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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지독한 사랑

seongsoo 2013. 2. 21. 07:32

남존여비 사상이 극도로 활개를 치던 때. ‘여자와 북어는 수시로 두드려야 한다.’는 속담대로 집집마다 계집 두드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던 조선시대때 기생은 참으로 묘한 신분이었다.

 

명목상으로는 팔천-(여덟 가지의 가장 낮은 천민: 사노비, 광대, 무당, 백정, 승려, 기생, 상여꾼, 공장)에 들어가는 가장 낮은 신분의 천민이었다.

그러나 신분만 천민이었지 어느 양반댁 규수 못지않은 호사를 누릴 수도 있었다.

당장 경국대전에서는 기생만큼은 양반집에서도 함부로 못 입는 금은수식이나 능라의복을 걸칠 수 있도록 했다.

노리개와 장신구들은 첨단의 패션을 걸었다.


업무는 술자리 시중이었으나 그 대상은 고관대작이나 상류층인사들이었다.

그래서 글과 춤과 노래와 악기와 서화에 능해야 했고 학식 또한 뛰어나야 했다.

당자의 노력에 따라 능력이 뛰어나면 대우가 달라졌다.

‘명기’라는 칭호가 붙으면 고고한 절개를 지키는 이도 있었고 뭇남성들을 쥐고 흔드는 수완을 발휘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돈을 싸들고 찾아오더라도 풍류도 모르고 시문을 모르는 멋대가리 없는 사내들은 상대도 안 해주고 돌려보내니 남자들 애간장을 태우는 일도 잦았다.

그러니 신분은 천민이었으나, 사는 방법은 일류의 양반댁이 부럽지 않았고 나라에서도 그걸 인정해 주었다.

홍랑으로서는 혈혈단신이었던 자신의 입장으로서는 그 시대 최고의 자유인이 되기를 선택한 셈이었다.


기생에게도 등급이 있었다.

1패, 2패, 3패가 있는데

1패란 궁중에 나아가 여악(여자 악공)으로 가무를 하는 일급기생이다.

2패는 관가나 재상집에 출입하는 기생이다.

이 중 겉으로는 기생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은근짜’라고 하여 내놓고 몸을 팔지는 않지만 은밀히 매음도 하는 기생도 있었다.

3패는 술좌석에서 품위있는 기생의 가무하는 재주가 없으니 잡가나 부르며 내놓고 매음하는 유녀(노는계집)다.

지방 기생은 2패나 3패에 속했다.


- 고죽 -

조선 선조 때 팔문장이 있었다.

당시 조선 최고의 문장가들이었다.

조선실록에 보면 崔慶昌(최경창), 宋翼畢(송익필), 李山海(이산해), 白光弘(백광홍), 崔岦(최립), 李純仁(이순인), 尹卓然(윤탁연), 河應臨(하응림)이 그들이다.

또는 唐詩(당시)를 짓는 게 이백과 두보 등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하여 삼당파 시인이라 불리운 사람들이 있었다.

삼당시인은 고죽 최경창, 손곡 이달, 백광훈(앞의 팔문장의 백광홍은 백광훈의 兄이다.)으로 또 다른 일파를 이루었다.

최경창의 시는 淸淑(청숙)하다 했고 이달의 시는 孤絶(고절)한 특징이 있다하였으며 백광훈의 시는 麗雅(여아)하다고 했단다.

 


1555년 17세 때 을묘왜란(임진왜란 전)이 일어나 왜구가 영암을 포위하고 청년들을 붙잡아 가자, 어린 고죽과 마을 사람들은 배를 타고 달아났다.

그러나 이내 왜구가 배를 타고 쫓아 왔다.

고죽은 옥퉁소를 꺼내어 '사향가'를 불렀다.

마침 달 밝은 밤이라 그 소리를 들은 왜구들은 모두 고향 생각에 젖게 되었고, 아울러 신선이 하강한 것으로 착각하였다.

넋을 잃고 듣느라고 포위망이 허술해지는 틈을 타 재빨리 달아나 살아날 수 있었다 한다.

문장에도 뛰어나 이이(李栗谷), 정철, 송익필 등과 함께 삼청동에서 어울려 몇 날 낮과 밤을 지새우며 시문으로 문답하였다 하니 그의 재주는 하늘이 내린 듯하다고 하였다.


고죽은 1568년(선조1) 우리 나이로 서른 나이에야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치다가, 그 5년 후인 35세 되던 해인 1573년(선조6)에 함경도의 북평사로 경성도호부에 부임하면서 홍랑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북평사란 조선 때 국경지방이었던 함경도에만 있었던 북병영에 딸린 정육품 문관으로 북병사를 보좌하는 참모벼슬이었다.

즉 병사가 사령관이면 평사는 부사령관 정도 되는 벼슬이었다.


 

홍랑은 자리를 옮겨 최평사의 옆으로 갔다.

‘네 속을 다 알겠다.’

긴 말이 필요 없었다.

‘자네 얘기야 익히 소문을 들어 다 아는 바이지만 이리도 능할 줄은 몰랐네.’

오늘날 말에도 있지 않은가?

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단다.

홍랑은 그냥 그의 여자가 되었다.

그냥 그렇게 되었어도 아무도 뭐라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조선 최고의 문장과 경성 최고의 기생이 만나는 걸 누가 뭐라 할 건가?

명기 황진이가 그랬고, 명기 일타홍이 그랬고, 명기 매창이 그러하지 않았는가?

명기는 제 눈에 차야 님을 맞는다.

춘향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었지 않았는가?


최경창은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의 문장은 그런 그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말수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말 한마디를 해도 홍랑의 폐부를 적셨다.

홍랑의 모든 것을 다 알고, 다 느끼고, 다 받아 주었다.

홍랑은 어미를 잃고 난 후 처음으로 맛보는 혈육같은 정을 느껴졌다.

텅 빈 가슴 한 켠에 어두운 그림자만 남았던 그림을 차츰 지워나갈 수 있었다.

홍랑에게 고죽은 아버지이자 그녀만의 남자였다.


일설에는 그들 사이에 아이가 하나 있었다 하는데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고죽이 서울로 돌아오며 입적시켰을 거라는 얘기도 있고 어려서 죽었다는 얘기도 있다.


- 이별 -

2년의 세월은 그리 흘렀다.

꿈보다 더 달콤한 세월이었다.

관직이란 그런 것.

2년의 임기가 끝나면 내직으로 순환 근무를 해야 한다.

경성 땅에서는 아직 이른 봄.

고죽이 가야 한단다.


말 없는 고죽의 가슴이야 어찌 타들어가도 상관없다.

남자는 참을 만하다.

서울 가면 자식도 있고 아내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홍랑의 속은 말도 못한다.

눈물로 며칠을 새우며 이별을 아쉬워해도 나랏님의 부름에는 거역할 수는 없는 일..

‘날 잊지 않으실 거지요?’

다짐에 다짐을 받아도 맘 놓이지 않는 말 뿐인 것을........


함경도는 변경지방이다.

함경도는 원래 고려 때까지는 영흥과 길주의 이름을 따 영길도라 불렀다.

태종 때 이성계가 머물던 함주를 함흥부로 승격, 함흥과 길주를 따서 함길도라 하였다.

세조 때는 이시애의 난으로 함흥부가 함흥군으로 강등되는 바람에 영흥부로 본영을 옮겨, 영흥부와 안변도호부를 따서 영안도가 되었고, 다시 중종 때 함흥부와 경성도호부의 이름을 따서 함경도가 되었다.

내란도 외침도 많은 이곳은 조정에서는 첨예한 관리대상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함경도 지방에만 일부러 북병사와 북평사란 관직을 만들어 병력을 관리하게 하였다.

제일 큰 문제는 치안이 불안하여 인구 감소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양계(평안도, 함경도)지방 사람들은 그 곳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법을 만들었다.

그걸 ‘양계의 금’이라 했다.

일개 기생이 그 법을 어겼다가는 아무리 빽이 좋아도 중한 벌을 받아야 했다.


떠나는 날

경성 땅에서 쌍성(영흥) 땅이 어디인가?

홍랑은 함경도 최북단 경성에서 최남단 쌍성(영흥)땅까지 따라왔다.

1,000리(400Km)길이다.

더 밑으로는 그 놈의 나라 법이 무서워 따라 올 수가 없었다.

쌍성(영흥) 넘어 강원도로 가는 고갯길.

함관령이다.

이제 정녕 이별의 시간이었다.


홍랑은 문득 함관령 고개 길가의 버들가지 하나를 꺾어 고죽에게 주며 이리 읊었다.


묏버들 가려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는 창 밧긔 심거 두고 보쇼셔.

밤비에 새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쇼셔.


옛말이라 어렵다면 현대말로 한 번 풀어 보자.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 여기소서


조선 최고의 연정가다.

사람의 애간장을 다 녹이지 않는가?

그냥 듣고 나서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 같다.

교과서에도 나와 있다.

현대의 어떤 시가도 이런 정염의 속뜻을 나타낼 말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이게 뭔가?

그냥 불이다.

불씨 꺼뜨리지 말고 두고두고 잘 살려 놓으라는 얘기다.

언제든 타오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얘기다.

그러면서도 전혀 속되지 않고 차원 높은 애정이 흐르듯 그대로 전달된다.

조선이란 극심한 통제의 시대에 은유로 나타낼 수 있는 최고의 사랑시다.


조선후기 기록인 ‘성호사설’에 보면, 남녀 간에 길을 떠날 때 동구 밖에서 버들가지를 꺾어 주는 풍습이 있다고 했다.

이걸 ‘折柳枝(절류지)’라 한단다.

절류지 하나에 사랑을 싣고, 그 불씨를 꺼드리지 말아달라고 절절한 시가 한 마디 덧붙이는 이런 풍류는 이즘 세상에는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순수 우리말 시였던 홍랑의 이 시를 고죽은 ‘고죽유고’에 한시로 번역하여 옮겨놓았다.

이른 바 ‘번방곡’이다.


  飜方曲(번방곡)

折楊柳寄與千里人  절양기여천리인

爲我試向庭前種    위아시향정전종

須知一夜新生葉    수지일야신생엽

憔悴愁眉是妾身    초췌수미시첩신


버들가지 꺾어    천리 머나먼 임에게 보내오니

뜰 앞에 고이 심어두고    이 내인가 여기소서.

모름지기 하룻밤 지나면    새잎 돋아나리니

이 내의 초췌하게    시름 쌓인 아미인 줄 아옵소서.


고죽이 받았다.


相看泳泳贈幽蘭   상간영영증유란

此去天涯幾日還   차거천애기일환

莫唱咸關舊時曲   막창함관구시곡

至今雲雨暗靑山   지금운우암청산


맥맥히 서로 보며 건넨 그윽한 난초

이제 한 번 멀리 가면 언제 오려나

함관에선 옛노래랑은 부르지를 마오.

지금까지 운우가 청산에 어둑하구려.


고죽의 구구절절 이별의 슬픔은 홍랑에 못지않았다.

고죽 최경창이 서른일곱, 아마도 홍랑은 20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그때가 1575년,

임진왜란(1592年)이 나기 전이다.

변방인 함경도 첩첩산중 끝자락에서 익어간 사랑 얘기의 제일막이다.


- 병 -

서울로 돌아 온 고죽은 이 말 많은 조선 조정에서 부침을 거듭했다.

고죽이란 호는 중국 고죽국의 굴원, 백이, 숙제의 절의를 본받고자 해서 지은 것이다.

정철, 이이 등과 함께 서인 계열이었던 고죽은 그 말 많고 걸핏하면 사화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피로써 당쟁을 해결하던 시대에는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구봉 송익필은 고죽이  ‘은벽지행이 아니더라도 명리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고 했다.


최경창은 선조임금의 부름을 받아 명나라에 사신으로도 다녀오게 되고 전라도 영광군수에 제수된다.

삼당시인의 한 사람인 손곡 이달과는 자별한 사이다.

한 번은 이달이 고죽의 임소를 지나는데 정을 주었던 기생이 상인이 파는 자운금을 보고 사 달라고 요구하였다.

때마침 이달은 가진 돈이 없었으므로 최경창에게 [증 최경창]이란 시를 써서 보냈다.


湖商賣錦江南市   호상매금강남시

朝日照之生紫煙   조일조지생자연

住人正欲作裙帶   주인정욕작군대

手探粧? 無直錢   수탐장? 무직전


호남의 장사꾼이 강남시에서 비단을 파는데

아침 햇살이 비치어 자줏빛 연기가 나는구려.

정을 주었던 여인이 치맛감을 보채는데

화장그릇 뒤져 보나 내 줄 돈이 한 푼도 없구려.


고죽이 이 시를 보고 회답했다.

"시의 가치로 말하자면 어찌 금액으로만 헤아리겠소? 우리 고을이 본시 작으니 넉넉하지는 못하오." 하고 쌀 한 섬을 보내니, 이달이 그 기생에게 자운금(비단) 한 필을 사서 주었다고 한다.


3년이 흘렀다.

다시 내직으로 올라온 고죽은 어쩐 일인지 시름시름 앓게 되었다.

도대체 낫지 않는 병...

그때는 그런 병이 많았다.

그 소문이 어찌 천리만리 땅 끝에 있는 경성 땅까지 전달되었는지 홍랑의 귀에 들어갔다.

‘양계의 금’(평안도 함경도 사람은 도경계를 넘어오지 말라는 법)이 문제던가?

세상 태어나 단 하나 뿐인 정인이 죽어 간다질 않는가?

죽고 나면 무슨 소용?

겁나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함경도 끝자락에서 서울까지 천오백리(600Km)가 넘는 길이다.

어렸을 때 어미 아플 때 의원 찾아 산길을 사흘 밤낮으로 걸어 보았다.

그까짓 걷는 거....

홍랑은 남장을 하고 칠일 밤낮으로 잠 안자고 걸었다.

몰골이야 말로 옮길 수도 없었다.

그 덕분에 미색이 감추어져서 걸리적거림 없이 한 달음에 달려 올 수 있기도 했다.

서울에 와 물어물어 고죽의 집으로 들어섰다.

아픈 게 언제냐? 싶게 누워있던 고죽은 벌떡 일어났다.


큰 마누라 있는 집에 시앗이 당당하게 들어와 제 남편 간호한다고 붙어 있으면 눈에서 불이 난다.

그래도 고죽이 한참을 병마에 시달렸던 터라 제가 별 수 있겠나 싶고, 집안 체신도 생각하여 그쯤 용인해 주었을 게다.

병간호는 극진했다.

홍랑의 간호 덕분이었는지 고죽의 병은 금세 호전되었다.

고죽과 홍랑은 단 며칠이라도 꿈같은 세월을 보냈다.

고죽은 병이 다 나아 조정에도 나갔다.


문제는 그 놈의 당쟁이었다.

서인이 눈에 가시였던 동인들이 시비를 걸었다.

고죽은 별로 중요인물도 아니었지만 서인인 게 문제였다.

‘양계의 금’을 어긴 여자를 집으로 맞이해서 같이 산다하니 그게 제일의 문제고...

더구나 관기라 하니, 관기란 관의 부속물이나 마찬가지여서 관기를 개인이 소유한다는 일은 공금을 횡령하는 거나 마찬가지 중죄로서 그게 또 문제이고.......

명종의 인순왕비의 상이 끝난 지 1년도 안된 국상기간에 기생을 첩으로 만들어 끼고 노는 꼴은 또 뭔가고 조정을 들 쑤셔댔다.


- 생이별 -

최경창은 연연하지 않았다.

서인의 중심에 있지 않았지만 서인 선배들에게 누를 기치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고 정말로 홍랑만 있으면 세상을 다 버려도 좋았다.

파직을 시키자 ‘얼씨구 고맙습니다.’하고 물러났다.


그래도 홍랑은 경성으로 복귀를 시켜야 했다.

홍랑이 떠나던 날 봉성(지금의 파주 땅)까지 배웅을 나갔다.

그 놈의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한 걸음 옮기고 뒤 돌아 보며 눈물 한 방울 찍어내고, 또 한걸음 옮긴 후 뒤돌아보고 손수건 한번 훔치며 홍랑은 그리 떠나갔다.


고죽이 시 한수를 읊었다.


玉頰隻啼出鳳城   옥협척제출봉성

曉鶯千澱爲離情   효앵천전위이정

羅衫寶馬河關外   나삼보마하관외

草色超超送獨行   초색초초송독행


고운 뺨에 눈물지며 봉성을 나올 적에

새벽에 우짖는 꾀꼬리소리 더욱 서러워.

말 위에 비단 적삼을 강 건너에 두고서

풀잎은 아득한데 나 홀로 떠나야만 하는가?


그래도 산다.

사람은 그래도 산다.

검게 그을린 쓰린 멍을 가슴에 가득 안고서도 산다.


사람에 따라서는 멍울이 점점 흐려지는 이도 있으나 웬 돌연변이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멍울의 색깔이 점점 더 짙어지는 이들도 있다.

홍랑이 그랬다.

아무리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잊지를 못하겠다.


고죽은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았지만 지방의 한직으로만 떠돌았다.

그 자신에게는 차라리 그게 나았다.

어디에도 정을 못 붙였다.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지바고의 심정이 그랬을까?

어느 때 경성을 지나면서 객관에서 잠시 홍랑을 만났어도 그 정을 다 하지 못하여 안타까움만 남았을 뿐...

이승에서의 인연은 그게 끝이었다.


- 시묘 -

고죽은 1583년(임진왜란이 나기 9년 전) 방어사의 종사관에 임명되어서 상경 도중 마흔 다섯의 젊은 나이로 객사하고 말았다.

마침 경성 부근이어서 홍랑의 귀에도 들어갔다.

홍랑은 만사 제쳐두고 고죽의 시신을 따라 갔다.

‘양계의 금’이고 뭐고 모르겠다.

고죽은 선영이 있는 파주에 묻혔다.


그날부터 고죽의 묘에는 누군지도 모르는 부랑자가 한 사람 살았다.

홍랑이었다.

얼굴에는 숯검정을 칠하고 다 떨어진 옷으로 남장을 했다.

마음이 놓이지 않은 홍랑은 칼로 제 얼굴을 그어 여러 군데 상처를 내었다.

흉한 몰골이 되어야 어느 누구도 알아볼 수도 없고 남정네들이 접근도 안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강 하구인 그 곳에는 겨울에는 살을 에는 찬바람이 불어왔다.

작은 몸을 움막 하나에 의지하기엔 너무나 험한 세월이었다.

그렇게 시묘살이를 했다.


고죽의 가족들과 일가들은 다 알았으나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홍랑의 일편단심에 감복했기 때문이었다.

홍랑은 3년 시묘살이를 지나고도 갈 곳이 없었다.

그냥 눌러 있었다.

그곳은 살아서는 맺어지지 못한 정인의 몸이 누워 있는 곳이다.

홍랑에게는 세상 어느 곳 보다 따뜻한 곳이었다.


- 시인 홍랑 -

10년이 지나 왜란(임진왜란 1592년~1598년)이 터졌다.

조선 천지에 쓸 만한 집은 다 불타고, 왜군들은 사람이 보이는 족족 죽이거나 끌고 갔다.

피폐될 대로 피폐된 국토,

아무 곳도 안전하지 못했다.

파주에 더 머무를 수는 없었다.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남은 생을 정인과 함께 하고팠던 홍랑의 바램은 이어지질 못했다.

7년 전쟁 동안 홍랑이 어디서 무얼 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함경도 고향에 가 있었다는 얘기가 있지만 확인은 불가능한 얘기다.


전쟁이 끝나고 어느 해 고죽의 무덤 옆에 사람이 하나 죽어 있었다.

아들이 보고 알았다.

홍랑이었다.

죽은 사람이 귀중하게 품고 있던 보자기를 풀었다.

거기에는 고죽이 생전에 쓴 시가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전부 200수가 넘었다.


해주 최씨 가문은 인심이 넉넉하였다.

해주 최씨 문중에서는 홍랑의 장사를 지내고 고죽이 누운 자리 앞에 무덤을 마련해 주었다.

지금도 시제 때면 ‘할머니’란 호칭으로 제수를 받고 있다고 한다.

해주 최씨의 가문은 그때나 이제나 후손들이 이 아름다운 사랑을 불륜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안 그러면 본부인인 할머니의 시앗을 어찌 할아버지 묘 바로 앞에 모실 수 있겠는가?

고죽(최경창)의 원고향인 전라도 영암 땅에서도 고죽과 홍랑의 묘를 이장하여 모시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단다.

홍랑의 사랑은 이 땅에 400年을 넘어 아직도 살아있는 것이다.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청석초등학교 북편 산자락에 있는 해주 최씨의 문중 산에는 고죽 최경창 부부의 묘소와 그 아래로 홍랑의 무덤이 있다.

1969년 6월에 홍랑의 묘비를 세우며 비제를 <詩人洪娘之墓>라 했다.

홍랑의 묘소 아래에는 1981년에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가 세운 홍랑가 비가 서있다

거기에는 번방가 - 묏버들 가려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에...-가 새겨져 있다.

비록 홍랑의 몸은 따로 묻히었으나 고죽의 혼이 그 아래 홍랑의 댁으로 와 밤낮으로 머물 것이다.

몰라! 죽어서까지 본부인의 질투가 심하다면 자신에게 오는 시간까지 조절하여 낭군을 맞이하는 여유를 부릴 지...


그의 손자가 숙종대에 이르러 [고죽유고]를 출판하였다.

1책 104장. 한시 250수.

1683년(숙종9) 손자 석영이 편집하여 자기의 《역촌유고》를 부록으로 붙여 간행하였다.

책머리에 송시렬이 1683년에 쓴 서가 있고, 책 끝에는 판서 이민서의 발문과 남구만의 서가 실려 있다.

고죽의 명문장들은 정녕 홍랑의 사랑의 집념이 아니었으면 후세에 남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서문에서 우암 송시열은 고죽의 시뿐 아니라 사람됨까지도 크게 평가하면서 율곡 이이의 표현을 인용하고 있다.

"율곡 선생이 말하기를 고죽은 그 성품이 깨끗하고 하는 일마다 선이 되는 사람이니 그 청고한 절조는 사람마다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

또 송시열 자신은 "사람 때문에 시가 가려진다더니 오히려 시 때문에 사람이 가려졌구나"라는 말로 고죽의 문장과 성품을 칭송하였다.

또 조선 중기의 학자 남학명은 그의 문집 회은집에 홍랑의 고죽에 대한 사랑이 오늘날 이 시들을 후대에 전할 수 있었다는 얘기를 실었다.

출처 : 너울의 창
글쓴이 : 너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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