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동의 얼굴 이천동 석불상과 제비원
경상북도 안동의 '이천동 석불상'은 과거 '안동의 얼굴'이었다.
안동 시민의 발인 시내버스 정류장에 이 석불상이 그려져 있었으며, 안동을 대표하는 이미지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지금은 안동이 유림의 고향임을 내세워 '선비'로 바뀌었지만......
이렇게 안동의 얼굴 노릇을 하던 이천동 석불상이 있는 지역은 흔히 '제비원'이라고 불린다. 지역의 이름에 '제비(燕)'가 붙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 안동 연미사 제비원과 연이처녀 이야기
신라시대 고창(古昌)이라고 불린 이 곳에는 당시 원(院)이라고 불리운 여관이 하나 있었다. 이 여관에 8살 때 부모를 여의고 심부름을 하는 '연(燕)'이라는 예쁜 처녀가 있었다. 연이는 인물이 예쁠 뿐 아니라 마음이 고와서 항상 지나는 길손들에게 후대와 적선을 다했다. 방에 불도 따뜻하게 지펴 주고 밥도 후히 담아 주었으며, 빨래까지 빨아주는 연이는 밤늦게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곧바로 자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글을 익히고 내일은 어떻게 하면 손님들에게 보다 친절하게 도와드릴까 하는 궁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는 한편 불심도 대단하여, 새벽에 일어나 청소를 마치고 염불을 해서 지나가는 과객들로 하여금 그 알뜰한 정성과 고운 마음씨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때문에 이웃 마을 총각들도 모두 남모르게 연이를 사모할 정도였다.
이 원(院)의 이웃 마을에 김씨 성을 가진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남을 동정할 줄 모르는 성미여서 거지를 보는 대로 내쫓는 고약한 위인이었다. 이렇게 인심 고약한 김씨집의 총각도 연이에게 장가들고 싶은 마음이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이런 부잣집에서 세상 물정을 모르고 자란 총각도 이 착한 마음씨를 가진 연이 처녀만은 감히 호락호락 범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찌하다가 이 총각이 비명에 죽어 저승에 가게 되었다.
염라대왕이 인사를 받고 한참을 기웃거리며 명부를 뒤적이다가 겨우 이름을 찾아서는 능글맞게 이르는 말이, “아니, 자네는 아직 올 때가 되지 않았는데, 이왕 왔으니 인정이나 좀 쓰고 갈 마음이 없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이에 총각이 대답하기를, “지금 전 가진 것이 없는 걸요.”하는 것이었다.
염라대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엇을 생각하더니, 웃으며 총각을 다시 불러 말했다.
“이봐, 총각! 자네는 세상에 적악(積惡)한 사람이라 다음에는 소로 환생할 것이다. 자네의 창고는 텅 비어 있지만 자네가 사는 건너 마을의 원에 살고 있는 연이는 착한 일을 하여 창고에 많은 재물이 쌓여 있은즉, 그걸 좀 꾸어 인정을 쓰고 가렸다.”
이 말에 그 총각은 많이 놀랐지만 다시 살아서 돌아간다는 기쁨에 연이의 재물을 꾸어 쓰고는 다시 세상에 돌아왔다.
돌아온 즉시 총각은 연이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자기의 재물을 나누어 주었다. 이에 연이는 그 재물을 모두 부처님을 위해 쓰리라 마음먹었는데, 마침 석불이 비바람에 시달리고 있어 도선국사로 하여금 석불을 중심으로 하여 큰 법당을 짓도록 했다. 그러나 이 공사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어서 5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다.
법당을 짓던 마지막 날, 기와를 덮던 와공(瓦工)이 그만 잘못하여 높다란 지붕으로부터 떨어지니, 온 몸뚱이가 마치 기왓장이 깨진 것처럼 산산조각이 되었고, 혼은 제비가 되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이에 이 절을 '제비사[燕飛寺]' 또는 '연미사(燕尾寺)'라 부르고, 이 곳을 제비원 또는 연비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큰 재산을 기부해 절을 지었던 '연(燕)' 낭자는 서른 여덟 살 되던 해에 죽었는데 낭자가 죽던 날 저녁 천지가 진동하는 듯 한 소리가 나더니 큰 바위가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지금의 석불이 나타났다고 한다. 공덕을 쌓은 '연(燕)' 낭자가 부처로 태어났기에 사람들은 불상을 미륵불이라 여기고 치성을 드린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 불상이 바로 '제비원 미륵'으로 불려 지는 이천동 석불상이다.
원(院)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전해온다.
조선 시대에 영남 지역에서 충청도나 경기도, 또 서울로 갈 때에는 반드시 안동을 거쳐 소백산맥을 넘어야만 했는데, 안동의 초입에 '연비원(燕飛院)'이라는 여행자들의 숙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비원'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전설의 배경이었던 '연(燕)', 즉 '제비'에 숙박시설인 원(院)이 결합 되어 ‘제비원’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 안동 이천동 석불상
<마음씨 착한 연낭자가 부처로 변했다고 전해지는 안동 이천동 석불상, 보물 제115호, 경북 안동시 이천동 소재>
이천동 석불상은 고려시대에 유행하였던 거불(巨佛)들 중의 하나이다.
당시 자신의 힘을 과시하던 많은 지방 호족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지방 호족이 자신의 세력 과시의 차원에서 조성한 불상일 것으로 생각된다.
약12m에 달하는 거대한 자연석에 선각(線刻)으로 몸통을 새기고, 머리는 다른 돌로 조각하여 얹어 놓은 것이다.
○ 미륵바위와 욱바위 이야기
이천동 제비원을 넘어 가면 욱바우골이 있다. 제비원의 미륵불이 만들어지기 전, 큰 바위 둘이 서로 그 자리에 가서 좌정(坐定)하려고 하였으나 현재의 미륵이 먼저 가서 좌정하는 바람에 바위 하나는 지금의 욱바우골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미륵불은 자리를 먼저 잡았기 때문에 불도(佛徒)들이 받들어 모시는 미륵불이 되었는데, 이 바위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바위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이것을 원통하게 여긴 이 바위는 울면서 나날을 보내게 되었고 사람들에게는 우는 바위로 알려졌다. 사람들은 우는 바위라고 하여 이 바위를 욱바위라 부르고 욱바위가 있는 골을 욱바우골이라고 한다.
연미사는 또한 "성주본향 어디메냐, 경상도 안동땅의 제비원이 본이더라‥‥" 하는 성주풀이의 발상지일 뿐더러 "선어대 제비원, 명승고장에 끼쳐 주신 찬란한 문화‥‥"로 시작되는 안동시민의 노래에 나올 만큼 안동의 상징과 신앙의 대상이 되어 정신문화의 한 기둥이 되고 있는 곳이다.
○ 제비가 되어 날아간 목수
제비원에는 난간이 있었다. 목수가 이 절을 훌륭하게 짓기 위하여 난간 집을 짓기로 구상을 하였다. 목수는 절의 밑 부분부터 정성을 들여 차례차례 지어 올라갔다. 절을 짓는데 너무 몰두했기 때문에 절을 다 지은 뒤에 내려 갈 방법은 생각하지 않았다.
목수는 처음에 구상한대로 아주 높고 멋진 난간 집을 지었다. 그러나 워낙 높은 집을 지었기 때문에 절 밑으로 내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붕의 난간 위에서 제비가 되어 날아갔다고 한다. 목수가 절을 다 짓고 제비가 되어서 날아 나갔다고 하여 지금도 연미사를 제비원으로 부르고 있다.
○ 두 목수의 제비원과 법룡사 절짓기 시합
안동시에 법룡사(法龍寺)라는 절이 있었다. 신라 때 지어진 절이라고 하는데, 6.25사변 때 타버린 것을 다시 중수했다.
법룡사 뒷편에 천년도읍지(千年都邑地)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던 걸 보아 사찰의 역사가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옛날에는 다래 덩굴이 절 둘레를 에워싸고 있어서 사람들이 기어 들어가고 기어 나왔다고 한다.
법룡사의 유래담은 제비원의 그것과 관련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옛날에 절을 짓는 기술이 비슷하게 뛰어난 두 목수가 있었다. 기술이 막상막하였기 때문에 서로 경쟁의식이 강했으며 이 나라 제일의 큰 목수가 되려고 늘 애썼다. 그러던 차에 법룡사와 제비원을 지으면서 내기를 하기로 했다.
“자네가 법룡사를 먼저 짓느냐, 내가 제비원 절을 먼저 짓느냐 내기를 하세. 그래서 누가 이 나라 제일의 목수인지를 판가름하세, 자네 생각은 어떤가? 나는 자신 있네”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일세. 내가 법룡사를 먼저 지어서 뒤편에다가 '천년도읍지'라는 현판을 달면, 아마 그 서기(瑞氣)가 제비원까지 뻗칠 것이니 그렇게 알게.”
“자네 큰 소리 치지 말게. 나는 제비원을 법룡사보다 먼저 짓고 한티재를 넘어 올 테니 두고 보세.”
이렇게 약속을 하고 각자 열심히 절을 짓기 시작했다 제비원 절을 짓는 사람이 절을 다 완성하고 한티재 위에 막 뛰어올라가 보니, 법룡사 뒷편에 '천년도읍지'라는 현판 글씨가 광채를 내고 있었다.
그 서기가 한티재까지 비친 것이다.
법룡사를 지은 목수가 경쟁에서 이긴 까닭에 “이놈아!”하고 큰소리로 호령을 하는 것이었다. 제비원을 지은 목수는 자기가 경쟁에서 진 것을 깨닫고는, “내가 자네한테 졌다. 그러나 내가 죽어도 내가 지은 절이 이 세상에 남아 있는 한 내 이름도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소리치며 자기가 지은 절의 지붕 위에 올라가서 밑으로 뛰어내렸다. 그런데 지붕에서 뛰어내리자마자 그는 제비가 되어 푸른 하늘 위로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뒷사람들이 이 절의 이름을 제비가 날아갔다 하여 '연비원(燕飛院)'으로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