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금강경(법륜스님)

13 금강경 강의 제18. 일체동관분

seongsoo 2014. 10. 6. 07:17

 

 

18.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_법륜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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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금강경 열네 번째 시간이 되겠습니다. 지난 번 시간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참으로 행복하게, 참으로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참으로 행복하게 자유롭게 산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부처님께 여쭈었더니 부처님께서 첫 번째 하신 말씀은 일체중생을 제도하겠다고 원을 세워라.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아끼며, 죽어가는 모든 생명을 불쌍히 여기고 연민하여 그것을 다 살려내겠다고 그렇게 마음을 내라.

 

사랑받으려 하지 말고, 사랑하려고 하고. 얻으려고 하지 말고 줄려고 하고, 의지하려고 하지 말고 뭇 중생의 의지처가 되어주라. 그런데 이렇게 한다고 해서 보살이 아니다. 이렇게 마음을 낸다고만 해서 보살이라고 할 수가 없다. 이것을 다 실제로 행해야 된다. 그렇게 마음을 내고 그렇게 실천을 하게 되면 모든 괴로움은 사라지고 온갖 속박은 끊어진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렇게 마음을 내고 이렇게 실천을 한다고 해서 보살이라고 할 수가 없다. 내가 중생을 제도한다. 내가 중생을 제도했다 하는 이 생각마저도 버려야 한다.

 

실로는 한 중생도 멸도를 얻은바가 없다하라. 이렇게 돼 있죠? 내가 너를, 내가 당신들을, 내가 중생을 위하여 이런 생각을 내지마라. 그래서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었다 할 때도 깨달음이라느니, 깨달음을 얻었다느니 이런 생각도 내지 마라. 더 나아가서는 불토를 장엄한다 하는 이런 생각도 내지 마라.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고 중생의 괴로움이 없는 그런 정토세계를 이루기를 원을 세우고, 그렇게 한량없는 보살행을 하더라도 내가 중생을 위하여, 내가 정토를 건설한다. 이런 생각도 내지마라.

 

그 어떤 것이든 내가, 하면 벌써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사로잡히는 것이 된다. 그러니 아가 없음을, 그 어떤 곳에도 아가 없음을 통달해야 진짜 보살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 수보리는 나다 할 것이 없다면, 어떻게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보느냐? 이거야. 중생의 가지가지 고통을 다 아느냐? 부처님께서는 신통 자제한 갖가지 눈이 있어서 중생을 다 보고, 중생을 제도한다 하는데... 중생이 없어서 제도할 바도 없고, 제도하는 나도 없다면 부처가 중생을 어여삐 여긴다 할 때, 무엇으로 중생을 보느냐? 이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나와 중생이 둘이 아니다.

 

내가 중생을 하면 벌써 나와 중생이 둘로 나뉘고,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이, 구하는 자와 구하는 대상이 이렇게 나뉘게 된다. 주객이 나눠지게 된다. 주객이 나뉜다는 것은 두 가지 모양을 짓는 거다. 두 가지 모양을 짓는 것은 상에 사로잡히는 게 된다. 그렇게 해서 일체가 하나임을, 즉 동체임을 부처님께서는 말씀을 하시게 됩니다. 그러니 손이 발을 씻기듯이, 눈이 발의 가시가 박힌 것을 바라보듯이. 이렇게 한 몸으로서 아픔을 느끼고, 그것을 치료하는 행위. 거기에는 둘이라는 생각도 없고, 거기에는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도 없고, 거기에는 어떤 바랄 것도 없고. 그러한 세계가 바로 진여의 세계 부처님의 세계다.

 

그래서 일체동관, 一切同觀分 일체를 같은 걸로 본다. 하나로 본다. 이 말이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肉眼不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처님은 눈을 가지고 계시느냐?

如是世尊 如來有肉眼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은 눈을 가지고 계십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天眼不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는 천안을 가지고 있느냐? 천안이라는 것은 보지 않고도 볼 수 있는, 그런 힘을 말합니다. 즉 신통력을 말하죠. 여래는 신통력을 갖고 있느냐?

如是 世尊 如來有天眼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신통력을 갖고 계십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慧眼不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혜안을 가지고 있느냐? 즉 부처님은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있느냐? 이 말이오.

如是 世尊 如來有慧眼 그렇습니다. 부처님은 지혜의 눈을 가지고 계십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法眼不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서는 법안을 가지고 계시느냐? 일체만법에 그 가지가지 변화무쌍한 것을 다 그대로 꿰뚫어 보는 법을 법안이라 하는데, 그런 보살의 눈을 가지고 있느냐? 이런 얘기요.

如是 世尊 如來有法眼 그렇습니다. 여래께서는 법안을 가지고 계십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佛眼不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는 부처의 눈을 가지고 있느냐?

如是 世尊 如來有佛眼 그렇습니다. 여래는 부처의 눈을 가지고 계십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다섯 가지 눈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이 다섯 가지 눈을 우리가 보통 오안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부처님은 육체의 눈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부처님은 신통의 눈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부처님은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부처님은 보살의 눈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부처님은 부처의 눈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우리는 육체의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 하늘의 눈을 가지고 있는 신들, 지혜의 눈을 갖고 있는 성문연각의 성인들, 법의 눈을 갖고 있는 보살, 부처의 눈을 갖고 있는 부처님이 다 다른 존재, 다른 것이다. 각각 높고 낮음이 있고 다른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 않다. 이게 다 하나다.

 

여기서 눈이라고 말하는 것은요.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눈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무엇인가를 안다. 이런 얘기요.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정보를 받아 들여야 되겠죠. 그죠? 감각을 해야 된다 이 말이오. 이 감각을, 감각 작용을 일으켜야 되는데. 이 감각작용을 일으키려면 우리 몸에는 그 감각작용을 일으키는 근이 있고, 바깥에는 그 것의 대상이 되는 경이 있습니다. 우리 몸에는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이 있다 해서 이것을 육근이라 그러고. 그것에 따라서 바깥의 대상을 육경이라 해서 이렇게 나누죠.

첫째가 우리 몸에 있는 갖가지 감촉기능입니다. 가장 발달돼 있는 게 손이라고 말 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부딪쳐서 아~ 여기 뭐가 있구나. 이렇게 아는 것, 만져보고 아는 것, 이렇게 말 할 수 있다. 여러분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코를 막고, 입을 다물고도 손으로 뭔가 만져보고 아~ 여기 뭐가 있다. 이렇게 알 수는 있죠. 그런데 그렇게 아는 거는 어때요? 불확실하고 매우 불명확하죠.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신근, 신근이다. 이렇게 말해요. 우리 몸에 있는 이러한 감각기능을 신근, 그리고 그 대상을 뭐라 합니까? 이라 이렇게 말해요. 이것이 가장 우리가 바깥사물을 인식을 하는 원초적인 거고, 하등한 겁니다.

 

구더기 같은 거는 바로 지나가다가 어떤 물체에 부닥치면 옆으로 비켜가겠죠? 이때 앞에 뭔가 장벽이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아는 것도 아니고, 냄새 맡고 아는 것도 아니고, 소리를 듣고 아는 것도 아니고, 맛보고 아는 것도 아니고. 오직 몸으로 가서 부딪쳐 봐야 된다. 부딪쳐 보고 아는 거요. 그 다음에 두 번째는 맛을 보고 아는 거요. 이것을 우리는 설근이라 그러죠. 그리고 그 대상은 뭐요? 라 그래요. . 맛이다. 이 말이오. 그 다음에는 비근이다. 비다 이러죠. . 그 대상은 향기죠. . 냄새다 이거야. 그 다음에는 , 귀다 이 말이오. 그리고 그 대상은 , 소리다. 그 다음에는 이다. 안이다 이 말이죠. 그 대상은 이다. 모양과 빛깔이다.

 

일단 이렇게 다섯 가지가 있다. 이것을 우리는 오근이라 그러죠. 우리 몸에 있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인 오근이다. 그리고 그 대상을 오경, 색성향미촉. 이렇게 말한다. 안이비설신.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바깥사물을 감각해서 인식을 하게 된다. 그래서 안다 할 수 있다 이 말이오. 그런데 가장 하등한 동물은 이 몸으로 부딪혀서 아는 것밖에 없습니다. 아주 작은 벌레들, 이런 것은 그것밖에 없죠. 그러나 조금 더 향상이 되면 어떠냐? 맛을 보고 알게 된다. 물고기 같은 것은 맛을 보고 먼데서 까지 자기 고향을 찾아가죠. 조금 더 발전되게 되면 어떠냐? 향기를 맡고 알게 된다. 조금 더 진화하면 어떠냐? 소리를 듣고 알게 되고, 더 진화하게 되면 어떠냐? 눈으로 보고 알게 된다. 모든 생물은 이것이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등한 생물일수록 아는 방식이 몸에 부딪혀서 아는 것이 그가 받아들인 정보의 대부분이고. 사람에 이르게 되면 어떠냐? 눈으로 봐서 아는 것이 거의 대분이 된다. 그러면 여기서 부딪혀 아는 것은 따로 있고, 눈으로 봐서 아는 건 따로 있고. 이렇게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여기 한 송이 장미꽃이 있다. 부딪혀서는 알 수가 없고, 눈으로 보고만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습니다. 손으로 만져 봐도 한 송이 꽃이 있는 거를 알 수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데는 그 꽃의 모양이나 빛깔은 알 수가 없어요. 다만 만져보고 아~ 꽃잎이 부드럽다. 또는 딱딱하다. 또는 차다. 또는 덥다. 이런 거는 알 수가 있다.

 

그러나 그 꽃의 빛깔이나 그 가지가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냄새도 알 수 없고, 그런데 눈으로 보면 어떠냐? 그것이 붉은 색깔도 있고 흰 색깔도 있고 검은 색깔도 있고. 이렇게 가지가지 그 장미의 모양과 빛깔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 눈을 가지고만은 다 알 수 있는 게 아니죠. 그 장미의 향기는 코가 있어야 아는 거지. 눈만 가지고는 알 수가 없다. 그럼 이러한 장미가 어떤 연유로 이곳에 피어있게 됐느냐? 이런 걸 아는 거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귀가 있어서 소리를 듣고 알자. 그거는 꽃을 아무리 봐도 알 수가 없다 이 말이오. 그런 얘기를 들어서 아~ 장미는 무슨 과에 속하고. 장미꽃은 몇 종류가 있고, 장미꽃은 누가 여기 갖다 심었고. 이런 것은 다 소리를 듣고 내가 아는 거요.

 

그러니까 어떤 존재를 올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손으로 만져도 보고, 입으로 맛도 보고, 코로 냄새도 맡고, 귀로 듣기도 하고, 눈으로 보기도 하고. 이렇게 해서 우리는 그 장미꽃에 대해서 그 물체에 대해서 보다 온전하게 알 수가 있다. 저기 하나의 시계가 있다. 저 시계를 온전하게 아는데도 만져보고 시계가 있다. 이렇게 생각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져보고는 빛깔은 알 수가 없다. 만약에 거기에 방향제 같은 게 달려 가지고 냄새가 난다면 그것은 만져보고는 알 수가 없다. 그러니 만져도 보고, 맛도 보고, 냄새도 맡고, 듣기도 하고, 눈으로 보기 하고,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의 존재를 올바르게 파악해 나간다.

 

여기서 여래께서 육체의 눈이 있느냐? 육안이 있느냐? 는 말은 바로 육체의 눈을 말하는 동시에 이 속에는 뭐가 다 포함돼 있습니까? 다섯 가지 감각이 다 포함이 되 있다. 부처님은 안보고도 아니까. 부처님은 지혜의 눈이 있으니까. 육체의 눈 같은 건 필요 없나? 냄새도 못 맡고. ? 부처님은 음식이 맛없고 맛있는 걸 안 따진다니까. 냄새도 못 맡으시고, 좋은 소리 나쁜 소리도 구분하지도 못하고, 귀도 제대로 안 돼 있고. 코도 혓바닥도 손의 감각도 뭐 찬지 더운지 부드러운지 딱딱한지 아무 감각기관이 없는 그런 사람이냐? 즉 나무토막 같거나 돌멩이 같은 사람이냐? 일체를 깨달았다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데 이렇지가 않다.

 

여래는 우리와 똑같이 손에 감각이 있고, 혀에 맛보는 감각이 있고, 향기의 감각이 있고, 듣는 감각이 있고, 보는 눈의 감각이 그대로 있다. 이 말이오. 똑같이 있다. 사람이 개나 물고기에 비해서 눈으로 보고, 모든 것을 파악한다니까 사람은 부딪치는 감각도 없고, 그건 구더기한테나 있고, 사람은 없고, 맛보는 거는 물고기한테나 있지 사람은 없고, 냄새맡는 거는 개한테나 있지 사람한테는 없고, 이런 거예요? 아니에요. 다 있다 이 말이야. 다 있는데 사람과 그 동물의 차이점은 뭐요? 고거 하나하나가 더 뛰어난 게 아니다. 몸으로 부딪히는 감각이 구더기보다 더 뛰어나고, 맛보는 감각이 물고기 보다 더 뛰어나고, 그래서 물고기 보다 더 위대한 게 아니다.

 

몸으로 부딪히는 거는 구더기 보다 못할 수도 있고, 구더기 보다 나을 수도 있고, 아무튼 구더기와 마찬가지로 몸으로 느끼는 감각이 있고, 물고기와 마찬가지로 혀로 맛보는 감각도 있고,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코로 냄새 맡는 감각이 있고.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귀로 듣는 감각이 있고,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눈으로 보는 감각이 있지만은. 눈의 역할이 다른 동물과 다르기 때문에 다른 동물보다 훨씬 더 많이 안다. 다른 동물이 알지 못하는 세계를 다 안다. ? 다른 동물은 그 분야가 눈이 달려 있기는 달려있지만은 개 같으면 칼라가 아니래요. 누가 개가 되 봤는지는 모르겠는데. 흑백이라는 거요. 흑백비디오 보는 거와 같다는 거요. 눈에 누가 개 눈 박은 사람이 보니까. 잘 안보여서 그런 얘기가 나왔는지 어땠는지 개의 눈에는 그렇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세계를 보듯이 그렇게 찬란하게 보이지를 않는다. 그것은 우리 사람 눈에도 색맹이 있는 사람은 그도 보기는 보지만은 색깔 구분을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생각할 때 나하고 똑같이 보지만 똑같이 보는 게 아니에요. 달리 본다. 색맹, 아시죠? 적녹색맹. 하면 빨간 거 하고 푸른 녹색하고를 구분 못하는 거요. 그러면 그는 다른 사람들하고의 차이에서 자기가 구분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거지. 그는 거기서만 살았으면 구분할 수 있는지를 알아요? 몰라? 몰라. 원래 그런 줄 안단 말이오. 원래. 그러니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다 같이 가지고 있다 해서 똑같은 것도 아니고. 다 같이 다르다니까 기관이 달리 가지고 있냐? 이런 것도 아니다. 이거야.

 

물고기를 한 마리 잡아도 다섯 개가 다 달려 있어요? 안 달려 있어요? 달려있다. 지나가는 개를 잡아서 보면 두 눈이 달려있고, 두 귀가 달려있고, 코가 달려 있고, 입이 달려있고, 발바닥이 다 감각기관이 있죠. 다 있지만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르니까 아예 사람은 다른 눈이 더 달린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아는 세계가 다르다. 아는 세계가.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갖가지 신통한 힘을 가지고 계신다니까. 부처님께서는 사물을 좋고 나쁘고 이렇게 분별하지 않으신다니까. 부처님은 그런 감각기관이 없느냐? 돌멩이처럼 나무토막처럼 그러냐? 아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감각기관을 그대로 다 갖고 있다.

 

어쩌면 더욱더 기능이 잘 살아있다. 또 그 기능이 어쩌다가 다쳐서 눈이 안보이거나 어쩌다가 다쳐서 마비가 되면 우리는 그 기능에만 의지하기 때문에 불편해지고 괴로워지지만은 부처님은 그렇게 하면 부처가 아니냐? 아니다. 부처님은 그런 기능이 없을 수도 있고, 장애를 받을 수도 있고, 더 발달해 있을 수도 있다.

 

여래에게 이러한 다섯 가지의 감각기관을 가지고 계시느냐? 부처님은 우리와 똑같이 다섯 기관의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더 발달해 있다 해서 여래가 위대한 것도 아니고, 그 중에 어떤 것이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 그래서 그가 못 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냄새 맡는 작용이 사람이 개보다 못하죠? 그렇다 그래서 사람이 개 보다 못한 게 아니다. 여래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여래는 다섯 가지의 감각기관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물건을 만질 때 부드러운지, 딱딱한지, 더운지, 찬지, 어떻게 생겼는지를 만져보고 다 아시는 분이오? 모르시는 분이오? 아시는 분이다. 우리처럼. 그리고 그는 맛을 보면 짠지 매운지, 쓴지 신지 다 아시는 분이오? 모르는 분이오? 아시는 분이오. 그 분은 냄새를 맡으면 그 냄새가 어떤 건지를 아시는 분이다. 그 분은 소리를 들으면 소리를 구분한다 이거야. 큰 소리인지, 작은 소리인지. 이런 거 다 구분하시는 분이오.

그 분은 눈으로 사물을 보면 그것이 붉은 색인지. 검은색인지, 흰색인지, 파란색인지 구분이 다 된다 이거야. 이런 눈을 그 분은 갖고 계시느냐? 그렇습니다. 그분은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어떠냐? 위대하신 분이니까. 그 분은 이런 거 없어도 될 거라든지, 이런 거 없다든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런 육체에 부착되있는 이런 것들이 그 분은 우리보다 뭐하다? 훨씬 뛰어나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지 않다. 그 분이 가지고 계시는 건 특별히 뛰어난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그냥 우리와 똑같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걸 통해서 갖가지를 다 느끼시고 계시다. 그걸 통해서 다 활용을 해서 알고 계신다.

28:22

 

如來有天眼不 여래는 천안을 가지고 계시느냐? 이 말이오. 천안이라는 것은 이 다섯 가지 감각 이외의 알 수 있는 힘. 이것 말고 이것을 통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어떤 능력을 뭐라고 한다? 천안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그러니까 이 육체의 눈을 통하지 않고도 뭔가를 안다 이거야. 이 천안에는 천안, 천이가 다 포함이 됩니다. 어떤 소리를 듣고 어떤 곳을 본다 이 말이오. 어떤 직관력을 말하는 거요. 도저히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없는데 그 분은 그것을 알고 있다. 귀로 들을 수 없는데 어떻게 그 사실을 아느냐 이거야. 이러이러 하다고 누가 설명해 준 게 아닌데도 이미 알고 있고, 그걸 가서 보시지도 않았는데도 거기 사정을 알고 있다.

 

그러니 안보고 알고, 안 듣고 안다 이 말이오. 다른 말로 하면 이것만 있는 게 아니겠죠? 안 만져 보고도 알고, 맛을 안보고도 알고, 냄새를 안 맡고도 알고, 귀로 안 듣고도 알고, 눈으로 안보고도 안다 이거야. 우리는 그걸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거를 그걸 통하지 않고도 알고 있다. 이것이 뭐다? 천안이에요. 여기도 천안에도 나머지를 다 포함하고 있다. 아시겠어요? 천이라든지 다른 걸 다 포함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이해가 안 된다. 도대체 어떻게 그걸 알까? 너 뭐가 괴롭니? 저는 이래 이래 괴롭습니다. 귀로 듣고 알죠? 그죠? 그런데 부처님은 안 듣고도 안단. 이게 뭐요? 타심통이요. 이것도 다 여기서 말하는 천안에 들어가는 거요. 크게 말하면. 아시겠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천안, 천이, 신족, 숙명, 타심. 이게 다 여기에서는 어디에 들어가는 거다? 천안에 들어가는 거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런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그분은 알고 계신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을. 그분은 알고 있다. 이걸 가지고 계시느냐? 그 분이. 그렇습니다. 그렇다 이거야. 그럼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알 수 있느냐 하지만은. 굼벵이가 생각하기에는 부딪혀 안보고 안다는 건 자기로서는 상상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 그러나 사실은 부딪쳐 보고도 알 수 있지만은 부딪혀 안보고도 알 수 있어요? 없어요? 알 수 있지. 즉 눈으로 보거나 소리를 듣고 알 수 있다 이거야. 저기 벽이 있는 줄을 눈으로 보고 저까지 안 가 보고도 알 수 있고. 또 눈을 감아도 그 앞에 가면 벽있다 하는 소리를 들으면 미리 비켜갈 수가 있다.

 

그런데 구더기나 굼벵이는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니 야야 거기 가봐야 헛거다. 거기가면 막혀있어, 이래도 모른다 이거야. 가서 자기 몸으로 부딪혀 봐야 안다. 그래 오늘 우리는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귀로 듣고, 자기 코로 냄새 맡고, 자기 입으로 맛보고, 자기 손으로 만져봐야 확신을 하지. 그 이상은 모르니까 그것을 뛰어넘는 얘기는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또 그런 얘기를 듣거나 했는데 믿지 않다가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되면 ~ 신비하다. 신비하다.’이렇게 말합니다. 신비하다 이렇게 말해. 거기도 빠진다. 하나도 신비한 게 아니에요. 사람이 눈으로 본다 해서 구더기가보면 그것참 기적 같은 일이지만 사람이 볼 때는 기적같은 일이 아니에요. 너무나 당연한 거다.

 

그러니 구더기가 그걸 안다고 해서 사람을 신으로 섬기면 구더기 인생에 뭐 큰 변화가 올까? 그렇지 않다. 그걸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그를 신으로 섬긴다 해서 여러분들의 인생에 무슨 특별한 변화가 있는 게 아니에요. 이것이 소위 신들이 갖고 있다. 우리가 갖지 못하는 어떤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걸 신통력이라 그래. 부처님은 이것을 갖고 계시느냐? 갖고 계신다. 이게 있으니까 부처님은 육체의 이 다섯 가지 감각기관은 없어도 되는가? 아니다 부처님은 이걸 갖고 계신다.

 

如來有慧眼 부처님은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다. 부처님은 지혜의 눈을 갖고 있다. 그러면 이 갖가지 신통의 힘을 갖고도 알 수 없는 게 있어. 어떤 거는 알 수 없느냐? 선한 것도 없고 악한 것도 없다는 거. 이 육체의 눈을 갖고는 아름답고, 추하고, 선하고, 악하고 갖가지 분별을 일으키죠. 그러면 이런 듣지 않고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힘이 있어도 그 또한 선하고 악하고 아름답고 추하고, 이렇게 한다 이 말이오. 그런데 그 존재의 실상이 본래 선하고 악한 것도 없고, 아름답고 추한 것도 없고, 깨끗하고 더러운 것도 없는 줄을 아는 눈이 무슨 눈이라고? 혜안이다. 이거는 신이라 그래서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것은 깨달아야 만이 알 수 있다. 이것이 혜안이다. 지혜의 눈이다.

 

예를 든다면 눈이 먼 사람하고, 즉 눈이 안 보이는 사람하고, 눈이 잘 보이는 2.0자리하고 같이 사는데. 이 세상을 사는 데는 눈이 보이는 사람이 안 보이는 사람보다 훨씬 더 편리하죠? 훨씬 더 힘을 더 많이 냅니까? 적게 냅니까? 많이 내지. 그런데 누가 내 부모를 죽였다 이러면 눈이 안 보이는 사람만 울고불고 합니까? 화를 내고 원수를 갚을 생각 합니까? 눈 보이는 사람도 그렇습니까? 눈 보이는 사람도 그렇다. 차이가 없어요. 어쩌면 그 장면을 본 눈 보이는 사람이 더 원한을 살 수가 있죠. 안 보이는 사람보다. 그런데 무술을 닦든지, 뭔가 심신을 연마해가지고 천이통이 있고, 천안통이 있고, 타심통이 있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펄쩍 뛰고 칼로 갖고 조화를 부릴 수 있는 이런 아주 갖가지 능력을 갖고 있는 그런 도사, 무술사가 있다 이거야.

 

그런데 누가 자기 부모를 죽였다 하면, 그는 우리가 갖고 있지 않는 큰 힘을 갖고 있는데, 우리는 범부중생이라 가지고. 그걸 보고 슬퍼하고, 미워하고, 원망하지만은 그 사람은 슬퍼하고 미워하고 원망하지도 않고 그럴까? 아니에요. 어쩌면 그는 더 자기가 가진 힘이 있기 때문에 어때요? 더 사람을 증오하고 원수를 갚으려고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원수 갚을 생각만 했지 감히 사람을 죽이지는 못 할 텐데 그는 갖가지 힘을 이용해서 그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뺏고 그럴 수가 있어요? 없어요? 그럴 수가 있죠. 더 할 수도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지혜의 눈으로 볼 수 있다 이거야. 그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천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원수라 할 것이 본래 없는 줄을 깨달을 수 있는 거는 무슨 눈이다? 지혜의 눈이다. 지혜의 눈이 열렸으면 그는 비록 육체의 눈이 없더라도, 그는 비록 신통이 없더라도 지혜의 눈이 열린 사람은 그럴 경우에 슬퍼하거나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 제행이 무상하고, 제법이 무아인 줄을, 제법이 다 공한 줄을 알기 때문이다. 일체법이 다 공하다는 걸, 그것을 아는 눈을 뭐라고 한다? 지혜의 눈, 혜안이다. 이렇게 말해. 그러니 수행하는 사람들은 그 목표가 어떻게든 심신을 단련해서 눈이 이게 0.3인데 이게 2.0이 되는 게 목표 여서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안되겠지. 수행을 하다보면 눈이 좀 맑아 질 수도 있지만은 그게 수행의 목표가 아니다.

 

그것처럼 수행의 목표가 수행을 하다보면 아픈 몸이 나을 수도 있고, 오래 살 수도 있고, 뭔가 안 듣고도 들을 수 있고, 남의 마음을 빨리 꿰뚫어 볼 수 있는 눈도 있고, 사람이 전후 생을 할 수 있는 그런 힘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목표로 하면 안 된다. 그것은 있든지, 그것은 없든지, 이 지혜의 눈을 여는 사람에게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있어서 나쁜 것도 아니고, 없어서 나쁜 것도 아니다. 이 말이오. 그런데 우리가 육체의 눈을 육체의 감각기관을 좀 더 발달시키는 거에 수행의 목표를 둔다면 그건 수행과는 거리가 멀고, 그 다음에 이것을 떠난 그 신통력을 갖는 걸 목표로 둔다면 그것은 깨달음과는 거리가 먼 얘기다. 그런 것들이 있으면 안 된다든지, 그런 건 있을 수 없다든지 하는 게 수행이 아니라. 그런 거는 있을 수가 있고, 진신을 단련하면 그런 능력을 얻을 수가 있다. 어떤 사람이 노력하면 돈을 벌수가 있다. 그러나 수행자는 그 돈에 집착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런 걸로 애쓰지 않는다 이 말이야.

 

그럼 수행자는 돈이 있으면 안 됩니까? 아니에요. 돈이 있으면 그럼 그걸 어디에 쓴다? 증생을 이익 되게 하는데, 베푸는데 쓴다. 수행을 하다가 그런 신통의 힘이 생기면 그걸 가지고 도()로 삼지 않는다. 그걸 가지고 어떤 데 쓴다? 중생을 이롭게 하는데 그냥 쓸 뿐이에요. 그럼 그게 없으면 그는 도력이 떨어진 거냐? 아니다. 재물이 없으면, 수행자는 재물이 없어도 상관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 그런 갖가지 신통이 없어도 상관이 없어. 그것은 수행의 기준이 될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가 수행을 얘기하면서 아직도 돈 많이 가지고 있는 스님이나,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보고. 아이고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서 아~ 좋겠다. 이거는 전생의 복을 많이 지어서 현생에 그런지. 현생에 재물을 중요시하니까 그 원인을 전생에다 꿰어다 맞춘 건지. 우린 좀 검토 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말이야.

 

독약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아이고 좋겠다. 전생에 얼마나 복을 많이 지었으면 독약을 저래 많이 먹을 수가 있노? 나는 한 숟가락 밖에 안주고 저 사람은 한 사발이나 주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다 이거야. ? 그걸 중요시 하지 않으니까. 그러니 우리가 잘 살펴야 한다. 우리가 수행을 하면서도 제대로 살피지 못하면 엉뚱하게 계속 헤매게 된다 이 말이오. 여래는 육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여래는 천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여래는 혜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육안과 천안까지도 보지 못하는 것을 혜안은 뭐다? 볼 수가 있다. 혜안을 갖고 보니까 육안과 천안이 필요 없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께서는 육안과 천안과 혜안을 갖고 계시니까 천안이나 육안이 꼭 있어야 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본질에 벗어나 있다 이거야. 그게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없어야 된다든지, 있어야 된다든지 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천안이 열린 사람에게 육체의 눈이 고장난 사람도 있을 수 있어요? 없어요? 있어.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에요? 아니룻다... 아나율이라 말이오. 육안은 있는데 천안이 안 열린 사람도 있어요? 없어요? 있다. 그런데 육안도 가지고 천안도 가진 사람도 있어요? 없어요? 있다. 그러니 생물학적인 인간으로서의 가장 잘 발달된 게 뭐냐? 바로 오관 중에서도 이 눈이란 말이오. 다른 동물은 사람 눈처럼 그렇게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육체의 눈을 가지고 있지만은 그러나 우리들에게도 무슨 눈이 있느냐? 천안이 다, 천안을 가질 능력이 다 있다 이 말이야. 그러나 그것을 우리가 개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지금 작동이 제대로 안 되는 거요. 여러분들 그걸 개발하면 누구나 다 그것을 쓸 수가 있다 이 말이오. 우리는 육체의 눈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그것을 개발하지 않고 있는 거요. 그걸 개발하면 5가지 감각의 기관은 죽어 버리냐? 그것도 아니다 이 말이야. 그러나 5가지 감각기관을 버려도 천안을 얻을 수가 있고, 가지고도 얻을 수가 있어요.

 

성인이라고 말하는 해탈의 세계, 해탈의 세계로 나아가는 이 성인의 류에 들려면 어디서부터다? 혜안부터다. 혜안. 천안을 갖고는 성인의 유에 들지를 못한다. 갖가지 신통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오신통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마음의 번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어. 질투심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어. 원수 갚을 생각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 재물에 대한 집착이 있어요? 없어요? 있단 말이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신통을 금하셨단 말이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갖고 늘 거기에 끄달리는 거에 대해서 경계하기를 주의를 줬습니까? 안줬습니까? 줬죠? 그와 마찬가지로 신통에 끄달리는 것에 대해서 늘 주의를 줬다 이 말이야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거기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그것을 넘어서서 바로 지혜의 눈이 열려야 한다. 그래야 번뇌가 끊어진다. 똑같은 사람을 보고 있지만은 여기에 눈이 먼 사람은 더듬어서 그 사람을 안다. 하니까 더듬어서 아니까 그 사람이 아는 거는 피부가 부드러운지 꺼칠꺼칠 한지, 뭐 눈이 달렸는지 안 달렸는지, 이런 거는 만져보고 알 수 있어요? 없어요? 알 수 있죠. 눈이 달렸지만은 이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는지 없는지는 손으로 만져서는 알 수가 없단 말이오. 그런데 눈이 있는 사람은 만져도 보고 눈으로 보면 어때요? 손으로 만져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세계까지 다 알 수 있어요? 없어요? 알 수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천안이 열리면 어떠냐? 눈으로 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만져보고 맛보고 냄새 맡고 듣고 해서는 알 수 없는 거를 알 수가 있다. 즉 그의 마음이 지금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성질이 어떤지. 좋은지 나쁜지. 악한지 선한지 이런 걸 탁 직관으로 보고 안다 이거야. 이게 천안이란 말이야. 여러분은 다 천안이 다 쪼끔씩은 있어요? 없어요? 있는데 천안이라 할 것도 없는 게 맨날 틀리니까. 눈이 달리긴 달려서 보기는 봤는데 맨 날 헛 거를 보면 어때요? 그거 있으나 마나 한 거죠? 없는 게 낫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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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것만으로는 그 사람을 다 안다고 할 수가 없다. 손으로 만져서 보고 그 사람을 안다 하는 거 하고, 눈으로 보고 그 사람을 아는 건 다르죠, 눈으로 보고 이렇게 보는 거는 껍데기만 보는 거요. 그 사람의 마음, 그 사람의 생각, 이런 걸 다 아는 것은 천안이 열려야 직관이 딱 있어야. 딱 보자마자 사람이 어떤지 다 알 수 있단 말이오. 사람 보는 눈이 우리가 뭐라 그래요?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하다. 사람 보는 눈이 모자란다. 이런 얘기하죠? 육체의 눈이 봉사라서 그래요? 아니에요. 훤히 눈 뜨고 귀 놔놓고 다 듣고, 다 보고도 헛 다리 집는다 이거요. 우리는. 왜 그러냐? 이게 천안이 없어서 그래요.

 

그래서 천안을 가지고 있다 해서 그럼 그 사람을 온전하게 아느냐? 아니다. 천안을 가지고는 그가 어떤 경계에 부닥칠 때 저 사람이 화를 낼지 화를 안낼지 이런걸 알 수가 없어. 그가 도인인지 아닌지 그런 건 모른다 이 말이오. 그러니 혜안이 열려야 한다. 혜안이 열리면 천안으로 본 것 중에도 잘 못 본게 많아. 선하느니 악하느니, 어쩌니 저쩌니 하는거, 그런 거 본래 없는 거요. 손으로 만져보고 상상한 것이 착각이 굉장히 많은데 눈으로 탁! 뜨고 보면 어때요? 일부 손으로 만진게 맞는 것도 있지만은. 즉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다리를 만져보면서 아이고 코끼리는 기둥같이 생겼구나 이렇게 했을 때, 다리를 만져보고 기둥같이 생긴 그 분야는 맞어요? 안 맞아요? 맞지만은 코끼리가 기둥같이 생겼다 하는 거는 얼토당토 않는 얘기요. 눈을 탁 뜨면 그건 틀렸다는 거를 알 수 있단 말이오.

 

그러나 우리가 눈을 보고 얼굴이 예쁘다고 아이고~ 저 사람 사람 참 좋겠다했지만은 막상 알고 보면, 그 마음을 보면 어때요? 그게 헛다리짚었다 이거야. 헛다리짚은 사람 많잖아 그죠? 기둥 같은 줄 알고 결혼했더니 나중에 전혀 아니더라 이 말이오. 그런데 그가 그런 저런 갖가지 능력, 신통력을 갖고 있다고 그가 도인인줄 알고 그를 섬겼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까 헛다리 집었더라 이런 결과가 나온다.

 

如來有慧眼 여래는 혜안을 갖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여래는 혜안을 갖고 있습니다. 모든 법이 다 공한 줄을 안다. 선도 없고 악도 없고, 깨끗함도 없고, 더러움도 없고, 아름다움도 없고 추함도 없고, 큰 것도 아니고 적은 것도 아니고, 늙은 것도 아니고 젊은 것도 아니고 . 그것이 존재의 참 모습니다. 이걸 깨닫게 되면 우리는 바로 윤회의 세계로부터 벗어난다. 즉 경계에 휩쓸려서 희로애락 하는 이런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안온한 세계에 나아가게 된다. 그래서 여기서부터 우리가 성인의 유에 든다.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성문 연각(聲聞 緣覺), 성문성, 연각성에 이르는 성인의 경지다.

성문(聲聞)은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서 도에 정진하는 사람이고, 연각(緣覺)은 독각(獨覺벽지불(辟支佛)이라고도 하며 스승에 의하지 아니하고 혼자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나타낸 말

 

如來有法眼 여래는 법안을 가지고 계십니까? 부처님은 법안이 있습니까? 이 말이죠. 그렇다. 부처님은 법안이 있느니라. 이런 얘기요. 법안이라고 하는 것은 혜안은 제법이 공한 줄 아는 것이 혜안이라면 그 공한 가운데서 인연을 따라서 갖가지가 현현합니까? 안합니까? 현현하죠. 서울 가는 길은 정해져 있지 않다. 누가 동쪽이다. 누가 서쪽이다. 에이 잘못된 거야. 서울 가는 길은 동이다 할 수도 없고, 서라 할 수도 없다. 정해져 있지 않느니라. 이렇게 아는게 뭐다? 혜안이라면. 중생의 인연을 따라, 사람의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만 가지, 천 가지, 억만 가지로 벌어집니까? 안 벌어집니까? 벌어죠. 그 갖 가기 인연에 따라 일어나는 그 만상을 하나하나 빠지지 않고 환히 다 아는 거를 뭐라고 한다? 법안이다. 이렇게 말해요.

 

제법이 공한 줄을 알면 자기 내면은 안온합니까? 안합니까? 분별심을 낼게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러나 중생의 가지가지 그 번뇌를 제하고 그들을 구제할 힘은 없다 이거야. ? 그 인연을 따라 일어나는 갖가지에 대해서 훤하게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바로 이 법안이 열려야 뭐라고 한다? 보살이다 이렇게 말한다. 보살이다. 공이 색한 줄을 알죠. 수많은 파도가 파도 하나하나가 나고 죽은 줄을 알면 그것은 중생이죠. 그러나 그 바다전체를 보면 어때요? 바로 수많은 파도가 생성소멸을 하지만은 생겼다 할 것도 없고, 소멸했다 할 것도 없어. 바로 생멸을 떠난 공한 세계를 안다.

 

그러나 거기서 한 가지 더 나아가면 그저 바다는 고요하거나 하나만이 아니죠. 그 하나로부터 그 고요로부터 갖가지 파도가 생겨나고 풍랑이 일어나고 하는 걸 다 안다. 이거야. 바람이 얼마나 불면, 얼마나 세게 풍랑이 일어나고, 어떤 경우에는 어떤 게 일어나고, 어떤 경우에는 어떤 게 일어나고. 그 수많은 미묘한 현상을 가지가지 현상을 다 훤하게 안다. 그러니 거기에 대해서 중생들이 휩쓸려서 희로애락에 빠져있는 중생을 다 인연을 따라서 구제를 할 수가 있다. 그러니 혜안이 열렸다고 해서, 혜안이 열렸다 하면 혜안을 얻으려면 천안에 집착을 해야 됩니까? 안해야 됩니까? 안해야 되. 신통에 집착을 하면 안 되. 그런데 혜안을 얻었다 해서 그 혜안에 집착을 하면 법이 공한 줄만 알면, 즉 이것이 진리다 할 때 진리에 집착을 한다 이거야.

 

그걸 뭐라 해요? 우리가 법집이다. 이제까지 배웠죠. 거기에 집착을 하게 되면 그것이 다시 인연을 따라서 기기묘묘하게 현현하는 세계를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그 법이라고 하는데도 뭐해야 된다? 집착을 놔야 한다. 진리라고 하는 집착도 버려야 한다. 그래야 참으로 대승불교 대승보살의 세계에 들 수가 있다. 여래는 법안이 있는가? 그렇다. 성문연각은 혜안은 있지만은 뭐는 없다? 법안이 없다. 방파제 쳐 놓은 안에서 보드타고 자기가 안온하게 지낼 수는 있지만은 저 파도치는 넓은 세계에 가서 마음껏 뛰 놀지는 못한다.

 

자기 혼자는 쪽배를 타고 강을 잘 건널 수는 있지만은 배가 없는 뭇 중생을 실어 나를 수는 없다. 그러나 법안이 열린 사람은 중생을 큰 배에 싣고 그냥 지나간다. 다 각자가 노를 저어야 건너가는 줄 알았더니. 큰 배를 가져와서 노저을 줄 모르는 사람도 태워서 간다. 차를 탈려면 다 자기가 운전 할 줄 알아야 타는 줄 알았더니, 운전 할 줄 몰라도 큰 버스 가져와서 운전하는 사람 뒤에 앉아서 가면 타고 가진다. 이 말이오. 이게 법안이 열린, 보살만이 이렇다.

 

如來有法眼 여래는 부처의 눈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다. 여래는 불안을 가지고 있다. 부처의 눈을 가지고 있다. 부처의 눈이라는 건 뭘까? 부처의 눈이라는 것은 일체가 다 하나임을 아는 거요. 너 따로 있고 중생 따로 있어서 나만이 건너간다든지. 중생을 데리고 간다든지 이런 얘기가 아니다. 중생이 나와 별게 아니다. 내 몸이다. 나와 한 몸이니 거기는 구제한다 할 것도 없다. 내가 그들을 데려간다든지, 그들을 놔 놓고 나만 간다든지 이런 건 있을 수가 없어. 한 몸이니까. 가면 같이 그냥 따라 가지고. 다리가 못가면 뭐도 못가고? 머리가 못가는 거고, 머리가 가면 다리는 따라 가는 거지. 몸은 놔 놓고 머리만 간다든지. 몸이 반드시 몸뚱이를 끌고 간다든지 그런 얘기가 필요가 없다.

 

그런데 여래는 불안만 있고 다른 건 필요가 없느냐? 여래는 다른 것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다 가지고 있다. 그러니 육안도 천안도 혜안도 법안도 불안도 사실은 분리할 필요가 없는 거다. 우리가 어떤 정보를 안다 할 때 아는 방식을 손으로 만져보고도 알고, 냄새 맡고도 알고, 귀로 듣고도 알고, 혀로 맛보고도 알고, 눈으로 보고 도 알아서 그냥 아는 거지. 요거는 손으로 만져보고 따로 있고, 요거는 냄새 맡고 아는거 따로 있고, 요거는 눈으로 보고 아는거 따로 있고. 이런 게 아니다. 이거야. 손으로 만져보고 아는 것도 손이 다치면 발바닥을 갖고 슬슬 부딪혀서도 알 수 있는 거고 눈으로 보고도 알 수 있는 거고.

 

이제까지 늘 눈으로 보고 알았는데도 눈이 봉사가 되면 그럼 그건 모르느냐? 아니죠. 소리를 듣고도 알 수가 있고, 손으로 만져 보고도 알 수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눈감으면 못 움직이지만은 눈이 아예 안 보이는 사람은 세월이 흘러가면 그냥 우리가 눈감은 거 하고 똑같은 게 아니에요. 그 감각이 어디로 이동이 된다? 손끝으로, 소리로, 냄새로 다 이동이 되요. 그래서 지팡이 하나만 딱 집고 탁탁 두드리면 손에 오는 감각과 들리는 소리 이런 걸 갖고 길을 갈 수가 있다. 눈으로 보는 것만큼 안되더라도 그래도 우리가 눈감은 거 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 마치 눈을 뜨고 가는 것처럼 가는 거요.

 

이렇게 어떤 것이 정해져 있는게 아니다. 이게 따로따로면 하나로 망쳐지면 그거로 끝나지만은 이게 한 몸이기 때문에 이게 기능을 못하면 다른 것이 보완을 한다. 이 말은 뭐요? 따로따로라는 거요? 하나라는 거요? 하나라는 거요. 그래서 뭐라고 한다? 일체동관이다. 일체를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하나로 본다. 같은 걸로 본다. 이게 동체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갖고 계시는 중생에 대한 대자대비는 중생 따로 있고 부처 따로 있어서 부처가 중생을 외면할 수도 있지만 불쌍하니까 봐 주는, 그런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그러한 베풂이 아니다. 이거야. 한 몸으로서의 느낌이다. 발락에 가시가 박혔을 때 온 몸이 다 그것을 그냥 느낀다. 온 몸이 느낀다. 그래서 이빨로 가서 빼고, 귀로 가서 뭐하고 하는게 아니죠. 역할이 있다 이거야. 눈으로 보는 역할을 하고 손은 가서 빼는 역할을 한다 이거야.

 

그런데 우리는 무엇인가 자꾸 분리해서 본다. 따로따로따로 나눠서 보는 습관이 있어서. 부처님께서는 일체를 분별하지 않는다니까, 집착하지 않는다니까, 맛도 못느끼는 사람이구나. 부처님은 분별하지 않는다니까, 아름답고 추한 게 없다 그러니까, 부처님은 예술작품도 볼 줄 모르고, 부처님은 사람도 구분도 할 줄 모르고, 그저 강바닥에 있는 돌멩이가 굵은 거 작은거 있듯이 사람들이 둥글둥글하게 생겨가지고 그냥 그런가 보다. 이렇게 생각한다. 이러면 안된다. 다 눈은 눈의 역할을 하고, 귀는 귀의 역할을 하고, 코는 코의 역할을 하고, 혀는 혀의 역할을 하고 손은 손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각각에 집착을 해서 늘 눈이 있으되 제대로 못하고, 귀가 있으데 제대로 듣지 못하고, 코가 있으데 제대로 냄새 맡지 못한다. 한치 앞을 제대로 못 본다.

 

그러니 각각이 다 따로 나눠져 있는게 아니라 그저 하나다. 한 몸이다 하면 또 육체를 상상하니까 안 됩니다. 아시겠어요 마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육체의 한 몸에 붙어 있는 것처럼 이 신근 따로 있고, 설근 따로 있고, 비근 따로 있고, 이근 따로 있고, 안근 따로 있어가지고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고 한 몸에 다 있는 것처럼, 바로 육안이든, 천안이든, 혜안이든, 법안이든, 불안이 따로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이게 하나다 이 말이오. 그러나 굼벵이나 물고기는 그런 기능이 그게 한 몸이지만은 나머지 기능이 제대로 발달해 있어요? 안 돼 있어요? 안 돼 있어. 그것이 작용이 안 되니 헤매게 되죠. 우리는 그것이 어느 정도 더 작용이 되니 잘보고 잘 가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천안이나. 혜안이나, 법안이나 불안이 아직 열리지 않으니 여러 가지 삶의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고통을 겪고 있다 이거야.

 

수행자가 귀가 있으면 좋지만은, 고장난거 보다는 달린 게 좋지만은. 귀가 소리가 좀 잘 들리고, 눈이 시력이 좀 좋다는게 별로 중요한게 아닌 것처럼 천안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그건 그리 중요한게 아니다. 그러나 그 법안이 열리지 않는자가 볼 때는 육안밖에 없는 자가 볼 때는 천안이 굉장한 거 같고, 거기에 우리가 매어 달리게 된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공부를 할 때 바로 이런 신통력에 빠져서는 안 된다. 육근을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다 청정하게 한다는 것은 시력이 좋안 눈이 반짝반짝 하고 귀에 소리가 잘들리고 이런 걸 말하는 게 아니다. 그것도 포함이 됩니다. 그건 제외하느냐?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육근경계에 집착하지 아니한다. 망념에 빠지지 아니한다.

 

사람이 봉사가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데 만져봐야 소용없다 이런 얘기가 아니다. 다리를 만져서 아무리 감각이 뛰어나게 잘 만졌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상상되는 코끼리 모습은 전혀 실제의 코끼리 모습이 아니다. 눈을 떠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런 것처럼 우리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 여섯 가지 감각기관 또는 신통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상상하고 도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해탈의 길과는 거리가 멀다. ~ 다섯 가지 감각기관인 몸의 감촉은 잘 있는게 좋아요? 없는게 좋아요? 있는게 좋죠. 그렇다고 없다고 뭐 큰 문제가 있어요? 아니다. 음식이 들어오면 맛있으면 좋죠. 맛없다 그래서 큰 문제는 아니다.

 

이러한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틀어서 우리가 육안이라고 말하고, 육안이 청정하다는 것은 눈으로 잘 본다 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대상에 집착하지 않는다. 천안이 청정하다는 것은 그러한 신통력이 자제하다는 걸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신통력에 집착하지 않는다. 거기에 빠지지 않는다. 법안이 청정하다는 것은 제법이 공하다는 것을 안다 하더라도 거기에 이것이 진리라고 하는 법집을 일으키지 않아야 혜안이 청정하다고 알 수가 있다. 이렇게 우리가 여래는 다섯 가지의 눈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여래는 있는 그대로 잘 보신다. 이런 얘기죠. 그러니까 필요하시다면 꽃의 색깔을 말씀하실까? 안하실까? 말씀하셨겠지, ? 육안이 계시니까.

(01:07:28)

 

須菩提 於意云何 여기까지 부처님이 말씀해 놓고,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다시 정리를 해서 물어봅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如恒河中所有沙 佛說是沙不 항하 가운데 있는바 모래수를 여래께서 이 모래수라 말하느냐, 말하지 않느냐. 겐지스강의 모래가 아주 많이 있죠. 모래의 그 수가 많아요? 많지 않아요? 많죠. 그러니까 그걸 많다 하느냐? 여래가 갠지스강의 모래를 보고 야~ 여기 참 모래가 많다. 이렇게 말하느냐? 안하느냐? 이 말이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셔요? 안하셔요? 말씀하신다. 여래는 그냥 모래라 하느냐? 안하느냐? 이렇게 돼 있는데. 엄격하게 말하면은 모래라 하느냐? 안하느냐? 이 말은 무슨 뜻이다? 모래가 많으냐? 많지 않느냐? 이 말이란 말이오. 그러니까 모래가 매우 많습니다. 이렇게 여래가 말씀하신다.

如是 世尊 如來說是沙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모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부처님께서 모래는 모래라고 말하고, 모래수가 많으면 많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문장 전체를 볼 때는 모래가 갠지스강에 있는 그 모래가 많으냐? 많지 않느냐? 그러니까 매우 많습니다. 그렇다. 부처님께서는 모래가 많다고 말한다. 이런 뜻입니다. 여기서. 거기서 더 한 단계 더 나아가서

 

須菩提 於意云何 如一恒河中所有沙 有如是沙等恒河 수보리야, 하나의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수와 같이, 이와 같은 항하가 있다고 하자. 하나의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수가 있죠? 그 모래수와 같은(같을 등). 그 모래수와 같은 뭐가 있다? 항하가 있다고 하자. 갠지스강에는 수많은 모래가 있는데 그 모래 수만큼의 많은, 모래수와 똑같은 항하, 다시 그 만한 강이 있다고 하자.

 

是諸恒河 所有沙數 이 모든 항하에 있는 바 모래 수는 많아요? 많지 않아요? 많지. 그 수만큼 뭐가 있느냐?

佛世界如是 寧爲多不 부처님의 세계가 있다 이거야. 많으냐? 많지 않느냐? ~ 그러면 한문의 글자 표현이 조금 이상해서 직역하면 좀 이상하지만은 우리가 쉽게 이해하면 어떤 말이에요? 수보리야 저 갠지스강에 모래가 많으냐? 많지 않느냐? . 매우 많습니다. 그래. 부처님께서도 그 모래를 매우 많다고 말한다. 그런데 하나의 항하에도 저렇게 많은 모래가 있는데 저 모래 수만큼의 항하가 있다. 그러면 그 모든 항하의 모든 모래 수는 많아요? 많지 않아요? 매우 많다. 그런데 그 많은 모래수 만큼의 뭐가 있다? 부처님의 세계가 있다.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의 부처님의 세계가 있다는 말이 아니고.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의 많은 갠지스강이 있고, 그 모든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의 뭐가 있다? 부처님의 세계가 있다. 그럴 때 많으냐? 많지 않느냐? 이 말이오. 영위다부... 많으냐? 많지 않느냐? 이 말이오.

 

甚多 世尊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랬어.

佛告須菩提 爾所國土中 所有衆生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했어요. 이 많은 국토가운데에 이 많은 국토라는 건 뭐요? 갠지스강의 많은 모래알 수만큼 많은 갠지스강이 있고. 그 모든 모래알 수만큼 많은 부처의 세계가 있는데. 이 모든 국토를 말하는 거요. 이 모든 국토 가운데에 있는바 중생의

若干種心 如來悉知 가지가지 마음을 여래는 다 알고 있다 이랬어. ~ 이리 보세요. 한 중생의 번뇌는 몇 가지입니까? 자 여러분의 자신이 일으키는 갖가지 번뇌는 도대체 몇 가지에요? 한량이 없다 그러죠? 팔만사천 번뇌 망상이다 이러잖아 그죠? 중생 하나가 일으키는 갖가지 번뇌, 갖가지 걱정, 갖가지 괴로움이 이루 말 할 수가 없다 그래. 중생 하나가 일으키는 그 갖가지 마음, 심보, 이거 종잡을 수가 없어. 그래서 예부터 뭐라 그래요?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 ? 워낙 변화무쌍하니까. 시뚝빼뚝하니까.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이거야. 그러니까 한 중생의 번뇌 망상을, 그 마음을 다 안다 하는 것도 불가능해요 가능해요? 불가능해.

 

여러분들 몸을 부딪기고, 같이 껴안고, 애까지 낳으면서 지금까지 살았는데. 남편마음, 아내마음 다 알 수 있어요? ? 살면 살수록 모르겠다지. 처음에는 알거 같았는데 살면 살수록 아~ 사람마음은 모르겠다. 내가 낳아, 내가 키운 애들 마음도 다 알아요? 몰라요? 몰라. 얼마나 모르면 내가 그럴 줄을 몰랐다. 이러겠어요. 내가 니 그럴 줄을 몰랐다. 어쩌면 천분의 일 만분의 일도 몰라. 하나도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아는 게 있기는 있지만은 모르는 거에 비하면 만분의 일도 안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세계 안에 중생이 도대체 얼마나 있어요? 사람만 쳐도 60, 거기서 짐승까지, 벌레까지, 세균까지 다 하면 어때요? 엄청나죠.

 

그런데 한 중생의 그 갖가지 번뇌 망상도 한량이 없어서 헤아리기가 어려운데. 그 모든 중생의 번뇌를 헤아리기는 어때요? 더더욱 어렵겠죠. 그런데 이런 세계, 이 지구상에 하나의 세계에 있는 중생만 해도 그 중생의 수가 한량이 없으니 그 번뇌의 수는 더더욱 한량이 없겠지. 그런데 이런 세계가 몇 개있다?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 있다가 아니고.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갠지스강이 있고, 그 모든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세계가 있으니. 세계만 해도 뭐하다? 한량이 없는데. 그 세계에 있는 중생일까보냐 이거야.

 

중생의 수는 더더욱 많죠. 그 중생의 수만 해도 한량이 없는데. 그 중생의 갖가지 마음일까 보냐 이거야. 그걸 여래께서 다 알고 계신다. 이런 얘기요. 한 중생이 일으키는 한 가지 마음도 알기가 어려운데. 이렇게 수많은 세계에, 수많은 중생에, 수많은 번뇌 망상을 그 일으키는 마음을 부처님께서는 훤히 다 알고 계신다. 지금 이 얘기에요. 여기서.

 

何以故 어찌한 까닭이냐

如來說諸心 皆爲非心 是名爲心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마음이라 하지만 마음이라 할 것이 없다 이런 얘기요. 다만 이름하여 마음이라고 한다. 제법이 공한 줄을 알면, 제법이 공하다는 것은 한 중생의 번뇌만, 한 중생이 일으키는 번뇌는 공합니까? 실체가 있습니까? 공하지. 저런 죽일 놈 할 때, 죽일 놈의 실체가 있어요? 텅 빈 거요? 텅 빈 건데 중생이 괜히 헛꿈을 꾼 거죠? 그러면 저 사람은 선한 사람 할 때도 그게 선하다는 실체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 그것 또한 공한 거다.

 

저런 사람은 선한 사람도 아니고, 악한 사람도 아니고 중간이다. 그것도 공해요? 안공해요? 공하다. 중생의 가지가지 마음이 다 공하고, 중생이라 하지만 중생이라 할 것도 없고, 세계라 하지만은 세계라 할 것도 없다. 그것이 다 공하다 이거야. 그러니 부처님께서 일체중생의 그 마음을 다 안다 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말하시는 모든 마음이라는 것은 마음이라 할 것이 없어. 마음이라 할 그 어떤 실체도 없다. 그래서 다만 그 이름이 마음이다. 마음이라 이름 한다.

 

所以者何 어찌한 까닭이냐 하면

須菩提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가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가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가 없느니라. 도대체 마음이라 할 것이 없다. 이런 얘기요. 한마디로 말하면. 마음, 마음하지만은 마음이라 할 것이 없다. 한량없는 중생을 구제한다 하지만은 중생이라 할 것이 없으면 구제할 것도 없고, 그 수많은 번뇌 망상을 어떻게 다 제거할 거 하지만은 번뇌라는 것이 본래 없는 줄을 알면 제거할 것도 없다. 지금 얘기 들으니까 속이 시원해요? 헷갈려요? 헷갈리는 거 같은데.

 

爾所國土中 所有衆生 若干種心 如來悉知 이 모든 국토가운데 있는바 중생의 가지가지 마음을 여래께서는 다 알고 계신다 이거야. 그러니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일체 마음을 다 알고 계셔. 바다가는 사람은 동해바다 서해바다 가서 다 물맛을 봐야 다 압니까? 한군데만 물맛 보면 다 압니까? 한군데 물맛 보면 짜다라는 거 다 알아요? 그것처럼 자기를 탁 깨달으면 일체중생이 다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거야.

 

何以故 어찌한 까닭이냐

如來說諸心 皆爲非心 是名爲心 여래께서 말씀하시되 제심이 비심이다. 모든 마음이 다 하는 것이 마음이라 할 것이 없다. 그 이름이 마음이다. 그러니까 금강경 앞에 3분으로 돌아갔죠? 3분이 아니라 5분에 나와 있죠? 뭐라고 나와 있어요?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라 약견제상비상이면 즉견여래다. 이랬단 말이오. 어찌한 까닭이냐? 수보리야. 과거심 불가득이오, 현재심 불가득이오, 미래심 불가득이다.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과거의 마음이라는 것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과거의 마음이 없습니다. 과거의 마음은 이미 지니 가 버렸어. 어디에 남아 있느냐?

 

여러분들의 생각 속에 남아 있어. 테이프 속에 담겨 있다. 이 말이오. 현재는 그런 일이 없어. 어제 어떤 남자가 나를 강간을 했다 하더라도 이미 나의 몸은 강간당한 몸이 아니오.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 흔적도 없어. 여러분들은 그것을 끄집어 와서, 과거를 생각해서, 지금 공포를 느낀다. 그것은 그 비디오테이프를 다시 재생해서 보니까 두려움이 생기는 것과 같다. 따뜻한 방안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거기 무슨 두려울 게 있어요? 없어요? 없지. 그러나 공포 영화를 틀어놓으면 겁이 납니까? 안 납니까? 나죠. 슬픈 영화를 틀어놓으면 눈물이 납니까? 안 납니까? 나죠? 거기에 우스운 영화를 틀어 놓으면 웃습니까? 안웃습니까? 웃죠.

 

사실은 거기 웃을 일이 있어요? 없어요? 웃을 일도 없고, 슬플 일도 없고, 무서워 할 일도 없지만은 그 화면에 빠지기 때문에. 그 화면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그것이 마치 현실과 같다는 착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두려워도 하고? 뭐도 하고? 슬퍼도 하고, 미워도 하고, 울기도 하고 즐기기도 한다 이거야. 여러분들이 따뜻한 방에 누워 자면서 그 꿈속에 빠지기 때문에 결국은 꿈속에서 갖가지 희로애락에 젖어 들게 된다. 그것처럼 이미 지나가버린 것들을 여러분들은 비디오테이프를 틀어서 보듯이 꿈에 빠지듯이 똑같은 현상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

 

과거에 어떤 경험이 있다. 그런 경험이 현재에도 일어나는 게 아닌데. 만약에 어떤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 하면 그건 그거로서 이미 끝난 건데. 만약에 지금 남편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하는 행동이 그거하고 비슷하게 탁! 영상이 될 때, 현재는 없어지고 과거의 비디오테이프가 머리에 돌아간다. 이거야. 그러면 엄청나게 괴로워하고 저항을 하겠죠. 그럴 때 남편이 볼 댄 어때요? 이 여자가 갑자기 미쳤나? 이렇게 된단 말이오. 전부 다 그래요. 여러분들이 학교를 못 다녔다 해서 그것이 상처가 돼 있다 이 말이오. 그런데 옆에 있는 친구들이 저그끼리 아이고 게는 학교도 중학교밖에 안 나왔데. 이런 말을 탁 하면 그것이 자기의 열등의식하고 탁 결합을 하면서 과거의 비디오가 어때요? 돌아간다 이거요.

 

현재는 여기 이래 앉아 있는데, 머릿속엔 테이프가 그게 돌아간다 이거야. 그래서 분노가 폭발하고, 울고 이렇게 하는 거요. 과거가 이미 지나가버려서 없는 줄을 알면 아무런 괴로워 할 일이 없다. 그것은 비단 요에서 자는 사람이 아무런 두려워하고 괴로워하는 일과 같다. 그러나 그가 꿈속에 빠져들면 어때요? 갖가지 괴로움이 생기는 것처럼. 여러분들이 과거 속에 빠져들게 되면 갖가지 괴로움이 생긴다.

 

지금 이 방안에 똑같이 앉아 있죠? 그런데도 끝나고 있다고 점심 먹을 때 한 번 봐요. 똑같은 점심상을 접해 놓고도 사람의 생각이 다 달라요. 인도여행을 가면 같은 차에, 같은 여관에 자고, 같은 음식을 먹는데. 죽겠다는 사람부터 즐겁다고. 참 내 여행 안 왔으면 어떻게 할 뻔했느냐고 이렇게 막 기쁨에 젖어 다니는 사람 있고, 그저 밤마다 한 숨을 쉬고 내가 왜 왔든고~ 하고 보낸 사람끼리 원망해 가면서 이렇게 다니는 사람도 있단 말이오. 현재는 똑같에요? 안똑같에요? 똑같에요. 무슨 차이가 있었었냐? 과거에 사로잡혔냐? 안 사로잡혔냐? 이 차이란 말이오.

 

똑같이 우리가 어떤 밭에 가서 일을 하거나, 똑같은 월급을 받고 똑같이 일해도 여기 있는 사람의 경험에 따라 다 차이가 납니다. 과거에 만 원받고 일했던 사람은 삼만 원 받고 일하는 사람은 기분이 좋은데. 과거에 십 만원 받고 어디 높은 직종에 있던 사람들은 내가 왜 이 짓을 해야 되느냐? 하면서 온갖 분별을 내고, 괴로워하고, 인상을 쓰고 있는다. ? 과거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러니 과거심 불가득이다. 과거라는 것은 얻을 수 없다. 과거의 마음이라는 것은 사실은 얻을 수가 없는 거다. 그런 건 없어. 그것은 꿈처럼 환상처럼 비디오테이프에 담겨 있을 뿐이오.

 

미래심불가득이다. 미래의 마음 또한 그래. 여러분들이 걱정이 많죠. 근심걱정이 많은 것은 뭐요? 다 미래를 염려하기 때문에 그래요. 10년 후에 어떻게 될까? 저 아이가 크면 귀가 약간 이런데. 저게 크면 문제가 안 될까? 제는 코가 약간 삐뚤어 졌는데. 저게 문제가 안 될까? 손가락이 약간 짧은데 저게 크면 문제가 안 될까? 남편이 지금은 나를 사랑하지만은 혹시 똑 내가 늙고 쭈그러지면 또 딴 여자 안 쳐다볼까? 이런 생각을 계속 하는 거요. 내일 교통사고 나 죽을지도 모르면서 이런 생각을 자꾸 한다 이거야. 그러니 그걸 현재화 시키는 거요. 마치 남편이 지금 다른 여자하고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는 거같이. 아이가 지금 당장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당장 무슨 일이 생기는 것과 같은 착각에 빠져드니까. 근심 걱정이 끝날 날이 없다.

 

그런데 미래라는 것은 다만 그런 상상 속에 있지. 현재에 있는 게 아니에요. 여기 걱정이 이제 두 가지죠. 괴로운 거는 과거에 사로잡혀서, 걱정은 미래에 사로잡혀서. 과거도 놓고 미래도 놔 버리면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어요. 괴로워 할 일도 없고. 다만 눈앞에 보이는 현재만 남아있겠지. 눈앞에 보이는 현재라는 것도 시시때때로 항상 합니까변합니까? 변해. 금방 눈앞에 부닥쳤지만 벌써 과거가 되 버렸고. 그러니 현재라 할 것도 없는 거요. 이 마음이라는 것은 늘 시시때때로 관심무상이라. 시시때때로 이랬다 저랬다, 이랬다 저랬다, 이랬다 저랬다 변하는 거요. 여러분들이 지금 마음이 시시때때로 변하는 거나, 꿈에서 꿈이 시시때때로 변하는 거나, 같은 거요? 다른 거요? 같은 거요.

 

종잡을 수 없이 변해요. 그런데 거기에 무엇에 집착하느냐 이거야. 한 생각 일어나고, 한 생각 사라지는데. 그 한 생각 일어나는 걸 잡고 있다 이거야. 이미 사라져버리고 없는데 그걸 사진을 찍어서 잡고 있다. 이거야. 네가 그때 그렇게 말했지. 네가 조금 전에 그랬지. 그걸 사진을 딱 찍어 쥐고 있는 거요. 그러니 한 마디로 말하면 무슨 얘기요? 이게?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하면 마음 마음 하지만은 마음이라 할 것이 없다. 이 말이오. 마음이라 할 것도 없다. 선가에서 이런 얘기 있죠? 혜가스님이 달마대사를 찾아 갔을 때 많은 사람이 달마대사를 찾아도 뭔가 얻으러 왔죠. 그래서 주지 않으니 다 가버렸다 이 말이오.

 

그런데 9년을 사람을 응대를 하지 않으니 누가 붙어있겠어요? 다 가버리지. 그런데 오직 혜가만 거기 있었다 이거야. 그래서 물어봤어. 너 왜 왔니? 안심입명(安心立命)의 도를 얻으러 왔습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도를 얻으러 왔다는 거요? 그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싶다는 말은 마음이 불안하다는 얘기요? 편안하다는 얘기요? 불안하다는 얘기 아니오. 그래? 니 마음이 어떤데? 불안합니다. 그래? 불안한 마음 이리 내 놔봐라. 이랬어. 그러니 한참 후에 있다 내놓을래야 내 놓을 수가 없습니다. 불안한 마음, 불안한 마음하지만 불안한 마음이랄 게 없다 이 말이오. 그러니 뭐라 그랬어요? 없는 줄 알았으면 해결이 됐죠. 그래 뭐라 그랬어요? 내 이미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도다. 이랬단 말이오.

안심입명(安心立命) : 천명(天命)을 깨닫고 생사(生死)이해(理解)를 초월(超越)하여 마음의 평안(平安)을 얻음

 

이게 마음마음하지만은 마음이라 할 것도 없는 도리에요. 옛날에 이 금강경을 열심히 독송을 하고, 금강경 이 주석서란 주석서는 다 갖다 읽고. 그래서 그걸 늘 봇다리에 메고 다니는 거요. 그래서 자기 법명도 금강이다. 자기는 금강경에 완전히 도가 트였다 해서. 성이 주씨인데 그래서 주금강이다. 이렇게 다니는 스님이 있었어. 그런데 저 어느 곳에 불자도 모르는, 경도 읽지 않는 무식한 사람이 마음의 도리를 깨달아서 그 수행자를 다 가르치고 있다니 어느 사이비 같은 놈인가 해서 내가 가서 혼을 내 줘야 되겠다고. 그래서 그 무거운 금강경을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인데 글로 갔단 말이오.

 

금강경 하나야 작지만은 주석서를 열 명, 스무 명, 백 명 꺼를 지고 다니려면 무겁겠죠? 그래서 그 분이 용담선사인데. 용담선자 계시는 곳을 찾아 갔단 말이오. 가다가 절 입구쯤 와서 삼거리가 있는데. 거기서 어떤 노파가 떡을 팔고 있는 거요. 마침 배도 고프고 해서 노인장, 내 점심 요기나 하게 떡 좀 주십시오. 하고 청했단 말이오. 그러니까 그 할머니가 이렇게 보더니 스님 등허리에 맨 게 뭐요? ~ 이거 금강경 주석서요. ~ 그래요? 그러면 내가 지금 금강경 공부를 하면서 물어 볼게 있는데. 내가 물어보고 당신이 대답을 하면 내가 떡을 공짜로 주고, 모르면 당신이 돈을 줘도 내가 떡을 안 팔겠소. 이랬어.

 

그러니까 금강경 박사니까 잘 됐어요? 안됐어요? 잘 됐죠. 돈 주고 사 먹을라 그랬는데 공짜로 먹게 됐다 이 말이오. 그래 그러시오 그랬어. 할머니가 금강경 18분에 보면 과거심 불가득이요. 현재심 불가득이요 미래심 불가득이라 했는데. 스님은 도대체 어느 마음에 점을 찍으려 하느뇨? 이랬단 말이오. 지금 점심을 먹는다. 점심을 먹는다 하니까 점점자, 마음심자로 해석을 해서 점심을 먹는다 하니까. 과거의 마음도 없고, 미래의 마음도 없고, 현재의 마음도 없다는데. 당신 도대체 어디다가 점을 찍으려고 하느냐? 어느 마음에다 점을 찍으려 하느냐? 이렇게 떡 물었어. 그러니 할 말이 없어졌어. 아이고 그 수백 명의 주석서에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없었단 말이오.

 

아시겠어요? 주석서는 겨우 누가 동산이다 하고 누가 서산이다 하니까 뭐라고 나와 있다? 그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 이렇게 나와 있어서. 동산이다 서산이다 하는데 그게 무슨 산이오? 하면 그건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오. 이렇게 대답을 탁~ 하려고 했는데. 뭐라고 물었냐 하면 누군가 그 산을 남산이다 북산이다 하는데 그 산이 뭐요? 이렇게 하니까 그런 말은 주석서에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다 이거야. 이게 탁 알았으면 남산이오? 북산이오? 이렇게 하면 남산도 아니고 북산도 아니오. 이렇게 대답하면 되겠죠. 그런데 그런 말이 주석서에 없었단 말이오. 그러니 콱 막혀 버리고 말을 못했단 말이오.

 

그러니까 그것도 모르는 놈이 뭐 하러 짊어지고 다니느냐 이거야. 그 무거운 짊을. 거 쓸데없는 짓 하고 다니는데. 밥은 뭐 하러 먹냐? 이거야. 자기 먹는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말이야. ~ 이거 얕보고 왔더니 보통일이 아니죠? ? 절에 스님은 고사하고 길거리에 떡 파는 할머니까지도 도가 이 정도니. 그래 찾아 갔단 말이오. 찾아가서 절을 하고 이 정도면 깨달아야 되는데. 그래도 아심이 있어서는 절을 하기는커녕 방을 빙빙 돌면서. 용담에 왔는데 용도 안보이고 연못도 안 보인다 이거야. 용담은 (용 용, 못 담). 용담이다 해서 용담에 왔더니 연못도 없고 용도 없네. 이랬단 말이오.

 

이렇게 도전을 했어. 그래 그 용담 선사 하는 말이 자네 아직 제대로 못 본거네. 이랬단 말이오. 도전장을 냈는데 자네 아직 눈을 못 떴네. 이러니까. 자기가 무슨 눈을 못 떴는지를 모르는 거요. 그래서 자기가 금강경 주석서에 대해서 눈을 못 떴다. 이 말이오. 당신 아직 못 봤다. 이리 말했어. 아무것도 못 봤다. 이러니까. 내가 뭘 못 봤는데. 내가 눈이 달려 다 보고, 경을 읽고, 주석서를 보고 다 아는데. 그래 자기 얘기를 다 몇 시간을 금강경에 대해서 어쩌구저쩌구해. 그래 다 듣고는. 알았다. 날이 어두웠어. 그래서 가서 자고 내일 얘기하자. 촛불을 줬어. 촛불을 가지고 나가서 신발을 찾는다고 촛불을 딱 들고 내려가는데 선사가 불을 확~ 촛불을 불어버렸어. 촛불을 들고 촛불에 의지해서 훤하던 세상이 촛불을 꺼버리니까 천지가 깜깜해져.

 

그때야 확연히 깨친 거요. 그래서 금강경을 다 불을 살라버리고 그랬다. 금강경에 살았다는거 금강경에 무슨 죄가 있어요? 죄가 없지. 그래서 이분이 나중에 유명한 선사인 덕산선사가 됐단 말이오. 그래서 이 분은 나중에 누가 와서 도를 물으면 어때요? 절대 말을 안 하고 주장자를 놔놨다가 대갈통을 30번씩 때렸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라 이 말이죠. 부처가 뭐니? 도가 뭐니? 다 쓸데없는 상을 지어서 다니는 거다. 이 유명한 덕산방 이러죠.

 

~ 그런 얘기가 여기에, 과거에 얽혀 있지만은. ~ 그 앞에 이미 나와 있죠? 마음마음 하지만은 마음이랄 것이 없어 그 이름이 마음이다. 그러니까 이미 근본 불교에서 뭐라고 했어요? 관심무상. 이렇게 말했죠. 마음 마음하지만 마음을 그대로 관해버리면 어떻다고? 항상 함이 없다. 조금도 가만있지 않는 뜬 구름같이 그렇게 떠도는 거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마음을 붙들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한 생각을 잡고 갖가지 일을 헤매고 있다 이거야.

 

그래서 우리 그 원효대사도 해골바가지 물을 먹고 나서 그렇게 노래를 불렀죠? 한 마음이 일어나니 만법이 일어나고 한 마음이 사라지니 만법이 사라진다. 이렇게. 다 일체가 이 마음이 일으키는 갖가지 번뇌 망상에 의해서 세계가 이루어지고 사라지는 거다. 그러니까 마음이 텅 빈 줄 알게 되면 제법이 텅 빈 줄은 저절로 깨닫게 되는 거죠. ~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