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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성(春城 1891~1977)스님 유머모음

seongsoo 2011. 10. 3. 15:15

□ 춘성(春城 1891~1977)스님 유머모음

 

 

1

일제시대 때 춘성 스님이 산림법 위반으로 경찰서에 잡혀갔다.

일본 순경이 주소를 묻자 “우리 엄마 보지다”라고 대답했다.

“본적은?”

“우리 아버지 자지”

 

2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절, 어느 날 춘성 스님은 육영수 여사의 생일에 초대되어 간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불자인 박 대통령과 육 여사가 법문을 청하자, 춘성 스님은 마이크 앞에 아무런 말도 않고 잠자코 있었다. 30분이 넘어서 결국 참가자들의 기다림이 한계점에 이르렀을 때 춘성 스님은 갑자기 법문 한 마디를 하였다.

 

“오늘은 육영수 보살이 지 애미 보지에서 응아하고 나온 날입니다.”

 

3

소견이 몹시 좁은 딸을 둔 노 보살이 있었다. 하루는 이 장성한 딸을 춘성 스님 처소에 보내서 소갈머리가 좀 터지는 법문을 청해 듣도록 했다. 춘성 스님이 딸에게 말했다.

 

“내 그 큰 것이 네 그 좁은 데 어찌 들어가겠느냐?”

 

딸은 얼굴이 벌개지면서 방문을 박차고 울면서 달아났다. 집에 돌아와서 노보살님에게 스님의 법문 내용을 말하고, “큰스님은 엉터리요” 라며 어머니께 푸념을 하였다. 그러자 노 보살은 “그러면 그렇지. 바늘구멍도 못 들어갈 네 소견머리에 어찌 바다 같은 큰스님의 큰 법문이 들어가겠느냐”며 혀를 찼다. 딸은 그제서야 울음을 그치고 스님의 소중한 법문을 잘못 알아차린 줄을 알았다.

 

4

춘성 스님이 서울역 앞에서 전차를 타셨는데, 그당시에도 "예수 믿으면 천국 불신지옥"을 써서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스님이 타신 칸에 우르르 몰려타더니 왠 늙은 중이 앉아 있으니 한 광신자가 스님앞에 오더니 하는 말,

"죽은 부처를 믿지 말고 부활하신 우리 예수를 믿으시오. 그래야 천국갑니다."

 

그러자 전차 안의 모든 사람들이 두 눈이 휘둥그레졌는데 춘성스님이 기골이 장대하셨던 분인지라 필시 한 대 패줄 것이라 기대를 하고 잔뜩 구경거리를 기대하고 있었다. 춘성스님이 그말을한 사람을 올려보더니 "부활이 뭔데?"하고 묻자 그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요,부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못했지만 ,우리 예수님은 부활하셨소. 그러니 죽은 부처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더 위대하지 않소? 예수님을 믿으시오." 했다.

 

춘성스님이 그사람을 빤히 쳐다 보더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게 부활이라고?" 예수쟁이가 "그렇소."라고 말하자 춘성스님이 그사람에게 말하기를

 

"그럼 니는 내 좆을 믿어라, 내 좆은 매일 아침 부활한다. 예수가 내 좆하고 같으니 니는 내 좆을 믿거라."

 

큰싸움이 날걸로 알고 있던 전차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하고 웃었다.

 

5

야간 통금이 있던 시절 방범순찰을 하던 경찰관이 밤길을 가는 행인을 보고 누구냐고 묻자

"중대장이다"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순경이 풀래시로 얼굴을 비춰보니 중대장이 아닌 어떤 스님이었다."아니, 스님이

아니시오?"하고 묻자

 

"그래, 내가 중(僧)의 대장이다"

 

6

춘성 스님이 기차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중에 함께 탄 목사가 기독교를 믿으라면서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고 했다.

춘성이 물었다.

“그러면 하나님은 없는 데가 없다는 말이냐?”

“그러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똥통 속에도 있겠네?”

 

이 말을 들은 목사는 춘성을 노려보면서 “감히 하나님에게 불경스러운 말을 쓴다”고 화를 내며 물었다.

“부처님도 없는 데가 없느냐?”

“없는 데가 없지!”

 

“그러면 부처님도 똥통 속에 있겠네?”

“똥이 부처님인데 똥통 속에 있고 말고 말할 것이 뭐 있어?”(예수는 부처님 속에 있다는 의미...)

 

7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스님은 정진 중에 사정없이 몰려오는 졸음을 물리치기위해 비장한 결심을 했다. 스님은 법당 뒤 빈터에 구덩이를 파고 그 자리에 큰 항아리를 묻은 다음, 그 항아리에 냉수를 가득 채웠다. 엄동설한 자칫하면 항아리에 가득 찬 냉수가 얼어 항아리가 터질 지경이었는데 춘성 스님은 참선수행을 하다가 졸음이 밀려오면 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지고 그 찬물 담긴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서 머리만 내밀고 앉아 정진을 했다. 발가벗고 항아리 속에 들어 앉아 참선하면서 춘성 스님은 쾌재를 불렀다.

 

“허허! 이제야 졸음한테 항복을 받았다!”

 

수행자로서 춘성 스님은 참으로 무서운 분이었고 서릿발 같은 분이었다. 도봉산 망월사에서 참선 수행을 할 적에 젊은 수좌들이 담요를 덮고 자다가 춘성 스님에게 들키면 그 자리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수행자가 편하고 따뜻한 잠을 자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야 이 씨부랄 놈아. 그 담요 당장 이리 내놓아라!”

 

춘성 스님은 기어이 젊은 수좌로부터 담요를 빼앗아 그 자리에서 불태워 버렸다. 그토록 수행에 철저했던 분이 바로 춘성이었는데 서울 근교 어느 비구니 사찰 중창불사를 위한 법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파격적인 법문을 남기기도 했다.

 

“시집 장가가는 데는 보지와 자지가 제일이듯. 중창불사 하는 데는 돈이 제일이니 오늘 이 법회에 온 년들아 돈 많이 시주하고 가거라!”

 

8

하루는 제자가 스님에게 질문했다.

“스님 백척간두에서 다시 한발을 더 내디디면 그 다음 경계는 어떤 것입니까?”

“야 이놈아, 내가 떨어져 봤어야 알지”

 

9

춘성 스님이 입적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후학이 스님에게 물었다. "열반에 드신 후에 사리가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스님은 "필요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후학이 다시 물었다. "스님, 사리가 안 나오면 신도들이 실망할 터인데요" 라고 하자 춘성 스님 왈

"시발 놈의 자식아! 신도 위해 사냐?"

 

스님은 입적 후에 절대로 사리를 찾지 말고, 비석과 부도는 세우지 말 것이며, 오직 수행에 힘쓰라고 당부했다. 투철한 수행과 일반인의 눈에 특이하게 보이는 기행으로 한 생을 살다 간 그를 보내는 날 밤, 명진(현 봉은사주지) 스님을 비롯한 후배 선승들은 다비식장에서 그가 생전에 즐겨 불렀던 <나그네 설음> 등을 부르며 노래자랑(?)을 벌였다고 한다.

 

춘성(春城)스님(1891∼1977)

 

춘성스님은 1891년 강원도 인제군 원통리에서 태어났다. 속명 창림(昌林), 본관은 평창(平昌), 성(姓)은 이(李)씨, 법명은 춘성(春城), 법호 또한 춘성(春性) 이다. 태몽에 하늘에서 동자가 오색구름을 타고 어머니 품안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어린 시절 영민함이 유난히 남달랐다고 한다. 9세에 어머니를 따라 신흥사에 가서 대웅전 부처님을 뵙고 난 후 출가의 뚯을 부모님께 고하니 불허하였다. 이후 13세에 백담사로 출가하여 만해 한용운스님 휘하로 들어가 머리를 깍게 되었다. 이후 여러 해동안 백담사에서 만해스님에게서 수학하였다. 스님은 만해스님의 유일한 제자이기도 하다.

 

20세에 스님은 금강산 유점사에서 동선스님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25세에 평안도 안변 석왕사에서 전문강원 대교과를 수료하고 이어 강학(講學)을 전공하시고 강백(講白)으로서 전국의 운수납자를 들끓게 했다. 30세에 신흥사 주지를 맡았으며, 재임시 불전답(佛田畓)을 많이 확보하셨다. 35 세에 석왕사 주지를 맡아 불사(佛事)에 심혈을 기우려셨고, 이후 서울 삼청동에 많은 신도들의 힘으로 칠보사를 창건하시고 도봉산 원통사를 중창하셨다.

 

40세에 덕숭산 수덕사에서 만공스님 휘하에서 법사로 전법수행하셨다. 만공스님께서 '별전일구(別傳一句)가 재기처(在基處)요'하며, 춘성스님은 우렁찬 목소리로 일갈(一喝)하며 되받으나, 만공선사께서 이를 수긍치 않으셨다. 이에 스님은 수덕사 정혜사에서 겨울에 불도 지피지 않고 장좌불와를 거듭하셨고, 그 후 금강산 유점사에서 3년간 수행하시다 마지막 동안거 결제일에 '이제 잠은 항복 받았다'고 하시니 드디어 무애한 대자유인으로 탈바꿈하시었다.

 

45세에 25하안거를 마치셨고, 60세인 1950년 6.25전쟁 때에는 북한산의 망월사를 떠나지 않았다. 60세 이후 망월사 주지, 강화 보문사 주지 등을 역임하셨으며, 80세까지 망월사 조실로 계시다가 81세 홀연 만행을 떠나시고 87세에 스님은 화계사에서 문도를 모아두고 '허공에 골체(骨體)를 보았느냐? 만월청산(滿月靑山)에 무촌수(無寸樹)하니 현애철수장부아(懸崖撤手丈夫兒)니라, 팔십칠년사(八十七年事)가 칠전팔도기(七轉八倒起)로다. 횡설여견설(橫說與堅說)이여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니라.' 라는 마지막 법어를 내리시고 스님의 뜻대로 성남시 봉국사에 탑과 비가 세워졌다.

 

육두문자를 거침없이 써서 욕쟁이스님으로도 통했으나 평생을 옷 한벌 바리때 하나만으로 살다간 무소유의 실천가였다. 극락이 마음을 떠나 따로 없고, 종교도 본래 없는 것으로 한번 빠지면 나오기 힘들어 사람을 버리게 된다며 종교의 참뜻을 깨우친 선승이기도 하다.1977년 화계사에서 세수 87세, 법랍 74세로 입적하였다. 유언에 따라 사리와 재는 서해에 뿌려졌다.

 

열반송(涅槃頌)

팔십칠년사(八十七年事) 여든 일곱 생을 살았던 일이
칠전팔도기(七轉八倒起)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일어나는 것과 같네
횡설여견설(橫說與堅說) 횡설수설했던 그 모든 것이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 붉은 난로 속의 한 점 눈이네


나그네 설음(하모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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