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불교 일반

월명암

seongsoo 2011. 10. 4. 13:28

□ 월명암

 

 

692년(통일신라 신문왕 12년) 부설거사에 의해 창건되었고 그 후 1848년(현종 14년)에는 성암화상이 크게 고쳐 대사찰의 면모를 갖춘 때도 있었으나 여러차례의 재난을 거치며 중수를 거듭 해 오던 중 1954년 원경 스님이 군내 각기관의 협조를 얻어 작은 규모의 암자를 갖게 되었는데 현 주지(천곡)스님께서 다시 중축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 월명암(月明庵) 가는길

내변산에 위치한 월명암 탐방로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코스입니다.

서해바다의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을 바라보고~

이곳에서 보는 낙조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넘이가 될 것입니다.

 

1. 부안IC에서 30번국도(변산,격포방면)로 10분 -> 하서 섶못오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내변산방면으로 736번국도를 따라 15분 ->국립공원내변산센터

 

주차장에 주차하시고 산행을 시작해야 해요~

평평한 길로 1.3km(20분) 가시면 자연보호헌장탑이 나오는데요.

좌측으로 가시면 봉래곡을 거쳐 직소폭포로 가실수가 있구요.

우측으로 산능선을 따라 40분정도 올라가시면 월명암이 있습니다.

즉, 내변산주차장에서 월명암까지 1시간정도 산행을 하셔야하니까 왕복2시간이 소요됩니다.

 

2. 다른방법으로는 736번 국도를 타고 내변산(직소폭포)을 지나쳐 5분정도 더가면 '남여치'라는 곳이 있는데요. 남여치에 차를 세워 두고 1시간정도 산을 오르면 쌍선봉 아래 월명암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3. 부안IC에서 변산방면(20분)-> 새만금전시관(5분)-> 변산면소재지에서 변산파출소를 끼고 좌회전하여 내변산방면으로(5분) -> 남여치

남여치주차장에 주차하시고 1시간정도 산을 오르시면 월명암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 월명암(月明庵)과 부설거사(浮雪居師)

 

 

부설거사는 신라 진덕여왕(제 28대) 때의 이름 높은 고승이었다.

이웃 김제 만경에서 태어났다 하며 속명은 진광세(陳光世)라 했는데, 어려서 출가하여 이 곳 변산의 월명암에서 영조(靈照), 영희(靈熙)와 함께 수도를 하였다 한다.

 

길을 떠나 가는데 고향인 만경(萬頃) 못 미쳐 두능이라는 데를 지나다 날이 저물어 구씨라는 사람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 구씨(具氏) 집에는 묘화(妙花)라는 벙어리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이 벙어리 묘화가 하룻밤 묵어 가는 세 수도승 가운데 부설을 보더니 원래 부처님 곁에 피어 있는 연꽃 한송이를 꺾은 죄로 벙어리가 되어 부설에게 결혼하여 줄 것을 간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큰 뜻을 품고 수도의 길을 떠나는 부설이 들어 줄 리가 없었다.

「어찌 한 여인의 작은 소망을 위하여 장부의 큰 뜻을 꺾으려 하오」하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그랬더니 묘화가 하는 말이 「그대의 큰 뜻을 어찌 꺾으려 하겠습니까? 그대는 불도를 깊이 닦아 수많은 중생을 구제하려 한다면서 어찌 소녀의 소박한 소망 하나 들어주지 못하고 그로 인하여 뒷 날 많은 중생을 구제하기에 앞서 우선 눈앞에 있는 이 불쌍한 소녀부터 구제하라는 내가 죽게 되면 장차 큰 뜻을 편다 하여 무슨 뜻이 있겠나이까?」

묘화의 끈질긴 요구에 감동한 부설은 자기의 뜻을 굽혀 묘화와 결혼하기로 하였으며 두 친구 영조와 영희는 오대산으로 떠났다. 부설은 묘화와 결혼하여 아들. 딸 남매를 낳고 살면서 아내와 더불어 쉬지 않고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가 사는 마을의 하늘엔 언제나 하얀 눈이 떠돌아 다녔다 하여 사람들은 두능리 마을을 부설촌(浮雪村)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부설거사의 법명도 여기에서 땄다고 한다.

 

이렇게 아들 딸 낳고 끊임없는 수도생활에 힘쓰며 살아가는데 하루는 오대산으로 공부하러 갔던 영조, 영희 두 친구가 찾아 왔다.

반갑게 맞이하는 부설을 보고 두 친구가 하는 말이 「그대는 여자에게 빠져 낙오자가 되어버렸으니 참으로 아깝고 가엾은 일이네」하고 비웃음 반, 위로 반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옆에서 이를 듣고 있던 묘화부인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 남편과 그대들 중 누가 더 깊은 공부를 하였는지 한번 도력을 겨루어 보시지요” 하였다.

 

그리하여 병 세 개에다 물을 가득 담아 벽에 걸어놓고 그들에게 방망이로 병을 쳐보라 하니, 병이 깨어지면서 병 속의 물이 쏟아졌다.

이어서 부설거사가 남은 병을 치니 병만 깨어지고 병 모양을 한 물은 그대로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게 아닌가!

이를 본 두 스님은 아무 말도 못하고 서둘러 떠나버렸다.

("우리의 몸뚱이는 저 깨어진 병과 같고, 물은 성품과 같습니다. 성품은 변함이 없고 흔들림이 없어 이와같이 항상 여여한 것입니다")

 

신라 신문왕 12년(692년), 내외는 남매를 데리고 지난날 공부하였던 변산으로 들어가 월명암 근처에 부설암을 지었다.

낙조대 밑에다는 묘화부인을 위해서는 묘적암(妙寂庵)을 세웠으며, 아들 등운(登雲)을 위해 월명암 뒤에 등운사를, 딸 월명(月明)을 위하여는 지금의 월명암(月明庵)자리에 월명암을 지어 일가족이 모두 불도를 깨우쳐 널리 펼쳤는데 이때부터 변산에서 불교가 크게 융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월명암은 내소사의 말사로, 전북 부안군 산내면 중계리 변산반도 봉래산 쌍선봉 아래 있으며, 이름 그대로 어둠 속의 인간들에게 길을 비춰주는 달빛[월명]이 되고 있다.

 

☆ 등운과 월명

 

부설거사가 신이한 법력을 시현하고 열반에 든 뒤 다비를 마친 두 스님은 부설의 유촉에 따라 등운과 월명의 장래를 결정해야 했다.

“너희는 장차 어떻게 하려느냐?”

 

등운이 먼저 말했다.

“출가하여 수도할까 합니다.”

 

월명이 바로 이어서 말했다.

“저도요.”

 

“헌데 부인의 의향은....?”

“아이들의 뜻에 동의합니다.”

 

이렇게 하여 등운과 월명은 두 스님에게 계를 받고 각각 사미와 사미니가 되었다.

두 스님은 일 년을 머물며 등운 사미와 월명 사미니에게 여러 가지 수행과 중노릇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두 스님은 출가 본사인 불국사로 길을 떠났다.

 

묘화부인과 남매는 여전히 수행 정진하는 나날을 보냈다. 부설이 입적한지 십년이 지났다. 등운은 스물여섯의 어엿한 장부가 되었고, 월명은 이제 스물 세 살의 꽃다운 나이가 되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남매를 불러 앉히고 자신도 운수행각을 떠나고 싶다는 말을 했다.

“정 그러시다면 저희들에게 말미를 좀 주십시오.”

“뭐하려고?”

“월명과 제가 지낼 토굴을 마련한 다음에 떠나시지요.”

 

등운은 다음 날부터 적당한 장소를 찾아 며칠을 산을 헤매었다. 원효방과 부사의방도 가 보았다. 부사의방은 사복성자 다음에 진표율사가 기도를 드려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의 현신수계를 감득한 신령한 도량이었지만, 가파른 벼랑이어서 월명에게는 적당하지 않았다.

 

산 정상에 올라 마침 낙조를 보게 된 등운은 그 아름다운 광경에 황홀하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토굴을 짓기에 또한 조건이 적당했다.

 

다음 날부터 혼자 주변에서 재료를 준비하고 이승계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다섯 명의 일꾼들과 목수 토수 각 한 사람을 지원받았다. 이들과 함께 일을 하여 본채와 행랑채를 완성하고 본채는 ‘월명암’이라고 이름 지었다. 월명이 수도할 암자이기 때문이었다.

 

월명은 혼자 이곳에서 수도하였으나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홀로 지낸다는 것이 너무 적적했다. 그래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자 하여 등운은 겨울 채비를 마쳐주었다.

 

등운은 보안산 정상에서 바라보이는 계룡산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월명암이 안정이 되자 등운은 계룡산으로 떠났다. 자신이 떠나는 것이 나이 많으신 어머니의 운수행각을 막을 방책이기도 했다.

계룡산 정상에 움막을 마련하고 ‘등운암’이라는 편액을 달았다. 달포 만에 보안산으로 갔더니 어머니는 기어이 행각을 떠나고 계시지 않았다.

 

월명암에는 월명과 김국보가 보내준 부목 한 사람만이 있었다.

이윽고 땔 나무를 한 짐 지고 부목이 돌아왔다. 이름을 “춘돌’이라고 하는데, 좀 모자란 사람이지만 순박하고 신체는 건장해 보였다. 나이는 월명보다 한두 살 어렸다

 

춘돌이는 원래 충청도 연산에서 살았는데, 집안이 보안읍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김국보가 알선하여 월명암의 부목으로 보내 준 사람이다.

등운은 별 생각없이 점심 공양을 마치고 등운암으로 돌아갔다. 이 때 등운은 이미 신족통을 얻어 멀리 다닐 때에는 구름을 타고 다닌다고 전해진다. 다른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등운은 누이가 어머니와 함께 살 때에는 안심이 되었으나 홀로 남게 된 누이가 걱정이 되어 한 달에 한 두 번은 월명암에 다녀오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두 번째 월명암에 갔다.

“부목이 딴 짓은 안하던?”

“딴 짓이라니요?”

“너에게 찝쩍대지나 않았냐는 거지.”

“요즘 들어 자주 입맞춤을 하자고 해요.”

“입을 맞춰?”

“입맞춤을 허락하면 땔나무도 더 많이 해오고 군불도 많이 넣어준다면서요.”

“그래서 해봤어?”

“세 번인가 해줬어요.”

“그래? 기분이 어떻던고?”

“마른 수수때기 씹는 맛이어요.”

등운은 예사로 들었다. 마른 수수때기 씹는 맛이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아무 맛도 못 느끼니 별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점심을 먹고 등운암으로 돌아갔다.

 

가을이 깊어지자 등운은 또 월명암으로 갔다.

“요즘도 입맞춤하자고 하던?”

“예”

“기분은?”

“그런데 전보다 좀 달라진 것 같아요. 손가락 빠는 맛이랄까...”

등운은 내심 걱정이 되었다. 처음에는 아무런 맛도 느끼지 못한다고 했던 입맞춤이 이젠 그 어떤 ‘맛’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어려서 산으로 들어와 남자라고는 모르는 천진한 누이가 만약 색 경계에 빠지면 어쩌나 하고 염려가 되었다.

 

“다음에 또 하자고 하면 말이야...”

등운은 누이에게 한 가지 계책을 알려 주고 다시 등운암으로 돌아갔다.

 

석양 무렵에 장작을 한 짐 지고 온 춘돌은 월명에게 말했다.

“오늘 밤에도 입맞춤 해 줄래유?”

“요즘은 왜 그리 자주 하자는 거야?”

“헤헤, 입맞춤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고 온 몸에 힘이 생겨 땔나무도 많이 해유.”

“나랑 입맞춤하고 싶으면 군불을 아궁이 깊숙이 많이 넣어주어야 해.”

춘돌은 숯불이 이글거리는 아궁이에 새 장작을 더 넣고 이를 깊숙이 집어넣으려고 아궁이에 바짝 머리를 숙였다. 이때 월명은 오라버니가 일러 준 대로 뒤에서 춘돌의 엉덩이를 힘차게 차서 부목을 아궁이 속으로 몰아넣고 문을 닫아버렸다. 아궁이 문은 읍내에서 맞춰 온 철문이라 닫고 걸어버리면 천하장사라도 열 수가 없었다. 춘돌은 아궁이 안에서 요동을 치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이때 등운은 계룡산 등운암에서 삼매 중에 춘돌이 화장되는 것을 관(觀)하고 있었다. 월명은 무심으로 돌아가 선정에 들었다.

등운은 이튿날 여명에 구름을 잡아타고 월명암으로 달려갔다. 월명이 선정에서 깨어나기 전에 아궁이에서 춘돌의 뼈를 수습하여 반석위에 놓고 돌로 가루로 만든 다음 아미타불을 외며 산골짜기에 뿌렸다. 그리고는 손을 씻고 누이를 불렀다.

“어떻게 이런 이른 아침에 오셨어요?”

“밤새도록 달려 왔지.”

등운은 신족통을 얻은 것을 누이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부목은 아궁이 속에서 천상으로 갔나보다.”

“아궁이를 통해 천상엘 가요?”

“내 말이 믿기지 않거든 아궁이 속을 살펴보렴.”

월명이 아궁이 속을 들여다보니 정말 뼈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실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춘돌은 죽어 염라국에 가서 염라대왕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억울함을 하소연했다.

“월명 아가씨와 저는 서로 지극히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등운이 놈이 훼방을 놓아 제가 비명횡사하여 여기로 왔사오니 등운이 놈을 벌해 주소서.”

염라대왕은 말을 듣고 사자에게 당장 신라국에 가서 등운을 잡아들이라고 명했다. 그러나 염라국 사자는 신라 전역을 샅샅이 뒤졌으나 등운을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갔다. 염라대왕이 세 번이나 사자를 보냈으나 등운을 찾지 못하자 직접 찾아 나섰다.

염라대왕이 장담하고 신라에 당도하여 역시 샅샅이 뒤졌으나 끝내 등운의 그림자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제서야 염라대왕은 마음에 집히는 것이 있어 계룡산 등운암 마당에 꿇어 앉아 등운에게 사죄를 드렸다.

“소인이 우매하여 춘돌이 놈 말만 듣고 큰스님을 벌하려 하였으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때에 등운암 머리 위 구름에 누워 낮잠을 즐기던 등운이 큰 소리로 외쳤다.

“염라왕은 듣거라. 그대가 만일 새끼를 꼬아 사 천하(四天下)를 묶는 재주가 있을지라도 이 등운은 결코 잡지 못할 것이다.”

염라왕은 더욱 뉘우쳐 거듭 사죄를 드렸다.

“너의 우매함이 지나친지라 내가 크게 벌을 내리려 했지만, 네가 이처럼 사죄를 하니 이번만은 용서해 주겠노라.”

“감사합니다, 큰스님.”

“내 한 가지 청이 있노라.”

“분부만 내리십시오, 큰스님.”

“춘돌이 놈이 대 도인을 번거롭게 한 죄는 지극히 크다마는 대 도인을 정성 다해 모신 공로도 없지 않으니, 생사부에서 이름을 빼서 천상으로 보내 주기 바라노라.”

“예? 그것만은 아니 됩니다. 대 도인에게 번뇌를 드린 죄가 너무도 큽니다.”

죄와 복은 본시 뿌리가 없고 씨앗이 없는 것, 모두가 마음에서 꺼지는 환몽이 아니더냐? 내 친히 청을 하는 데에도 거절한다면 그것도 큰 죄에 속할 것이니라.”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그 뒤 춘돌은 염라국의 심판을 거치지 않고 바로 도리천에 왕생했다. 염라대왕은 춘돌을 보내며 일렀다.

“네가 천상에 왕생하는 것은 등운 큰스님의 특별한 배려이니라. 아무쪼록 원망하는 마음을 거두고 부지런히 선업을 닦아 오래도록 천상락을 받기를 바라노라.”

춘돌은 천상에 오르며 등운 큰스님에게 수없이 감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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