜라 이거야. 도와주겠다고 하면서, 도와주겠다고 하면서 그 사람에게 도움이 필요 없는 엉뚱 생각을 하면서 그를 도와주겠다고 한다 이거야. 그러면서 그 사람이 정작 가장 필요한 것은 가로막고 서 있다 이거야.

 

옛날에 한 수행자가 있었는데. 왕이 그를 존경해서 그의 스승으로 삼았다. 그래서 스승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려고 한다 이거야. 스승을 너무나 존경하니까. 그러나 스승은 왕에게 한 번도 무엇을 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왕은 늘 불만이오. 자기가 스승을 위해서 뭐든지 다 해줄 수가 있는데 스승은 하나도 도움을 요청한 게 없으니 오히려 섭섭했다 이거야. 그래 어느 날 스승이 길을 가다가 한 가난한 이를 만났어. 그는 먹을 것도 없고 그는 병들어 있고, 그는 잘 집도 없었어. 그런데 이 스승은 이 수행자는 그것을 해 줄 수 있는 자신에게는 옷도 없고, 자신에게는 음식도 없고, 자신에게는 약도 없고, 자신은 집도 없다 이거야.

 

본인은 그것이 없어도 아무 문제도 안 되는데. 지금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는 어때요? 그것이 필요하다 이거야. 그는 작은 집,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옷, 병을 고칠 수 있는 약, 몇 가지 옷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왕궁으로 왕을 찾아갔다 이거야. 이 스승의 왕궁 출입에는 일체 제약이 없다 이거야. 무상출입하게 되어 있다 이거야. 어디든지. 왕이 자신의 아버지 선왕을 섬기듯이 했기 때문에. 그래서 이 수행자는 왕을 찾아가서 그 조그마한 몇 가지를 얻어서 이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해서 찾아 갔다 이거야. 왕이 없어. 어디 가셨냐 하니까 저 법당에 갔다 그래. 신전에 갔다 그래.

 

그래서 그 신전으로 가 봤다 이거야. 그랬더니 왕이 그 신전에서 빌고 있어. 신이시여. 신이시여. 저에게 한량없는 복을 주시고 저에게 더 큰 집을 주시고, 저에게 수많은 군대, 코끼리를 주시고, 저에게 뭇 아름다운 여인을 주시고, 저에게 온갖 것을 달라고 간절하게 빌고 있다 이거야. 그래 그 수행자가 왕이 빌고 있는 것을 가만히 뒤에서 듣고 있다가 그냥 돌아 나왔다 이거야. 그런데 왕이 기도가 끝나고 나오니까 스승이 왔다 가셨다는 거요. 아니 스승이 오셨다 가셨으면 자신을 만나지도 않고 어찌 그냥 갔는가 해서 허둥지둥 스승을 찾아서 성문 밖으로 나가는 스승을 찾았다 이거야.

 

스승이시여. 어찌 왔다가 그냥 가십니까? ~ 내가 조그마한 부탁이 있어서 찾아 왔다가 대왕을 보면서 안 되겠다 싶어서 그냥 돌아간다는 거요. 아니 무슨 부탁인데 그걸 저에게 부탁하면 제가 무엇이든지 해 줄 수 있는데 왜 말씀을 안 하시고 그냥 가십니까? 내가 길을 가다가 한 가난한 이를 만나서 조그마한 집과 몇 가지 옷가지와 간단한 음식과 약품을 요구해서. 내가 그것을 왕에게 얻으러 왔는데. 와서 그 신전에서 당신을 보니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자가 당신이다 이거야. 당신은 아직도 엄청난 집이 부족하고, 엄청난 음식이 부족하고, 엄청난 옷이 부족하고 이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자기 당신인데. 내가 밖에 가서 갖가지를 구해 당신을 줘도 지금 당신이 바라는 것을 다 채울 수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당신에게 도움을 달라 할 수가 있겠느냐.

 

가장 가난한 자는 부족함이 많은 자입니다. 가장 부자는 부족함이 없는 자다. 이 말이오. 당신이 신에게 그 갖가지를 달라고 지금 요구하고 있다. 당신이 신에게 그 갖가지를 달라고 요구하는데 신하고 가까운 건 누가 더 가깝다? 내가 더 가깝단 말이오. 그것을 신에게 빌어서 얻을 수 있다면 내가 뭐 하러 당신에게 달라 그러냐? 이거야. 내가 그냥 달라 그러지 바로. 그래? 안 그래요? 그렇지. 당신은 그런 것들이 없어서 신에게 달라고 그렇게 간절하는데 내가 당신보다 훨씬 더 신의 세계, 신과 가까이 있는데 내가 그것이 필요하면 신에게 달라 그러지. 당신에게 얘기할게 뭐가 있느냐? 나는 그것이 신에게 구할 수 없는 거라 당신에게 찾아 왔는데 당신은 그것을 신에게 구하고 있다 이거야.

 

최상의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실로는 이것이 최상의 깨달음이다라고 할 그 어떤 정해진 한 법도 없음을 말하는 거다. 이거야. 그러니 수보리가 의심이 들었어요. 부처님이시여.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어찌하여 저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부처님께서 미래세에 수기가 되리라 부처가 되리라하는 수기를 받으셨나이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이거야. 그러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합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如來於燃燈佛所有法 여래가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계실때에 이것이 법이다 할 그 어떤 법이 있어서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느냐? 그때야 수보리가 번쩍 법이라 하는 상에 집착하고 있음을 깨닫고

不也世尊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如我解佛所說義 佛 於燃燈佛所 제가 부처님의 설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부처님께서 저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연등부처님에게서 이 말이죠.

無有法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사실은 한 법도 있음이 없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나이다. 최상의 깨달음이라 할 그 어떤 정해진 법도 없음을 증득하셨습니다. 이런 얘기죠? 이것이 법이다. 이것이 깨달음이다. 이것이 깨달음을 얻었다 할 그 어떤 법도 없음을 깨달으셨다 이거야.

 

佛言如是如是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고 그러하다. 그렇고 그러하다.

須菩提 수보리야,

實無有法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사실은 이것이 법이라고 할 그 어떤 정한 법, 한 법도 없음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느니라.

 

須菩提 若有法 수보리야, 만약에 이것이 법이다 할 그 어떤 법이 있어서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 여래께서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 하면,

燃燈佛 卽不與我授記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 釋迦牟尼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를 주시지 아니하시련만은. 어떻게 수기를 준다? 너가 내세에 마땅히 깨달음을 얻어 부처를 이루어 그 이름을 석가모니불이라 하리라고 수기를 주시지 아니하실 것이다. 내가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라고 한 생각을 내어 그것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부처님께서는 나를 보고 부처님을 보고 연등부처님께서는 나를 보고 너가 내세에 마땅히 깨달음을 얻어서 그 이름을 석기모니불이라 하리라고 예언하시지 아니 하셨을 것이다.

 

以實無有法 그런데 사실은 한 법도 있음이 없어서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할 것일세.

是故 燃燈佛 與我授記 作是言 이런 까닭으로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 釋迦牟尼

사실은 정말은 이 말이죠. 이것이 법이다라고 할 것이 없기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한다 이거야. 이런 까닭으로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를 주시사 말씀하시기를 너가 내세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그 이름을 석가모니불이라 하리라. 이렇게 수기를 주셨다 이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법이라고 하는 어떤 상을 짓게 된다. 우리는 이것이 행복이다. 저것이 행복이다 하는 어떤 상을 짓고 어떤 모양을 짓고 그것을 찾아서 늘 헤맨다 이거야. 그것이 우리가 옛날 얘기에 집을 떠나서 행복을 찾아 이산 저산 이 고을 저 고을 이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면서 자유와 행복을 구하는 이것을 파랑새를 쫒는 거로 표현하고 있다 이거야. 파랑새를 잡으러 온 천하를 다 돌아다녀도 파랑새를 잡지 못하다가 집에 돌아와 앉아서 처마를 보니 어때요? 파랑새가 처마 끝에 앉아 있더라. 이게 바로 행복과 자유는 밖으로 찾아서 결코 얻을 수가 없다. 다 자기 마음이 짓는 바기 때문에 자기를 돌이켜, 돌이켜 살펴보면 바로 찾을 수가 있다.

 

그러니 이것이 법이다. 이것이 깨달음이다 라고 하는 그 어떤 것을 여러분들이 찾아다니면 여러분들은 마치 돈을 찾아다니듯이 권력을 찾아다니듯이 명예를 찾아다니듯이 그렇게 밖으로 구하는 마음이 된다. 다만 그 생각을 돌이켜서 뭇 중생을 사랑하고 보살피고 도와주고 의지처가 되어 주는 마음을 내면 어느덧 여러분들은 자유롭고 행복한 경지에 있다. 마음속에 있는 모든 응어리는 다 풀어지고 그 탁한 마음은 다 맑아지고 그 무겁던 마음은 다 가벼워져 있다 이거야. 밖으로 향한 마음으로 인해서 갖가지 괴로움이 생기고 안으로 돌이켜 살펴보면 모든 게 다 마음이 짓는 바라. 그 마음이 본래 공한 줄을 알게 되면 마치 봉사가 눈을 뜨듯이 천하가 그대로 밝아진다. 이거요.

 

그런데 내가 깨달음을 얻었다 하는 한 생각 내는 것 자체가 뭐요? 그것 또한 상을 짓는 거다. 이미 아상이 생기는 거고 깨달음이라고 하는 상이 생기는 거고 깨달음을 얻었다 하는 상이 생기는 것을, 늘 나를 구분하고 나와 세계를 구분하는 주관과 객관 주와 객을 나누니 이것은 깨달음의 세계에 일체의 세계가 아니다 이거야. 나라 하는 생각을 놔버려야 만이 나와 너가 사라져버리고 세계가 바로 연기된 하나임을 동체임을 알게 된다.

 

何以故 如來者 卽諸法如義 어찌한 까닭이냐, 여래라 하는 것은, 여래라고 하는 것은 여래자는 여래라하는 것은 이 말이오. 모든 법이 뜻과 같음이니. 모든 법이 있는 그대로임이니. 이 말이오.

若有人 言 如來得 阿耨多羅三藐三菩提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되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

須菩提 實無有法 수보리야, 사실은 이것이 법이다 할 것이 없어서.

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느니라. 이런 얘기요. 여래라고 하는 것은 제법이 여의하다. 여래라고 하는 것은 어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제법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말하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이 다 뜻과 같다 함이다. 있는 그대로다. 이런 얘기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어때요? 상이 없다 이거야. 거기는 더럽다는 상도 없고, 깨끗하다는 상도 없고, 거기는 높다는 상도 없고 낮다는 상도 없다. 거기는 옳다는 것도 없고 그르다하는 것도 없다. 두 가지 모양이 없다. 그래서 법성게에서 뭐라 그래요? 法性圓融無二相(법성원융무이상). 법의 성품을 둥글고 두루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다. 諸法不動本來寂(제법부동본래적), 모든 법은 고요하여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로부터 고요하도다 이랬어. 모든 법이 공함을 말하는 거요. 제법은 다 공하다 이 말이오. 모든 법은 다 아라고 할 것이 없다 이 말이오. 깨끗하니 더럽니 하는 그 어떤 실체도 없다.

 

그러니 깨끗하고 더러운 게 있어야 더러운 걸 버리고 깨끗함을 취한다는 어떤 노력이 필요하고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만드는 그 어떤 애씀이 필요하고 어떤 오고감이 필요하다. 그러나 본래로는 깨끗함도 없고 더러움도 없으니 더러운 것을 버릴 것도 없고 깨끗하다고 취할 것도 없고 더러운 걸 깨끗하게 만들 필요도 없다 이거야. 그러니까 아무런 할 일이 없다. 함이 없다. 오고갈 것이 없다. 그래서 뭐라고 한다? 여래라고 한다 이거야. 제법이 공함을 깨쳐야 바로 여래라고 한다. 올 곳도 없고 갈 곳도 없다 이거야. 버릴 것도 없고 취할 것도 없는 그런 세계가 바로 깨달음의 세계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마음을 돌이켜서 남편을 자식을 부모를 보면서 그들의 아픔을 덜어주고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고통을 보살피고 그들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사실은 여러분들은 아무런 특별히 애쓰고 할 일이 없습니다. 아이가 문제가 있다고 여러분의 색깔 있는 안경을 끼고 단정을 해 놓고. 그걸 뜯어 고치려니까 어때요? 갖가지 노력을 해도 뜻대로 잘 안된다 이거야. 스스로의 그 안경을 벗어버리게 되면 아이는 본래 아무 문제가 없다. 아무 문제가 없으니 나는 아이에게 뭔가 이렇고 저렇고 할 일이 없어.

 

남편 또한 그렇고 부모 또한 그렇다 이거야. 애쓸 일이 아무것도 없어. 다만 물이 필요하다면 물을 줄 뿐이고 밥이 필요하다면 밥을 줄 뿐이다. 그러니 내가 그들을 갖가지를 구제한다고 하지만은 실로는 나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한 바가 없어. 왜냐하면 그들은 본래로부터 고요하기 때문이다.

55:57

 

여래라고 하는 것은 諸法如義(제법여의). 모든 법이 그대로 뜻과 같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말하되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리라. 그러니까 여래라고 하는 것은 모든 법이 다 뜻과 같음이라. 제법이 다 공함을 깨달은 자다 이거야. 그러니 일체세계가 다 그대로 청정하다. 그럴 때 사람들이 말하여 뭐라고 한다?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 이렇게 말한다. 본인이 뭔가 얻었다라는 게 아니다 이거야. 여러분들이 눈을 돌이켜서 여러분들의 타인을 이제까지 타인이라고 생각해 왔던 사람. 미워하고 원망하고 갖가지 불평을 해 왔던 사람들을 그들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을 내게 되면, 그들을 향해서 생각을 돌이키게 되면, 그들이 본래 아무런 잘잘못이 없는, 그냥 그대로의 한 존재임을 바라보게 되면, 그래서 그들이 원함을 따라서 여러분들이 쓰이고 있으면,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여러분들 보고 뭐라 그래요? 아이고 도인이 다 됐다. ~ 보살이구나.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나는 보살이니까 애가 골치가 아프지만은 내가 참고 저 아이를 잘 보살피고, 잘 선도해야 되고, 저 남편이 문제가 많지만은 내가 보살이니까 잘 시봉을 하고 받들어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만약에 행동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을 보고 그 누구도 보살이라고 말하지 않으며. 깨달음을 얻었다고 도인이다. 할 일 없는 사람이다. 뜻과 같은 사람이다. 이런 말을 아무도 하지 않는다.

 

須菩提 如來所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於是中 無實無虛 수보리야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는 것은 여래가 얻은 그 최상의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그 가운데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이건법이고 이건법이 아니고, 이건 깨끗한 거고 이건 더러운 거고, 이건 바른 거고 이건 그른 거고 이런 게 없다. 여래의 깨달음은 제법의 공함을 말하는 거다. 그 공함가운데 실다운게 어디 있고 헛됨이 어디 있겠느냐 이거야. 그런 분별망상을 다 떠난 세계를 말한다.

 

是故 如來說一切法 皆是佛法 이런 까닭으로 여래께서 말씀하셨다. 일체법이, 제법이 모두 다 불법이다. 이 세상에 모든 법이 다 불법이다. 즉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 뭐다? 다 진리다 이 말이오. 진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갖가지가 그대로, 거기 보탤 것도 없고 뺄 것도 없고, 그대라고 다 진리다. 삼라만상이 다 그대로 진여의 현현이다. 드러남이다.

 

須菩提 所言一切法者 卽非一切法 是故 名一切法 수보리야, 말하는 바 일체법이라는 것은 곧 일체법이라 할 것이 없을세. 그 이름이 일체법이다. 여기서 일체법이라 하니 요것이 일체법이다라고 하는 또 어떤 상을 지으면 안 된다. 일체법이라고 하는 것은 다만 그 이름이 일체법이다.

 

須菩提 譬如人身長大 須菩提言 世尊如來說人身長大 卽爲非大身 是名大身 여기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분명치 않으니까 다시 비유를 들어서 말을 한다. 어떤 사람이 그 몸이 아주 크다. 이렇게 말할 때 큰 몸이라 할 것이 있어서 큰 몸입니까? 큰 몸이라 할 것이 없어서 그 이름이 큰 몸입니까? 큰 몸이라고 할 것이 없다. 저 사람 참 크다 할 때 그 사람은 늘 큽니까? 아니다. 그 사람은 어떤 부류에 들어가면 뭐가 되고? 큰 사람이 되기도 하고, 어떤 부류에 들어가면 작은 사람이 되기도 하고, 어떤 부류에 들어가면 중간이 되기도 하고. 어떤 부류에 들어가면 착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어떤 부류에 들어가면 악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어떤 부류에 들어가면 착하지도 안하고 악하지도 안하다. 이렇게 들어가기도 한다.

 

그 사람 자신은 큰 사람도 아니고, 작은 사람도 아니고, 중간도 아니고, 선한 사람도 아니고, 악한 사람도 아니고, 중간도 아니다. 여기 한 보살이 있다. 저 보살님은 키가 큰 사람이냐?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 저 보살님이 어떤 사람과 함께 있느냐에 따라서 키가 크다라고 불릴 때도 있고, 키가 작다라고 불릴 때도 있고. 중간이네 이렇게 불릴 때도 있고. 저 사람이 어떤 부류에 있느냐에 따라서 아이고 그 보살은 그래도 착하구나라고 불릴 때도 있고, 아이고 그 보살 그 성질이 못됐더라 이렇게 불릴 때도 있고, 아이고 그 보살은 그냥 그런대로 그렇더라. 이렇게 불릴 수도 있다 이거야.

 

바람피우는 남편이 밉죠? 내가 보기에는 미운사람이고, 내가 보기에는 나쁜 사람이다. 그러나 그쪽 편에 가서 그 여인이 볼 때는 좋은 사람이다. 맨날 술집에 매일 가서 술 먹고 오는 남편이 참으로 나쁜 사람 같지만은 그 술집에서 볼 때는 단골손님으로 참으로 좋은 사람이다. 절에 큰돈을 보시해서 절에 있는 신도들은 그 분은 참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지만은, 그 분의 주위에 있는 일가친척들은, 일가친척은 돌보지 않고 쓸데없이 절에나 돈 갖다 준다. 이래서 나쁜 사람이라고 그래. 여러분들이 절에 와서 이렇게 법문듣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하고, 갖가지로 봉사하면 절에서는 어때요? 아이고 그 보살 참 훌륭하다 이러지만, 여러분 남편이 볼 때는 미쳤다 그런다 이거야. 할 일없으면 절에 가서 그짓 하느냐? 이렇게 말한다.

 

절에 다니다가 교회를 가게 되면 여러분들은 아이고 그 보살 신심이 없는 사람이다. 불심이 없는 사람이다 이러지만, 이렇게 말하지만. 교회에서는 뭐라 그래요? 참 축복받은 사람이다. 이렇게 말한다. 교회 다니다가 절에 와서 이렇게 법문을 듣고 좋아하면 아이고 이제 정신 차렸구나. 이래 말한다 이 말이오. 그런데 교회 있는 사람은 어때요? 아이고 사탄의 시험에 빠졌다.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얘기하면 이제 이해하시겠어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 사람의 몸이 크다 하지만은 크다 할 것이 없이, 그 인연을 따라 이름하기를 뭐다? 크다라고 불린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須菩提 菩薩 亦如是 若作是言 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我當滅度 無量衆生 則不名菩薩 만약에 이렇게 말한다면. 내가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였느니라. 또는 내가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느니라. 내가 마땅히 일체 중생을 제도하느니라. 요렇게 뭐하면? 말하면 즉 불명보살이라. 곧 보살이라 이름 할 수가 없다. 보살이 아니다 이 말이오.

何以故 須菩提 實無有法 名爲菩薩 아이고 어찌한 까닭이오. 수보리야, 사실은 법이라 할 것이 없을 새 그 이름이 보살이다. 법이라 할 것이 없는 줄을 깨닫고 할 일이 없는 줄을 훤히 아는 속에 행한다면 그를 이름하여 보살이라 한다.

 

是故 佛說一切法 이런 까닭으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일체법이라고 하는 것이

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거기에는 라 할 것도 없고, 너다 할 것도 없고, 사람이라 할 것도 없고, 중생이라 할 것도 없고, 존재라 할 것도 없느니라.

須菩提 若菩薩 作是言 수보리야, 만약에 보살이 이런 말을 한다.

我當莊嚴佛土 내가 마땅히 불토를 장엄한다라고 하면

是不名菩薩 이 곧 보살이라 이름 할 수가 없다. 내가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리라. 내가 이 세상을 불국정토로 만들리라. 이렇게 하면 그를 보살이라 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내 마음속에 갖가지 허상을 버리는 것이 정토를 장엄하는 거다. 우리 남편을 내가 요렇게 뜯어 고쳐서 좋은 사람 만들리라. 이러면 보살이라 할 것이 없다. 남편이 바로 그대로 청정하고 그대로 존귀한 존재임을 내가 깨우쳐 바라보는 것이 뭐다? 남편을 가장 존중하는 태도다.

 

何以故 如來說莊嚴佛土者 이런 까닭으로 여래가 불토를 장엄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卽非莊嚴 是名莊嚴 곧 장엄이라 할 것이 없을 새 그 이름이 장엄이다.

須菩提 若菩薩 通達無我法者 如來說名眞是菩薩 수보리야 만약에 보살이 나다 할 것이 없는 법을 통달하면. 무아법, 나다 할 것을 없는 법을 통달하면 이 말이오. 무아법을 통달해야 부처님께서 진짜 보살이라고 이름 붙여 말씀하신다. 여래가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이 진짜 보살이다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을? 가 없음을. 너다라고 할 것도 없고 법이라고 할 것이 없는것을 통달한자, 즉 일체상이 허물어 진자. 어떤 생각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자. 그런 자를 진짜 보살이다고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신다. 그러니까 경 제목이 뭐요? 구경무아분. 마침내 아라고 할 것이 없는, 법이라 할 것이 없는, 그러한 세계에 이르러야 한다.

 

그러니 다시 질문으로 한 번 돌아가 봅시다. 어떻게 해야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할 수가 있느냐? 또는 어떻게 해야 항상 맑은 마음을 가지고 얼굴을 밝게 하고 가벼운, 그런 인생을 살 수가 있느냐?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생명가진 일체 중생을 사랑하라. 그들을 보살피고 보호하라 이랬어. 이제까지는 나는 이 세상을 향해서 늘 도움을 요청하고, 사랑을 요청하고, 의지처를 구하고, 늘 바랬다 이거야. 그게 뜻대로 안 되가지고 괴로웠다. 그래서 남편을 원망하고, 아내를 원망하고, 자식을 원망하고, 부모를 원망하고, 친구를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했다 이거야. 내가 원하는 것이 지금까지 뜻대로 된 게 없다. 내가 무슨 죄를 지어 이렇게 됐냐? 벌을 받았느냐? 전생에 죄가 많아서 이렇게 됐냐? 지금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서 생긴 거다. 바로 한 생각을 돌이켜라. 뭇 중생의 구어처가 되어 줄려고 해라.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의지처가 되 줘라. 가난한 자를 보면 도울 마음을 내라. 병든 자를 보면 치료 하려고 마음을 내라. 외롭고 방황하는 사람을 보면 위로 하려고 마음을 내라. 뭇 중생을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어여삐 보라. 그러면 이미 내 마음의 괴로움은 다 사라져 버리리라. 내 가슴 속에는 갖가지 충만함으로 가득 하리라. 그런데 내가 그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했다고 이런 생각을 하지 마라.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이미 그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 전재가 된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알아라.

 

비록 발을 헛디뎌서 물에 빠졌다 해서 그래서 그 순간에 나의 도움이 필요해서 물가로 건져졌다 이거야. 그러나 발을 헛디뎌 물에 빠졌다 해서 그의 인생이 뭐 크게 잘못된 게 아니다. 다만 그 상황에서 그 조건에서 배가 고프니 먹어야 했고 병이 났으니 치료받아야 하는 거다. 우리는 그것이 없으면 그 사람은 굉장히 불쌍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이고, 그렇게 하면 나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것자체가 이미 내가 아직도 그런 물질에, 그런 윤리에, 그런 도덕에, 그런 형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내게 된다. 다만 목마른 자가 물을 구하면 물을 주고, 그가 목마르다 해서 불쌍한 존재도 아니다. 그가 목마른 자가 아무 불쌍함도 없다 해서 물이 필요 안하다는 뜻도 아니다. 그가 목이 마르니 물이 필요하다.

 

그러니 제법이 공한 줄을 알아야 된다. 이렇게 한 생각을 돌이켜서 보살피더라도 그 대상을 불쌍히 여기고 어여삐 여기더라도 사실은 그 대상의 어떤 상을 지어서 규정을 지으면 안 된다. 그러면 필요 없는 걸주겠다고 내가 마음을 낸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 철학자에게 뭔가 도와주겠다고 생각한다. 그 철학자가 필요한 것은 따뜻한 햇볕인데, 햇볕은 스스로 가려놓고 필요 없는 걸 주겠다고 자꾸 설친다. 오늘 우리가 타인에게 베풀겠다는 생각이 없고, 오직 얻겠다는 생각만 갖는 것이 첫째 문제라면. 두 번째 여러분들이, 특히 자식들에게 뭔가 주겠다는 마음을, 엄청난 베푼 마음을 내지만은. 그것이 필요한 것을 주는 게 아니다. 필요 없는 것을 자꾸 줄려고 한다.

 

여러분들 보기에 좋아서, 좋은 음식 먹이고, 좋은 옷을 사 입히고, 원하는 대로 해주고, 어디 여행을 가면 비행기를 태우고, 새마을 특실을 태우고 한다 이거야. 그러니 그 아이는 그런 습관이 들고, 그러니 그 아이는 자라면 세상의 지탄을 받는 사람이 된다. 그러니 그 아이가 음식을 아껴먹고, 옷을 검소하게 입고, 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니고, 여행을 가더라도 삼등칸에서 타고. 그래야 그 아이가 자라서 세상의 민심을 알고, 중생의 아픔을 알고. 그래야 큰 지도자가 될 수가 있다. 그것이 그 아이에게 필요하다. 그 아이에게 그것이 필요하면 여러분들이 지금 그렇게 해 줘야 된다. 그 아이에게 그렇게 해 주려면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아야 된다. 여러분들이 아이를 위해서 그렇게 지금 살 수가 없잖아. 자기 생활에 빠져서 자기 편리에 빠져서 그 아이도 같이 끌고 흙탕물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아이를 위해서 마치 해 주는 것인 양 이렇게 생각한다.

 

여러분들이 참으로 아이를 생각하느냐? 정말 아이들이 자라서 살아 갈 그 세상을 염려하고. 그 아이들이 살아야 할 그 인간관계를 걱정한다면. 여러분들은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며, 무엇을 보여 줘야 될 거냐? 본받을 것은 여러분 밖에 없는데. 아무런 본 받을 것을 보여주지도 않으면서 아이보고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왜 그렇게 말하느냐? 너는 버릇이 왜 그러냐? 이렇게 얘기한다고 되겠느냐? 이거야. 정말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도 해 주지 않고 필요 없는 것 만 잔뜩 해 줘 놓고. 거기다 해 줬다 하는 생각으로 압박을 한다 이거야. 그 아이는 가볍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인생을 살게 두지 않고. 니는 뭐가 돼야 되. 니는 공부를 잘해야 되. 니는 나의 오직 한 가지 희망이니까 희망을 져 버리면 안 되. 이렇게 해서 아이에게 무거운 짐을 지어서. 자기 인생을 사는 게 아니고 부모가 원하는 인생, 그 헛 인생을 평생 살도록 만든다.

 

그래서 그렇게 살 때는 갖가지 억눌림으로 괴로워 하고, 그것을 벗어던지고 도망을 가면 또 부모에 대한 불효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또 괴로워해야 된다. 무엇 때문에 아이를 그렇게 괴롭히느냐? 당신들이 무엇 때문에 그 아이를 괴롭힐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참으로 우리가 사랑의 눈으로 아내를 보고, 남편을 보고, 아이들을 보고, 부모를 본다면 어찌 인생이 불행해 질 수 있겠습니까? 불행해 질래야 불행해 질 수 없다 이거야.

 

여기 절에 온 사람들이 스님이 여러분들이 그 어렵게 어렵게 콩나물 가게 가서 그 콩나물 한 움큼 사는 걸 깎거나 적게 사고, 채소 살 때 조금씩 조금씩 아껴 쓰고 갖가지로 모아서 사고 싶은게 얼마나 많은 세상이오. 그거 아끼고 아껴가지고 법회 올 때마다 천 원, 이천 원 그렇게 아껴 모은 백만 원 이백만 원 보시했는데. 그 돈 갖고 그 아픔을 알면 어떻게 중이 그걸 갖고 허튼짓을 하겠어요? 못하지. 시줏돈이 무서운 줄 알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걸 가지고 고스톱을 친다. 그걸 가지고 술을 먹는다. 그걸 가지고 불사를 한다면서 돈을 함부로 쓴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죠.

 

이 다 그 은공을 모르니까 그렇단 말이오. 그 은혜를 모르면서 사는 사람이 어떻게 도를 이루겠냐? 이거야. 중생의 은혜를 모르고, 시주자의 은혜를 모르고, 그 한 인간도 안됐는데 어떻게 도를 이루겠냐? 그렇게 해서 도를 이루었다면 그 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또 집에서 못된 사고방식, 지 버릇대로 지가 낳은 자식도 보살피지 못하고, 자기와 한 이불에 사는 남편과 아내도 제대로 함께 사랑하지 못하고 다투고, 자기 낳은 부모도 모시지도 못하고. 그 더러운 성질 버리려고 그거 고치려고 절에 왔지 않습니까? 그런데 절에 와가지고 그 더러운 성질을 또 드러낸단 말이오. 그래서 또 지고집대로 절에 와서 할라고 그래? 여기가 어디라고 여기 와서 그런 못된 버릇을 부리느냐 이거야.

 

집에서는 그렇게 하더라도 절에 와서는 고개를 숙이고, 집에서는 비록 파출부를 두고 일을 하더라도 절에 와서는 부엌에 가서 음식을 만들고, 집에서는 회사에서는 부하를 두고 비서를 두고 있다 하더라도 절에 와서는 자기 몸을 움직여서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대중을 위해서 봉사도 하고, 자기를 늘 숙여야 될 거 아니오. 여기 와서 사장이네, 정치인이네, 거들먹 피우고. 여기 와서 집구석에서 하든 못된 버릇, 또 패를 지어서 옳으니 그르니 다투고 이런단 말이오. 그러니 그게 무슨 공부가 되겠어. 절에 와서 이방 저방 패 만들고, 그러니 절 집안이나 절 밖이나 똑같은 거요.

 

그러니 우리가 지금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인생살이를 이제 고쳐야 할 때가 오지 않았느냐? 아직도 우리는 계속 이렇게 살면서 저나 어디를 가나 다투고 시비하고 괴로워하고 이렇게 살아야 되겠느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간곡하게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집착마저도 갖지 말기를. 부처님의 대한 형상에 사로잡히지 말기를. 이렇게까지 간곡하게 얘기하는데. 무슨 귀신같은 얘기로 중생을 현혹하느냐 이거야.

 

그러니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고자 하는 사람은 마침내 무엇이 없음을? 라고 할 것이 없음을, 그 어떤 상도 지어서는 아니 된다. 그러니 우리가 늘 참회하고 살아야 됩니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때때로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타인을 미워하고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준 적이 얼마나 많겠느냐 이거야. 그러니 시간 나는 데로 엎드려 절하고, 참회하고, 비록 내 아직 정진이 덜 돼서 비록 법을 만나고 법을 즐기기는 하지만은 아직도 과거 다생겁래의 습기를 못 버려서 내 이러니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고 숙이는 마음이 있어야 된다.

 

須菩提 若菩薩 通達無我法者 如來說名眞是菩薩 수보리야 만약에 보살이 라고 할 것이 없는 법, 무아법을 통달을 하면 여래께서 이 사람이 진짜 보살이다라고 말씀을 하실 것이다. 이런 얘기요. 이 사람을 진짜 보살이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가 요 최근에 몇 십 년 살은 인생만 잠깐 한 번 살펴봅시다. 지금부터 30년 또는 50년 전, 여기 연세 많이 드신 분은 다 알 수 있는 그런 시절의 세상으로 돌아가 보자. 입을 옷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죠. 그 옷 한 벌 만들려면 삼베, 모시, 무명, 명주 만들려면 옷 한 벌 만들려면 힘이 얼마나 듭니까? 오죽했으면 베 짜는 여인의 피땀으로 만들어 진다 하겠어. 입술이 다 트고, 무릎이 다 트고, 손톱이 다 갈라지고, 그렇게 해서 옷을 만들어서 입잖아. 그러니 옷 한 벌 제대로 입기가 쉬운 일이 아니오.

 

참으로 겨울에 솜바지 입고 사는 사람이 드물었어요. 그리고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어요. 쌀밥? 어떻게 보통 서민이 남의 집에 소작하는 사람이 쌀밥을 먹어요? 평생 보리밥 아니면 잡곡밥 아니면 감자 아니면 고구마였는데. 그것도 충분히 먹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남의 집 와서 일해주고, 밥한 끼 겨우 먹는 게 일이야. 여자들은 인건비도 없었어요. 남자들은 그래도 하지. 아침에 남의 집에 가서 아침 먹기 전에 한두 시간 일해주면 겨우 아침밥을 얻어먹거나 해장 술 한 잔 얻어먹는다 이 말이오. 그러니 그때 사람들의 소원이 뭐겠어요? 뜨뜻한 솜바지 하나 있었으면 이 겨울을 나는데 얼마나 좋겠느냐? 소고기 국밥에 흰쌀밥 한 번 말아 먹어봤으면 캬~ 얼마나 좋겠냐? 부자의 기준이 뭐에요? 쇠고기 국밥에 쌀밥 먹는 거란 말이오. 허연 쌀밥 먹는 거란 말이오.

 

그리고 집집마다 비가 새기 때문에 우산을 받쳐 놓고 살고 그러잖아. 그죠? 비가 새지 않는 집, 찬바람이 들어오지 않는 집, 바늘구멍에 황소바람 들어온다고 겨울에 노인들 무릎은 쑤시는데 얼마나 외풍이 셉니까? 이렇게 살았단 말이오. 흙집에서. 그런데 소원이 뭐요? ~ 고깃국에다 밥 먹는 거. 옛날 나일론 옷 좋았어요? 안 좋았어요? 그렇게 피땀흘려가지고 옷을 만들어도 금방 떨어지는데. 이놈의 나일론은 어때요? 신어도 신어도, 입어도 입어도 안떨어지니 얼마나 좋았어. 장마당에 가서 나일론 양말, 나일론 옷, 하나 입는게 소원이었단 말이오. 그리고 시멘트 블록으로 슬렛트 지붕 이기는게, 초가지붕 해놓으면 또 썩고, 또 썩고, 비새고 하는데. 그 슬렛트 지붕하나 갈려면 시골에서 오래 돈을 모아야 지붕도 갈고 한단 말이오. 새마을운동의 주 내용이 뭐요? 그 지붕 가는 거 아니오. 지붕개량. 그것도 뭘로? 슬렛트로.

 

이렇게 해서 조금 먹고 입고 자는게 숨이 돌려졌단 말이오. 거기서 한 발 더 올라가서, 한발 더 올라 가서 나일론 옷이 뭐요? 그죠? 무슨 옷? 털옷. 그죠? 밍크코트니 요즘 나오듯이. 저런 옷. 그 다음에 집은 아파트 또는 벽돌집이죠? 먹는 음식은 다 갖가지 소고기 국밥전도 해요. 소고기 통째로 구워서 씹어 먹고, 통째로 구워도 그것도 안심이니 뭐니 해서 갈비니 골라 골라 먹는단 말이오. 이렇게 살았는데, 이런다고 행복한 게 아니죠. 이래서 결국 돌아온 게 뭐요? 알고 봤더니 털옷이든, 나일론 옷이든, 뭐든, 인조섬유가 좋은 거요? 안 좋은거요? 안좋은 거지. 그래서 요즘 삼베가 얼마나 비싼지 알아요? 내가 삼베 두루마기 한 벌 만들려면 여러분들 옷값 열배는 잡아야 삼배 두루마기 하나 만들어요.

 

그러니 요새 부자들은 다 잡곡밥 먹어요? 쌀밥 먹어요? 다 잡곡밥도 가지가지 뭐 조니, 기장이니, 이상한 거. 그 쌀보다 비싸요 싸요? 비싸죠. 그 다음엔 또 요즘 산나물, 옛날에도 잘 안 먹던 이상한 나물까지 전부 봄에 산에 나는 거는 다 뜯어 먹어도 된다는 그런 거. 그 다음에 수도꼭지 놔 놓고 물을 어디 뜨러 간다? 산에 물 뜨러 가요. 산에 물 뜨러 가. 그리고 요즘은 집을 다 무슨 집을 지어요? 흙집 짓는다고, 아파트 까지 황토를 파와가지고 바닥에 깔고 요즘 흙벽돌 찍고 난리요. 그리고 또 요즘 초가집 짓고, 그죠? 요즘 다 고급 집에 가면 이 벽지나 문을 다 저기도 돈 들여서 창호지로 다 만들죠. 그래서 다 살다 살다 살다가 요즘 제일 잘 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오? 다 나이 들어가지고 자식이니 뭐니 이런 거 다 소용없고.

 

저 산속에 좋은 데 가서 초가집으로 토담집 딱 하나 지어놓고 흐르는 물에 세수하면서, 밭에 옹기종기 비료도 안치고 농약도 안치고 새 파란거 무슨 들풀 같은 그런 키워서, 그거 꼭꼭 씹으면서 고기 먹어야 되 안먹어야 되? 안먹어야 되. 고기 먹으면 생활수준이 팍 떨어지는 사람이오. 그건 요즘 돼지고기 그거는 최하층이 먹는 거죠. 그리고 거기 가서 칡뿌리 캐먹고, 거기다 소나물 껍질 벗겨먹고. 이거는 영양식으로 어때요? 이거는 성인병 방지에 최고에요. 많이 먹어야 되? 적게 먹어야 되. 방에도 불을 많이 때야 되? 적게 때야 되? 적게 때야 되. 그리고 폭신폭신한 베개를 베야 되? 목침을 베야 되? 목침을 베야 되. 바닥도 푹신푹신 해야 되요? 딱딱해야 되요? 딱딱해야 되요.

 

그래 돌아서 보면 옛날에 가난한 사람이 살던 그 인생이 가장 건강하고. 일을 많이 해야 되? 적게 해야 되? 많이 해야 되. 생각은 뭐하고? 적게 하고, 노동은 많이 하고, 음식은 적게 먹고, 잠도 적게 자고, 고기는 적게 먹고, 풀은 많이 먹고. 그게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다 천하가 부러워하는 사람이오. 이렇게 꼭 돌아와야 되겠어? 옛날에 가난한 사람의 한 생각 탁! 바꾸면 되겠어? 한 생각 탁 바꾸면 끝나겠지. 인생이 그런 거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돌고 돌고 올 필요가 없이. 여러분들이 지금 아까 내가 얘기한데로 부처님 가르침대로 한 생각 탁 바꾸면 바로 보살행이 된단 말이오.

 

가족을 버리고 출가해서 스님이 돼서, 온갖 고행 다 겪고, 소승법 다 익혀서 그것도 버리고, 대승법 익히고, 다시 머리 길러가지고, 화작한다고 원효대사처럼 또 스캔들 일으켜서 애 낳아서. 이래서 꼭 와가지고 이래 살아야 되겠어요? 그렇게 살 필요가 없지. 앉은 자리에서 한 생각 탁! 바꾸면 그대로 보살행이 된다 이 말이오. 지금 사는 그대로 여러분들이 바로 최고의 해탈의 경지, 도인의 세계, 부처의 세계에 살 수 있다 이거야. 이게 위대한 가르침이오. 저 신을 찾아서 몇 천 년 헤매다가 돌아와서 신이 딴 데 있는게 아니라 내 가슴속에 있다. 이렇게 해야 되겠어? 왜 그러 쓸데없는 짓 하냐 이거야. 에너지 낭비하고.

 

그러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위대함은 바로 여러분들이 망상을 제하면 다 본래 청정한 거요. 옛날에 우리가 말했던 가난한 삶이란 것이 절대 가난한 게 아니오. 그것이 바로 다 그대로 청정한 삶이오. 그런데 중생이 어리석어서 그것이 더럽다고 생각하고,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잘못 생각해서 돌고, 돌고, 돌고 돌아 왔다 이 말이오. 여러분들 남편, 여러분들의 자녀들의 지금 생각이 그걸 뜯어 고쳐서 해결 될 거 같죠? 그러면 이렇게 몇 십 년 뜯어 고쳐서 다 산천을 다 버려놓고, 이제 본래 자리 찾기가 어려워지는 거와 같다 이거야. 그런데 아직도 몰라. 인제 이 문명의 전환이 돌아와서 결국은 돌고, 돌고 돌아와서 이제 우리들의 지난 이 헤맴이 얼마나 어리석었냐를 깨닫게 되면 그때야 불교를 제대로 알지.. 그때 그 자리로 우리가 나아가야 한다. 어리섞은 망념을 제하는 것이 바로 해탈의 길이며 정토의 길이다. 이것을 잊지 마시고 오늘 이 순간부터 이대로 그냥 행복해야한다. 이대로 좋아야 한다. 내일도 아니고 어떻게 되면이 아니라 그냥 이대로 좋다. 이대로 좋습니까? ,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