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천상병 시몬의 귀천(歸天)
천상병(1930-1993) 시인이 작고한 지 꼭 5년이 되었다. 그의 부음을 듣고 의정부의 의료원으로 찾아가던 길에 길갓집 울안에 화사하게 피어있는 라일락을 보며 저 세상 가는 날을 잘도 택했다고 감탄하던 일, 빈소에 모인 친구들이 대낮에 취해 죽음을 예감한 시 ‘귀천’을 외며 고인의 기행을 과장하던 일 등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평생 돈벌이도 돈도 필요 없어 늘 빈손으로 다니던 “천상 시인”인 천상병 시인이 죽어서도 천상 시인이었음을 말해주는 상징적인 사건은 바로 그날 밤 일어났다.
조위금으로 들어온 5백여만 원은 천 시인이 평생에 만져보지 못한 큰돈이었다. 그의 장모는 이 큰돈을 둘 곳을 몰라 쩔쩔매다가 가장 안전한 곳으로 연탄불을 넣지 않은 아궁이를 선택했다. 한데 고인의 아내는 봄추위가 싫어 느닷없이 아궁이에 연탄불을 넣은 것이다. 타다 남은 몇 푼은 건졌지만 조위금은 그대로 재가 되었다.
그는 ‘소릉조(小陵調)’에서(소릉은 두보의 호이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하고 돈이 없음을 걱정했었는데 그 걱정이 쓸데없는 걱정이었음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듯 빈손으로 저승으로 갔다. 과장해서 말한다면 ‘귀천’을 통하여 예감한 죽음을 20년 뒤에 실천한 것이다(‘귀천’이 발표된 것은 1970년이다). ‘주일’이라는 부제가 붙은 시 ‘귀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귀 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그에게 세상살이는 잠시 동안의 소풍이었고 귀천은 그 소풍을 끝내고 영원히 머물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또 돈도 권력도 없었지만 그가 소풍하는 세상을 그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 죽음은 슬프고 어두운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밝고 화사한 행복의 시작이 된다. 그리하여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와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의 맑고 고운 이미지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천상병 시인을 처음 만난 것은 20대초, 르네상스라는 관훈동에 있는 고전음악 감상실에서였다. 문단에 갓 나와서 였는데, 그곳에 단골로 다니는 유종호(문학평론가)를 만나러 가보면 거의 늘 우중충한 얼굴을 하고 구석에 앉아있었다. 이미 그는 문단 초년병인 나와는 달리 시와 평론으로 상당한 문명을 얻고 있을 때였다. 얼마가 지나 서로 낯이 익으면서 역시 단골들인 임재경(전 한겨레신문 부사장), 황명걸(시인), 박성룡(시인) 등과 시장바닥으로 좁쌀술을 마시러들 다니게까지 되었지만 그리 깊은 얘기는 나누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도 그가 서울 상대에 다니지만 학교공부에는 별반 관심이 없다는 것, 늘 주머니가 비어있다는 것, 일정한 거처가 없이 이집 저집 떠돌며 먹고 잔다는 것, 술 한잔 생긴다면 턱없이 좋아한다는 것 정도였다. 더러 함께들 명동으로 진출하기도 했는데 천상병 시인은 만나는 사람 아무한테나 손을 내밀어 술값을 얻어냈고 술만 마시면 아이들처럼 즐거워했다. 그리고 내가 시골로 전전하다가 10년이 지나 만났을 때 그는 조금도 변하지 않아, 여전히 거처나 직장이 없이 동가숙 서가식으로 살고 있었고, 주머니는 늘 무일푼이었다. 술만 생기면 턱없이 좋아하는 것도 여전했다.
우리가 더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김관식 시인 덕이 크다. 기행으로는 한 수 위인 그를 천 시인은 동병상련으로 이해했고, 막 상경해서 갈 데가 없는 나는 김 시인의 문간방을 공으로 얻어들어 살고 있었던 것이다. 툭하면 천 시인은 홍은동 산중턱의 김 시인 집을 찾아왔고, 그가 찾아왔기에 벌어지는 술자리에는 나도 반드시 참석을 했다. 천의무봉의 천 시인은 김 시인 집에 오면 마치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행세를 했는데, 그런 그를 김 시인이 더없이 좋아했다.
이른바 동백림 사건이라는 것이 일어난 것이 바로 이때다. 서독 유학생 가운데 호기심으로 동독을 다녀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모두 간첩으로 몰아 때려잡은 사건으로, 천 시인은 그 주모자 중의 하나와 서울 상대 동창이었다. 천 시인은 그 사실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다 해서 불고지죄로 구속되었다. 그 사정은 이러하다.
천 시인의 동창인 서독 유학생이, 가끔 찾아가 술값을 뜯는 천 시인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면서 동독을 다녀온 사실을 고백했다. 다녀왔을 뿐 그밖의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뒤가 켕겼던 모양이다. 술값을 뜯는 값을 하고 싶은 천 시인은 아는 정보부원이 있으니 그와 상의해서 무사하게 되도록 해주겠다고 장담하고, 실제로 정보부에서 책자를 만드는 친구에게 동독에 다녀온 친구가 있는데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어보았다. 물론 술자리에서였고, 친구는 동독에 좀 다녀오면 어떠냐고 무심하게 넘겼다. 천 시인은 또 술값 얻는 재미에 하회를 묻는 서독 유학생에게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일이 터져 잡혀 들어간 서독 유학생은 천 시인을 통해 당국에 고지했다고 실토했고, 천 시인과 그 친구 정보부 직원은 불고지죄로 잡혀 들어가 하나는 재판을 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나고 하나는 직무유기로 파직당했다.
4개월여 갇혀 있다가 나온 천 시인은 저간의 일에 대해서는 일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이 빠져있는 것 같았고 늘 불안해 했다. 옛날의 재치와 활기도 찾을 수가 없었다. “정보부에 잡혀가더니 등신이 다 돼 나왔어.” 그가 없는 데서 김관식 시인이 하던 말이다. 천 시인이 이 체험을 시로 쓴 것이 4년이 지난 71년인 것을 보면 그가 오랫동안 두려움에 떨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젠 몇 년이었는가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내 살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내 마음 하늘
한편 가에서
새는 소리치게 날개 편다
─‘그날은’전문
와이셔츠같이 아이론 밑에서 당한 날들, 무서운 집 뒷창가에서 여름 곤충밖에 손을 내미는 것이 없었던 두려움의 날들… 어쩌면 진실과 고통 그 어느 쪽이 강자인지를 내 살과 뼈가 안다는 소리조차 공연한 객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 그의 “마음 하늘 한편 가에서 새가” 날개를 편 것만은 분명하다. ‘귀천’도 사건 이후의 작품임을 감안할 때, 그가 그 시련의 과정에서 귀천의 도를 터득했다고 보는 것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는 한때 홀연히 자취를 감춰, 사상 초유의 ‘새’라는 살아있는 사람의 유고시집을 만들게 하는 해프닝도 벌였지만, 다시 돌아와서는 친구를 찾아다니며 술값을 뜯고 주옥 같은 시를 쓰다가, 친구들이 모아준 저승 가는 노자도 이승에 버린 채 갔다. “노을빛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이 손짓을 하니까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가버린 것이다. 지금 그는 저승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말하겠지, 이승이 참 아름답더라고.
신경림/시인
'좋은글 > 피와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속의 탐욕과 분노... (0) | 2010.10.26 |
---|---|
내 人生 내가 스스로 찾아서 살자 (0) | 2010.10.16 |
[스크랩] 조선 명기들의 사랑과 시와 풍류 (0) | 2010.10.14 |
이별.....황장엽 (0) | 2010.10.14 |
십만양병설 (0) | 2010.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