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금강경(법륜스님)

14 금강경 강의 제19. 법계통화분 제20. 이색이상분 제21. 비설소설분 제22. 무법가득분 제23. 정심행선분

seongsoo 2014. 10. 6. 07:20

 

 

 

 

19. 법계통화분(法界通化分)_법륜스님

 

안녕하세요. 110페이지 펴주세요. 오늘은 금강경 열다섯 번째 시간이 되겠습니다. 19 법계통화분입니다. 부처님께서 여래는 다섯 가지의 눈을 가지고 있다. 육체의 눈이 있어서 사물의 형체와 색깔을 잘 구분한다. 그리고 만져보고 부드럽고 딱딱하고 차고 더운 줄을 알며, 맛을 보고 짠지 매운지 아시고, 코로 냄새 맡고 무슨 냄새인지를 아시고, 갖가지 소리를 듣고 아시고, 눈으로 보고 형형색색을 잘 구분하신다. 이렇게 육안을 갖고 계신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러한 감각기관에 의해서 갖가지를 아시지만은 그 대상에 집착하지 아니하신다. 눈에 보이는 대상인 그 색깔과 모양에, 그리고 소리에, 냄새에, 맛에, 감촉에 집착하지 아니한다. 어떤 상도 짓지 아니하시며 거기에 사로잡히지 않으신다. 다만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느끼고 하신다. 부처님은 이것만 계시는 게 아니고 눈으로 볼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나, 성격이나 이런 것도 다 아신다. 이것을 천안통이라고 한다. 천안통을 비롯한 천이통, 타심통, 신족통, 숙면통, 이런 것들이 있어서 우리가 보이는 것만 아는데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다 아신다.

 

부처님은 더 나아가서 진리의 눈, 혜안이 있어서 이 세상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꿈과 같은 거다. 실체가 없는 거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하며 거기에는 아라고 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없다. 모든 형상은 허망한 것이다 하는 것을 꿰뚫어 아는 지혜의 눈을 갖고 계신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은 집착하지 아니하신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은 번뇌가 일어나지 아니하신다. 언제나 자유롭고 괴로움이 없는 안온한 상태에 머물러 계신다. 부처님은 이 세상이 진리의 바다로부터 마치 출렁거리는 파도처럼 갖가지 형상이 거기로부터 나타난다. 현현한다.

 

하나의 나무줄기로부터 가지가 벌어지고, 가지가지마다 잎사귀가 달려서, 수많은 잎이 달려서 그늘을 이루듯이, 그 하나하나를 다 아시고 보시고 계신다. 이것을 법안이라고 말한다. 법의 눈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근기 따라 그 갖가지 병을 다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신다. 대자대비심이 계시고, 갖가지 방편을 구사하셔서 중생을 저 안온한 세계로 인도 할 수 있는 그런 힘을 갖고 계신다.

 

다시 말씀드리면 부처님은 우리가 말하는 사람으로서의 그 정직하고 성실한 면을 갖고 계시면서 동시에 저 하늘의 신들이 갖고 있는 선량하고 또 갖가지 능력도 갖고 계신다. 더 나아가서 부처님은 세상을 떠나 숲속에서 고요히 수행하는 그런 성문연각의 삶의 방식, 수행자로서의 태도를 갖고 계시고. 즉 청정한 수행생활을 하시면서 동시에 부처님은 중생의 고통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그 몸을 나퉈서 중생과 함께 살아가는 보살의 모양을 또한 갖고 계신다.

 

다시 말씀드리면 부처님은 인간으로서의 정직하고 성실한 면을 가지고 계시고. 부처님은 저 신들처럼 선량하고 갖가지 능력을 가지고 계시고. 부처님은 성문연각과 같은 그 수행자로서의 청정한 계율, 안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계시고. 부처님은 보살로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갖가지 행을 행하시고 있다. 그것을 뛰어 넘어서 부처님께서는 해도 행한 것이 아닌, 아무런 함이 없는 속에서 갖가지를 행하시는 그러한 여래의 경지, 부처의 눈을 갖고 계신다.

 

그러니 한 인간으로서도 아무런 흠잡을 데 없는 삶의 태도를 갖고 계신다. 쉽게 말하면 한 인간으로서 인격을 갖고 있다. 수행자이기 때문에 아주 기발 라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윤리, 도덕, 가치 이런 걸 부정하고 기행을 하고 특별한 행동을 하고 이렇게 하시는 게 아니다. 보통 사람다운 사람의 모양을 하고 계신다. 언제 어느 때 만나도. 그런데 그분은 그것만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저 하늘의 신들이 가지고 있는 그 선량함, 그리고 그 능력을 갖고 계신다.

 

그런데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숲속에서 고요히 홀로 정진하는 갖가지 계율을 지키면서 청빈하게 살아가는 그런 수행자의 모습을 하고 계신다. 그 수행, 한 수행자로서 그런 성자로서의 모습에 흠잡을게 하나도 없다. 그런데 그 분은 그렇게 세상을 떠나 숲속에서 고요히 하는 그런 수행자의 모습만 하고 있느냐? 아니다. 그 분은 중생이 괴로워하면 그 괴로움 속에 중생과 함께 하면서 갖가지 몸을 나퉈서 중생을 제도하는 그 보살로의 몸도 가지고 있다.

 

보살로의 갖가지 몸을 나툰다고, 우리는 중생과 더불어 산다고, 술도 먹고, 머리도 기르고, 중생 속에 사는 그런 보살을 우리는 많이 봤죠. 그러나 부처님은 그런 보살로서 흠잡을 데 없지만은 성문연각으로서의 청정한 계율을 지키는 그의 모습도 또 흠잡을 수 없다 이거야.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는 보살행을 한다하는 스님들과 부처님 모습은 다르다. 산 속에서 채식을 하고, 하루 한 끼 먹고, 고요한 숲속에서 갖가지 고행을 하시는 그런 수행자로서의 모습을 그 분은 갖고 계시는데 그것만 갖고 계시는 게 아니다.

 

그 분은 저자 속에서 중생의 갖가지 병에 대해서 갖가지 처방을 내리는 그런 보살의 행도 함께 계신다. 더 나아가서 부처님께서는 나라 할 것이 없는 줄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일체 중생이 바로 자신이며, 자신이 곧 일체중생이다. 주객이 분리 돼 있지 않으시다. 그래서 어떤 행을 하시든지 내가 하는 생각이 없으시다. 거울에 물건이 오면 그냥 비치듯이 중생이 그 앞에 오면 그냥 법이 설해지는 거지. 어떤 의도를 갖고 계시는 게 아니다. 우린 뭘 하려면 의도를 하고, 의지를 발하고, 노력을 하고 그래야 되죠. 그런데 부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아니하신다.

 

한 물건도 그 누구의 것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즉 내거라 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삼천대천세계를 다 보시를 해도 그 분은 내가 누구를 위해서 줬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으신다. 중생의 갖가지 이익을 베풀되 그 어떤 바람도 없다. 중생의 그 아픔을 다 하나하나 살펴 보시지만은. 그리고 대자대비 심을 내시지만은 부처님은 중생에게도 집착을 하시지 않으신다. 거기에 빠지지는 아니하신다. 다 보살펴 어루만지시면 서도 그것이 늘 꿈과 같음을 아신다. 이것이 따로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것이 다 일체다. 한 몸이다.

 

여래는 세계를 나누어서 보시지 아니하신다. 연관된 하나로 보신다. 사람의 인격을 이런 인격, 저런 인격으로 나누지 아니하신다. 그 분은 한 인간으로서도 성실하시고, 한 신으로서도 위대한 신이며, 한 수행자로서도 청정한 수행자고, 한 보살로서도 만 중생을 구하는 보살이시고, 그 모든 것을 갖추시고도 그러한 것들에 집착 또한 떠나계신다. 그래서 부처님을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가 어렵다. 코끼리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눈을 감고 다리를 만져보고 기둥 같다 하고, 꼬리를 만져보고 빗자루 같다 하고, 귀를 만져보고 부처 같다 하면 그 부분은 맞기도 하지만은 사실은 코끼리 전체모습으로서는 맞지가 않다.

 

그러니 우리가 여래를 말할 때 부처님을 그 어느 한 모습을 자기 눈으로 보고 부처님은 훌륭한 인간이시다. 부처님은 신과 같으신 분이다. 부처님은 청정한 수행자다. 부처님은 보살의 화현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옳지가 않다. 그러니 소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인격을 어느 부분만 본다? 청정한 수행자로서의 인격만 보기 때문에 부처님은 바로 아라한에 가장 모범적이신 분이고,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은 오직 보살로 보기 때문에 관세음보살을 부처님의 화현이라 하고, 또 부처님을 1100억 화신의 하나로 본다.

 

그것은 그 한 모습니다. 그분과 같이 지내 있었던 분은 그 분이 한 인간으로서 성실하니까. ~ 그 분은 참 사람다운 사람이다. 이렇게 본다. 또 어떤 분은 그 분의 갖가지 능력을 보고 뭐라고 한다? 무한한 신과 같다. 무한한 힘을 가진 신과 같다. 이렇게 또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 분을 표현하기를 열 가지 명으로 표현하고 있죠? 그 분은 온 바도 없고 간 바도 없으신 여여하신 분이다 해서 뭐라고 한다? 여래. 그 분은 모든 번뇌를 다 없애버리고 열반적정에 드신 분이라서 중생의 그 어떤 공양을 받아도 아무런 빚이 되지 않는 그런 분이라 해서 응공이다. 그 분은 바른 지혜를, 그리고 두루 보편적인 지혜를 다 알고 계시는 깨달으신 분이다 해서 정변지. 그 분은 아는 것과 실천이 늘 하나로 같으시다. 둘을 다 갖추고 계신다 해서 명행족.

 

그 분은 모든 고요의 바다를 훌쩍 뛰어넘어서 저 언덕에 이르신 분이다 해서 선서. 그 분은 세상의 있는 모든 일을 중생의 가지가지 그 고통과 아픔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아시는 분이다. 세간해. 보살로서의 능력이죠. 이거는 성문으로서는 그런 능력이 없다. 그 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선비다. 그 분보다 더 한분은 없다 해서 뭐라 한다? 무상사. 그 분은 중생의 갖가지 번뇌를 다 조복 받고 중생을 괴로움의 바다로부터 건져낼 수 있는 힘이 있다 해서 조어장부. 그 분은 사람과 신들의 스승. 이 만생명의 스승이시다 해서 뭐라고 한다? 천인사. 그 분은 깨달으신 분으로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이다 해서 , 세존이다.

 

그래서 이 제목이 뭐냐? 일체다. 일체다. 오안이 한 몸이고, 오근 다 한 몸에 붙어 있듯이, 오안이 한 몸이다. 부처와 중생도 하나다. 번뇌와 보리도 하나다. 둘이 아니다 이거야. 번뇌를 떠나 보리가 따로 있고, 중생 떠나 부처가 따로 있고, 사바세계 떠나 정토가 따로 있고. 이렇게 분리 된 게 아니다. 두 가지 모양이 아니다. 모든 것은 다 한 몸이다. 그래 일체동관분이다. 한 몸으로서 같이 본다. 이런 얘기요.

 

그러니 그 가운데서 어떤 것을 떼어내 가지고 그것만으로 모양을 짓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거다. 이런 얘기에요. 그러니 중생이 따로 중생이라 할 만한 게 따로 떼어서 요게 중생이다 할 것이 없다면 즉, 일체중생을 구제하되 마치 그것을 자기 몸을 씻듯이, 자기 손이 발을 씻듯이 그렇게 하나로서 한다. 그러니 그 할 때는 한다는 생각이 없다. 해준다는 생각도 없다. 불쌍하다는 생각도 없다 이거야.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하는데 구제했다 하는, 구한다 하는, 그 어떤 상을 짓지 않고 행한다. 다만 할 뿐이다.

 

그것이 무위의 행이다. 그러니 자연적 의심이 들죠. ?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고 할 바가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복을 지을 수 있고, 복을 받을 수가 있으며, 어떻게 중생을 교화하느냐? 그러니 부처님께서 어떻게 너는 그런 함이 있는 행과 거기에 따른 한계가 있는, 셈이 있는 복인 유루복만 생각하느냐? 바로 함이 없는 행과 한량이 없는 복인 무루복을 알지 못하는가? 어떻게 이 세상의 법계를 교화하는가? 부처님은 이 일체 법계 중생을 다 교화하시는데 온통 지금 설명하듯이 그렇게 중생을 교화하신다.

 

뭔가 중생 따로, 부처 따로 두고 중생을 부처의 세계로, 예토에 있는 중생을 정토로. 이렇게 구제하시는 게 아니라. 일체로서, 한 몸으로서의, 그러기 때문에 한 몸으로서의 중생의 아픔을 느끼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가 자비라 이렇게 말해요. 동체대비다 이런 말을 하죠? 대비. 큰 비심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몸에 가시가 박혀서 아야~ 하고 아픈 거와 같이 그렇게 느끼는 것을 비심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그럴 때 그 가시를 빼는 데는 아무런 생각이 없어요. 눈은 그것을 보고, 손을 그 가시를 찾고, 잡아 당겨 뺀다 이거야. 그런 마음으로, 그렇게, 그렇게 뭐한다? 중생을 교화한다.

 

須菩提 於意云何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若有人 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있어서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 가득히 채워서 보시를 행한다면

是人 以是因緣 得福多不 이 사람은 이런 인연으로 복을 얻음이 많으냐? 많지 않느냐?

 

如是 世尊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此人 以是因緣 得福甚多 이 사람은 이와 같이 지은 인연으로 얻은바 복이 매우 많사옵니다.

須菩提 若福德 有實 수보리야 만약에 복덕이라 하는 것이, 요것이 복이다 하는 것이, 실제로 정말로 있는 것이라면. 요게 복이다 하는 그런 모양, 그런 정해진 어떤 성품이 있는 것이라면

如來不說得福德多 以福德 無故 如來說得福德多 여래가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말씀하시지 아니 하시지만은, 이 복덕이라 할 것이 없는 까닭으로 여래가 말씀하시기를 복덕이 매우 많다고 하느니라.

 

깨달음의 세계에서 보면 실로 복덕이라 할 것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 태양이 뭇 생명을 내리쪼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 모든 생명 에너지의 근원은 다 어디서 오는 겁니까? 태양에서 오는 겁니다. 전부 다. 태양 빛의 한 1% 정도도 안 되게 지구에 닿습니다. 그 태양에너지를 식물들이 마치 비를, 하늘에서 비가 오면 바가지에 담듯이. 그 태양에너지를 담아내는 게, 담는 게 뭐냐? 식물의 탄소동화작용이다. 우리가 곡식이나 이런 것을 먹고 에너지를 내는 것은 그 탄소동화작용에 의해서 담아 놓은 에너지를 우리가 이용하는 것과 같다. 마치 바가지에 담겨있는 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그거를 다시 소화시킨다 하는 것은 분해시켜서 담겨있는 에너지를 도로 우리가 지금 사용한다. 그것을 힘으로 할 때는 운동에너지로, 생각을 하는 이런 에너지로, 갖가지 에너지로 우리가 그것을 사용한다. 에너지가 어디서 별도로 온 게 없습니다. 다 태양의 에너지가 식물에 고정이 되고, 식물이 동물로 이전이 되고, 우리가 동물의 고기를 먹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에너지가 거기에 담겨있는 거요. 그것을 우리가 갖다 쓰는 거요. 여기에 초를 태운다 하더라도 초에서 에너지가 나오는 게 아니라. 태양에너지가 결국은 담겨 있는 것을 그 그릇을 해체하면서 그 에너지가 지금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거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태양에너지는, 태양은 복을 엄청나게 짓죠. 만생명의 뭐요? 근원이죠. 그래서 옛날에 다 태양을 숭배한건 일리가 있어요. 사실은 얼토당토 않는 하느님 숭배하는 것보다 태양을 숭배하는 거는 굳이 따지면 일리가 있죠? ? 우리 생명의 근원이에요. 그러니 부처님 중에도 어떤 부처님이 계십니까? 大日如來(대일여래)가 있죠? 大日如來. 그러나 태양은 아무런 바람도 없이 그냥 비출 뿐이에요. 태양이 난 누구를 비추겠다. 넌 나쁜 놈이니까 안비추고, 넌 좋은 놈이니까 비추어 주겠다. 이런 게 있습니까? 없습니다. 차별 없이 비춘다. 그런데 각 생명은 그 태양에너지를 다 자기 나름대로 받아서 그걸로 생명을 영위를 하는 거요.

 

하늘에서 비는 차별 없이 내리지만은 각 중생이 그것을 받아서 자신의 생의 일부로, 생명의 에너지의 일부로 받아쓰는 거요. 향나무는 그것을 향기로, 소독나무는 그것을 소태로, 뱀은 그것을 독으로, 소는 그것을 우유로, 가시나무는 그것을 가시로, 이렇게 각자가 다 자기 업대로, 자기 업대로 그것을 쓴다. 차별 없이 비춘다. 아무런 차별이 없다. 또 아무런 차별이 없으면 모든 게 다 똑같아야 되는데 똑같지가 않아요. 그것을 가지고 다 달리 나타난다. 이것이 중생의 업이다.

 

똑같이 이렇게 법문을 해도 다 그 결과가 달리 나타납니다. 이것을 가지고 해탈의 길을 가는 사람도 있고, 이것을 잣대로 해서 다른 종교인이나 다른 절에 다니는 사람이나 집안에 남편이나 식구하고 이걸 가지고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도 있다. 정법이다 사법이다 이렇게 해가지고. 그러니까 각각 자기 근기 따라서, 자기 업식 따라서, 그것이 달리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부처님이 그렇게 하도록 하거나 그렇게 조정하는 게 아니다. 태양이 비치지만은 눈 감은 사람은 보지 못하고 눈뜬 사람만 보게 된다.

 

부처님은 늘 이렇게 가르치셨어요. 나의 가르침은 빛과 같다. 와서 보라. 하는 거다. 와서 보라. 숨겨진 비밀이 아니고 몰래 비밀이 전해 주는 것도 아니다. 비밀주의가 아니에요. 불교는. 그런데도 불교에는 지금 상당히 무슨 비밀이, 뭐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눈 있는 자 와서 보라하고 이렇게 탁 드러내 놓는 거다.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은 못 보는 거요. 눈만 뜨면 다 볼 수 있는 거다. 숨겨서 비밀이 어떻게 하는 게 아니다. 바로 열려진 세계를 말하는 거다. 누구한테만 은밀히 이런 게 아니에요.

 

그러나 똑같은 조건에서도 보는 사람도 있고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엄밀하게 누군가를 선택해서 전해주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자업자득이다. 자신으로부터 일어나는 거다. 저 태양빛은 누구의 거냐? 부처님 거냐? 아니다. 자연 거냐? 아니다. 우주 거냐? 아니다. 내거냐? 더더욱 아니다. 그럼 니 꺼냐? 물론 아니다. 저것은 내 것도 아니고 너 것도 아니고. 우리 거냐? 우리 거도 아니다. 생명 거냐? 생명거도 아니다.

 

내 거면 나만 가져야 되는데 너도 갖잖아 그죠? 그러니까 너 거냐? 그러면 나도 받으니까 너 거도 아니죠? 그럼 우리 꺼야? 우리 둘 다 받으니. 아니다. 저 다른 생명도 다 받지 않냐? 그럼 생명 거냐? 아니다. 생명 아닌 것도 다 받지 않느냐? 그러면 자연 거냐? 아니다. 지구 밖에 있는 다른 것도 다 받지 않냐? ~ 그럼 우주 거냐? 그러면 넓어지죠? 넓어지니까 여러분들은 와~ 그 정도면 깨달은 거 아니냐? 이러게 생각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그건 다 오십보백보다. 그건 다 무엇인가 누구 것이야 된다는 아직도 꿈을 깨지 못한다. 누구 것이어야 되. 그것이 꿈과 같은 줄을 알면 그것이 가치 있다는 생각이 꿈같은 줄을 알면 그런 인연을 그런 원인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32 : 54)

 

20. 이색이상분(離色離相分)_법륜스님

 

그러니 우리는 부처라고 하는 것을 눈으로 보이는 어떤 상, 귀로 듣는 어떤 소리, 이런 몸뚱이의 어떤 모양, 이런 걸 찾으니까. 아이고~ 그러면 지은바가 없다면 저런 결과는 어디서 생겼노. 저건 왜 생겼을까? 이런 생각을 한다. 그러니 부처님께서 수보리야 네가 부처를 아직도 상으로 보는 거구나. 상을 부처로 삼는 거구나. 상이 아니라면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 부처는 형상이 아니에요. 부처는 빛깔도 아니고, 모양도 아니고, 어떤 소리도 아니고, 냄새도 아니고, 맛도 아니고, 감촉도 아니에요. 어떤 능력도 아니란 말이오. 그런데 우리는 부처, 깨달음 하면 뭔가 그런 것들을 자꾸 연상에서 부처를 찾는다.

 

離色離相分 색깔과 모양도 떠나고 색깔도 떠나고 모양도 떠나야 된다. 어떤 색깔과 모양으로 부처를 구하는 것은 그것은 잘못된 거다.

須菩提 於意云何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佛 可以具足色身 見不 부처님은 색신이 그 몸매 말합니다. 그 색신이, 그 몸매가 아주 잘 갖추어 졌다 이 말이오. 구족하다. 다 갖추어진 것으로 볼 수가 있느냐? 부처님은 몸매가 어떻다고 그랬어요? 황금빛이 난다 그랬죠? 황금빛 나는 몸매에다가 미간에는 백호가 있고 다 이렇게 보면 알 수 있잖아.

여러분들 다 꿈꾸고 나서는 다 뭐라 그래요? 부처님 봤다. 관세음보살 봤다. 이러잖아요. 그럼 어이 생겼는지 알 수 있다는 얘기 아니오. 그죠? 그래서 난 참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겠는데 어떻게 생겼다 해서 굉장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不也 世尊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如來 不應以具足色身 見 여래를, 이 색신이, 이 몸매가 잘 갖추어진 것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몸뚱이가 어이 생겼다. 빛깔이 어떻다. 이런 것으로는 부처를 볼 수가 없다. 이런 얘기요. 그런데 앞으로 꿈에 부처님을 봤다든지, 꿈에 관세음보살을 봤다는 소리를 하면 안 되겠지. 비슷한 걸 봤다? 비슷한 걸 봤다 그래도 뭔가 모양 짓는 게 있잖아. 그죠? 그래 깨고 나서 뭘 봤다 그래야 된다? 헛 걸 봤다. 헛 걸 봤다. 헛것을 헛것인 줄 아는 게 바로 깨달음이오.

 

何以故 어찌한 까닭이냐

如來說具足色身 卽非具足色身 是名具足色身 여래께서 구족색신을 말씀하심은 몸매가 잘 갖추어진 것을 말씀하심은 사실은 몸매가 잘 갖추어졌다 할 것이 없을세. 몸매가 잘 갖추어졌다 이름 하나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것이 몸매가 잘 갖추어진 거냐? 사실은 정할 수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시대 따라 인연 따라 다 다르죠? 그죠? 옛날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요즘 서양사람 같은 걸 봤다면 인물 잘생겼다고 했을까요? 아니다. 저 어떻게 원숭이 같이 생겼나? 이렇게 했을 거요. 아프리카사람들이 우리를 봤으면 잘생겼다 이런 생각을 안 한다. ? 우리가 아프리카 사람들 보고 잘생겼다는 생각을 해요? 안 해요? 안하죠. 그와 같다.

 

그러나 현시점에서는 또 우리들이 어떤 기준을 갖고 있다 보니까 아이고 그 여자 참 예쁘다라는 말을 해요? 안 해요? 한다. 그 여자 예쁘다 하지만은 예쁘다 할 어떤 성품이 있는거는 아니다. 다만 예쁘다 이름 할 뿐이다. 그 여자 참 못생겼다 해도 못생겼다 할 어떤 성품이 있는게 아니다. 다만 못생겼다 이름 할 뿐이다. 사실은 못생기고 잘생긴 게 없다. 사실은 그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 사람들이 어느 위치에 섰느냐에 따라 동산이다 서산이다 이렇게 불리는 것처럼. 사람들이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잘생겼다? 못생겼다? 착하다? 선하다? 이렇게 할 뿐이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잘생긴 게 있고, 못생긴 게 있다 하면 이것은 상에 사로잡힌 거다. 또 잘생기고 못생겼다는 말을 쓰면 그 사람은 뭘 모르는 수도를 안 한 사람이다. 이렇게 말해도 안 된다. 아시겠어요? 잘생기고 못생긴 게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사실은 상에 집착한 거지. 관념에 사로잡힌 거지. 존재는 잘생기고 못생긴 게 없다.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 그러나 인연을 따라서 서쪽에 사는 사람들은 편의상 뭐라고 부른다? 동산이라고 부른다. 그 골짜기에서는 그렇게 부르듯이 그 나라에서 그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떻게 그걸 가지고 잘생겼다 못생겼다. 이렇게 다만 부를 뿐이다.

 

須菩提 於意云何 수보리야 저 뜻이 어떠하냐?

如來可以 具足諸相 見不 여래가 모든 모양이, 상이 잘 갖춰진 것으로 볼 수 있느냐, 없느냐? 상이 잘 갖추어졌다는 것은 여기서는 하나의 부분 부분을 말하는 거에요. 3280종호 이런걸 말하죠. 코는 몇cm높이로, 팔은 얼마나 길고, 뭐는 어떻고 뭐는 어떻고 하는 이런 것을 말한다. 요런 게 잘 갖추어진 것으로 여래를 볼 수가 있느냐? 어떤 모양, 이런 모양이 부처다 하는 그런 모양으로 부처를 볼 수가 있느냐?

 

不也 世尊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如來 不應以具足諸相 見 여래를 모든 상이 구족된 것으로 이러이런 조건이 잘 갖추어졌다하는 그런 것으로 여래를 볼 수가 없습니다.

何以故 어찌한 까닭인가 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如來說諸相具足 부처님게서 모든 상이 잘 갖춰졌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사실은

卽非具足 상이 갖춰졌다 할 것이 없을세.

是名諸相具足 다만 그 이름이 모든 상이 잘 갖춰졌다 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상으로도, 어떤 색으로도 여래를 볼 수가 없다. 어떻게 해야 여래를 본다 할 수가 있는 거요? 상을 떠나고, 색을 떠날 때, 여래를 본다 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이상이색(離相離色)하면 곧 즉견여래라 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5분에서 뭐라 그랬어요? 약견제상비상이면 즉견여래다. . 일체제상. 일체의 모든 상을 떠나면. 곧 부처람 이름 하리라. 즉명제불이다. 이렇게 나와 있죠? 그러니까 모든 상을 떠나야 한다. 그러니까 깨달음의 세계. 여러분이 해탈과 열반에 이르려고 하면 모든 이 모양 지어진 것, 이 어떤 빛깔, 형상, 어떤 관념, 이런 것을 떠나야 된다.

 

눈에 보이는 어떤 모양과 빛깔만 말하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서 그리고 있는 어떤 상으로도 부처는 볼 수가 없다. 여러분들이 아~ 깨달은 자는 이럴 꺼다. 말씀도 잘하시고. 요렇게 요렇게 행동도 하실거고, 이러이런 분이 부처님이실 거다. 이거도 뭐다? 이미 상이다. 아시겠어요? 이렇게 모양 지으면 이미 내가 이미 모양을 짓는 거요. 여러분들은 이런 것이 훌륭한 남편이다. 요런 게 훌륭한 자식이다. 요런 게 훌륭한 스님이라고 각각 다 자기가 모양을 지어놓고 있습니다. 아시겠어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하면 당신은 요렇게 말해야 된다. 내가 요렇게 할 때는 당신은 요렇게 행동해야 된다. 이걸 정답을 다 여러분들이 갖고 있어요. 안 그래요? 전부 다 가지고 있어요. 대화 할 때 들어보면 알아요. 내가 이러 이렇게 고생을 하니 남편은 내 하는 행동을 보고, 고생하는걸 알아가지고, 집에 들어와서 뭐라고 해줘야 된다? 위로를 해주고, 일을 좀 거들어 주고, 그죠? 아침에 신문은 자기가 가져오고 커피를 타주면 고맙다고 할 줄 알고, 설거지는 지가 할 줄 알고, 요렇게 전부 애고 어른이고 누구든지 너는 요래야 되고, 너는 요래야 되고. 너는 요래야 되고, 너는 요래야 되고, 요걸 다 지금 여러분 다 알고 계세요. 부처님처럼.

 

남편은 어떻게 해야 되고, 자식은 어떻게 해야 되고, 스님은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아요? 몰라? 다 알아. 스님은 어떻게 해야 된다. 다 답을 가지고 있어요. 스님은 고기도 안 드셔야 되고, 술도 안 드셔야 되고, 여자들이 가까이 오면 멀리해야 되고. 그런데 내가 갈 때는 깍듯이 나를 보살펴야 되고. 돈을 많이 낸다고 그 사람한테 특별히 행동해서는 안 되고. 그러나 나한테는 특별히 늘 감사를 해야 되고. 은혜를 탁 알아서 해야 되고 다른 사람을 다 평등히 대해야 되고, 나한테는 특별히 대해야 되고. 이렇게 다 답을 가지고 있어. 그래서 자기가 딱 보고 가서 보니 그 카테고리에 맞다 싶으면 아이고 훌륭하시다. 부처님이 새로 태어나셨나? 이랬다가 거기서 한 줄만 딱 벗어나면 어때요. 에이 중 그 별거 아니더라. 이러면서 탁 돌아서버린다.

 

이 세상에 모든 것에 대해서 자기가 상을 딱 지어서 갖고 계시는 거예요. 자기는 뭐하다? 완벽구족한 사람이에요. 세상에 훌륭한 승려가 어떤 건지, 훌륭한 사람이 어떤 건지, 훌륭한 남편이 어떤 건지, 부처는 어떤 건지, 다 자기는 다 알아요? 몰라? 알아. 다 알아. 그러니까 너무 알아서 지금 문제지 몰라서 문제가 아니에요. 다 그래서 보면 벌써 훌륭한지 안한지 잘하는지 못하는지 다 안다니까 여러분들은. 착 보면 벌써. 그 상을 버려야 참으로 행복하고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가 있다. 그걸 가지고 있는 한은 절대 깨달음의 길에 이르지 못한다. 부처를 볼 수가 없다. 이런 얘기요.

(46 : 47)

 

21.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_법륜스님

 

~ 그 다음 제21 비설소설분.

非說所說分 설한바 없다. 설하되 설한바가 없다. 설한 것이 설한 것이 아니다. 이런 얘기겠죠.

須菩提 汝勿謂如來作是念 我當有所說法 수보리야, (너 여) 네가 여래가 이런 생각을 짓는다 이랬는데. 여래가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하지 마라. 이 물자는 뭐뭐뭐뭐 금지를 명령하는 단어입니다. 네가, 수보리 네가 여래는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하지마라. 어떤 생각? 내가 마땅히 법을 설하는 바 있다.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실 때 내가 법을 설한다 하고 이런 생각을 한다고 너는 하지 마라.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하지마라. 이런 얘기요.

 

莫作是念 역시 막도 뭐뭐하지 마라 이런 얘기에요. 이런 생각을 짓지 마라. 수보리야 너가 여래계서 이런 생각을 한다. 어떤 생각? 내가 설한바 법이 있다. 이렇게 하지 말라. 이런 생각을 하지 마라.

何以故 어찌한 까닭이냐

若人 言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되

如來有所說法 여래가 법을 설한 바 있다고 하면

則爲謗佛 곧 부처를 비방 하는 것이 된다.

不能解我所說故 불능은 불가능하다 이 말이죠? 내가 설한 바를 이해하기가 불가능한 까닭이다. 그것은 내가 설한 바, 내가 설한 바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니라. 이렇게 말했어.

 

그러니까 부처님이 수보리보고 야~ 너 이런 생각하지마라. . 어떤 생각이요? 부처님이 스스로 내가 법을 설한바 있다. 이런 생각을 부처님이 한다고 네가 그런 생각을 하지 마라. 사실 여래는 법을 설하되 법을 설한다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다. 그건 몇 번 말씀 드렸지만은 마치 물건이 거울에 와서 비치는 것과 같다.

 

만약에 부처님께서 법을 설한다라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네가 말한다면 그것은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여래가 뭔가 의지를 가지고 행한다 하는 이런 뜻이 되기 때문에 부처님은 그 행함 속에서 뭐가 남는다? 흔적이 남는다 하니까. 그건 이미 부처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거다. 그것은 여래의 설하신바 그 뜻을 알지 못한다. ~ 비유는 똑같은 비유입니다. 서울 가는 길을 누가 물었어.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와서 물으니까 동쪽으로 가라 그러고. 어떤 사람이 와서 물으니까 북쪽으로 가라 그러고. 어떤 사람이 와서 물으니까 서쪽으로 가라 그러고. 어떤 사람이 물으니까 또 동쪽으로 가라 그러고. 어떤 사람이 물으니까 서북쪽으로 가라 그러고. 어떤 사람이 물으니까 동남쪽으로 가라 그러고. 묻는 대로 대답을 한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생각하시기에 부처님은 서울 가는 길을 한 천 가지는 알고 계실거야. 나는 한가지 밖에 모르는데. ~ 부처님은 참 많이 알고 계신다. 그래서 사람들이 올 때마다 그 사람한테 맞게 그 길을 착착 일러 주시는 거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 된다. 제 말뜻 이해하시겠어요? 중생이 갖가지로 와서 아프다 하니 부처님께서 배 아프다 하니 넌 이걸 먹어라. 눈 아프다 하니 넌 이걸 받아라. 머리 아프다 하니 넌 이걸 먹어라. 착착착착 오는 사람마다 전부 처방을 내 준단 말이오. 옆에서 보니 야~ 부처님은 처방을 몇 개나 알고 계실까? 한 만개는 아는 거 같애 아무리 봐도. 그걸 그 사람의 병따라 척척 처방을 내 주시는데 정말 놀랄 일이야.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많은 처방을 알 수가 있지? 난 죽어라 공부해도 열 개, 스무 개, 백 개 알기도 힘 드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부처님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 된다. 이 얘기요. 그건 부처님의 설한 바 뜻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왜 그럴까? 부처님은 아무런 길도 정해놓고 가지고 계시는 게 없어. 부처님은 아무런 처방도 갖고 계시는 게 없어. 다만 중생이 물을 때, 그때 그 사람 서 있는 위치 따라 때로는 동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서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북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남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동북이 되기도 하고 이렇게 되는 거지. 부처님이 100가지 서울 가는 길을 외우고 계시는 게 아니고, 정해놓고 있는 게 아니고, 그걸 하나씩 나눠주는 것도 아니다.

 

중생의 번뇌 따라, 중생의 근기 따라 그냥 길이 나오는 거요. 그래 부처님은 한 법도 정해놓고 갖고 계시는 게 없다. 부처님은 무슨 법을 설하실까? 이렇게 정해 놓은 게 없다 이거야. 부처님은 어떤 처방전을 갖고 계시는 게 아니다. 그냥 그 병 따라 처방이 나온다. 밥을 많이 먹어서 병이 났으면 적게 먹어라. 적게 먹어서 병이 났으면 많이 먹어라. 많이 걸어 다녀서 병이 났으면 천천히 걸어 다녀라. 쉬어라. 너무 앉아 있어서 병이 났으면 야~ 좀 걸어라. 이렇게 말한다 이거야.

 

그러니 어떤 여자가 얼굴 잘났다고 폼 잡고, 남편도 무시하고, 부모도 무시하고, 자기 출신 계급이 높다고 뜩~ 잘난 척하고 이렇게 있었어. 자기가 처녀 때 뭍나라 왕자들이 와서 자기하고 결혼하자고 그랬는데 그래도 자기가 거절을 했다 이거야. 이런 생각을 떡하고 있으니 부처님께서 그 여인에게 말했다. 그 시아버지가 바로 그 유명한 수닷타 장자, 급고독장자인데 며느리를 봤는데 그런 며느리를 봤단 말이오. 그러니 이거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래 부처님의 제자인데 옛날 같으면 그런 며느리는 죽여 버려도 되요? 안 되요? ? 여자는 남편이 죽여도 아무 죄가 안 되는 시대니까.

 

그러나 부처님의 제자인 수닷타장자가 그럴 수는 없잖아. 그죠? 그래서 부처님께 말씀을 드렸다. 부처님이 그 집에 식사 초대를 받고 설법을 하는 자리에 그 여인은 참석도 안 해요. 양심의, 자기가 참석해서 자기 속 들여다본다니까 도사라고 한다니까 자기 속들 여다 보고 뭐라 그러면 큰일이잖아. 그죠? 숨었다. 그랬더니 부처님이 일체 벽면을 다 투명하게 만들어 버렸어. 그러니까 자기가 어디를 숨어도 보여요 안보여요? 다 보여. 여길 숨어도 훤히 보이고, 저기를 숨어도 훤히 보이고. 사람이 미칠 지경이죠. 기둥 뒤에 숨어도 기둥이 투명해져가지고 기둥 뒤에 숨었다. 천하가 다 안단 말이오. 그러니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었어.

 

그건 아마 자기가 어떤 변명을 해도 부처님께서 이미 다 아신다. 이렇게 말 할 수가 있겠죠. 부처님 기둥을 유리로 만드시는 분은 아니니까. 그가 어떤 변명을 하고 다 숨기려 해도 부처님은 이미 다 아신다 이런 얘기겠죠. 그래 이 여인이 꼼짝 못하게 됐단 말이오. 그래 부처님이 이리 말했어. 여인의 아름다움이란 남자의 노리개가 되기 적당하다. 네가 지금 잘났다고 폼 죽이는 데. 여인이라는 게 잘났다 하는 게 뭐냐? 결국 남자 노리갯감이 되기 적당하다는 얘기다. 그게 하나도 잘난 게 아니다 이거야.

 

그러면서 이 세상의 아내가 일곱 가지 아내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부모 같은 아내가 있고, 남편에 대해서 말이오. 부모 같은 아내가 있고, 또 기생 같은 아내도 있고, 또 누이 같은, 아내도 있고, 종 같은 아내도 있고. 이런 아내 중에 독사 같은 아내도 있고, 살인자 같은 아내도 있다. 그 아내를 죽 열거를 하면 그게 어떤 건지를 죽~ 설명을 하는데 자기가 듣고 보니 자기가 어떤 아내다? 독사 같은 아내, 살인자 같은 아내란 말이오. 그래서 그가 엎드려서 눈물을 흘리면서 깨우쳤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됐다는 거요? 착한 아내가 되고, 착한 며느리가 되고, 착한 어머니가 됐다 이거지. 이 여인은 엄마로서의 역할도 제대로 안하고, 아내로서의 역할도 제대로 안하고, 며느리로서의 역할도 제대로 안하니.

 

그래서 이런 경전이 남아 있다. 그래 이 경전을 가만히 요즘사람이 읽어보면 그 시대의 배경은 빼고. 그냥 요즘 사람이 가만히 읽어보면 부처님은 완전히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계시는 분이다. 그래서 옛날 스님들은 여자의 길이 뭐냐? 이걸 가지고 주로 가르쳐요. 이게 옥야경인데. 탕녀 옥야 해서 옥야경인데. 이 옥야를 가지고 여성이 어떤 삶을 살아야 되느냐를 가르친다. 그리고 오늘 여성해방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이경을 읽고 그 말하신 대로 분석을 하면 부처님은 반여성해방운동자요. 여성차별론자가 된다 이거요.

 

그런데 오늘 우리가 서있는 위치는 춘천이고, 서울 가려면 서쪽으로 가야되는데. 그 때 부처님 당시에 어떤 사람이 인천에 사는 사람이 물어서 서울을 둥쪽으로 가라 그랬다 이거야. 요즘 해석해 보니 어때요? ~ 동쪽으로 가면 강릉 가는 길인데 이게 어찌 서울 가는 길이냐? 이렇게 해석하는 거와 같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다? 한 인간도 못된 인간이었어. 아시겠어요? 한 인간도 못된 인간이니까 우선 뭐가 되라고 했다? 한 인간이 되라. 윤리 도덕도 안 지키는 인간이니까 윤리도덕이라도 지키는 인간이 되라 이런 얘기요.

 

그런데 부처님은 또 그저 자기자식만 귀한 줄 알고, 자기 남편만 귀한 줄 알고, 자기 부모만 귀한 줄 알고, 세상은 외면하고, 남의 자식은 돌아보지도 않고. 이런 사람에겐 어떻게 했을까? 아이고 착하다. 그래 여자는 그래야 되. 남편한테 잘하고, 자식한테 잘하고, 부모한테 잘하고. 그게 훌륭한 여자다라고 이렇게 말씀하셨을 거 같애? 아니에요.

 

어떤 여인이 있었는데 신분이 아주 높고, 세력이 있는 여자였어. 그런데 이 여자가 사람고기를 좋아해. 그래서 동네에 있는 천민 애들을 자꾸 잡아다가 먹었어.

2600년 전 얘기니까 얼마든지 그런 얘기가 있을 수 있죠. 그런데 이걸 아무도 항의를 못해요. ? 신분이 높은 집의 여자였기 때문에. 그런데 부처님께서 이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한데도 아무도 어떻게 못했어. 그래 부처님께서 어떻게 하셨냐? 아난다를 시켜가지고 그 여인의 아들, 막내아들을, 제일 귀여워하는 막내아들을 데리고 와서 정사에 숨겨놨어. 요즘 말하면 뭘했다? 유괴를. 그래 이 여인이 아들이 없어졌어. 아들을 하루 이틀 찾아도 없으니까 완전히 미쳐버렸어.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면서 온 천지를 찾아다니는 거요. 찾다가 찾다가 없어 어디까지 왔느냐?

 

부처님이 훌륭하다 하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 용한, 아들이 어디 숨었는지 아는 용한, 점쟁이라도 되는 가 싶어 왔겠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잖아 그죠? 훌륭하다 그러면 뭐든지 다 안다니까. 그래 찾아와서 내 아들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어. 그래 부처님께서 그 아들이 없을 때의 고통이 어떤지를 물어 봤어. 이래 이래 괴롭고, 이래 괴롭고, 이래 괴롭고, 잠 못 이루고, 살아도 산 게 아니고, 음식을 먹어도 맛도 없고, 다 온갖 얘기를 하는 거요. 그래 말했어. 너만 그렇겠느냐? 다른 부모도 그렇겠느냐? 아이고 다른 부모도 그렇죠.

 

그럴 때 이미 여인은 깨쳤어. 너가 한 행동이 다른 부모에게 얼마나 가슴 아픈 짓을 하게 됐는지를. 그래서 아이를 돌려보냈어. 그럼 이것만 보면 자기 아들만 귀한 줄 안다고 되는 거요? 안되겠죠. 내 아들이 귀하듯이 세상아들이 다 귀한 줄을 알아야 된다. 이것만 또 잘못보고 아이고~ 부처님이 애기를 유괴했다. 이렇게 보거나. 자기 아들만 귀한 줄 알면 안 된다. 이렇게 단편적으로 보면 안 된다. 자기 아들 귀한 줄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자기 아들이 귀한 줄을 깨우쳐주고, 자기 아들 귀한 줄만 아는 사람은 남의 아들도 귀한 줄을 깨우쳐주고.

 

그런데 승만부인같은 사람은 이런 것들을 뛰어넘어서, 여인인데도, 이런 가정사 문제는 거기에 문답에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와. 전부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얘기. 그 다음에 진리가 뭐냐? 깨달음이 뭐냐? 정토세계를 어떻게 이루냐? 이런 얘기만 나오지. 그 부인은 아예 이미 그런 생각을 하고 살지. 무슨 마누라니, 남편이니, 살림이니, 이런 얘기는 아예 등장도 안하는 여자란 말이오. 그런 여인보고 부처님이 아이고 여자야. 집에 가서 애기나 봐라. 이렇게 말하나? 아니다.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그 여인보고 부처님께서 뭐라 그랬냐? 중생이 따로 없다. 이래 말한다.

 

이미 남을 위해서 한량없이 베푸는 그 여인을 두고 부처님께서는 그래봐야 아무런 공덕이 없다. 이래 말한다. 베풀지 말라는 얘기에요? 아니죠. 거기는 더 높은 세계로 인도하신다. 그러니까 중생의 근기 따라 법을 설하는 거요. 그런데 이걸 도식적으로 해석을 해서 되겠어요? 안 돼. 그러니 여러분들이 그걸 보고 오늘 시대에도 아직도 여자는 요래야 된다고 가르치는 분들도 문제고. 고것만 보고 고렇게 가르치니 또 반발이 생기겠죠. 아이고~ 그러니 부처님은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남존여비사상을 갖고 계시는 분이구나. 또 이렇게 비판이 제게 된다.

 

그렇게 보면 안 된다. 부처님은 인연을 따라서 법을 설하신다. 여자는 이런 길을 가야된다고 정해진 길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 빨간 신호등에 가라 그럴까? 가지마라 그럴까? 가라? 가지마라? . 일상적으로 가지마라 그러겠지. 그죠? 그러나 사람이 교통사고 나서 다쳐서 숨이 넘어갈 즘 지경일 때는 빨강불이니까 안가야 될까? 가야지. 그러면 교통딱지를 나중에 찾아와서 붙이면, 사진 찍히고 와서 붙이면, 나는 사람 살린다고 그랬으니까. 왜 내가 벌금을 물어야 되? 이렇게 항변할까? 벌금 낼까? 그냥 벌금 내죠.

 

~ 그러면 대강 이해하시겠어요?

須菩提 汝勿謂 如來作是念 我當有所說法 莫作是念 何以故 若人 言 如來有所說法 則爲謗佛 不能解我所說故(수보리 여물위 여래작시념 아당유소설법 막작시념 하이고 약인언 여래유소설법 즉위방불 불능해아소설고). 수보리야. 너는 이러지 마라. 여래가 이런 생각을 한다고 생각하지마라. 어떤 생각? 내가 마땅히 법을 설한바 있다. 부처님께서 내가 법을 설한바 있다 라고 생각한다고 하지마라. 막작시념. 이런 생각을 하지 마라. 어찌한 까닭이냐? 만약에 어떤 사람이 말하되 여래가 법을 설한바 있다 라고 하면 곧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 된다. 부처님의 설하신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이니라.

 

須菩提 說法者 無法可說 是名說法 수보리야, 설법이라 하는 것은, 법을 설한다라고 하는 것은, 가히 설할 법이 없다. 가히 설할 법이 없는 것이어서 그 이름이 설법이다. 법을 설한다 말할 뿐 이다.

爾時 이 때에 이 말이오. 즉 이런 법문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 말하는 거요.

慧命須菩提白佛言 이때 혜명은 다른 뜻이 아니에요. 수보리의 한자식 이름이에요. 그냥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되

世尊 頗有衆生 於未來世 세존이시여. 어떤 중생이 있어서 저 미래세에

聞說是法 生信心不 이 법 설함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겠습니까? 이런 말을 믿겠느냐? 미래의 중생이. 이 기막힌 소식을 믿을 수 있겠느냐?

 

佛言 須菩提 彼非衆生 非不衆生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이리 말해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 되. 수보리야 저 중생도 아니고, 중생 아닌것도 아니느리라. 네가 자꾸 중생중생하는데 너만 똑똑한 줄 알고 미래 중생중생하는데 사실은 중생도 아니고 중생 아닌 것도 아니다. 네가 중생 하니 중생이 아니다 하고, 중생이 아니다 하니 그럼 설할 것도 없네요. 이러니까 중생이다 이건 무슨 말이오? 중생이라 할 것도 없고 중생 아닌 것도 없다 라는 말은 공하다 이 말이오. 아시겠어요? 그건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 동산도 아니지만 동산 아니라 할 것도 없죠. 중생도 아니고 중생아닌것도 아니다. 한 생각 어리석게 내면 뭐라고 부르고? 중생이라 부르고, 그 사로잡힘에서 탁 놔버리면 중생아니라고 부른다. 보살이라고 부른다.

 

중생이 따로있고 보살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한 생각 사로잡히게 되면 중생이라 이름하고, 내려놓으면 보살이라 이름 하지. 중생이니 보살이니 따로 있는게 아니다. 중생도 아니고 중생아닌 것도 아니다.

何以故 어찌한 까닭이냐

須菩提 衆生衆生者 수보리야, 중생 중생하지만

如來說非衆生 是名衆生 여래가 말씀하시되, 중생이라 할 것이 없음으로 중생이라 이름 한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너무 나는 중생이다. 이렇게 생각해도 안 되고, 그래서 물러서는 마음을 내도 안 되고. 나는 부처다 이렇게 해서 교만해도 안 된다. 늘 겸손해야 된다. 내가 아직도 어리석고 아직도 아는 것이 적다. 이렇게 겸손해야 되. 아시겠어요? 그러나 나는 부처님의 제자고, 나는 본래 부처다 하는데서 당당해야 되. 무슨 물질에, 돈에, 권력에, 지식에, 학벌에, 남자 여자에, 피부빛깔에, 늙고 젊고에, 그런데 집착해 가지고 기죽어서는 안된다. 당당해야 된다. 이 말이오. 아시겠어요? 늘 천하 어디를 가도 당당해야 된다. 눈곱만큼도 기죽을게 없어.

 

설령 내가 정신대에 끌려가서 수백, 수천 남자가 내 몸을 스쳐 지나갔다 하더라도 나는 부끄러울 게 있어요? 없어? 없어. 내 몸은 일점일획도 더럽힐 수가 없다. 이렇게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는 이렇게 당당해야 된다. 그렇게 당당해야 되요. 뭐 요즘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큰 집을 작은 집으로 옮기고, 작은 집에서 전세로 옮기고, 전세에서 월세로 옮기고, 뭐 월세에서 남의 집으로 흩어져 이사를 갔다 해서 기죽을 필요가 없다. 이 말이오. 쌀밥 먹다 보리밥 먹는다 해서 기죽을 필요 없어. 영향가가 더 좋아. 아시겠어요?

 

그러니 어떤 경우에도 기죽을 필요가 없어. 옛날 스님들은 왜? 권력에 기가 죽지 않았냐? 왕으로부터 얻을게 없기 때문에. 얻으려면 가서 기가 죽어야 되죠. 그죠? 솔잎도 안 먹고 사는데. 너한테 내가 얻을 게 뭐가 있어? 그러니까 기죽을 아무 이유가 없는 거요. 지난번 시간에도 얘기했지만은 그리스의 철학자는 조그마한 통속에서 그냥 사는데, 알렉산더 아니라 저그 할아버지가 와도 기죽을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 아무 필요가 없는데. 얻을 게 없는데. 하느님이 와도 굽실댈게 있어요? 없어요? 없어. ~ 얻을게 있어야 굽실대지. 굳이 뭘 해주겠다니까 다만 어떻게 해라? 햇빛만 좀 가리지 마라. 이거야. 왜 남 앞에서 햇빛가리냐 이거야. 뭐 가려도 그만이지만은 네가 굳이 해 줄게 있다니, 해 줄게 있다면, 그거나 해줄게 있다. 이 말이오.

 

이걸 이 사람을 어떻게 하겠어. 천하장사라도 이 사람에게 어떻게 해 볼 수 없잖아요. 이렇게 당당해라. 이 말이오. 당당해라. 넘어지면 일어나서 아이고 돌부리에 걸렸구나. 다음부터 조심해야지. 사업에 딱 망하면 어떻게 한다? 다시 일어나야 되겠죠. 한 번 망해봤으니 이제는 조심해서 안 망할 가능성이 있으니, 공부 값 좀 들었죠. 이 세상에 배우는데 학습비가 듭니까? 안 듭니까? 들어. 공부 값이 요번엔 좀 과하게 들었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조심해서 하면 되죠.

 

서울에서 부산 가는데 비행기타고 가면 제일 빨리 가는 줄 알지만은 비행기 값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되? 호주머니에 돈이 만원밖에 없으면. 어디 가서 공공 근로하는데 가서 하루 종일 일해서 벌어서, 사 만원 주고 비행기 타고 가는 게 빨리 가? 그냥 3등 열차타고 가는 게 빨리 가? 3등 열차타고 가는 게 빨리 간단 말이오. 인연을 따라서 길이 있는 거지. 어떤 길이 더 좋고 어떤 길이 더 나쁜 게 아니란 말이오. 그러니 돈이 있다면 어떤 일을 할 수 있지만, 있다면 이건 얘기할 필요가 없어. 있다면 조건 붙는 인생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거요. 복권만 당첨 된다면 내 너한테 오천만원 주겠다. 할 수 있어요? 없어요? 할 수 있어. 인천에 배만 들어온다면.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이오. 그건 누가 못해요.

 

어려워요? . 내일 누군가가 나한테 1억 준다면 내 당신한테 오천만원 주겠소. 이러말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어떤 거사님이 나한테 이렇게 물어요. 스님 저 불전함에 돈 내면 정말 복이 옵니까? 이래. 정말 옵니까? 정말 오면 내 내겠소. 그래. 그래서 아이고 그럴 바에야 나도 내겠소. 이래. 아이 거기 만원 넣으면 이만 원 나온다. 그러면 뭐 하러 읍내에 가서 저축하겠어? 안 그래요? 거기 내지. 그러니까 조건 붙은 거란 말이오. 여러분들 늘 말해요. 그냥 하면 되는데, 늘 이래. 그러면 도가 깨달아 집니까? 이래. 그러면 이 말이오. 조건이 없어야 도를 깨쳐요. 조건 붙는 거, 조건을 버려야 깨달음이 얻어진다. 그런데 이 조건 붙이는 습관을 도 닦는데 와서도 그러면 또 이래요.

 

뭐 어떻게 수행하면 됩니까? 해서 이렇게, 이렇게 하라. 그러면 남편이 술 안 먹습니까? 또 이래 나와, 그러면 애가 좋아집니까이래. 다 누굴 바꾸겠다? 상대를 바꾸겠다. 세상을 바꾸겠다 이거죠? 다 보살이죠? 세상을 바꾸겠다니까. 그래요? 안 그래요? 그러지. 그래 다 이래 보살이라고 붙여주잖아요. 오직 자기는 바꿀게 없고 이 세상을 바꾸겠다. 이런 생각을 하니. 아니다. 자기가 바뀌어야 되요.

 

그러니 우리는 일체중생을 구제하라 하면 또 일체중생을 구제하라 하는 게 자기 속에 상을 깨뜨리는 게 바로 뭐다? 일체 중생을 구제하는 거다. 일체 중생의 시비를 안거는 게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거란 말이오. 그런데도 자기 또 잘났다고. 아이고 우리 남편이 이 말 알아들을까? 아이고 저거 언제 구하지? 또 이런 생각해. 자기상을 버려버리면 바로 일체중생이 그대로 부처인줄을 알게 된다.

(01:18:00)

 

22.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 23.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_법륜스님

 

須菩提 白佛言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되

世尊 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無所得耶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함은 얻은바가 없습니까? 이 말이오.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는데 사실은 얻은 게 없습니까? 얻은바가 없는 것입니까? 아무것도 얻은바가 없는 것입니까?

佛言 如是如是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그렇고 그러하다. 수보리가 이제 제대로, 묻지도 않는데 대답을 제대로 했죠. 그렇고 그러하다. 얼마나 부처님이 기뻤으면 그렇고 그러하다. 이렇게 했겠어.

 

須菩提 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 내가 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乃至無有少法可得 작은 법도 얻은바가 없을세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그 이름이 뭐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여래가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은 사실은 얻은 법이 없습니까? 하니까 그렇고 그러하다 수보리야. 만약에 내가 최상의 깨달음을 구할 때 눈곱만큼이라도 어떤 법을 얻었다 한다면 그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니다. 그런 것을 얻은바 없기에 그 이름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느리라,

 

그러니까 한 법도 얻을 바가 없다. 이것을 반야심경에서는 뭐라 그래요? 무지역무득. 이러죠? 깨달음도 없고, 깨달음을 얻었다 할 것도 없다. 법이라 할 것도 없고 법을 얻었다 할 것도 없다. 이무소득고. 얻을 바 없는 까닭으로, 한 법도, 그 어떤 것도 얻을 바 없어야 되. 바라는 게 없어야 되. 구하는 게 없어야 된다 이거야. 상을 짓지 말아야 되. 그래서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이다. 가히 얻을 것이 없다. 가히 얻을 법이 없다. 이 말이오.

 

復次須菩提 是法平等 다시 다음에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이 법은 평등하다 이거야. 차별이 없다 이 말이죠.

無有高下 높고 낮음이 없다. 이 법은 평등해서 높고 낮음이 없어. 일체 차별이 없다 이거야. 그래서 뭐라고 한다?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그 이름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느니라. 최상의 깨달음이라고 한다.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아도 없고, 나라 할 것도 없고, 사람이라 할 것도 없고, 중생이라 할 것도 없고, 존재라고 할 것도 없는 일체의 상이 없는

修一切善法 이런 상태로 뭐다? 착한 법을 닦으면

則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최상의 깨달음을 곧, 최상의 깨달음을 얻느니라. 이런 얘기요. 아무런 분별도 없이 그렇게 행했을 때 이름하여 뭐라 한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이런 얘기요.

須菩提 所言善法者 수보리야, 선법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것도 선법이다. 착한 법을 닦는다 하니까 착한 법이 또 별도로 있다고 생각하죠? 아니다.

如來說卽非善法 是名善法 착한 법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착한 법이라 할 것이 없을세 그 이름 이 착한 법이다. 그러니까 어떤 상도 지으면 안 된다. 지금 이런 얘기요. 이래서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이다. 그 마음을 깨끗이 하여 선을 행한다.

 

이런데,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게 더럽고 깨끗함의 깨끗함입니까? 아니죠. 그 마음에 어떤 상도 짓지 않는 것을 뭐라고 한다? 깨끗한 마음, 청정한 마음이라 이름하고. 그런 아무런 모양과 형상이 없는, 아무런 기대도, 바람도 없는 그런 마음으로 일체중생을 위하여 마음을 내고 행하라. 이것이 바로 선법을 행하는 거다. 그러니까 부처는 중생을 이렇게 교화하고 우리는 타인을 이렇게 도와줘야 한다. 이런 얘기요. 여러분들이 자식에게나 부모에게나 남편에게나 아내에게. 이렇게 행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늘 요구조건이 많다. 뭔가를 얻으려고 한다. 그러니까 절에 와서도 우리는 이렇죠? 여러분들은 절에 올 때 조건이 붙어 있고, 상을 짓고, 뭔가를 얻으려 하고, 스님 또한 어때요? 신도들을 만나면 저 보살 돈이 좀 있을까? 없을까? 쓸모가 있을까? 없을까? 절에 와서 일 좀 할까? 안할까? 아이고 또 골치께나 아프겠다. 뭐 다 이렇게 자기에게 유리하게 뭔가 얻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다 바라본다. 이런 거를 잘 보는 것을 뭐라 그래요? 보는 눈이 좋다. 이런단 말이오. 아따~ 그 스님 참 잘 맞췄더라. 잘 보더라. 이래. 그래 그런 눈으로 도인을 찾으니 그게 도가 아니죠.

그러니 진짜 도인은 중생이 보기에 바보 같죠? 내 손해나는 짓이나 하고, 헛 다리나 짚는 거 같고. 아이고~ 저 중은 저것도 모르나? 사기꾼인 걸 그것도 모르나? 나도 알겠는데. 중이 되 왜 그것도 모르나? 이렇게 자꾸 생각한단 말이오.

 

옛날에 어떤 노스님이 절에 이렇게 조실스님인데. 절에 땅이 많아 가지고 절에 식구들이 다 먹고 일 년에 한 백석쯤 남아요. 쌀이. 백가마니가 남는다 이 말이오. 그런데 그해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많이 굶주려요. 양식이 없으니까 쌀값은 오르고 논 값은 떨어져. 그래 쌀 한가마니하고 논 한 마직이하고 맞바꿔져요. 이런 거 흉년에 많이 썼습니다.

이거 해방 된 후에도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일제시대 때 이런 경우가 있었고. 그러면 그 백가마니를 사람들을 주면 논 몇 마지기를 얻을 수 있어요? 백마지기를 얻을 수 있죠? 그런데 이 스님이 절 밑에 하천부지를, 이건 실제로 있었던 일이오. 경작을 해요. 둑을 막고 돌을 캐내고. 일당을 하루에 쌀을 반 되를 주든지 이렇게 해서 공사를 벌렸어. 그래 그 공사를 다 해서 치니까 논이 무려 열 마지기나 나왔어. 그런데 임금으로 쌀이 백가마니가 다 없어졌어. 절에 있는 젊은 스님이 와~ 바보 같다 이거지. 요즘 말하면 경제성이 없는 짓을 했죠? 그죠?

 

아니 백마지기 좋은 논을 살 수 있는데 그 하천 부지를 쳐서 겨우 제대로 되지도 않는 논, 열 마지기를 만들었으니 손실이다. 이거야. 그때까지만 해도 큰 문제가 없었어. 그런데 어떤 마을 사람이 와서 그 열 마지기 팔아라. 이랬어. 그러니까 어우~ 그러지. 시세가 그러니까 시세대로 팔았어. 그래서 쌀을 열가마니를 받고 팔아버렸단 말이오. 이러니까 난리가 난거요. 그래 쌀 백 가마니 갖고 논 열가마니 논 칠 때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이렇게 딱 바꾸고 나니까 쌀이 백가마니에서 몇 가마니로? 열가마니 되고 없어졌으니, 확실히 구십 가마니 손해가 났단 말이오. 그래서 난리를 피웠단 말이오.

 

그러니까 노스님이 조실스님이 너 왜 그리 야단이냐? 논은 논대로 있고, 쌀은 열가마니 생기지 않았느냐? 여기서 니 논이다, 내 논이다 하는 생각이 없으니 논은 논대로 있고 쌀은 열가마니 생겼다 이거야. 그러니 이 불법의 도리는 그러니까 우리들의 사랑분별로 계산할 것은 아니죠.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사량 분별로만 계산을 한다 이거야. 그래서 부처님의 그 우리 불교 땅 중에서 말이오. 절 앞에 있는 땅들, 이런 것들 나중에 토지개혁 할 때 그 밑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 다 절 땅 붙여먹다 차지해 버린 경우 많죠? 요즘 이거 재판해서 찾는다고 굉장한데. 그런 거 굳이 할 필요 있어요? 어떻게 생각할까?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차이가 있단 말이오. 그러니까 삼보정진을 보시금 들어오는 것만 니꺼다, 내꺼다 해서 놀음판에 가서 해쳐버리는 건 괜찮을까? 그런 건 잘해요. 다르다 이 말이오. 아껴 쓸 것과 아껴 쓰는 것과, 자기가 아껴 쓰고 검소하게 사는 것과 일체중생이 나누어 가질 것을 베푸는 것과는 성격이 달라. 그런데 이걸 거꾸로 한단 말이오. 지금.

 

옛날에 저기 부산에 계시는 그 이름을 대면 여러분이 잘 아시는 노스님인데. 이름을 거명 안하는 거는 사람들의 또 시빗거리가 되니 그래요.

그래 그 부산에 있는 저 부잣집 신도가 와서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하면서 제를 잘 49재를 지내달라는 거요. 잘 지내달라는 거요. 그러니까 몇 번 좀 잘 지내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어요. 그래 재비를 얼마나 냈냐? 쌀을 백석을 냈어. 백가마니 냈어요. 옛날에 백가마니면 굉장하죠? 요즘 말하면 한 일억 냈다고 봐야 될 거요. 요즘 돈으로 해도 한 이천만원 넘잖아 그죠? 한 이천만원 되는데, 그 당시는 굉장할 때란 말이오. 그렇게 재비를 내면서 재를 잘 지내주십시오. 하고 큰 그님께 몇 번이나 부탁을 했단 말이오.

 

그냥 재를 지내달라면 큰스님이 관여를 안했을 텐데. 잘 지내 달라고 몇 번을 부탁을 했어요. 그래서 큰 스님이 알았다고. 그럼 내가 잘 지내주겠다고. 보통 재 지내는 건 주지가 알아서 지내는데. 큰 스님께 자꾸 와서 부탁을 해서 큰스님이 꼭 좀 잘 지내 달라니까 잘 지내 주겠다고. 요즘처럼 7, 7 매일 재 안 지냅니다. 옛날에는. 주일마다 지내는 게 아니고 바로 언제 지냅니까? 49재 때, 딱 한 번 지내는 거거든요. 이거 교화하려고 집에서 7, 7지내고, 이렇게 하면 되요. 그래서 우리 절에도 초재하고 막재만 스님이 참여하고 중간은 신도들 끼리 하죠. 그게 뭐 법에 어긋나는가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 49재 때, 49일 째 재를 지내는 거거든요.

 

그래 이제 스님이 그 쌀 100가마니 돈을 받아가지고는 그 날로 부터는 다니시면서 돈을 잘 쓰시는 거요. 거지가 와서 달라면 턱~ 줘버리고, 어려운 사람이 와서 달라면 줘 버리고, 다 줘버려. 그래 주지가 간이 조마조마한 거요. 저 돈을 받아가지고 뭣 좀 써야 되겠는데 돈을 자꾸 줘버리니까 말은 못하고. 스승이니까. 그래도 적어도 한 천만 원이나, 요즘 말하면 그때 돈으로 한 돈백만원 남겨놔야 될 거 아니오. 재물을 사야 되니까. 그런데 49일이 내일 모래가 다가왔는데도 다 써버리는 거요. 그래 간이 타고.

 

스님 재 어떻게 준비해야 안 됩니까? 요번 재는 내가 지내기로 했으니까 넌 신경 쓰지 마라 이러는 거요. 제자가 나한테 와서 부탁을 했다 이 거요. 그러 신경 쓰지 마라 이거요. 그러고 나서는 돈을 조금, 요즘 말하면 몇 천원 남겨 시장에 가서는 할머니들이 파는데 있잖아. 그죠? 가게 말고, 놔 놓고 파는데 가서 콩나물 한 500원어치 사고, 저쪽에 가서 나물 하나 사고, 요렇게 너덧 가지를 사 오셔서, 손수 사오셔 가지고서는. 손수 부엌에서 따따다따닥~ 볶아가지고는 딱해서 올려놓고, 아침 예불 끝난 후에 죽비 세 번치고는 참선 조금 하시다가 그냥 끝냈단 말이오. 그러니까 사람들은 재를 지냈다고 생각해? 안 지냈다고 생각해? 아무도 안 지냈다고 생각한단 말이오.

 

그날 아침에 제자하고 확~ 왔단 말이오. 49, 부잣집에 49재 지내니까 사람들이 몇 백 명이 몰려왔단 말이오. 주지는 큰스님이 니는 말하지 말라니까. 입도 벙긋 못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와서 어떻게 됐냐 하니까. 큰스님한테 큰스님이 지내신다 하고 갔더니. 말씀하시는 얘기가 어~ 내가 아침에 재는 잘 지냈느니라. 저 부엌에 가면 먹다가 남은 반찬 있으니 음복은 해야 되죠. 그러니까 그거나 좀 한 젓가락씩 먹고 가거라. 이러는 거요.

그래서 주지한테 물어보니 아무것도 안했다는 거요. 그래 화가 나서 난리인거요. 그러니까 신심이 있는 거는 여자들이 신심이 있어서 절에 열심히 다녔는데. 남자들은 사실 절에 나오지도 안했는데 49재 지내러 왔는데. 절에 다니는 보살은 난리가 난거요. 이럴 수가 있냐 이거야. 재비도 한두 푼 준 것도 아니고, 쌀을 한말두말 주고 재 지내는 시대에 100가마나 줬으니까. 그래 난리니. 그래 주지스님부터 큰스님 어떻게 했나 가만히 듣는데. 보살은 난리인데. 그래 거사가 가만히 듣더니 큰 스님 하신 게 옳다 이거야.

 

그렇게 해서 가족을 말려 데려가면서 다시 돈을 내서 가족이 섭섭해 하니까 쌀을 몇 가마니 내서 재를 차렸다. 재를 한 번 더 지냈다는 거요. 잘 지냈어? 못 지냈어? . 배고픈 일체중생에게 다 나눠줬다 이 말이오. 특별히 잘 지내 달라고 자꾸 부탁을 하니 어때요? 이렇게 특별히 잘 최고의 공덕이 되도록 지내줬다. 그러니까 아예 부탁을 하지 말든지. 대강 지내 달라고 주지한테 맡겼으면 큰 스님이 관여를 했겠어? 안했겠어? 안했지. 찾아와서 절을 하면서 몇 번이나 잘 지내 달라고 부탁을 해서 이렇게 잘 지냈다 이 말이오.

 

왜 잘 지냈는지 몰라? 아직도? 우하하하. 그래서 보통 보면요. 이게 절에 다니기는 여자들이 열심히 다니는데. 이래 얘기하면 또 여자 차별한다. 그래. 머리 돌아가는 거 보면 늘 모지래. 왜 그럴까? 상에 집착을 한다 이거야. 늘 형상을 갖고 자기 소견머리로 자꾸 뭘 본다 이거야. 그 소견머리를 탁 놔버려야 되는데. 그렇게 했을 때는 정말 신심 있는 불자라면 자기 스승이 그렇게 했다면 큰 스님이 그렇게 했다면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을 한 번 해 봐야 되? 안 해봐야 돼? 해 봐야 되.

 

그런데도 자기 소견머리로 길길이 뛴단 말이오. 왜 그랬을까? 왜 저런 말씀을 하셨을까? 왜 저렇게 하셨을까? 상상을 초월하잖아. 일반인이 생각할 때. 왜 그러셨을까를 생각해 봐야 되. 그리고 이해가 안 되면 물어봐야지. 그게 뭘 의미하는거냐? 그런데 그냥 허튼짓 했다 이런단 말이오. 허튼짓 했다. 한 생각을 내는 순간 어떻게 됩니까? 정말 허튼짓이 되죠. ? 자기 스승을 허튼짓했다고 규정을 해버리면 자기가 뭐가 돼? 스승은 그렇다 치고. 그 절에 다닐 필요가 없잖아.

 

자기가 이제까지 20, 30년 믿고 살은 인생이 다 뭐가 돼요? 다 쓸데없는 인생이잖아. 그죠? 속아 살은 게 되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자기 생각에 빠지면 그게 자업자득이라는 게 그런 얘기에요. 한 생각 잘못 일으키면 그 괴로움의 과보가 누구에게 온다? 자기에게 오는 거요. 이렇게 법문을 해 놔야 나도 재를 안지내 줘도 큰소리를 칠 수가 있지. ~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