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금강경(법륜스님)

15 금강경 강의 제24. 복지무비분 제25. 화무소화분 제26. 법신비상분 제27. 무단무멸분 제28. 불수불탐분

seongsoo 2014. 10. 6. 08:13

 

 

24. 복지무비분(福智無比分)_법륜스님

 

buddhastudy.egloos.com/3694375

 

안녕하세요. 121페이지 펴 주십시오. 오늘 금강경 16번째 강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24 福智無比分 복과 지혜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다. 복지무비분입니다. 부처님께서 어떻게 하면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느냐라는 수보리의 질문에 대해서 생명가진 모든 것을 사랑하고, 생명가진 모든 것들을 구제하려고 하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즉 일체중생을 구제하라. 이렇게 발심을 해서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삶을 산다하더라도 내가 중생을 구제한다. 이런 생각을 내지마라.

 

왜냐하면 내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면 바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사로잡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보살이라 할 수가 없다. 내가 중생을 구제한다. 하는 이런 생각만 내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깨달음을 얻었다. 해도 어때요? 그것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사로잡힌 게 된다. 이것이 깨달음이다라고 하는 그 어떤 대상도 집착해서는 안 되고, 내가 깨달음을 얻었다 하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도 아니 된다. 이거야. 더 나아가서는 보살이 중생을 구제한다할 때 중생이라고 하는 어떤 상을 지어서도 안 되고, 보살이 정토를 장엄한다 하면서 장엄에 사로잡혀도 아니 된다.

 

그러니까 어떤 상도 지어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에도 내가 하는 생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이래서 구경무아분에서 아상을 깨뜨렸습니다. 그러자 수보리가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가지가지 눈으로 중생의 온갖 고통을 다 보시는데. 그 부처님의 가지고 계시는 가지가지 눈은 어떻게 해서 얻어졌는가. 이렇게 했을 때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육안이다, 천안이다, 혜안이다, 법안이다, 불안이다 하는 그 다섯 가지의 눈, 일체를 깨닫는 그 안목마저도 따로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즉 한 몸에 우리가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코가 있고, 혀가 있고, 손이 달렸듯이 바로 붓다라는 하나의 인격에 여러 작용에 불과한 거다. 그래서 바로 한 몸이다. 부처와 중생도 한 몸이고, 번뇌와 보리도 둘이 아니라 하나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도 주관과 객관, 주와 객을 둘로 나누면 두 가지 모양을 지으면 이것은 바로 상이 된다.

이래서 일체, 한 몸으로 보고 같은 것으로 본다. 한 몸으로 같이 본다. 이게 일체동관분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나와 너를 나누어서 내가 너를 구제하는 게 아니고. 나와 너가 한 몸임을 알고 연기된 하나임을 알고, 발에 가시가 박혔을 때 그것을 알아차리고 머리가 알아차리고 입이 아야~ 하고 눈이 가서 살피고, 손이 빼주는 거와 같이. 이렇게 중생을 교화한다. 여기는 교화한다는 생각도 없고, 구제한다는 생각도 없고, 바라는 마음도 없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없다. 바로 자기 문제로 스스로 행한다. 이렇게 중생을 온통 교화를 하신다. 그러면 아무것도 지은바가 없다면, 즉 예토도 없고, 예토를 정토로 가꿀 것도 없고, 중생이라 할 것도 없어서 중생을 구제할 것도 없다면 어떻게 복을 지어서 부처님은 저렇게 원만한 구족상을 갖고 계시는가?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너는 여래를 어떤 상으로 생각하느냐? 눈에 보이는 어떤 빛깔로, 어떤 모양으로, 어떤 소리로 여래라고 하느냐? 이렇게 해서 수보리가 또 잘못생각 한 줄을 안다. 그러니까 어떤 몸 모양으로, 어떤 형상으로 부처를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상을 떠나고 색을 떠나야 여래를 본다. 여래가 형상이 아니라면 누가 법을 설하느냐? 그러니까 설할 법이 있느냐? 이거야. 내가 언제 법을 설했느냐? 이런 식으로 딱 되묻죠.

 

거기에서 우리는 법을 설했다 하는 또 어떤 생각에 빠지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팔만사천법문을 설하셨지만은 설한 바가 없다. 왜 그러냐? 그것은 많은 물체가 거울에 와서 스스로 비추듯이, 서울 가는 길이 그 사람 서있는 위치 따라 방향이 정해지듯이, 물으면 대답이 나오지만은 부처님이 무엇인가를 정해서 어떤 상을 그려놓거나 답을 가지고 계시지 아니한다. 중생의 근기 따라 이렇게 설해질 뿐이지. 어떤, 이것이 법이다 할 어떤 설할 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얘기요. 그것은 설한 법에도 상을 지어서는 안 된다. 실체가 없다. 이런 것을 말합니다.

 

중생이다 하지만은 중생이랄 것도 없다. 다만 그 이름이 중생이다. 한 생각 어리석게 내면 이름하여 중생이라 하고, 어리석은 생각 내려놓으면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하는 거지. 여기 중생이 있고, 여기 부처가 있고 이렇게 중생과 부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똑같은 산을 이쪽에서는 동산이라 부르고 저쪽에서는 서산이라고 부르지. 동산이 따로 있고 서산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시니까 가히 설할 법이 없다 하니까, 설할 것도 없다 하니까, 수보리가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법을 얻었느냐 하니까 부처님께서 다시 법이라 할 것도 없고 법을 얻었다 할 것도 없다. 이래서 무법가득분이 설해지게 됩니다. 이렇게 깨달았다 하는 생각도 없이, 이것이 법이다 할 것도 없고, 이것이 중생이다 할 것도 없는, 그런 아무런 형상지어지지 않고, 모양 지어지지 않는 그런 마음을 깨끗한 마음이다. 이렇게 말한다 이거야.

 

더러운 게 있고 깨끗한 게 있고, 더러운 것을 버리고 깨끗한 것을 취한 그런 마음을 깨끗한 마음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분별을 일으킨 마음이니까. 그것을 우리가 다른 말로 더러운 마음이다. 이름 한다. 이거야. 여기서 깨끗한 마음이라는 것은 더럽고 깨끗한 것을 나누어져 깨끗한 마음을 말하는 게 아니고, 본래 더럽고 깨끗한 것이 없는 줄을 알아서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그 마음을 이름 하여 뭐라고 한다? 정심이다. 이렇게 말을 한다.

 

선행이 있고 악행이 있고, 이래서 악행을 버리고 선행을 취하는 그런 선행을 불교에서 여기서 말하는 선행이라고 말하지 않고. 선도 없고 악도 없고,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다만 필요에 의해서 쓰이는 흘러가는 물처럼. 그것을 여기서는 이름하여 뭐라고 한다? 선행이라고 한다. 이 말이오. 그래서 깨끗한 마음으로 선을 행한다. 이렇게 돼 있단 말이오.

 

~ 그래서 이제 그렇다면 아무런 한 바도 없이 마음에도 집착도 없고 행에도 걸림이 없다면 어떻게 복을 짓느냐? 이런 얘기요. 어떻게 복을 짓느냐?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수보리야, 너는 어떤 사람이 생각을 일으켜가지고 뭔가 형상에 집착해서 바라는 마음을 갖고 행동을 해서 얻어지는 그런 유위의 행과, 그로인해서 지어지는 유루복. 이것만 생각하느냐 이거야. 아무런 모양 없는 행 속에서 모양 없이 지어지는 그 복, 무위의 행에 따른 무루의 복은 참으로 한량이 없다.

(11:10)

 

그래서 이 깨달음과 지혜는 깨달음의 지혜와 이 복은 그 어떤 것하고도 비교할 수가 없다. 이것이 24분에서 지금 말하고자 하는 福智無比分복지무비분이다.

須菩提 若三千大千世界中 수보리야, 만약에 삼천 대천 세계 가운데

所有諸須彌山王如是等七寶聚 있는바 모든 수미산을 이와 같이 일곱 가지 보배로

有人 持用布施 사람이 보시를 행하더라도. 이랬어요. 쉽게 번역을 하면 세계, 세계마다 뭐가 있습니까? 그 세계의 중심에 아주 큰 수미산이 있죠? 수미산은 어마어마하게 큰 산이오. 그래서 산중에 산이다 해서 산의 왕이다.

 

그런데 삼천대천세계라 했으니까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수미산이니까 수미산이 한 개 있어요? 여러 개 있어요? 여러 개 있죠. 계산을 한다면 삼천대천세계라는 것은 세계가 천개, 천개가 다시 천개, 천개가 다시 천개. 이렇게 되죠. 그러니까 천이 세 번 돼 있으니까 10억 개다. 10억 개의 세계가 삼천대천세계인데 이 10억 개의 세계에 10억 개의 수미산이 있다 이거야. 그 모든 수미산만 하게 칠보로, 일곱 가지 보배로, 그 십억 개의 수미산만한 일곱 개의 보배로 된 덩어리가 있다하면 엄청나게 크겠죠. 그것을, 그것으로 타인에게 보시를 한다. 그러니까 엄청난 값이 많은 것으로, 엄청난 값진 것으로, 그것도 양을 많게 해서, 남을 위해서 보시를 행하더라도 이것은 유상보시를 말하는 겁니다.

 

若人 以此般若波羅蜜經 乃至四句偈等 受持讀誦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 반야바라밀경이나 그 안에 있는 내지, 다는 아니더라도 생략하고. 사구게 만이라도, 사구게 등을 수지 독송하고

爲他人說於前福德 百分不及一 남을 위하여 해설해 주면 저, 저니까 앞에 복이죠? 앞에 복이 뒤에 복에 비해서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百千萬億分 乃至算數譬喩 所不能及 백천만 억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내지 아니 산수 비유로는 뭐라고 할 수가 없다. 거기에 이르게 숫자로 거기에 억 만 분의 일이다. 조분의 일이다. 이렇게 산수로 얼마다 이렇게 표현 할 수가 없다. 이 말이오.

 

이 말은 반야바라밀경을 수지 독송하는 이 공덕이 한량이 없다 이 말이죠. 반야바라밀경을 수지 독송한다는 것은 그저 금강경을 줄줄 외우면 된다는 뜻이에요? 아니다. 범소유상이 개시허망한 줄을 알아야 된다. 무릇 상이 지어진 것은 다 허망하다. 모든 것은 다 공하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그렇다 이거야.

 

~ 어떤 사람이 우리나라에도 지금 몇 분계시죠? 일제시대 때 우리 선조들이, 처녀들이 많이 일본에 끌려가서 저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나 만주나 이런데 끌려가서 정신대로 끌려가서 일본군인들에게 갖가지 성폭행을 당했다. 옛날 사람들은 한 사람에게만 그런 모욕을 겪어도 어때요? 자살을 하죠. 내 몸이 더러워졌다. 그런데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도 아니고, 열 명도 아니고, 백 명도 아니고, 훨씬 더 많이.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몇 년을 그렇게 갖가지 고통을 겪었다.

 

그 겪는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만 고통이 아니고. 그 더러워진 자기 몸을 생각하면 남에게 부끄러워 도저히 이 세상에, 하늘밑에서 살 수가 없다. 이거야. 그래서 수많은 여성들이 죽어버리거나, 자살해 버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이름도 밝히지 않고 그 나라에 귀화해서 묻혀서 살아버렸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해탈을 할 수가 있겠느냐? 그 군인들을 잡아가지고 다 죽인다 이거야. 백 명이고, 천 명이고, 다 죽인다 하면 한이 풀리겠느냐? 죽인다 하면 원한은 좀 풀리겠죠.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을 극형에 처하면 처할수록 더러워진 내 몸은 회복할 길이 없어진다.

 

? 그 사람이 나쁜 짓을 얼마나 많이 했으면 죽이기까지 하겠느냐. 얼마나 더럽혔으면 그 사람을 죽이기까지 해야 되느냐? 그런데 그것을 그런 사람을 수백 명을 죽인다고 한다면, 또는 죽이지 않고 감옥에 오래 넣어놓는다 한다면, 그 사람들의 행동이 나쁘면 나쁠수록 누구의 몸이 더욱더 더러워진 것이 됩니까? 여인의 몸이 더욱더 더러워진 것이 된다. 그렇게 나한테 수많은 고통을 주고도 뻔뻔스럽게 살아있는 것에도 또 한량없는 고통이고, 그것을 어떤 형벌을 가해도 원한은 조금 풀릴지 몰라도 더러워진 내 몸은 회복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와 같이 됐을까? 하고 전생을 탓할 수도 있고. 하나님이 나에게 징벌을 주셨나?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고. 사람들은 다 그러겠죠? 전생에 죄를 얼마나 지었으면 저런 고통을 겪겠느냐? 아이고 하나님을 안 믿다 보니까 하나님한테 벌 받다 보니 저런 고통을 겪는다. 이렇게 사람들은 말하기가 쉽다. 또 본인도 잘못하면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다.

 

또 이 한량없는 이 죄업을 녹이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보살행을 하고 얼마나 많이 불전 앞에 보시를 하고, 봉사를 해야 이 수많은 죄업이 녹겠느냐? 아마 세세생생이 해도 이것을 깨끗이 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이것을 다 더렵혀진 것을 하나하나 빨아서 그것을 깨끗이 만든다면 어쩌면 한량없는 세월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좌절하고 절망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금강경을 한 구절 읽을 때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다. 제법이 다 공한 거다. 어제 밤에 내가 꿈을 꾸는데 그 꿈속에서 10년을 내가 갖가지 고통을 겪었다. 그러다 눈을 번쩍 뜨니까 꿈이였어. 그러면 몸이 더러워졌어요? 안 더러워 졌어요? 안 더러워졌다.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라는 거는 그런 거다. 꿈과 같은 줄을 아는 거다. 눈을 떡! 뜨니까 꿈이다.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은 이 몸을 그렇게 한다고 더렵혀질 수도 없고. 또 어떻게 한다고 깨끗해 질 수도 없고. 이 몸은 그대로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닌 그대로다. 그것을 이름하여 뭐라 한다? 청정하다. 이렇게 말한다. 이 몸은 본래부터 청정하다.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제법이 공한 줄을 깨쳐버리면 여기는 전생에 업도, 내생에 대한 타령도, 하나님에 대한 타령도, 전부 순식간에 없어져 버린다. 그것이 다 꿈속에 일으킨 하나의 망념에 불과하다. 그러면 그는 어제저녁에 자면서 악몽을 꾼 거는 악몽으로서 끝나고, 그는 아침에 눈을 뜨자 어때요? 맑은 정신으로, 밝은 태양빛을 받으며 자연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가 있다. 그러나 그가 늘 꿈을 생각한다면 밝은 태양도 그를 어둡게 만들고 아름다운 자연도 지옥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니 이 제법이 공한 줄을 깨닫는 거는 그 어떤 것하고도 그 지혜와 복이 비교될 수가 없는 거다. 그래서 복과 지혜가 이 세상에 그 어떤 것하고도 비교할 수가 없다. 그래서 복지무비문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그러니 지금 우리들이 겪는 갖가지 고통이나, 갖가지 억울함, 부도가 났다. 빚을 못 갚는다. 또는 여러 가지 살아오면서 두들겨 맞았다. 고통을 겪었다. 어릴 때 어떤 일을 당했다 하는 갖가지 것들도 마찬가지다. 법이 공한 줄을 깨닫지 못했을 때는 그것이 나에게 늘 무거운 짐이 된다.

나는 돈이 없다, 학벌이 없다, 나이가 들었다, 남편이 먼저 돌아가셨다. 자식이 없다. 얼굴에 흉터가 있다, 애기를 못 낳는다, 사업하다 실패했다, 남편이 논다. 남편이 주정을 한다. 이런 것들이 나를 눈곱만큼도 더럽힐 수가 없고, 나의 가치를 눈곱만큼도 떨어뜨릴 수가 없다. 이걸 여러분들이 금강경을 독송한다는 것은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라 할 때 이것이 다 허망한 줄을 깨쳐버려야 되.

 

그러면 바로 여러분들이 바로 순결무구한 그러한 보살이 되며, 부처가 된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지금 살아가는데 일점일획도 걸릴 것이 없다. 아무것도 여러분들에게 장애가 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여러분들에게 흠이 되지 않는다. 그런 길이 여기에 열려 있으니 그 어떻게 꿈속에 헤매는 인생하고, 꿈을 깬 인생하고, 그 복이며 그 지혜를 비교 할 수가 있겠느냐?

 

그래서 여기에 때 묻었다는 것과 때를 묻지 않았다는 거, 부처와 중생이라는 것이 사실은 이래서 둘이 아니다. 여러분들이 그 몸을 그 생각을 버리고, 바꾸고, 새로 태어나서 되는 게 아니라. 지금 가진 그대로, 지금 취해진 조건 그대로 바로 해탈의 길로 나아갈 수가 있다. 여러분들이 이 밖으로 한 번 나가보세요. 여러분들에게 학벌을 따라서 태양이 비춰주는 것도 아니고, 얼굴 따라서 태양이 비추어 주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늙고 젊다 해서 따라서 비추어 주는 것도 아니고, 재물이 많고 적다고 비추어 주는 것도 아니고, 남편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비추어주는 것도 아니고, 처녀냐 결혼했냐? 에 따라서 비춰주는 것도 아니에요.

 

다 차별 없이 비춘다. 여래의 자비광명은 우리들에게 차별 없이 비춘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지금 그 망념만 없애버린다면 여러분들은 똑같이 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아름답게 살아 갈 수가 있다. 여러분들이 얼굴에 흉터가 있다 그래서, 결혼을 안했다 그래서 결혼해서 실패했다 그래서 여러분들 눈에 태양이 비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여러분들 앞에 아름다운 꽃이 피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대로 세계는 아름답게 빛나고 있습니다.

 

다만 내가 그 꿈속에 사로잡혀서 그 자기의 경험의 세계에 갇혀가지고 여러분들이 태양을 보지 못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보지 못하고, 부처를 보지 못하고, 법을 보지 못하고 그냥 눈을 감고 헤매이기 때문에 지금 인생이 이렇게 답답하고 괴롭다.

(26:50)

 

25. 화무소화분(化無所化分)_법륜스님

 

buddhastudy.egloos.com/3694379

 

須菩提 於意云何 汝等勿謂如來作是念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희 등이 여래가 이런 생각을 한다하지 마라. 여래가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하지마라. 어떤 생각?

我當度衆生 내가 마땅히 중생을 제도한다. 부처님께서 스스로 내가 일체중생을 제도한다. 이런 생각을 부처님이 하고 계신다고 너는 생각하지 마라. 부처님이 일체 중생을 구제하신다 하니까 여러분들은 아~ 부처님은 자나 깨나 그저 일체중생을 구제해야 되는데. 오늘은 이 중생 구제하고, 내일은 저 중생 구제하고. 아이고~ 이거 언제 다 구하지? 이래가지고 초조하고 불안하고 잠 못 이룬 줄 알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된다.

 

부처님은 일체중생을 구제하되 중생을 구제한다 하는 그런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다. 거울이 많은 물건을 비추되. 거울이 이 물건 비추고, 저 물건 비추고 이런다고 애쓰는 법이 없는 것과 같다. 아무런 말씀도 없이, 준비도 없이 다만 물건이 오면 비친다. 그것처럼 부처님은 중생을 그렇게 교화하시는 거예요. 내가 중생을 구제한다.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하지 마라 이거야.

 

須菩提 莫作是念 수보리야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

何以故 어찌한 까닭이냐

實無有衆生如來度者 사실은 이 말이오, 정말은 이 말이오. 중생 있어서 여래가 제도하는 게 아니다. 실로는 중생이랄 것이 없다. 이 말이오. 진짜는 중생이랄 것이 없어. 중생이라 것이 없는 거를 여래가 중생을 제도한다. 이렇게 말해. 사실은 중생이랄 것이 없어서 여래가 중생을 제도한다 하느니라.

 

혜가대사가 달마대사에게 와서 간곡하게 청했다. 스승님,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십시오. 구제를 요청했다 이거야. 그래 달마대사가 구제를 해 줬다 이 말이오. 해 주겠다 이거야. 그래? 불안한 마음을 이리 내 놔라. 내가 마땅히 그 불안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겠노라. 그러니 혜가가 자기 마음을, 불안한 마음을 내놓으려고 살펴봤다. 살펴보니까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어. 그래서 없습니다. 그랬단 말이야. 그랬더니 달마가 내 이미 네 마음을 편안하게 했도다.

 

그러면 달마대사가 혜가를 구제했다 할 수 있겠죠? 도대체 어떻게 구제했어? 달마대사가 뭐 한 일이 있어요? ? 달마대사 한 게 있어요? 혜가가 마음이 그 전에는 불안하다 편안해지기는 해졌는데 달마대사로부터 뭘 얻어서 편안해 졌어요?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단 말이오. 어떤 꿈속에서 불안해 하다가 꿈인 줄 알고 편안해 졌단 말이오. 뭐가 있는 줄 알았는데 보니 없었어. 자기는 이제까지 뭐가 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살았는데 사실은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실로는 중생이 없어서 중생이 있음이 없어서 여래가 중생을 제도했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달마는 그러면 아무것도 한 일이 없어요. 하기는 했죠. 달마도 하기는 했어요? 안했어요? 했지만은 사실은 아무것도 한 게 없어. 해가는 분명히 그전에는 괴로움이 있었죠? 그 다음에 괴로움이 없어졌죠? 어이해 괴로움이 없어졌나? 달마가 가르침을 받아서 없어졌다. 이렇게 사람들이 말하는데 무슨 가르침을 받았어? 아무것도 받은 게 없잖아요. 준 것도 없고 받은 것도 없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편안해 졌을까?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없더라. 여인이 자기 몸이 더러워졌다고 사람을 만나기 싫어하고 해를 보기를 거부하고, 방안에 움켜 앉아 있었다 이거야. 그래 니 몸이 더러워졌다고? . 어떻게 더러워졌는데? 온갖 남자가 내 몸을 이렇게 저렇게 해서 더러워졌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했는데 어떻게 몸이 더러워지느냐? 이렇게 하니까 더러워지죠. 이렇게 하니 어떻게 더러워지느냐? 한 번 따져 봐.

 

~ 내가 손이, 내 손이 당신의 몸에서 10cm 정도 떨어져 있어. ~ 지금 당신 몸이 더러워졌소? 아니오. 5cm 정도 다가갔어. 더러워졌소? 아니오. 만졌어. 더러워졌어요? . 그럼 다시 5cm 떨어져서 이제 더러워졌냐? 안 더러워졌다. 그럼 다시 2cm까지 갔어. 더러워졌어요? 안 더러워졌어. ~ 탁 터치했다. 더러워졌어요? . 그럼 다시 떼. 더러워졌어? 안 더러워졌습니다. 터치 딱 합니다. 더러워졌어? . 그럼 떼. 안 더러워졌어. 그럼 당신 몸은 내 손을 대면 더러워지고, 떼면 안 더러워지고, 대면 더러워지고, 떼면 안 더러워지고 이런 거요? 그건 아닙니다. 어떻게 더러워졌는데?

 

대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데? 더러워졌다는 한 생각이 일어났죠. 그 상을 평생 움켜쥐고 있는 거죠. 그게 바로 꿈이라 이 말이오. 그걸 탁 깨치면 어때요? ~ 더러워졌어요? 안 더러워졌습니다. 그럼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서 이런다고 더러워졌나? 요기 팔은 만지면 안 더러워지고 목은 만지면 더러워지냐? 이렇게 하다가 보면. 아하~ 이 더러워졌다는 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내가 평생을 꿈속에서 살았구나. 그렇게 탁 깨달으면 어때요? 이제가지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이 다 없어지죠. 그럼 뭘 해줬어? 내가. 비누를 갖고 닦아 줬어? 하이타이를 가지고 문질러 줬어요? 아무것도 한 게 없단 말이오. 돈을 준 것도 아니고. 뭘 했어요? 거기서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단 말이오.

 

다만 자기가 스스로 꿈속에서 깨어났단 말이오. 그럴 때 그 보살은 더러워진 몸인데 스님이 깨끗하게 해 줬습니까? 본래부터 더러운 몸이 아닙니까? 본래부터 더러운 몸이 아니에요. 그가 더럽다고 생각할 때도 그건 더러운 몸이 아니다. 부정하다고 생각 할 때도 이미 부정한 몸이 아니다. 부정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니 중생이라고 이름 하는데, 그는 본래부터 중생이 아니다. 이 말이오.

 

若有衆生如來度者 如來則有我人衆生壽者 만약에 중생이 있어서 여래가 제도를 한다고 할 때는 여래가 곧 아가 있고 인이 있고 衆生중생이 있고 壽者수자가 있느니라. 정말 그가 중생이라서 내가 중생이 있어서 여래가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면 이미 여래가 아인중생수자에 집착하는 게 된다. 그러니 중생이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중생이라 할 것이 없는 줄을 확연히 아는 것이 바로 중생을 제도하는 거다.

 

원효대사께서 불쌍한 방울 스님을 보고 갖가지로 그를 그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었다 이거야. 그래서 그를 편안하게 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는 불쌍한 사람이 아니었어. 그럴 때 그가 한 행동은 뭐냐? 망상을 일으키고 망상에 따른 갖가지 행동이었다. 그 행동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행동이 망상에 사로잡힌 꿈속의 행동이다. 방울 스님이 본래 불쌍한 사람이 아니다. 방울스님이 불쌍한 존재가 아닌 줄을 확연히 깨달을 때 바로 일체중생이 그와 같다. 이거야.

 

방울 스님이 중생이 아닌 걸 깨쳐도 그가 밥을 얻으러 오면 밥을 줘야 되요? 안줘야 되요? 밥을 줘야 되겠죠. 그러니 불쌍하다는 생각을 뛰어 넘어서 보시를 해야 된다. 상을 짓지 말고 보시를 해야 된다.

 

須菩提 如來說有我者 수보리야, 여래가 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卽非有我 가 있다라고 할 것이 없다 이거야. 有我. 가 있다. 이렇게 하니까 정말 라고 하는 게 있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라. 여래가 가 있다 라고 말하는 것은 가 있다라고 할 것이 없지마는 범부들이 뭐라고 한다? 가 있다 하니, 할 뿐이다 이거야.

而凡夫之人 이 어리석은 범부들이

以爲有我 가 있다고 하느니라.

 

須菩提 凡夫者 如來說 卽非凡夫 是名凡夫 수보리야, 범부, 범부 하지만은 범부라고 하는 것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범부라고 할 것이 없어서 그 이름이 범부다. 그러니 중생이라 중생하지만은 중생이라 할 것도 없다. 이거야. 다만 그 이름이 중생이고, 범부다 하지만은 범부라 할 것도 없고 그 이름이 범부고,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다 하지만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라고 할 것도 없어. 다만 그 이름이 아상인상중생수자상이다. 이건 통 털어서 한마디로 말하면 뭐에요? 일체 상이 지어진 것은 다 뭐다? 허망한 것이다. 제법은 공하다. 이런 얘기요.

 

그것이 중생이라는 것도, 부처라는 것도, 깨달았다는 것도, 범부라는 것도, 장엄이라는 것도, 정토라는 것도, 크다는 것도, 적다는 것도, 복이라는 것도. 그 무엇도 상을 지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상은 깨뜨리고 저 상을 취하고, 저 상을 깨뜨리고 이 상 취하고 이러기가 쉽죠. 깨끗하다 하는 상에 취하고, 더럽다하는 상을 분별을 하죠. 그럼 분별을 하지마라 그러면 분별하지마라는 상을 하나 턱 만들고 이런단 말이오. 분별하지마라 하는 것도 버려라 하면 분별하지마라 하는 것도 버리라하는 상을 떡 취한다 이 말이오.

 

왜 그러냐? 누구를 분별하면 어때요? ~ 부처님께서 분별하지 마라는데 너 왜 분별 하냐? 이러면서 분별을 일으킨단 말이오. 상대가 나보고 너 왜 분별 하냐? 이렇게 말하면 어때요? 분별하지마라는 그런 상도 버려라 했는데 너 왜 나한테 분별 하냐? 또 이렇게 시비를 한다. 분별을 하지 않는다는 건 누가 뭐라든지 시비를 안해야 되는데. 무언가를 가지고 시비를 한다 이거야. 내가 옳다. 니가 옳다 갖고 시비를 하다가, 이제 부처님 말씀 듣고는 옳다 그르다 하는 게 없다 하는 상을 하나 지어서. 왜 너는 옳다 그르다 싸우느냐? 본래 옳고 그른 게 없는데. 이러면 또 성질을 낸단 말이오. 아시겠어요?

 

이렇게 우리는 갖가지 자꾸 상을 짓게 된다. 단어를 쓰거나, 말을 하면 금방 이 사고방식이 모양을 지어버린다. 그러니까 얘기를 진행해 가는 과정에서 부처님이 라 할 것이 있다는 상을 취하니까 부처님이 금방 뭐라 그래요? 라 할 것이 없느니라. 다만 범부들이 가 있다고 할 뿐이니라. 하니까. 수보리가 또 아이고 뭐 어리석은 놈들은 그런 생각을 하구나 이렇게 범부라는 말에 또 딱! 상을 짓는단 말이오. 그러니까 범부라 할 것도 없다. 그것도 깨뜨린단 말이오.

 

그러니까 계속 말이 반복되는 것 같고, 말이 말을 물고 나가는 것 같지만은 수보리가 바로 여기에 붙고 저기에 붙고 한 없이 상을 짓기 때문에 바로 따라면서 그 상을 깨뜨려 나가고 있다. 化 無所化 : 되어 짐이 없이 되어 진다. 함이 없이 한다. 교화함이 없이 교화한다. 중생이 이롭게 함이 없는 것같이 하면서 중생을 이롭게 하고, 교화를 함이 없이 교화를 한다. 그러니까 내가 교화 한다 이런 생각 없이 교화를 행한다. 또 교화를 받는 사람도 어때요? 내가 저 사람한테 교화 받았다 하는 의식이 없이 어떻게 된다? 교화가 된다. 이런 애기요.

(42:37)

 

26. 법신비상분(法身非想分)_법륜스님

 

buddhastudy.egloos.com/3699395

 

26

須菩提 於意云何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可以三十二相 觀如來不 수보리야 저 뜻에 어떠하냐? 서른두 가지 몸의 특징으로 여래를 볼 수가 있느냐? 이 말이오. 부처님은 몸에 서른두 가지의 특징이 있죠? 이 서른두 가지 특징으로 부처님을 볼 수가 있느냐? 이 거야. 여러분들이 스님은 어떤 몸의 모습으로 스님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 예. 이렇게 대답하는 게 당연하죠. 스님은 어떤 게 스님이오? 첫째 머리는 빡빡 깎아야 됩니다. ~ 그래. 그 다음에는 가사장삼을 수의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결혼을 안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예, 따라 다녀 보고 술먹거나 고기 안먹는게 스님입니다.

 

이렇게 스님이 어떤 게 스님이냐? 여러분들은 다 안다고 생각한다. 이게 바로 상에 집착하는 거요. 어떤 게 훌륭한 사람이냐? 여러분도 알 수 있죠? 어떤 게 나쁜 놈이냐? 알 수 있다고 생각해. 여러분들이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결혼할 때도 좋은 남편, 나쁜 남편 다 고르고. 이런 거 다 하는 거 아니오. 그죠? 내가 그런 걸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하면 뭘 갖고 고르겠어요?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해. 기준이 있을 거 아니오, 돈은 많아야 되, 학벌은 높아야 되, 인물은 잘 생겨야 되. 가문은 좋아야 되. 그죠? 유산을 많이 받으려면 뭐라야 된다? 외동아들이어야 되.

 

이런 걸로, 온갖 걸로 이렇게 딱 해서 자기 기준을 가지고 탁 보면 알 수 있다 이거야. 저건 쓸 만하다, 저건 쓸모가 없다. 저건 괜찮겠다. 이렇게 다 알 수 있다. 이 말이오. 그런데 우리가 바로 거기에 속는다. 이거야. 우린 늘 거기에 속는다. 그렇게 상을 지어서 훌륭한 스님, 훌륭한 남편, 훌륭한 사람, 이렇게 여러분들이 좋은 사람, 정해 놨기 때문에 결국은 실망을 하잖아. 남자한테 실망 한 두 번 해 본거 아니죠? 또 절에 다니면서 아마 스님들한테도 실망 많이 했을 거예요. 그죠?

 

어디 방송 듣고, 어디 뭐 텔레비 나오는 거 보고, 그 스님 좋다고 찾아갔다가 얼굴보고 목소리 듣고 찾아갔다가, 미쳐서 한 참 다니다가, 나중에 못 볼 꼬라지 보고는 또 어때요? ~ 실망을 해가지고 죽이나 살리느니 해서 절에 안 나간다. 이래 서 한 참 있다가 또 어때요? ~ 전에는 그랬지만 요건 진짜다 이래 우~ 몰려갔다가 또 실망을 해가지고 또 떨어지고. 그러잫아요. ? 상에 집착을 하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들은 그런 어떤 것으로 훌륭한 스님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

 

그런 눈으로는 여러분들은 원효대사를 볼 수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 그런 눈으로는 부처가 와도 손가락질 하고, 보살이 와도 손가락질 한다. 자장율사가 문수보살 친견하고 싶다고 그렇게 산 속에까지 가서 칡넝쿨 속에서 백일기도는 해 놓고는 정작 찾아온 문수보살은 쫒아버렸죠. ? 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분이 문수보살이다 하는 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맞지 않아서 쫒았단 말이오. 그래 뭐라 그랬어요? 돌아가리로다. 돌아가리로다. 아상이 있는 자가 어찌 나를 보겠는가? 이랬단 말이오.

 

그러니 여래라고 하는 것은 어떤 상이 아니에요. 그러니 부처님이 왜 내 곁에, 불보살이 내 곁에 올까? 뭣 때문에 올까? 나를 깨닫게 해 주려고 오겠지. 나한테 돈 주러 올까? 아니겠지. 나를 깨닫게 해 주러 올 거란 말이오. 나를 깨닫게 해 주러 오려면 내가 상을 가지고 있으면 상을 뭐하게 해 준다? 깨게 해 주겠지. 그러면 헛다리짚는 게 다수 일 수밖에 없다 이거야. 화려한 모습으로, 여러분들이 상상하듯이. ~ 보자마자 한 눈에 관세음보살인 줄 알았다. 이런 모습으로 올까? 그런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꿈에 관세음보살을 봤다 그래요. 내가 그래 금방 물어보죠? 옷은 흰 옷 입었지? . 어떻게 생겼드나? . 저기 탱화하고 똑같이 생겼던데요.

 

그러니 여러분들은 이 경을 읽으면서 수보리가 참 어리석다. 왜 이것도 모르나? 이렇게 생각 할지 몰라도. 여러분이 어떤 분이 스님이오? 하면 스님하고 스님 아닌 거 하고 구분할 수 있어요? 하면 한다.’ 이러지 못 한다.’ 그래? ‘아이고, 나는 누가 스님인지, 누가 스님이 아닌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해? 다 안다. 그러지. 뭐가 스님이오? 이러면 머리 깎았고, 첫째가. 이렇게 들어가겠죠. 그러면 여러분들은 스님이 제가 가발 떡 해가지고 양복 떡 입고 가면 작대기로 대번 쫓아 내 버릴 거 아니오.

 

須菩提 於意云何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可以三十二相 觀如來不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가 있느냐? 이 말이오.

須菩提言 如是如是 수보리가 말하되 그러하고 그러하옵니다. 이렇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거야. 이건 이렇게 표현했지. 쉽게 얘기하면 이렇게 대화를 진행하다가 부처님이 갑자기 수보리보고 야~ 니 앞에 있는 이게 부처냐? 이렇게 물은 거란 말이오. 아시겠어요? 제가 이렇게 대화를 하다가 보살님 보고 당신 앞에 서 있는 이게 법륜스님이오?’ 하니까 .’ 이랬단 말이오. 이거 말고 따로 법륜스님이 없잖아. 그죠? ‘.’ 이랬단 말이오. 如是如是 그러하옵니다.

 

以三十二相 觀如來 서른두 가지 몸의 특징으로 여래를 볼 수가 있습니다.

佛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須菩提 若以三十二相 觀如來者 수보리야 만약에 서른두 가지 몸의 특징으로 여래를 볼 수가 있다고 한다면

轉輪聖王 則時如來 전륜성왕도 곧 부처겠구나. 이렇게 말했어. ? 전륜성왕은 부처님과 생긴 게 똑같이 생겼기 때문에. 생긴 게 똑같이 생겼다 이 말이오. 그러면 전륜성왕이 부처요? 부처가 아니오? 부처가 아니지. 그러니

 

須菩提 白佛言 수보리가 크게 깨닫고 또 내가 형상에 집착했구나. 해서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쭙되

世尊 如我解佛所說義 不應以三十二相 觀如來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의 말씀을 부처님의 설하신바 그 뜻을 이해하기로는 삼십이상으로는 마땅히 여래를 볼 수가 없습니다. 어떤 모양과 형상으로는 부처를 볼 수가 없다.

 

爾時 世尊 이때 세존이

而說偈言 게송으로 말씀을 설한다. 게송, 노래로 이 말이오. 노래로 말씀하시되

若以色見我 만약에 이러한 색깔, 이러한 모양이나 색깔로 나를 보려고 하거나, 부처를 보려고 하거나, 즉 눈으로 나를 보려고 하거나 이 말이오. 눈으로 보이는 그 울긋불긋한 것으로 나를 보려고 하거나

以音聲求我 소리로 나를 구한다 이거야. 어떤 소리로, 부처님의 소리를 들으려고 한다면

是人行邪道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는 자다. 깨달음의 길에서 벗어났다. 삿된 길을 간다 이 말이오. 삿된 도를 행하는 자라.

不能見如來 결정코 여래를 볼 수가 없다. 깨달음에 이를 수가 없다. 상에 집착하는 한은 절대 반야바라밀다를 성취 할 수가 없다. 부처를 볼 수가 없다.

 

이렇게 까지 분명하게 얘기해 놨는데도 아이고 불교 교리는 뭔가 복잡해가지고 잘 모르겠습디다. 이런 말이 나 올 수가 없다. 부처님 말씀이 헷갈리는 거요? 자기 머리통이 지금 헷갈리는 거요? 부처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아직 이게 좀 꿈이 덜 깨서 비몽사몽간에 지금 헤매고 있는 거지. 불경을 자꾸 어렵다. 이래. 봉사가 대낮에도 세상이 어둡다고 고함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제목이 뭐라고 붙었어요? 법신비상분이다. 법신은 이 말이오. 여래는 이 말이오. 몸으로, 형상으로 드러난 화신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인 법신은 상이 아니다 이거야. 상을 떠나야 된다.

 

若以色見我 어떤 모양과 빛깔로 나를 보려고 하거나

以音聲求我 어떤 소리로 나를 구하면

是人行邪道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는 자라

不能見如來 결코 부처를 볼 수가 없다. 이거요.

그럼 우리가 부처님 일생으로 돌아가서 부처님을 보면 어때요? 부처님은 이렇게 모양과 형상에 집착을 했느냐? 그러지 않았다는 걸 우리가 알 수 있어요. 만약에 부처님이 그런 모양과 형상에 집착하고 세인들의 소리에 구애를 받으셨다면 부처님은 우리가 아는 몇 가지 일들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을 거요.

 

첫째 사람을 99명이나 죽인 살인자 앙구리마라를 출가 시킬 수 있었겠어요? 없었겠어요? 없었겠죠. 어떻게 사람을 99명이나 죽인 살인자를 그 자리에서 무릎을 탁 꿇고 부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니까 그래. 저는 출가 하면 안 되겠습니까? 출가할 수 있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 이거야. 이게 무슨 죄를 저지를 줄 알고. 이렇게 단박에 그 자리에서 인정을 해 버렸다, 이거야. 어떤 절차도 안 걸치고.

 

그건 왜 그럴까? 살인자가 본래 살인자라 할 것이 없다. 이거야. 그 마음이 어리석어서 한 생각 뒤집어 지니까 살인을 행하게 되는 거지. 그런데 사람은 공연히 그 몸을 괴롭힌다. 이거야. 그 살인을 하는 그 마음을 조복 받아야 되는데. 그 몸을 공연히 학대 한다 이거야. 이러한 가르침에서 보면 불교인들은 사형 제도를 찬성해야 되겠어요? 반대해야 되겠어요. 반대해야 되겠지. 이것은 불가에서 확실한 전통이 있다 이거야. 사람을 99명이나 죽인 살인마 앙구리마라를 부처님께서는 바로 마음을 조복 받으시고 그대로 출가 시켰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그렇게 했다 하니까 여러분들은 세상 사람들도 다 그걸 인정하고 그걸 받아 들였다. 부처님이 하신 일이니까. 그렇지 않다, 이거야. 세상 사람은 상에 집착 해 있다. 여래의 부처님의 제자라는 사람도, 부처님의 신도라는 사람들도 아직도 상을 못 깨뜨리니까. 어때요? 부처님이 하시는 일이 자기 마음에 들 때는 적극적으로 동조를 하는데.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어때요? 역시 반대다 이거요. 그래 앙구리마라를 출가 시킬 때는 제자들도 일부가 반대를 했다 이거야.

 

한 번 생각해 봐. 그 천하 살인마하고 옆에서, 아무 방비도 없이 옆에서 같이 살려면 보통 일이 아니죠. 또 이 대중들이 이해하지 못해가지고 그 앙구리마라가 승복을 입고 탁발을 하러 가면 사람들은 승복 입은 사람들은 다 뭐로 보인다? 살인자로 보이죠. 앙구리마라로 보이는 거요, 구분이 안 되잖아. 그죠? 그러니까 밥 얻으러 가면 전부 문 닫고 도망가 버린다, 이 말이오.

 

그러니 대중들이 이 앙구리마라 때문에 1200대중이 밥을 얻어먹을 수가 없다 이거야. 딴거야 없어도 살지만 밥 못 먹으면 살기가 어렵잖아. 하루도 아니고, 이틀도 아니고, 사흘도 아니고. 그러면 대중 속에서 불만이 있을까? 없을까? 불만이 있겠죠? 그런데 부처님은 그것을 끌고 가신 거요. 부처님은 늘 대중의 뜻을 따랐습니까? 안 따랐습니까? 따랐다 이거야. 자기 의견을 내세워서 고집하신 적이 없어. 늘 대중의 의견을 따랐다 이거야. 그런데 이럴 때는 어때요? 제자들과 전신도가 다 들고 일어나서 반대해도 어때요? 그냥 행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역시 위대한 것은 제자들이 어때요? 부처님을 존경하고 따랐다는 데 있어요. 설령 마음에 적극적으로 동조가 안 되도 그 만큼 스승을 믿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죠. 일주일이 지나서야 겨우 오해가 풀렸다. 그러나 대중들은, 신도들은, 앙구리마라를 용서 할 수가 없은 거요. 상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신도 아닌 사람도 많았겠죠. 신도들도 어쩌면 거기 포함되었을 거고. 결국은 앙구리마라를 돌로 때려 죽였다, 이 말이오. 이것이 상에 사로잡혀 있는 거요.

 

또 부처님은 결혼을 두 번이나 실패하고 기녀가 돼서 유녀가 돼서 요즘 말하면 기생이 돼서 뭇 남자들을 거느리고 살던 그 연화생녀, 부처님을 유혹하러 온 연화생녀를 교화를 시켰다. 그리고 그 유녀 대중 500명을 비구니로 만들었다 이거야. 여자가 출가해서 비구니 되는 것만 해도 당시 사회에서 엄청난 반대에 부딪쳐서 어려움을 겪었는데. 하물며 기생을 출가를 시켜놓으면 사람들이 볼 때 비구니만 보면 다 뭐로 보일까? 창녀로 보이겠지. 그러니 그게 얼마나 큰 무리가 될 수 있겠냐?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이미 순수해졌기 때문에 창녀가 몸에 있는 게 아니다 이거야. 마음의 헛됨을 쫒는 게 창녀지 몸뚱이에 무슨 창녀가 있는 게 아니다. 이거야. 그들의 몸뚱이는 그대로 있지만은 이미 그들의 마음은 갖가지 번뇌를 여의어 버렸기 때문에 바로 순수 무구한 그런 청정한 비구니들이 됐다, 이거야. 그럴 때도 대중이 반대 해가지고 일주일이나 공양을 얻어 먹지 못했어요. 그러니 대중의 의사를 따른다는 것이 무조건적인 것은 아니다 이거야.

 

부처님은 법을 따라 행하시는 분이다. 그런데 오늘은 여러분들은 이런 걸 또 이용해서 스님들이 어때요? 신도가 뭐라고 돈 문제나, 뭐 문제나, 건물 짓는 거나, 뭐 여러 가지 이런 문제를 제기해도 어때요? 무조건 믿고 따러. 이런단 말이오. 이런 게 악용 되서는 안 되겠죠. 또 부처님은 늘 대중의 의사를 따랐다 하니까. 여러분들은 또 스님한테 뭐라고 항의해요? 부처님은 늘 대중의 의사를 따랐는데 스님 뭐 잘났다고 지 맘대로 합니까? 또 이래서 다툰다 이거야.

 

그러니까 과거의 부처님의 행적마저도 오늘 우리시대에는 늘 뭐가 된다? 다툼이 돼. 그러니 뭐다? 투쟁견고 시대. 부처님 행적 갖고도 다투고, 말씀 갖고도 다툴 수밖에 없는 시대다. 그러니 대중의 의사에 따른다 해서 불법은 무조건 다수주의가 아니다 이거야. 그래서 절에도 대중의 의사에 따라서 절을 운영하는 뭐가 있다? 주지가 있고. 그러나 그 스승의 뭐가 있다? 조실스님이나 방장스님이 있어서 행정력을 관장하는 게 아니다. 이 법의 문제에 있어서는 대중의 의사라 하더라도 그것은 법사의 판단에 맡기게 되는 거요.

 

안 그러면 이게 사회정치집단과 별로 차이가 없겠죠. 부처님이 이러한 안목이 없으시다면 어떻게 그 천하 바보인 주리반탁을 교화해서 승려의 일원으로 받아들였고, 그 똥치는 니다이를 어떻게 교화해서 승려의 일원으로 받아들였겠냐? 당시의 관습, 당시 사람들의 상, 그 관점으로는 불가능한 일에 속한다. 상을 여읜 자만이 이렇게 여실히 보고, 일체중생을 다 근기 따라 구제를 하죠. 그런데 오늘 우리는 늘 상을 짓고 모양을 지어서 어때요? 세상을 바라본다.

 

부처님마저도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바라보고, 부처님의 가르침도 우리의 눈으로 본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우리의 상을 버려야 되는데, 우리의 상으로 부처의 가르침을 보고 여러분들은 분별한다. 이러니까 뭐가 생긴다? 종파가 생긴다. 부처님 가르침 중에 이게 더 높고 이게 더 낮고, 이게 더 옳고 이게 그르고. 이건 유치원과정이고, 이건 대학원과정이고. 그런 얘기하는 거 들으면 아이고 저 사람은 부처님을 수도 없이 가르치는 선생인가 봐.

 

부처를 학생으로 가르치는 선생이기 때문에 그렇게 자기가 잘 알지.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직 중생을 깨닫게 하는 한 가지 목적밖에 없다. 동으로 가라 그러든 서로 가라 그러든, 북으로 가라 그러든, 남으로 가라 그러든, 그것은 오직 서울 가는 길을 일러주지 거기에 높고 낮음이 없다. 방향이 서로 다른 것은 그들이 처해있는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이 어떤 언어로, 어떤 표현으로 쓰여 졌던 거기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

 

앞에도 나와 있죠?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 이렇게 나와 있지 않습니까? 그 우리가 이런 글을 읽기는 쉬워요.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어떻게 눈으로 보인 것으로 여래를 볼 수 있으며, 소리를 들을 수 있겠냐. 그런 것으로는 절대로 부처님을 볼 수가 없다. 만약에 그런 것으로 해서 불교에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깨닫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거는 사도를 행하는 거다. 그거는 엇길로 가서 결코 목적지에 도달 할 수가 없다. 이런 얘기요.

 

그러면 오늘 왜 수많은 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수많은 스님들이 출가해서 수행을 하는데 왜 깨닫는 자가 없고 보살행을 하는 자가 적을까? 이 말이오. 그것은 경전에 허물이 있는 게 아니에요. 다 자기 상을 버리지 못하고 공부를 한다.

(66:10)

 

27. 무단무멸분(無斷無滅分)_법륜스님

 

buddhastudy.egloos.com/3699396

 

須菩提 汝若作是念 如來不以具足相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야, 네가 만약에 이런 생각을 하되, 여래를 그 상호가 구족한, 모든 상호가 잘 갖춰지지 않은 까닭으로 여래를 본다.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게 여래를 본다 하는 거죠? 여래를 본다 하느냐?

須菩提 莫作是念 수보리야 이런 생각을 짓지 마라, 이 말이오.

 

如來 不以具足相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여래를 상호가 구족하지 아니한 것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리라, 이거야. 이게 지금 무슨 뜻이냐 하면요. 3280종호가 잘 갖추어진 것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느냐? 볼 수 없다 그랬죠. 그럼 반대로 그런 특징이 없으면 여래냐? 이 말이오. 그런 특징이 있는 게 여래냐 하니까. . 그런 특징이 있으면 부첩니다 이렇게 말했잖아 그죠? 그런데 야 임마. 그런 특징이 있다고 부처냐? 그런 특징이 있다고 부처면 전륜성왕도 부처겠구나 하니까 아차. 이렇게 해서 아이고, 그런 특징이 있는 것으로는 여래를 볼 수가 없습니다. 이러니까. 그러면 그런 특징이 없는 게 부처냐? 이 말이오.

 

그런 특징이 있는 게 부처인 줄 알았더니, 그런 특징이 있는 게 부처라고 볼 수가 없어. 그런 특징이 있는 것으로는 여래를 볼 수가 없다 하니, 그러면 그런 특징이 없는 것으로 여래를 볼 수가 있느냐? 이거야. 볼 수가 있어요? 없어요? ? ~ 법륜스님이 안경 끼고 있죠? 그러니까 안경 낀 사람이 법륜스님이냐 하니까. , 이랬단 말이오. 그러면 저 사람도 법륜스님이냐 하니까. 아이고, 아니네요. 이랬단 말이오. 그럼 안경 낀 것으로 법륜스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런 특징이 없는, 안경 안 낀 것으로 법륜스님을 볼 수가 있느냐? 이 말이오. 볼 수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

 

그러니까 우리가 그런 특징이 없다. 그런 특징이 없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런 특징으로 여래를 볼 수가 없다. 이 말이오. 그러면 그런 특징이 없는 것으로 여래를 볼 수가 있느냐? 그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있지 않다 하면 사고방식이 어떻게 간다? 없다. 이렇게 간단 말이오. 그러니까 없으면 부처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 뭐다? 단멸이란 말이오. 단멸. 아시겠어요? 없는 것으로 부처를 볼 수가 있다. 이게 단멸론이란 말이오. 그러니까 불교는 단멸론이 아니다. 이런 얘기요.

 

어떤 사람이 술을 많이 먹는단 말이오. 그래서 술 먹지 말라. 이랬단 말이오. ~ 부처가 되겠다는 사람이 술에 빠져서 어떻하느냐? 부처가 되려는 사람은 술에 빠지면 안 돼. 부처가 되려는 사람은 술 먹으면 안 돼. 술 먹지 마. 알았습니다. 그러면 술 안 먹는 것으로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 아니죠. 우리는 지금 이런 생각에 빠져있는 거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뭐 일체중생이 다 부처니까 술 먹어도 괜찮아. 이러거나. 안 그러면 술 먹으면 안 돼. 하거나. 괜찮다. 된다. 이 두 가지에 늘 빠진다 이거야.

 

술을 먹으면 안 된다 하니까. 그럼 술 안 먹으면 부처가 될 수 있느냐? 고기를 안 먹으면 부처가 될 수 있느냐? 거짓말 안하면 부처가 될 수 있느냐? 살생 안하면 부처가 될 수 있느냐? 이거야. 그러한 특징으로 여래를 볼 수가 없다니까 여래는 어떤 특징이 아니다. 그러니까 특징 없는 게 그럼 부처냐 이거요. 그런 뜻이 아니다. 이거야. 그러니까 없는 것으로 또 무기를 삼으면 안 된다. 이 말이오.

 

須菩提 汝若作是念 수보리야 네가 만약 이런 생각을 하되

如來 不以具足相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상호가 구족하다. 잘 갖추어졌다 이 말이죠? 앞에 아니불자가 붙었죠? 그러니가 상호가 잘 갖추어진 것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느냐? 하니까. 처음에는 본다 했다가 나중에는 볼 수가 없다 했죠. 그러면 상호가 갖추어지지 않는 것으로, 상호가 잘 갖추어지지 않는 것으로 여래를 볼 수가 있느냐? 이렇게 물은 거예요. 상호가 잘 갖추어지지 않는 까닭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그걸 깨닫고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느냐? 이 말이오.

 

須菩提 莫作是念 수보리야. 그런 생각을 하지 마라. 이 말이오.

如來 不以具足相故 여래가 상호가 잘 갖추어지지 아니한 것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지 마라, 이 거야. 상호가 잘 갖추어진 것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지 마라 이 말이죠. 그와 마찬가지로 상호가 잘 갖추어지지 않은 것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지 마라. 이 얘기요.

 

머리를 깎았다고 도를 얻는 게 아니다. 도는 머리털에 있는 게 아니다 이거야. 그러니까 머리 깎는다고 도가 얻어지는 게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아이고 나는 이제까지 도를 얻으려면 반드시 머리를 깎고 공부를 해야 도를 얻는다고 알았더니. 아이고 그게 아니구나. 머리털은 상관이 없는 거구나. 그러니까 머리 안 깍고도 얼마든지 도를 얻을 수가 있는 거구나. 이렇게 알았다 이거야.

 

그래서 야~ 니 머리털 깍아라. 이러니까 아이고 머리털에 무슨 도가 있습니까? 머리 털 안깍고도 도를 얼마든지 얻는데요. 머리털을 깍지 않는 것으로 그러면 도를 얻을 수 있습니까? 아니다. 이 말이오. 머리털을 깎아서 도를 얻는다고 생각을 했는데. 머리털을 깎는다고 도가 얻어지는 게 아니다 하니까. 아이고, 그럼 머리털 안 깎아도 도를 얻겠네. 할 때는 머리털 안 깎아야 도를 얻는 것처럼 생각하면 또 어긋난다. 머리털을 안 깎으면 도를 얻는다 하면 그것이 또 머리털에 뭐가 있다? 도가 있다는 게 된다.

 

도를 얻는 것은 머리털을 깎고 안 깎고의 상관이 없다. 머리털에 도가 있는 게 아니다. 그러면 그걸 확연하게 깨친 사람은 어때요? 깍을 인연이 되면 깎고, 깎을 인연이 안 되면 안 깎고, 자유로워야 된다. 깎아야 된다느니 깎지 말아야 된다느니 두 생각을 다 떠나야 된다. 그런데 우리는 깍지 말아야 된다는 파와 깍아야 된다는 파로 둘로 늘 나뉘게 된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괴롭다, 괴롭다 하시면서 뭐라 그러냐? 아이고 스님들처럼 이걸 다 떠나 버리고 나도 산속에 들어 가버려야 여기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도저히 안 되겠다.

 

이럴 때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을 하느냐? 마치 산속에 가면 도를 얻을 수 있고,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도를 얻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이 깨닫지 못하고 행복해지지 않는 원인이 바로 남편과 자식과 아내와 집과 재물 이런 것들이 원인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또 세속에 사는 이유는 뭐요? 그런 것들이 뭐의 원인이다? 행복의 원인이다고 하니까. 지금도 죽기 아니면 살기로 거기에 매달려 있는 거 아니오. 그러다 그것이 뜻대로 안되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런 걸 다 버려 버리는 게 뭐다? 행복을 찾는 길이다. 이렇게 생각한다. 그 줄에 매달려서 이걸 잡고 있는 게 행복의 원인이다. 하다가 한 번은 또 이걸 놔 버리는 게 행복의 원인이다.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재물과 이러한 사람들의 관계는 이것은 고의 원인도 아니고 뭐의 원인도 아니다? 행복의 원인도 아니에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것이 한번은 고의 원인이라 했다가 한번은 행복의 원인이라 했다가. 이렇게 늘 극단에 치우치게 된다. 이것을 잡고 있는 게 행복의 원인이다. 이렇게 생각을 여러분들이 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이 제가 술을 먹고 여자들하고 데이트를 하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닐 때도 여러분들이 나무라면 안 되겠죠. ? 그것이 행복의 원인이니까. 여러분들 지금 그것이 행복의 원인이라고 매달려서 살고 있는 한은 스님에게도 그것이 행복의 원인이겠지.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것이 행복의 원인이고, 그것이 복이라고 생각하고, 그게 잘되면 전생에 복을 많이 지었다 그러고 부처님의 가피를 입었다 그러면서 스님이 그러면 어떻게 생각합니까? 전생에 못된 짓을 많이 했나? 저 중이 왜 저러나? 이런단 말이오. 그러니까 달리 적용한다 이거야. 그러기 때문에 이게 분별심이 끊이지 않는 거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러면 다 끊고 절에 들어오면 행복해 지겠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끊고 들어오면 행복해 지느냐? 아니다. 이번에는 그런 것을 없는 것으로 또 뭘 삼는다? 행복의 기준을 삼고 한다. 그걸 가지고 행복의 기준을 삼으니까 그게 뜻대로 안되죠?

 

돈이 뜻대로 안 벌리고, 사람이 뜻대로 안되고, 지 원하는 데로 안 되고. 다 이래 괴롭다 이거야. 다 버리고 들어와서 버리는 것으로 행복의 원인을 삼고 있으면 또 돈이 자꾸 버리려는데 돈이 자꾸 어때요? 절에 중되 들어갔는데 또 자구 주지 맡아라 그래. 또 재무 맡으라. 그래. 포교하라 그래. 그러니까 주지 맡으니까 일거리가 복잡하게 회사 운영하듯이 생겨요? 안 생겨요? 생기죠. 회사 보다 더 복잡하단 말이요. 그 다음에 재무 맡으니 돈은 만져야 돼, 안 만져야 돼? 하이고, 집에 있을 때 보다 돈을 더 만져야 된단 말이오. 포교하라 하니까 사람을 만나야 되, 안 만나야 되? 만나야 되니. 집에 있을 때보다 여자를 더 많이 만나야 된단 말이오.

 

거기다 또 어린애까지 포교하라니까. 어때요? 집에 있을 땐 한두 애 때문에 문제인데 이건 또 애가 수십 명이란 말이오. 그러니 이게 괴로워 주겠단 말이오. 내가 중 할 때는 이런 거 하려고 들어온데 아니고. 집에 있는 내 새끼도 내 마누라도 버려버리고 들어왔는데. 내가 여기 들어와서 왜 또 이 짓하고 있어야 되느냐? 그러니 들어와도 괴롭다 이거야. 세속에 있을 때는 그럴 그런 것이 없어서 괴롭고, 출가해서는 그런 게 있어서 괴롭고. 이렇게 된단 말이오. 처녀 때는 남자 못 만나 괴롭고, 결혼하고 나서는 남자 때문에 괴롭고, 못 헤어져 괴롭고, 못 만나 괴롭고. 이렇단 말이오.

 

여기 있을 때는 해외여행 못가서 괴롭고, 해외 가서 며칠만 있으면 고국에 못 돌아가서 괴롭고. 밖에 있는 사람은 다 고국에 못 와서 괴롭고. 여기 뭐 좋다고 그죠. 여기 있는 사람은 바깥에 못나가 괴롭단 말이오. 바깥에 있는 사람도 여기 뭐 좋다고 이렇게 생각하고. 그러니 이러한 특징으로, 이러한 특징이 있는 것으로 부처다 하는 생각을 하니 이러한 특징이 있는 게 부처냐? 아이고 아니구나. 어떤 부처를 그런 모양과 형상으로 볼 수가 없구나. 모양과 형상으로 부처를 볼 수가 없다. 이러면 그러면 그 어떤 그런 특징이 없는 것으로 부터 여래를 볼 수가 없다는 얘기죠.

 

그러면 무조건 어떤 모양과 형상이 없어야만 그러면 부처를 보느냐? 허공 같아야만 부처를 보느냐? 그것도 아니죠. 내 눈앞에 있는 3280종호를 갖춘 그 분을 가지고 부처를 볼 수 있어요? 없어요? 또 있다 이 말이오. 제 말 이해하시겠어요? 그러면 부처라 그러면 몸과 형상을 가지고 있으면 거전 무조건 부처가 아니야. 내 눈에 보였으니까. 부처는 뭐해야 된다? 내 눈에 안보여야지. 내 귀에도 안 들려야 그게 부처냐? 아니다. 이거야.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만으로도 부처를 삼아도 안 되고. 그럼 반대로 거꾸로 안보이고 안 들리는 것으로 부처를 삼으면 되느냐? 아니다.

 

도무지 그런 형상을 떠나야 된다 이거야. 조금 이해가 되세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없는 것으로 능사를 삼는 것에 대한 단점을 여기 다시 부처님께서 노심초사 지금까지 늘 집착을 해 놔라, 놔라, 놔라, 놔라,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하니까 이제는 병이 탁 저쪽으로 가서 붙어서 아닌 것으로 능사를 삼는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법문 떡 들으면서 여러분들 어떤 생각해요? ~ 저기 앉아 있는 것 법륜스님이 아니고 왜? 내 눈에 보였으니까. 저 소리는 부처님 말씀이 아니다. ? 내 귀에 들렸으니까. 또 이렇게 능사를 삼는다 이거요.

 

須菩提 汝若作是念 수보리야 네가 만약 이런 생각을 하되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說諸法斷滅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자는 모든 법이 다 끊어지고 멸했다고 말하는가? 그러니까 이제까지는 법이 있다 하는 생각에 빠져서 법이라 할 것도 없고, 깨달았다 할 것도 없고, 설했다 할 것도 없다 이렇게 말했죠. 그러니까 생각이 확 뒤 바뀌어가지고 법이라는 것은 없는 거다. 없는 걸로 이번엔 법을 삼는단 말이오. , 끊어졌다. , 사라져 버렸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누가 법을 말하면 이건 법이 아니야. ? 법이라는 것은 말로 할 수 없는데 저놈의 시끼가 말로 한단 말이오. 글로 쓸 수 없는데 저게 글을 쓴단 말이오. 이건 법이 아니야. 없는 것으로 능사를 삼는단 말이오. 이게 단멸론이란 말이오. 아시겠습니까? 모든 법은 다 끊어지고, 다 없는 거다. 사라진 것이다. 이렇게 설하는가?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최고의 깨달음을 얻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렇게 법을 말하는가?

莫作是念 그런 생각을 하지 마라.

何以故 어찌한 까닭이오.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최상의 깨달음을 얻겠다고 마음을 내는 자는

於法 不說斷滅相 저 법에 단멸상을 짓지 마라. 단멸상을 설하지 마라. 없다는 상도 내지 마라. 그러니까 지금 까지는 어떤 병을 치료했습니까? 있다는 상을 내지 마라.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얘기했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 번엔 없는 거구나. 이렇게. 없는 거구나 할 때 벌써 무슨 상을 짓게 된다? 없다는 상을 짓게 된다. 그러니 실제의 존재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있는 것에 집착해도 안 되고 없는 것에 집착해도 안 된다. 눈앞에 보이지만은 거기에 뭐가 없고? 실체가 없고, 실체가 없지만은 갖가지 모양으로 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그러니 우리가 형상에 집착할 때는 그것이 꿈인 줄 알아야 하고, 또 공에 떨어져서 없는 걸로 생각 할 때는 이 제법이, 이 삼라만상의 모든 것들이 다 진여의 현현이다. 그대로 뭐임을 알아야 된다? 진리임을 알아야 된다. 그래서 여기에 여러분들이 말하는 그 무기 공, 공에 떨어진다. 단멸에 떨어진다. 허무에 떨어지면 안 된다. 이 말이오.

(85:05)

 

28. 불수불탐분(不受不貪分)_법륜스님

 

buddhastudy.egloos.com/3699399

 

須菩提 若菩薩 以滿恒河沙等世界七寶 持用布施 수보리야 만약에 보살이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의 세계에 칠보로 가득히 채워 보시를 행하면, 보시를 행하더라도 이렇게 되요. 그러니까 한 사람은 어떻게 한다? 갠지스상의 모래 수만큼 세계가 있고 그 세계에 칠보로 가득히 해서 보시를 행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복이 많아요? 많지 않아요? 매우 많죠? 이것하고

 

若復有人 만약에 다시 어떤 사람이 있어

知一切法無我 일체 법에, 모든 일체 법에 아라고 할 것이 없음을 깨달아서

得成於忍 저 인욕을 성취를 하면

此菩薩 이 보살은

勝前菩薩所得功德 저 앞에 보살이 얻은바 공덕보다 더 뛰어나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 가득히 채워서 보시를 행하는 것보다도, 저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 만큼 많은 세계에 칠보로 가득히 채워서 남을 위하여 보시를 행하는 것보다도 바로 일체법에 아가 없음을, 실체가 없음을 깨달아서 참음을 성취한 사람이 있다면 이 보살은 저 앞에 보살보다, 앞에 보살이 얻은 공덕보다 더 크다 이 말이오. 일체 법무아를 깨닫게 되면 참을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참을 것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 그러니까 가 없음을 깨달으면 참을 것도 없죠. 그 다음에 바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어. 이 사람이 얻은 공덕은 바로 참을 것이 있고, 얻을 것이 있고, 바라는 것이 있어서 얻은 그 사람의 공덕하고는 비교할 수가 없다.

 

何以故 어찌한 까닭이냐

須菩提 以諸菩薩 수보리야 이 모든 보살들이

不受福德故 복을 받지 아니한다 이 말이오. 모든 보살은 복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이랬어.

보살은 복을 짓는다. 그래요? 안 짓는다. 그래요? 짓는다. 그러죠? 보살은 중생을 사랑하고 중생을 어여삐 여기고 중생의 아픔을 다 자기가 짊어지고 중생의 갖가지 번뇌를 없애주니 복을 지어요? 안 지어요? 복을 짓죠? 복을 지으면 보살들은 다 어디 가져야 됩니까? 천상에 가야 되겠지. 그런데 한량없는 복을 짓는데 왜 지장보살은 지금도 계속 지옥에 있어요? 복을 지었으면 복을 받아 천상에 가버려야 될 거 아니오.

 

부처님은 중생을 위해서 한량없는 복을 지었죠? 한량없는 복을 지었으면 복을 받아서 부처님은 온갖 호의호식을 해야 될 거 아니야. 그런데 왜 부처님은 아직도 맨발로 길거리에서 나무 밑에서 잠자고 남의 집에 밥 얻어먹고, 그거서도 못 얻어먹고, 가끔 욕 얻어먹고 왜 그러냐 이거야. ? 500창녀들을 출가시키고 살인자 앙굴리마라도 출가시킨 그 위대한 일을 하셨으면 세상 사람으로부터 추앙을 받아야 될 거 아니에요? 그래요? 안 그래요? 지은 복으로 따지면.

 

그런데 부처님은 추앙은커녕 손가락질하고 욕 얻어먹고, 심지어 밥도 못 얻어 자시고, 제자들로 부터도 항의를 받고.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겠어. 보살은 복을 받지 아니한다. 복을 짓기는 짓는데 뭐하지 않는다? 받지는 않아. 그럼 우리 생각에 아니 받으려고 짓지 안 받을 바에야 뭐 하러 지어? 안 그래요? 이것이 이제 범부중생의 생각이죠.

 

須菩提 白佛言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되

世尊 云何菩薩 不受福德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보살이 복을 받지 아니하는고. 보살이 복 받으려고 한량없는 세월동안 복을 짓는데. 복을 받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왜 복을 받지 않습니까?

須菩提 菩薩 所作福德 수보리야 보살은 복을 짓지만은

不應貪着 그 복에 탐착하지 아니한다. 그 복을 탐하지 않고 집착을 하지 아니할세.

是故 이런 까닭으로

說不受福德 복을 받지 않는다고 말 하느니라.

 

복을 짓되 복을 탐하지 않아.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게 아니다 이거야. 열심히 농사를 짓되 가을 추수에 대해서 탐하지를 않아. 다 소득이 생기면 어떻게 한다? 일체 중생에게 다 양식 없는 사람에게 나눠 줘버려. 그럼 무슨 소득이 있느냐? 그는 소득 같은 것을 논하지 않아. 그는 따뜻한 봄날에 흙 밟은 것이 행복이고, 호미로 갖고 땅을 파는 것이 행복이고, 씨앗을 뿌려서 돋아나오는 것을 보는 게 행복이고, 잡초를 뽑고 곡식이 자라는 것을 보는 게 행복이며, 그것을 추수하는 것을 보는 것이 행복이며, 그것이 중생에게 나눠줘서 중생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는 게 뭐다? 행복이다.

 

그는 그의 삶 하나하나가 그대로 행복이지. 뭔가를 해서 결과에 뭔가를 얻어야 행복이 아니다. 그는 얻으려는 생각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들도 그런 적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 그 온갖 고통을 겪고 애기를 낳았는데 애기가 무사한 것만 보면 어때요? 기쁨이 솟았죠. 애기 낳고. 요새 다 배 째서 낳아가지고 별로 몰라요? 그 갖가지 산고를 겪고 낳았는데 그게 딴 사람 같았으면 그게 나오자마자 뺨따귀를 때려줘야지. 사람을 고통을 줘도 어떻게 이렇게 고통을 줄 수가 있어. 다른 사람 같았으면 큰일 났어. 맞아 죽을 뻔 했단 말이오.

 

그러나 그 애기가 다치지 않고 난 것만 해도, 내 몸은 찢어지더라도 어때요? 그 애기가 성한 몸만 받고 엄마는 다 뭐애요? 안심을 해요? 안 해요? 안심을 하죠. 아픈 건 온데간데없다 이거야. 그럴 때 애기를 키울 때도 마찬가지죠. 다 애기가 좋아하는 것만 보고 그냥 기뻐하지. 거기에 뭐 애기가 나를 칭찬해 주거나 이런 건 생각지도 않는다 이거야. 그게 보살의 마음이다. 거기에 차별 없는, 여러분들은 아무런 바람이 없는 그런 걸 베푼다 이거야. 그런데 이게 한 때고, 아시겠어요? 쬐끔 크면 어떤다? 벌써 대가를 기대하죠? 점점 크면 어때요? 내가 니 낳는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내 니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내가 고생고생해서 니를 키웠는데 니가 그럴 수가 있느냐?

 

이렇게 생각을 일으켜서 바라는 마음을 내서 부모자식 간에 뭐가 된다? 원수가 된다. 여러분들이 자식을 낳을 때, 어릴 때 키울 때 그때 마음이면 절대 원수가 될 수가 없어. 그러니까 보살이 엄마가 애기를 낳고 키우는 것과 같은 마음을 내는 게 보살이에요. 그게 실제로 다 그런 마음이 납디까? 안 납디까? 나지. 책을 보고 배워서 났어요? 아니에요. 왜 그렇게 날까? 자기 몸에서 나왔기 때문에, 한 몸이기 때문에, 그래요. 제 말 이해하시겠어요? 한 몸이었기 때문에 그래요. 자라면서 어때요? 니는 니고, 나는 나다. 이렇게 생각하니 이게 상이 지어지니까 안 되는 거요.

 

그러니 일체 중생이 다 한 몸인 줄 알게 되면, 이건 다 그냥 되는 거요. 왜 그렇게 되는데요? 무슨 지식을 갖고 되는 게 아니고, 이유를 갖고 되는 게 아니고, 생각을 먼저 해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보면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한다. 이거야. 아기가 중요한 뭐 조그마한 갓난애기가 중요한 미술품을 깨뜨려도 애 걱정 먼저 합니까? 미술품 걱정을 합니까? 애 걱정을 먼저 합니다. 그런데 애기가 좀 크면 어때요? 뭐부터 먼저 걱정한다? 미술품 걱정을 먼저 하는거요.

 

그러니 지금 남편이 아무리 지금 힘들고 괴로워도 여러분들 남편 걱정은 안하고 직장 그만 둘까? 말까? 하면 그만두면 돈 떨어질 걱정만 하지. 남편 지금 건강이 얼마나 어려운가? 정신적으로 얼마나 힘든가? 이런 걱정은 안하는 거요. 그러니 이렇게 복을 짓는 거는 다 지나놓고 보면 애한테 뭐 얻어서 행복한 거요? 그 낳고 키우는 재미가 있어요? 낳고 키우는 재미가 있죠? 그게 꽁 재미요. 그 재미를 공짜로 누렸으니 크면 어때요? 재미 본 값 내 놔라. 이게 이제 애를 먹이는 거란 말이오. 아시겠어요?

 

장난감을 갖고 놀라 그래도 다 돈을 주고 놀아야 되잖아. 어디 가서 놀려면 다 돈을 내야 되는데. 애 낳아 키우는 데는 공짜로 갖고 놀았으니 세상에서 재미중에 제일 좋은 재미를 봤으니 이제 자라면서 뭐다? 애도 머리가 돌아가는 거죠. 머리가 돌아가는 거요. ~ 이거 재미값 받아야 되겠다. 하는 상술이 딱 생각나는 거요. 그래 재미값 내놔라. 이렇게 하는거요. 그래서 애들이 조금 크면 뭐라 그래요? 내 누가 낳으라 그러드노? 이렇게 달려드는 거요? 나를 위해서 낳았나? 니 갖고 재미있게 놀려고 낫지. 그러니까 재미값 내 놔라. 이렇게 나온단 말이오.

 

그러니까 늘 어떻게 해야 된다. 참회를 해야 되겠죠. 아이고 세상에 공짜는 없구나. 이렇게. 보살은 복을 짓되 탐착하지 않는다. 이말 참 중요한 말이에요. 우리는 바라지 않는다. 복을 받지 않는다. 이러니까 안 받을 바에야 뭐 하러 하노?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 보살은 복을 받지 않는다 하는 것은 보살은 복을 짓되 복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복을 탐하지 아니한다. 그러니까 보살은 복을 받지 아니한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복이 어쩔 수 없이 오면 보살은 어떻게 한다? 일체중생에게 회향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회향이라는 말이 늘 나오게 되는 거요. 회향한다.

 

~ 오늘 여러분들도 어떻게 한다? 복은 짓되 所作福德하되 어떻게 한다? 不應貪着하여. 不受福德해야 됩니다. 아시겠어요? 복을 짓되 복에 집착하지 않고, 탐하지 않아서 복을 받지 않아야 한다. 복이 돌아온다고 놀라가지고 어때요? 죄 지은 것처럼 생각해도 안 되겠죠? 지금까지는 복이 안온다고 난리였는데 또 반대로 거꾸로 뒤집어져 복 온다고 난리여도 안 된다. 복은 오면 오는 데로 어떻게 한다? 일체중생에게 회향을 한다. ~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