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빠사나, 간화선, 묵조선
☞ 위빠사나
위빠사나는 석가모니 시절부터 전해져오는 명상 수행법이다. ‘위’란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를, ‘빠사나’는 ‘올바른 지혜’를 뜻한다. 초기불교 경전에 많이 사용된 인도 북서부의 팔리어 단어다. 초기 불교를 고수하는 남방에서 주로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데, 특히 미얀마는 수행자들이 철저히 부처의 가르침을 좇아 오후에는 음식을 먹지 않고 엄격하게 계율을 준수하는 등 전통이 잘 보존된 것으로 알려졌다.
☞ 간화선(看話禪)
부처님이 마하가섭 존자에게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로 법을 전한 데서 유래한다. 인도의 28대 조사(祖師)로 선종을 연 달마 스님이 중국에 전한 뒤 6조 조계 혜능(曹溪慧能) 선사가 정립하면서 북방 대승불교의 대표적 수행법으로 자리 잡았다. 화두에 집중하고 거기에 간절히 의심을 일으켜 삼매에 든 상태에서, 그 참뜻을 깨달음으로써 자신의 본성을 바로 보고 스스로 부처임을 자각하는 방법이다.
☞ 묵조선(默照禪)
묵조선이란 묵묵히 좌선(坐禪)하여 영묘(靈妙)한 마음의 작용을 일으킨다는 선풍(禪風)으로 간화선(看話禪)과 대비되는 중국 조동종(曹洞宗)의 선법이다.
이 명칭은 남송(南宋) 임제종(臨濟宗)의 종고(宗高) 임제선사가 조동종(曹洞宗) 정각(正覺)스님이 <묵조명(默照銘)>이라는 서적을 펴낸 뒤, 수행자들이 무조건 면벽좌선(面壁坐禪)함을 야유하며 이같이 불렀던 데서 유래한다.
묵조선은 스스로의 자성이 본래부터 청정하다는 자성청정(自性淸淨) 원리를 기본으로 한 수행법으로, 어느 날 갑자기 큰 깨달음(대오: 大悟)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내재하는 본래의 청정한 자성에 절대로 의뢰하는 선법으로서, 굉지(宏智) 정각스님은 그의 저서 <묵조명>을 통하여 묵조선만이 불조 정전(佛祖正傳)의 참된 선이라고 주장하였고, 대혜(大慧) 종고스님은 묵조선을 사선(邪禪)이라 공격하였지만 결국 양자의 차이는 본래의 면목(面目)을 추구하는 방법의 차이 이다.
第1章 위빠사나
1. 위빠사나의 意味
위빠사나는 마음 집중 수행법으로 근본적으로 몸과 마음 즉 내부와 외부에서의 영향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재의 현상을 면밀히 관찰하고 인식하여 그것들의 움직임, 기능, 작용, 자연적 성질 등을 파악하고 깨닫는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찰은 자신의 심적 내부현상과 자연적 외부현상 등이 영원성 없이 순간의 현상으로서 진행되는 것이며, 조건과 상황, 인연, 원인결과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임을 체험으로 깨닫게 하여준다는 것이다.
"위빠사나"(vipassana) 라는 단어는 파알리어의 "위"와 "빠사나"라는 두 개 의 단어가 결합된 것으로,
1) "위" (vi)의 뜻은 복합적이고, 다양하며 아래와 같이 여러 가지 뜻이 있다.
가. 모든 존재물은 영원성이 없어서 무너지고 허물어지며 사라지고 깨지고 부서지고 혹은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과,
나. 이로 인해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엄청난 고통이 원초적으로 내재 되어 있다는 것과,
다. 어떠한 물체나 생명체에도 그 자체의 주체가 없다는 것 즉, '我'라 는 개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2) "빠사나"(PASSANA)는 알아차림, 꿰뚫어 봄, 자세히 살펴 봄, 사물의 실상에 대한 지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긴 뜻을 한마디로 줄이면 "내관적지혜”(內館的 智慧)라 할 수 있고 이를 한글로 풀이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속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관찰을 통하여 실상을 깨닫는 지혜의 수행법”, "내관 수행의 법” 또는 "현상관찰 수행법”이라고 한다. 몸과 마음의 특성을 마음집중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으로써 지나친 탐욕심, 욕망, 갈애(渴愛 : 번뇌에 얽혀서 생사를 초월하지 못하는 범부(凡夫)가 목마를 때 애타게 물을 찾듯이 색욕, 재물욕, 음식욕, 명예욕, 수면욕의 다섯 가지 욕망에 애착함.)와 분노, 진심, 악심, 질투, 시기, 혐오, 어리석음, 초조 불안, 혼침, 망상, 의심 등의 번뇌를 다스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며, 이러한 모든 번뇌들을 완전히 다스려 제거했을 때 우리는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며 해탈을 이루어 모든 괴로움을 소멸시킬 수 있다. 우리의 마음속에 어떠한 번뇌라도 남아있는 한, 갖가지 괴로움, 슬픔, 비탄, 절망, 좌절, 정신적 심리적 갈등과 사랑과 미움의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이 같은 괴로움은 곧 번뇌가 원인이기 대문에, 번뇌는 반드시 다스려야 하고 제거해야 하며 번뇌의 소멸이 곧 고통의 소멸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위빠사나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2,500여년 전 인간의 과거, 미래의 번뇌로부터 해방되고자 수행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된 명상 수행법의 일종으로서 남방 불교권에서 이 수행법을 계속 이어받아 오고 있으며, 태국이나 미얀마국 등에서는 남자의 경우 군복무 대신 3개월 정도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 통상적인 경우라고 한다. 국내에는 약 20여년 전에 보급되었으며 소수 이 방법으로 수행하고 있는 불자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비교적 생소한 수행방법으로서 공부하는 마음으로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우선 행주좌와 어떤 모습의 수행 시에도 적용되는 통론적인 것을 먼저 보고 이어서 좌선 시, 보행 시, 와선 시에 각각 특유한 수행 방법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2. 위빠사나 수행 방법
1) 일반적인 수행
열심히 번뇌의 소멸을 향해 가는 수행자는 항상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알아채고 계속 주시해야 한다. 오직 잠자는 시간에만 어쩔 수 없이 그 노력이 멈출 뿐이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일찍 일어나며, 또한 잠에서 깨어날 때도 "잠이 깬다" 라고 주시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이것을 알아차려 주시하지 못하였다면 곧장 배의 오르내림을 주시한다. 수행자는 자세를 바꿀 때나 또는 어떤 움직임에도 병약자가 움직일 때 다치지 않을까 염려하여 천천히 행동하듯이 서서히 점잖게 그리고 품위 있게 움직여야 한다. 동작에서 오는 모든 현상들을 놓치지 않고 알아채려면 좀 더 천천히 움직임으로써 자세히 주시 집중할 수 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고자 할 때는 "일어나려 한다"라고 그 의도를 주시한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들, 팔 다리 등의 움직임, 머리를 들며 "든다", 일어나 앉으며 "앉는다", 이렇듯 모든 의도와 움직임을 세밀하게 주시한다. 세수나 목욕을 할 때는 움직임이 많고 빨라지나 그 세세한 동작들을 가능한 한 모두 주시하려고 노력한다. 그 뒤에 하게 되는 옷을 입고, 잠자리를 정돈하고, 문을 여닫고, 화장실에서 용변을 볼 때 모든 움직임과 현상 등, 이 모든 동작과 느낌들을 가능한 한 세밀하게 주시한다. 걸을 때, 서있을 때, 앉아있을 때, 일어날 때, 먹을 때, 볼 때, 들을 때, 등등에 마음 가득히 주시할 수 있는지, 만약 주시가 정확하지 않을 때에는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주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식사 때에 음식이나 식탁을 보면 "본다", 음식을 집으려고 손을 뻗을 때 "뻗음", 음식을 입에 넣을 때 "넣음", 음식을 씹을 때 "씹음", 맛을 느낄 때 "느낌", 음식을 삼켜 식도를 따라 내려갈 때 모든 느낌과 움직임, 계속해서 음식을 한입 한입 먹을 때마다 주시한다. 식사시의 주시는 수많은 관찰 대상이 있어서 약간은 어렵다. 초보자는 대상을 수없이 놓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모두를 주시하고자 하는 결심을 가져야 한다. 물론, 그렇더라도 많은 부분들을 넘어가고 놓치게 된다. 그러나 이를 통해 점차 마음의 집중력이 강해져서 모든 움직임을 세밀하게 주시할 수 있게 된다. 몸(신)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마음이 느끼(수)고 인지하는 것과 움직이려는 의도가 있어 몸이 행동하게 되고 몸이 원인이 되어 마음(심)이 일어나게 되며, 마음은 일어나는 대상(법)에 따라 계속 변화하고 있는 이 모든 경험들이 순간순간 일어날 때, 그 일어나는 현상들을 싫다고 거부하거나 좋다고 집착하지 말고, 일어난 원인을 분석하거나 판단(과거)하려하지 말며, 무엇을 이루어보려고 조작하거나 기대(미래)하지 말고, 예측이나 긴장이 없는 편안하고, 조급하거나 느슨하지 않은 균형 잡힌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그 현상들의 현재의 흐름을 알게 되는대로 보이는 대로 느끼면서 지속적으로 주시하여 의식과 행위들이 생멸할 때마다 변화하는 상태를 마음으로 자세히 보아 알아야 한다. 수행자는 주시하는 동안에 짧은 순간 일어났다 사라지는 육체적 감각과 느낌, 의도와 행위, 마음의 대상을 따라 현상이 일어날 때마다 편견 없는 집중된 주의력으로 계속 주시하여, 첫째로는 현상이 일어남을 알아채고, 둘째로는 주시하여 인지하게 되고, 셋째로는 사라짐을 보게 된다.
2) 앉았을 때의 수행(좌선)방법
앉는 자세는 가부좌나, 가부좌가 어려울 때는 반가부좌, 반가부좌도 어려운 경우에는 반가부좌의 자세에서 얹힌 다리를 앞의 바닥에 내려놓고 편안히 앉는다. 얼굴은 정면을 향한 상태에서 눈을 가볍게 감고, 입은 가볍게 다물고, 목과 등을 반듯이 펴고, 허리를 앞쪽으로 약간 밀고, 엉덩이를 약간 뒤로하고 힘을 빼어 긴장을 푼다. 왼손을 아랫배 앞의 발 위에 손바닥이 위를 향하도록 놓고 오른손을 그 위에 가볍게 얹어 놓고, 양손을 양쪽 무릎 위에 손바닥을 위로하여 가볍게 놓는 등 신경 쓰이지 않도록 하고, 너무 형식에 얽매인 경직된 자세보다는 편안하고 바른 자세가 좋다고 한다. 자세가 안정된 다음,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몸을 마음으로 살펴보면 호흡에 의하여 숨이 들어오고 나갈 때 배가 스스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움직이는 이 배를 마음으로 주시한다. 숨을 들이쉬면 배가 나올 때 <일어남>이라고 마음속으로 이름 붙이면서 주시하고 내쉬면 배가 들어갈 때 <사라짐>이라고 마음속으로 이름 붙이면서 주시한다. 만약, 배의 움직임이 명확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에는 손바닥을 배에 가볍게 대고 주시한다. 그러면 배의 오르고 내리는 움직임이 손바닥을 통하여 분명하게 전달될 것이다. 호흡의 흐름을 의도적으로 바꾸어 너무 빠르거나 느리게 또는 너무 강하거나 약하게 하면 쉽게 피곤하여지면서 여러 가지 부담을 준다. 호흡의 흐름에 인위적으로 의식을 가하지 말고 쉬어지는 대로 자연스럽게, 부드럽고 꾸준하게, 그리고 안정되게 하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움직임의 현상과 움직이는 과정 속의 <현상>에서 인지되고 느껴지는 것을 마음으로 <주시>한다. 처음에는 숨을 들이쉴 때 나오고 내쉴 때 들어가는 배의 움직임을 알아채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어떤 때는 배의 움직임이 저절로 길거나 또는 짧거나, 명료하거나 불분명할 때, 배가 일어나는 상태에서의 변화들, 팽만감, 피부 근육 등의 움직임을, 또 배가 사라지는 상태에서의 여러가지 변화, 반복될 때마다 달라지는 전과정의 <움직임과 느낌들을> 자세히 주시해야 한다. 현상의 일어남과 마음의 주시가 일치 되도록 정확하게 목표를 조준하여 스스로 움직이는 배의 움직임과 그것을 주시하는 마음이 동시에 일어나서 움직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들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 작용이 밀착되어 일치의 단계에 도달하여 동일 선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배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으면 몸의 여러 곳에서 여러가지 현상들이 일어난다. 통증, 가려움, 저림, 답답함, 경직, 열기, 피로감 등, 이러한 현상들이 일어나면 가능한 한 참아 내며 가장 두드러진 현상으로 주시 대상을 옮겨 그 현상에 따라 "통증, 통증, 통증" 또는 "가려움, 가려움, 가려움" 이라고 이름을 붙이면서 주시한다. 그 상태만을 마음속으로 이름 붙이면서 철저하게 치지 않고 주시하면 그 현상은 차차 사라지게 된다. 그 현상이 사라지면 다시 배의 움직임으로 돌아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주시해야 한다. 현상을 주시하면서 생각하기를 나라는 생각(자아관념)을 가지고 현상을 주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런 현상에 그같이 복잡한 나는 없다. 오직 느낌(현상)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 또 다른 현상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또 다른 마음이 연이어진 것뿐이다. 수행자는 어떤 행위를 할 때 행위 하려는 의도를 처음으로 알아차리고, 그리고 실제의 행위 하는 과정들을 주시해야 한다. 이러한 주시가 그의 수행력이 집중되고 무르익도록 도와줄 것이다.
의도란 행동에 앞서 나타나는 정신적 작용으로서 움직임에 앞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대체로, 우리는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행동해 왔다. 무엇인가 하려고 하는 마음의 작용을 알아차리고 마음이 어떻게 움직임과 관계 맺는지, 모든 의도와 움직임을 세밀하게 주시하며 몸의 자세를 바꾼다. 이것은 의도와 행위의 원인 결과를 바라보는 것이다. 움직임이 그치고 고요해지면 다시 배의 오르내림을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주시한다. 주시대상인 즐거움, 괴로움, 과거나 미래에 대한 상념, 욕망, 증오, 등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알아차렸을 때, 그 사실을 확실히 인식하면서 "망상, 망상, 망상", "잡념, 잡념, 잡념" 등 그 마음 상태에 따라 마음속으로 걸맞은 이름을 붙이면서 주시하면 그 현상은 사라진다. 망상이나 생각들은 수행의 장애가 아니라 주시해야 될 또 다른 대상들이다. 무슨 생각이며 왜 일어났는가, 어딘가, 등 생각의 내용이 아니라 생각이 일어난 순간 알아차려 생각하는 상태를 주시하는 것이다. 망상이나 생각들은 계속 주시하면 힘을 잃고 사라지지만 중요한 것은 망상이나 생각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수행자는 망상에 빠져 있어 정처 없이 떠도는 자신을 갑자기 발견하고는 놀라 실망하면서도 어느 사이에 또 생각 속을 헤매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주시력이 향상되면 일어남과 사라짐은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남의 끝과 사라짐의 끝에 중지가 있음을 보게 되는데 이 중지 부분을 더 자세히 보아야 한다. 수행이 많이 진전하여 몸과 마음에 모든 현상이 사라져서 대상이 없고 그 없는 상태를 아는 마음만이 있을 때에는 그 <앎> 자체만을 주시한다. 앉아서 하는 수행을 끝내고 일어설 때는 먼저 일어서려는 의도를 "일어서려 함" 하면서 주시하고 일어서는 과정의 모든 동작들을 하나하나 그에 걸맞은 이름을 붙여 손을 "듦", 다리를 "폄", 일어 "섬" 하면서 모든 동작에 집중하여 주시한다.
3) 걸으며 하는 수행(보행선) 방법
몸을 바로 하고 서서 시선은 발끝으로부터 2~3m 정도 거리의 앞을 본다. 고개를 앞으로 숙이면 쉽게 피곤하고 부담이 옴으로 턱을 들어 바르게 한다. 손은 앞이나 뒤로 모아 잡아 흔들리지 않게 하고, 천천히 자연스럽게 걸으며 걷는 발의 동작과 감각에 마음을 일치시켜 주시한다. 빨리 걸을 때는 왼발을 내딛으며 "왼발" 오른발을 내딛으며 "오른발"이라고 마음속으로 이름 붙이면서 한발 한발 주시 하던가 각 발을 두 단계로 왼발을 "들어서, 앞으로" 오른발을 "들어서, 앞으로" 하면서 발의 동작과 느낌을 주시한다. 천천히 걸을 때는 세 단계로 왼발을 "들어서, 앞으로, 놓음" 오른발을 "들어서, 앞으로, 놓음" 또는 네 단계로 "들어서, 앞으로, 놓음, 누름" "들어서, 앞으로, 놓음, 누름" 이라고 하면서 각 발의 움직임과 느낌 하나 하나를 단계별로 세분하여 주시한다. 앞으로 나아가다가 서려 할 때는 우선 "서려 함" 하면서 서려는 의도를 주시하고 "섬" 하면서 서 있는 상태의 몸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를 천천히 주시하고 "돌아서려 함" 하면서 돌아서려는 의도를 주시하고, "돌아감, 돌아감, 돌아감" 하면서 돌아갈 때 몸과 발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완전히 돌아섰을 때 "돌아섬" 하면서 서 있는 몸의 상태를 또 주시하고, 앞으로 나아가려 할 때 "나아가려 함" 하면서 나아가려는 의도를 주시하고, "들어서, 앞으로, 놓음" 하면서 또 발의 움직임과 느낌을 주시하면서 진행한다. 마음의 명령에 의하여 모든 동작이 이루어지고 그 움직임의 상태와 느낌을, 즉 왼발이면 왼발임을 알고, 들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고, 들면 들림을 알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고, 나아감을 알고, 놓을 때 의도와 놓음을 알고, 닿으면 닿음을 알며, 바닥과 접촉할 때의 감각, 체중의 중심이 옮겨질 때 발의 상태 등 모든 움직임에서 오는 느낌 무엇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주시해야 한다. 발의 움직임을 주시하다가 어느 사이에 마음은 주시대상을 놓치고 생각 속을 헤매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럴 때는 발의 진행을 멈추고 "생각, 생각, 생각" 하면서 생각하는 마음 상태를 주시하여 그 생각이 사라지면 다시 진행하면서 발의 움직임을 단계별로 주시한다. 주시력이 향상되면 발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는 중에도 미세한 잡념이 따라다니는 것을 발견하고 잘 가려내어 실제의 움직임이나 감각만을 주시할 수 있게 된다. 걸으면서 눈이 어느 대상을 보았을 때는 마치 보지 못한 것처럼 행동하고 또한 소리를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수행중인 수행자에 있어 집중해야 할 것은 오직 현재의 내 몸과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주시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이상하거나 또는 인상적인 것을 보거나 들었을 때는 그 대상에 빠져들지 말고 다만 조심스럽게 보임, 들림만을 주시할 뿐 어떤 견해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마음 집중이 잘되어 주시와 현상이 일치할 때 의도와 행위만이 있을 뿐 이를 주도하는 주체가 없음을 알게 된다. 걸으면서하는 수행은 앉아서하는 수행과 균형을 맞추어(한 시간:한 시간) 해야 한다. 앉아서하는 수행만을 주로 하면 심신이 침체되고, 걸으면서하는 수행만을 주로 하면 심신이 들떠 깊은 마음 집중을 이룰 수 없다. 앉아서하는 수행과 걸으며하는 수행의 조화가 잘 이루어질 때 깊은 마음 집중(삼매) 속에서 수행의 효율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오래 걷다 보면 앉고 싶어진다. 그럴 때는 "앉고 싶다"라는 그 욕망을 주시하고, 앉을 때 무겁게 내려앉는 몸의 모든 움직임을 주시한다. 움직임이 그치고 몸이 고요해지면 또 배의 오르내림을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주시한다.
4) 누워서 하는 수행(와선)방법
몸을 눕힐 때 몸을 눕히고자하는 의도를 먼저 주시하고, 천천히 누우면서 누울 때의 모든 동작과 느낌, 팔, 다리를 가지런히 놓는 등 세세한 움직임을 쉴 새 없이 조심스럽게 주시한다. 몸을 완전히 눕힌 후 움직임이 그치고 고요해지면 다시 배의 <일어남>, <사라짐>을 주시한다. 주시를 하다 보면 좌선 때와 같이 몸과 마음에서 여러가지 현상들이 일어날 때 두드러진 현상에 따라 이름 붙이면서 계속 철저하게 주시한다. 잠자는 시간에 누웠다 해도 바로 잠을 자지 말고 주시함을 계속한다. 수면 중에도 수행을 계속한다는 생각으로 한다. 수행이 여실하다면 잠에 쉽게 빠지지 않을 것이다. 잠자지 않고 계속 수행하면 피곤할 것이라고 염려하겠지만 잠을 잔 것보다 더 피로가 풀리고 몸이 가벼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누워서 수행을 하다가 참으로 피곤하여 졸음이 심하면 끝내는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잠에 빠지게 될 것이다. 몸이 몹시 지쳐 있을 때나 앉아서하는 수행이나 걸으며하는 수행에 진전이 없을 때, 그리고 수면시간에는 누워서 배의 오르내림을 주시한다. 초보자는 누워서하는 수행을 자주 한다거나 너무 오랜 시간해서는 안 된다. 누워서하는 수행보다는 앉아서하는 수행과 걸으며하는 수행을 주로 해야 한다. 수면시간은 수행자가 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참으로 진지하게 열심히 수행하려는 수행자는 하루 4시간 이상 잠자지 않는다. 4시간 수면은 충분한 시간이다. 더러는 4시간 수면으로 건강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하는 이도 있다. 그런 이들은 5~6시간을 잘 수도 있다. 6시간 수면은 건강에도 충분한 시간이다. 또 잠에서 일어날 때는 반드시 주시함을 곧장 다시 시작해야 한다.
第2章 간화선(看話禪)
1. 간화선의 意味
중생이 도를 알려면 화두(한 생각 일어나기 전의 자리)를 보아야 하며, 이것이 곧 마음을 관찰하는(觀心) 간화선 이다.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은 바로 마음이므로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 면목을 본다(看)는 것은 곧 마음을 관하는 것이고 성품은 곧 마음이며, '듣는 자기의 성품을 돌이켜 듣는다'고 하는 것은 관(觀)하는 자기 마음을 돌이켜 관하는 것이다. 수행인이 육근(六根)을 모두 거두어 들여, 한 생각이 처음 일어나는 곳을 살피면서 이 하나의 화두를 비추어 보면, 생각을 떠난 청정한 자기의 마음에 도달하게 될 것이며 이를 간화선 이라 한다. 참선의 목적은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보는 것 (見性成佛)으로 오염이 없어지면 진실로 자성의 참 모습을 보게 되는데 여기서 오염이란 망상과 집착이며 자성이란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말한다. 망상과 집착을 여의면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증득하여 부처가 될 것이나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중생인 것이다. 중생들은 무량겁을 지나오면서 생사의 구렁텅이에 빠저 오염 된지 오래이므로 단박에 망상에서 벗어나 성품을 보지 못 하므로 참선이 필요한 것이다. 부처님과 조사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진실로 믿고 열심히 공부하여 청정한 자기의 성품을 알면 일체에 수순(隨順)하되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밤이나, 낮이나 행주좌와에 도무지 마음이 변하지 않으니 이것이 부처이며, 마음 쓸 필요도 없고 힘들일 필요도 없으며, 다시는 해야 할 일도 없어 털끝만치의 말이나 생각도 필요 없는 경지에 이르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그 경지는 공부하는 불자들의 한결 같은 추구점이며 종착점이자 이상향이다.
2. 수행의 방법
1) 자세를 바르게 갖기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아래로 밀어 넣어 왼쪽 발바닥이 오른쪽 허벅다리 위에 바싹 당겨서 밀어 넣는 자세를 반가부좌, 또는 항마좌(降魔坐)라고 한다. 이와 반대로 오른쪽 발을 왼쪽 무릅 위에 올려놓는 것을 길상좌(吉祥坐)라고 한다. 결가부좌는 반가부좌의 자세에서 밑에 깔려 있는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의 허벅지에 올려놓는 좌법을 결가부좌 또는 금강좌(金剛坐)라고 한다. 간화선을 함에는 결가부좌가 이상적인 자세로서, 결가부좌가 자연스럽게 되는 경우에는 결가부좌로 수행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나, 종아리나 허벅지에 살이 많아 결가부좌를 함에 극도의 어려움이 있을 때는 육체를 학대하기보다는 차라리 반가부좌를 하고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할 것이다. 손의 자세는 오른발이 왼발의 위에 있을 때는 왼손 위에 오른 손을 놓고 (반대의 경우에는 오른손 위에 왼손을 놓고) 동그란 원을 그리듯이 양손의 엄지손가락을 맞닿게 한다. 이것을 법계정인(法界定印) 이라고 한다. 그러나 손의 자세에 너무 신경을 쓸 일은 아니고 편한 자세로 손을 무릅 위에 올려놓거나 차수를 하여도 무방하다고 본다. 허리는 자연스럽게 쭉 펴고 어깨에 힘을 주지 말고 부드럽게 가슴을 펴면 된다. 사실 허리는 참선 중에 자꾸 앞으로 구부러지는 현상이 있으나 결가부좌를 할 경우에는 허리나 어깨에 별도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구부러지지 않는 장점이 있다.
참선을 하다가 졸리움을 방지하거나 굳어진 몸을 풀기 위하여 50분 좌선 뒤 10분 정도는 천천히 걸으면서 경행을 하지만 이때에도 화두를 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2) 호흡을 바르게 하기
호흡을 중요 시 하는 분들은 “호흡은 수행의 반 이상이다” 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들숨과 날숨, 단전호흡, 태식호흡, 지식호흡 등 호흡의 종류나 자세도 대단히 많으나 평소의 호흡처럼 자연스럽게 할 뿐 별도로 호흡을 의식하며 하지 않아도 좋다.
3) 마음을 바르게 하기
참선의 삼요(三要)
서산 휴정 스님은 선가귀감에서 참선하는 사람이 기본적으로 가져야할 마음 자세로 세 가지 요건을 꼽았는데, 첫째는 큰 믿음이요, 둘째는 큰 분발심이며, 셋째는 큰 의심이라고 하면서 이중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만다고 말씀 하셨다.
가)대신근(大信根) 큰 믿음이란 일체 중생이 제불 보살과 조금도 차이가 없이 똑 같으며 자신이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이라 한다. 불교의 믿음은 특이하여 절대적인 힘과 권능을 지닌 신의 존재와 능력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내가 곧 부처라는 마음이 참선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세가지 요소 중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모든 상에는 심한 차별이 있다 하여도 근원적인 실지는 그러한 차이에 상관없이 부처님의 위없는 지혜와 온갖 공덕이 자신에게도 똑 같다고 믿는 것이다.
나)대분지(大墳志) 실제는 중생이 아니건만 스스로 중생을 환작하여 그것을 달게 여기고 하루하루 의미 없이 살다가 고뇌 속에서 생사를 반복하며 영원토록 이대로 살아 갈 것인가, 하는 자각과 회의 끝에 이래서는 않되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이 참선 수행자의 대분발심이며 이것이 참선 수행에 동력이 된다고 한다. 참선 공부를 한다는 사람은 많으나 대개는 흉내만 낼뿐이지 제대로 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하는 이유는 분발심이 없기 때문이다. 한번 태어난 삶을 무명 속에 잠긴 채 끝낼 수는 없다는 대분발심, 영겁의 무명을 뚫고 온갖 분별의 함정에서 단박에 벗어나 대 자유인이 되겠다는 대분발심을 갖고 부단히 참선 수행하는 것이 수행인이 갖추어야 할 모습이다.
다)대의정(大疑情) 큰 의심이라는 것은 화두를 대하는 마음을 가리킨 것으로 화두는 법성의 전면 제시이므로 망상 망념과 무명에 갖혀 살고 있는 범부로서는 알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고, 생각 할 수도 없는 이것이 화두라고 한다. 의심이 커야 깨달음이 크다는 말이 있듯이 대의정이야 말로 화두의 진면목이 아닌가 한다.
4) 참선의 방법, 단계
본래 간화선 이라는 것이 깨닫기 전에는 공부의 진도를 알 수 없는 것이라 하였으나 아래와 같이 시간과 공간적으로 체계를 분명히 세우는 견해도 있으므로 그 견해에 따라 화두 참구 시 마음이나 신체의 변화 단계를 살펴본다. 스승을 뵙고 가르침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아래 단계를 척도로 삼아 공부를 지어 가되 숙면일여에 이르지 못한 단계에서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것을 반드시 명심하고, 그 이전 단계에서는 다소 몸이나 마음에 변화가 있다 하더라도 그곳에 절대 집착하지 않음이 옳다.
① 송화두(誦話頭) : 소리를 좇아서 하는 것. 화두가 들리지 않더라도 그냥 화두를 드는 단계.
② 염화두(念話頭) : 화두를 하다가 멈추더라도 일상생활에서도 가끔씩 화두가 떠오르는 단계.
③ 주작화두(做作話頭) : 망상과 화두가 번갈아 들어오는 단계.
④ 진의돈발(眞疑頓發) : 의심을 조그맣게 하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참선을 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계속적으로 화두가 이어지나 반가운 사람을 만났을 때 대화를 하다보면 화두가 끊어지는 정도의 단계.
⑤ 좌선일여(坐禪一如) : 앉아만 있으면 시간에 구애되지 않고 화두가 지속되는 단계.
⑥ 동정일여(動靜一如) : 눈뜨자마자 화두 의심이 들어와서 저녁 때 까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화두 의심이 지속되는 단계. 이를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라고도 한다.
⑦ 몽중일여(夢中一如) : 낮에는 물론 꿈속에서까지 화두가 지속되어 일여가 되는 경지로 최소한 7일 이상은 연속적으로 잠 속에서도 화두가 들려야 몽중일여라고 할 수 있다 한다.
⑧ 숙면일여(熟眠一如) : 꿈이 없는 깊은 잠에 들어서도 삼매가 유지되기 때문에 이를 오매일여라고 하기도 하며 이 경지에 이르르면 다시는 중생 의 삶으로 퇴전치 않는 뜻으로 불퇴전의 경지라고도 한다. 그러나 숙면일여라 하여도 여섯가지의 추번뇌(6추 : 분별지상(分別智相) 상속상(相續相) 집취상(執取相) 계명자상(計名字相) 기업상(起業相) 업계고상(業繫苦相))는 전부 극복을 하지만 세가지의 세번뇌(3세 : 업상(業相) 전상(轉相) 현상(現相))가 남아 이곳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수행에 박차를 가하게 되면 3세의 번뇌도 소멸되어 무기와 번뇌가 꿰뚫어지는 내외명철이 된다고 한다. 이를 일러 百尺竿頭 進一步라고도 표현한다. 일본에서는 위 숙면일여에 이어서 다시 생사일여, 입태일여, 주태일여, 출태일여, 영겁일여를 더하여 이를 13단계로 세분하고 있으나 한국에서는 큰스님들이 숙면일여 이후의 과정을 중요 시 하지 않아 8 단계로 줄였다고 한다.
第3章 묵조선(默照禪)
1. 묵조선의 意味
중국의 송대에서 일어난 5가 중에서 조동종의 묵조선이 임제종의 간화선과 양립하여 각자 독자적인 선풍을 드날렸다. 조동종은 청원 - 석두계의 선법을 계승하여 동산 양개와 그의 제자 조산 본적이 개창한 것으로 임제종과 거의 같은 시기에 형성되었다. 임제종의 선에서는 화두를 참구하여 단도직입으로 진리에 들어가는 선법임에 대하여 조동종의 묵조선은 실천적이고 윤리적이며 친절하게 수행인을 인도하여 가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또한 식정이 없는 무정의 존재들도 쉴 사이 없이 설법을 한다는 무정설법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후일 간화선을 하는 조사 스님들도 많이 인용하는 구절이다. 묵조선은 사다리를 하나하나 거처서 올라가듯이 점진적으로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것이다. 묵조선에서는 그리하여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고요한 마음을 유지 할 뿐 어떤 의증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한다. 간화선이 화두를 철저히 의심하여 미세 망념조차 붙을 곳이 없이하여 일초직입 여래지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묵조선은 고요히 않아서 자기의 마음을 비추어 보고 점차로 그 마음을 없애면서 마지막 단계인 삼매의 세계에 머무는 것이다.
2. 수행방법
동산이 학인들을 지도하기 위한 수단 방편으로 조도, 현로, 전수라는 세 가지 길을 제시하여 동산삼로가 있다. 이를 간단히 보면,
1) 조도(鳥道) - 새가 공중을 날아다닐 때에는 일체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 없는 것처럼, 수행자는 몰종적(沒蹤跡) 혹은 단소식(斷消息)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2) 현로(玄路) - 현현미묘한 길이라는 의미로 유무(有無)나 미오(迷悟) 등 일체의 차별적인 견해를 초월하여 공적한 곳을 왕래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3) 전수(展手) - 수수(垂手)와 같은 말로 향상의 일로에 머무르지 않고 더욱 한 걸음 더 나아가 중생 교화의 행화문을 향해서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조동종의 종풍을 대변하는 조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동상오위송이 있으나 지극히 추상적, 철학적 작품이 아닌가 한다.
1) 정중편(正中偏) 정의 입장에서 볼 때 현상이란 본체를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 본체에서 현상에 주의를 기울이면 본체를 알 수 있다는 것.
2) 편중정(偏中正) 현상을 올바르게 관찰하여 마치면 본체의 파악이 가능하다는 것. 현상에서 본체로의 접근하여 가는 것.
3) 정중래(正中來) 정중편과 편중정의 고찰을 통해 나타나는 정 즉, 무상, 무형의 당체
4) 편중지(偏中至) 현실의 모든 사상의 구명을 통하여 절대경에 이르는 것 깨달음 본체를 현상과 합일 시키는 것
5) 겸중지(兼中至) 본질과 현상이 합일, 융합되어 본체, 현상을 초월한 단계.
여기서의 정은 만법 세계의 본체(妙理)를, 편은 만법세계의 모습(妙用)을 가르키며 정은 선적(禪的) 보편(普遍) 세계이며 편은선적(禪的) 개별(個別)의 세계를 말한다고 한다. 중국 송나라 때 오종이 갈라졌을 당시에는 간화선이나 묵조선이나 다름이 없었는데 때로는 묵조사선, 묵조귀선 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 것은 그 후 삿된 풍조에 떨어진 묵조선을 말하는 것이지 묵조선의 성립 당시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조동종은 중국과 한국에서는 쇠퇴한지 오래 되었으나 일본에서는 여전히 성행한다고 한다.
第4章 단점
위 3가지 수행 방법을 미흡한대로 각각 알아보았으며 나름대로의 장점과 독특한 특색은 이미 각 의미 부분에서 거의 기술이 된 상태이므로 여기서는 각 수행 방법 중 단점을 간단히 논하여 보고자 한다. 그러나 필자의 관점이 그동안 한국에서 수행 방법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였던 간화선임을 밝힌다.
1. 위빠사나의 단점
우선 위빠사나 수행 방법은 의심이 없다는 것이 수긍이 되지 않는다. 모든 대상이나 현상이 발생 변경 소멸하는 것을 관찰하여 그 대상이나 현상 들이 인연에 따라 생멸 할 뿐 영원성이 없음을 깨달아 해탈에 이르고자 함 이 위빠사나 수행법의 핵심임은 분명하다. 간화선에서는 참선을 할 때 의심이 없으면 무기에 빠진다고 경계를 하는 것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은 의심을 두는 것을 오히려 경계를 하는 것이다.
2. 간화선의 단점
수행 진도도 알 수도 없고, 참선 방법이 모호하기도 하며, 평생을 하여도 10중 8, 9는 깨닫기가 어려운 간화선은 타고난 상근기가 아니면 할 수 없다는 비난을 받는다. 때로는 은산철벽(銀山鐵壁), 손도 대기 어렵고 이도 안 들어간다는 것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간화선은 참으로 어려운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수행 방법이 어려워 반드시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아 공부를 하여야 되고, 또한 깨달음을 인정하여 줄 수 있는 스승이 필요 한 것이 선 공부이지만 요즈음은 확철대오한 스승이 드물어 그러한 가르침을 받기가 어렵다는 비난을 하는 분들도 있다. 위와 같은 이유 등으로 간화선이 깨닫기가 어렵다고 더러 배척되는 경향이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큰스님 말씀대로 한生 안난 샘 치고 장부로서 생명을 걸고 한번 도전하여 볼만한 것이 또한 간화선의 매력이 아닌가 한다. 도대체 인생 자체가 오리무중이라, 안개 속에서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지척을 분간조차 못 할 그런 것이 인생이라면, 비록 막연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신심이 부족한 탓일 것이다.), 우리가 큰 의심 덩어리를 가지고 어떠한 진리에의 도전, 탐구가 가능하다는 그런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종종 희열을 느끼게 된다.
3) 묵조선의 단점
묵조선은 침묵으로 앉아서 움직이고 머물고 앉고 눕는 (行住坐臥) 일상의 생활을 선의 체현으로 삼는 좌선을 가르쳤다. 이는 논리성과 지성을 결여한 것으로 오직 앉아있는 것만으로 좌선을 삼는다는 비난을 받았다. 일부에서는 또 묵조사선(黙照邪禪), 묵조귀선(黙照鬼禪), 묵조사선(黙照死禪) 이라고 비난하였으며, 이것은 화두를 지어가다가 사량(思量)을 한다거나, 중도에 다 깨달은 줄 알아 의심이 없어 공부를 못 짓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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