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별
지루한 밤은 가고
새 아침은 밝아온 듯하건만.
지평선에 보이는 검은 구름이
다가오는구나.
영원한 밤의 사절이
찾아오는구나.
벌써 떠나야 할 시간이라고
이 세상 하직할 영이별 시간이라고
값없는 시절과 헤어짐은
아까울 것 없건만
밝은 앞날 보려는 미련
달랠 길 없어.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가나.
걸머지고 걸어논 보따리는 누구에게 맡기고
가나.
정든 산천과 갈라진 겨레는
또 어떻게 하고.
때는 늦었고 남은 건
마지막 순간 뿐
여한 없이 최선 다해 받들고 가자.
삶을 안겨준 조국의 거룩한 뜻 되새기며.
2008. 1. 1.
황장엽
황장엽(黃長燁, 1923년 2월 17일 ~ 2010년 10월 10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주체사상의 이론가로 활동하였으나, 1997년 대한민국으로 망명하였다. 북한에서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인물 중 최고위급 인사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정일 정권에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하다 2010년 10월 10일 87세로 사망하였다. '주체사상의 대부, '김정일의 개인교사'등의 별명을 가지고 있다.
◇ 주요 경력
1923년 : 조선 평안남도 강동 출생
1948년 : 김일성 종합대학 석사
1952년 : 모스크바 대학 철학
1954년 :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1959년 : 당 선전 선동부 부부장
1965년 : 김일성 종합 대학 총장
1984년 : 당 중앙위원회 비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1993년 : 최고 인민회의 외교위원회 위원장,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
1996년 : 북한 권력 서열 13위
1997년 : 사상투쟁, 권력투쟁에 밀려 망명
1998년 : 국가정보원 통일정책연구소 이사장, 탈북자 동지회 고문
2003년 : 전주대학교 석좌 교수
2008년 : 국가 안보전략연구소 상임고문
◇ 출생
일제강점기 시절 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평양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가서 주오 대학 야간 전문부 법과에서 공부하였으나 일본 제국 패망으로 강제소환되어 졸업을 하지는 못했다. 약 1년 6개월 동안 강원도 삼척 탄광에서 징용을 하던 중 해방을 맞이하였으며, 그 후 서울을 거쳐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갔다.
◇ 김일성 종합 대학교 교수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평양공립상업학교 교사로 재직하였고 김일성대학에 재학 중인 1949년에 모스크바 대학교로 유학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을 공부하였고,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54년에 귀국한 후에는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교수직을 맡았으며, 1965년에는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에 임명되었고, 김일성 유일사상체계 확립에 관여하였으며, 김정일을 후원하여 주체사상 개인강사를 맡기도 했다.
◇ 당 선전 선동부 부부장
김일성 유일통치체제를 전당과 전사회에 구현하였고, 제1부-선전지도부, 제2부-교양지도부, 제3부는 선동선전부, 제4부는 출판보도부문과 문화예술부문 지도부 운영 했다.
◇ 북한에서의 정치 활동
1970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된 이후, 최고인민회의 의장(1972년 ~ 1983년), 1980년 당비서, 1984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1987년 사회과학자협회 위원장, 로동당 국제담당 비서 등 여러 요직을 겸임하게 된다. 그리고 1970년대에 주체사상을 체계화하는 역할을 했고 이를 제3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해외에 주체사상 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이후 중국[누가?]이 황장엽에게 30년 동안 개혁 개방을 같이 하자며 "너희 그러다가 진짜 망한다. 이제라도 정신 차려서 김정일을 중국에 보내 달라!"고 했고, 이에 황장엽은 김정일에게 중국에서 오라고 하는데 한번 가보라고 했다가 "에~ 그 나쁜 개XX들! 무엇때문에 중국에 가겠는가?"라며 욕하던 김정일에 의해 당내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 주체사상의 아버지
김일성 대학 총장 10여년 역임
공산당 노동당 비서 10여년 역임
북한 사상 창립과 확립
권력투쟁에 패배 대한민국으로 망명 북한 체제 비난
망명과 대한민국에서의 활동
1997년 주체사상에 관한 강연을 위해 일본을 방문한 직후에, 베이징에서 김덕홍과 함께 대한민국 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하였다. 그의 수기에는 망명 이유를 조국(북한)의 체제에 의분(義憤)을 느껴 그 변혁을 도모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소련의 붕괴와 맞물려 자신의 담당하던 당 국제사업의 실패가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망명 후에는, 각종 강연을 통해 김정일 정권의 타도를 주장하였으나 이후 김대중 대통령시절에 진행된 햇볕정책의 영향으로 그의 주장은 정부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10년간 정부에 의해 활동제한조치를 당해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에 놓였다가[5]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해제되었다.[6] 이후 사망할 때 까지 미국의 보수인사들과 함께 김정일 정권 타도와 북한의 인권상황을 폭로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황장엽이 1997년에 한국으로 망명한 직후 당 간부들을 상대로 한 비밀연설에서 황장엽을 “개만도 못하다”고 격렬하게 매도했다고 일본 마이니치신문이 2010년 4월 4일에 보도했다.
자신이 기초를 다진 주체사상이 북한에서 김일성·김정일 숭배를 위한 봉건사상으로 변질됐다고 비판했다. ‘개인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사회정치적 생명은 무한할 수 있다’는 주체사상의 사회정치적 생명관을 김 부자가 ‘수령 절대주의’로 왜곡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공개 강연이 되고만, 지난달 30일 <자유북한방송>의 ‘황장엽의 민주주의 강좌’에서 “개인은 죽어도 집단은 영생합니다”라고 강조하는 등 개인주의보다는 집단주의 정치철학을 중시했다.
◇ 사건
2006년 12월 21일에 김 모씨가 황장엽과 관련된 자유북한방송의 사무소에 '황장엽은 쓰레기 같은 그 입을 다물라, 배신자는 대가를 치른다.'라고 하는 내용의 협박문과 붉은 그림도구가 칠해진 황장엽의 사진, 도끼등이 들어간 소포를 보낸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2008년 9월 27일 경찰에 체포되었다. [7]
2009년 6월 1일에 김현희를 12년 만에 만났고 함께 투쟁하자고 전했다.[8]
2010년 4월 4일에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인 납북자들에 관한 논의를 한다.[9]
2010년 4월 20일 황장엽을 살해하라는 지령을 받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남파된 간첩 2명이 검거됐다.[10]
2010년 10월 10일에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11]
대한민국 재산 및 동거인과 유산 분쟁
87세 사망한 황장엽은 대한민국에 [12]40대 아내와 11년전 둘 사이에 낳은 11살 아들이 있으며 황씨는 서울 강남구 노현동 빌딩 등 상당한 유산을 남긴 것으로 전해졌다. 11년 전부터 동거하던 당시 [13]30대 아내와 아들이 있으나 실제 결혼하지 않아 유산분쟁이 빚어질 개연성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라알려 졌다.
◇ 암살 미수
신원을 알 수 없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군 상장은 대청해전에서의 패배로 북조선이 뒤숭숭해지자 황장엽을 암살하도록 공작원 김 모씨와 동 모씨 등 2명에게 지시했다. 이 공작원들은 탈북자들 틈에 섞여 대한민국에 유입되었으며 대한민국에 도착하긴했으나 탈북자 심사당시 남파된 목적이 발각되어 체포되었으며 현재 이들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수감되었고 2010년 7월 1일 10년형이 확정되었다.
◇ 최고등급 1등급 국민훈장 추서
이명박 정부에서 그를 기리어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를 할 예정이며, 국립 현충원 안장 논의가 검토되고 있다.
2010년 10월 12일 이명박 대통령은 황장엽에게 대한민국 최고 등급인 1등급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확정 하였다. 유관순이 2단계 아래인 3등급 국민훈장에 비하면 파격적인 것이며 이로써 황장엽은 국민훈장과 함께 대한민국 대전 현충원에 안장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었다.
◇ 비판
지만원은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김정일을 비방한 것이 업적이라면 이 나라에는 황장엽보다 더 열심히 김정일을 욕한 애국자들이 많다. 그가 통일을 위해 남한에 왔다면 그는 북한에서 잘 나가고 있었을 때 왔어야 말이 된다. 황장엽은 경제파탄등의 사고들로 인기를 만회하려던 김영삼의 정치적 탈출구로 이용된 사람에 불과했다며 비판했다. 김일성에게 충성하면서 73세에 이르기까지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김정일에 잘못 보여 숙청당할 위기에서 가족을 버리고 혼자라도 살아야겠다며 정치적으로 망명한 사람을, 남한에서도 노골적으로 김일성을 찬양하는 반면, 그를 숙청하려했던 김정일에게 욕을 퍼붓는 간사한 사람을 놓고, 1등 애국자라 하면서 호국영령의 반열에 세운다는 비판을 하였다.
◇ 가족 관계
북한 가족 부인1명 딸2명 아들1명
부인 : 박승옥
딸 : 2명
아들 : 1명
대한민국 가족 부인1명 딸1명 아들1명
명목적인 딸(수양딸) : 김숙향(68살)
사실혼(동거) 관계 : 한국인 부인(49살)
사실혼(동거) 관계 여자에게서 출생 : 아들(11살)
대한민국 내에는 딸인 김숙향(68살·황장엽민주주의건설위원회 대표)씨와 황장엽에게는 사실혼 관계인 한국인 부인(49살), 11여년전 황장엽 (당시77살)에 동거 하던 여자(당시38살) 사이에 낳은 실제 아들(11살)이 있으며 아들은 현재 미국 현지 초등학교 5학년에 유학중이다. 대한민국에 많은 유산을 가진 황장엽은 호적에 부인(49살)과 아들(11살)이 올라 있지 않은 상태여서 공식적인 딸이 김숙향(68살)과 유산 분쟁이 빚어질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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