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威儀寂靜分 : 위의가 맑고 고요하다
須菩提 若有人言 如來 若來若去若坐若臥
수보리 약유인언 여래 약래약거약좌약와
是人 不解我所說義 何以故 如來者
시인 불해아소설의 하이고 여래자
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
무소종래 역무소법 고명여래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는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며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한다’ 하면 이 사람은 나의 설한 바 뜻을 잘 알지 못함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여래란 어디로부터 온 바도 없으며 또한 가는 바도 없으므로 여래라 이름 하느니라.”
※ 중관(中觀) : 중도적으로 관찰하고 분석한다는 의미
‘중관(中觀)’이라는 용어는 <중론>에 대한 주석서인 <중관론소>에서 나온 것으로 ‘중도적으로 관찰한다’ 또는 ‘중도적으로 분석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중도는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불고불락(不苦不樂)과 같이 고행주의와 쾌락주의적 수행관 모두를 비판하는 ‘실천적 중도’이다.
다른 하나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비유비무(非有非無)와 같은 ‘사상적 중도’이다. 중관 논리에서 ‘중도적으로 관찰한다’고 하는 것은 후자를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중도는 ‘양극단이 모두 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은 극단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중관학에서는 흑과 백의 양극단 모두를 부정한다. 흑도 틀리고 백도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회색이 옳다는 말이 아니라 흑과 백이 모두 틀렸음을 알려줄 뿐이다.
이것이 중관학에서 말하는 진정한 중도의 뜻이다. 중도의 ‘중’자에는 이렇게 ‘양극단 모두 틀렸다’는 비판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텅 비어 있음’을 뜻하는 ‘공’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중관학은 흑백 논리적으로 작동하는 우리의 생각에서 모순을 지적해 낸다.
중관 논리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우리의 생각은 논리적으로 작동한다. 개념을 ‘설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판단’을 만들고 ‘추론식’을 작성함으로써 논리적 사유가 진행된다.
그러나 반논리학인 중관학에서는 공과 연기의 교설에 의거하여 개념의 실재성을 비판하고, 사구부정(四句否定)의 논리에 의해 모든 판단의 사실성을 비판하며, 상반된 추론을 제시함으로써 결국 논리적으로 작동되는 우리의 사유 그 자체를 모두 비판한다. 중관학은 이런 방식으로 일체의 존재는 물론이고 일체의 판단, 일체의 사유를 모두 비판한다. 중관학은 대승불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용수(150~250년경)에 의해 창안됐다.
※ 사구부정(四句否定) : 사물에 관해서 그 진상을 알리기 위하여 몇 번이고 부정을 거듭하여 유무(有無)의 견해를 명백하게 해주는 변증법적인 문답법을 말하는데, 사구분별(四句分別), 또는 사구백비(四句百非)라고도 한다. 중관파에서는 통상 사구분별의 각 구는 모두 부정된다.
사구는 정립(定立), 반정립(反定立), 긍정종합(肯定綜合), 부정종합(否定綜合)을 말한다. 즉 유(有)와 공(空)으로 만유 제법을 판정할 때에, 제1구의 유(有)는 정립, 제2구의 공(空)은 반정립, 제3구의 역유역무(亦有亦無)는 긍정 종합, 제4구의 비유비공(非有非空)은 부정 종합이며, 이러한 사구를 몇 번이고 부정하는 것을 백비(百非)라고 한다. 예를 들면 아함 경전에서는 ‘세계는 상주한다. 무상이다. 상주 또는 무상이다. 상주도 아니고 무상도 아니다’ 등의 질문에 대해 결코 답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것은 사구의 어느 것이든 특정한 견해를 지니는 것을 부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부처님은 당시 외도들의 질문 중 세상의 상주와 무상에 관한 사구, 세계의 유한과 무한에 관한 사구 및 혼과 신체가 동일한가, 다른가, 등 14개항의 질문에 대해 대답하지 않은 일은 잘 알려져 있다[十四無記]. 중론에서는 ‘일체는 진실이다. 혹은 비진실이다. 진실이고 비진실이다. 비진실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라고 하였다.
※ 여래(如來) : 부처의 여러 칭호 가운데 하나이자 역사상 석가모니가 자신을 가리킬 때 가장 자주 사용한 칭호.
그 원어의 정확한 의미는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불교 주석서에는 대략 8가지의 설명이 제시되어 있다. 가장 널리 채택되는 해석은 '그렇게(tathā 如) 간(gata 去) 이'라는 해석과 '그렇게(tathā 如) 도달한(āgata 來) 이'라는 해석이며, 양쪽 모두 역사상 석가모니가 과거 또는 미래에 깨달음을 체험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여거'(如去)라는 번역어가 쓰이는 경우는 매우 제한되어 있다. 후기 대승불교에서 여래는 모든 사람에게 내면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본질인 불성(佛性)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즉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진여(眞如 tathata)와 같은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모든 중생은 그러한 여래를 자신 안에 품고 있기 때문에 깨달음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여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참된 상태로서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궁극적 실재를 지칭하기도 한다.
※ 위의(威儀) : 규율에 맞는 행동. 즉 행(行), 주(住), 좌(坐), 와(臥), 네 가지 동작이 모두 계율에 어긋남이 없어서 위엄이 있는 것.
※ 적정(寂靜) : 마음에 번뇌가 없고, 몸에 괴로움이 사라진 해탈과 열반의 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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