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勸學篇(권학편)
子曰 博學而篤志하고 切問而近思면 仁在其中矣니라.
(자왈 박학이독지하고 절문이근사면 인재기중의니라.)
공자가 말하기를, "널리 배워서 뜻을 두텁게 하고 간절하게 붇고 잘 생각하면 어짐이 그 속에 있느니라."고 하셨다.
莊子曰 人之不學 如登天而無術하고 學而智遠이면 如披祥雲而覩靑天하고 登高山而望四海니라.
(장자왈 인지불학 여등천이무술하고 학이지원이면 여피상운이관청천하고 등고산이망사해니라.)
장자가 말하기를,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재주없이 하늘에 오르려는 것과 같고 배워서 아는 것이 멀면 상서로운 구름을 헤치고 푸른 하늘을 보며 산에 올라 사해를 바라보는 것과 같느니라."고 하셨다.
禮記에 曰 玉不琢이면 不成器하고 人不學이면 不知義니라.
(예기에 왈 옥불탁이면 불성기하고 인불학이면 부지의니라.)
예기에 말하기를, "옥은 다듬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못하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의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였다.
太公이 曰 人生不學이면 如冥冥夜行이니라.
(태공이 왈 인생불학이면 여명명야행이니라.)
태공이 말하기를,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어둡고 어두운 밤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라." 고 하였다.
韓文公이 曰 人不通古今이면 馬牛而襟裾니라.
(한문공이 왈 인부통고금이면 마우이금거니라.)
* 馬牛襟裾 : 말이나 소에 의복을 입혔다는 뜻으로, 학식(學識)이 없거나 예의(禮儀)를 모르는 사람을 조롱(嘲弄)해 이르는 말(옷깃 금, 옷자락 거)
한문공이 말하기를, "사람이 고금의 성인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면 금수에 옷을 입힌 것과 같으니라."고 하셨다.
朱文公 曰 家若貧이라도 不可因貧而廢學이면 家若富이라도 不可恃富而怠學이니 貧若勤學이면 可以立身이요 富若勤學이면 名乃光榮 惟見學者顯達이요 不見學者無成이니라 學者는 乃身之寶요 學者는 乃世之珍이니라 是故 學則乃爲君子요 不學則爲小人이니 後之學者는 宜各勉之니라.
(주문공 왈 가약빈이라도 불가인빈이폐학이면 가약부이라도 불가시부이태학이니 빈약근학이면 가이입신이요 부약근학이면 명내광영 유견학자현달현달이요 불견학자무성이니라 학자는 내신지보요 학자는 내세지진이니라 시고 학즉내위군자요 불학즉위소인이니 후지학자는 의객면지니라.)
주문공이 말하기를, "집이 만약 가난하더라도 가난한 것으로 인해서 배우는 것을 버리지 말 것이요. 집이 만약 부유하더라도 부유한 것을 믿고 학문을 게을리해선 안된다. 가난한 자가 만약 부지런히 배운다면 몸을 세울 수 있을 것이요, 부유한 자가 만약 부지런히 배운다면 이름이 더욱 빛날 것이니라. 오직 배운자가 훌륭해 지는 것을 보았으며 배운 사람으로써 성취하지 못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배움이란 곧 몸의 보배요, 배운 사람이란 곧 세상의 보배다. 그러므로 배우면 군자가 되고 배우지 않으면 천한 소인이 될 것이니 후에 배우는 자는 마땅히 각각 힘써야 하느니라."고 하셨다.
* 朱文公 : 朱文公은 朱子를 일컬으며(서기 1130년 9월 15일~1200년 3월 9일) 公의 휘(諱)는 희(熹)이며 (※죽은 사람의 생전에 이름을 휘(諱)라함.)
자는 원회(元晦) 또는 중회(仲晦)요 호는 회암(晦庵) 또는 자양(紫陽)이시다.
시호(諡號)는 문공(文公), 태사공(太師公), 신국공(信國公) 휘국공(徽國公) 등입니다.
성리학(性理學)을 대성시켰으며 이를 朱子學이라고도 합니다.
유상존칭(儒像尊稱)으로는 즉 주자의 후학(後學)들이나 후손 아닌 다른 사람들이 주로 주부자(朱夫子) 또는 朱子로 부릅니다.
朱文公은 중국 송나라(남송) 때의 대유학자(大儒學者)로서 공맹학(孔孟學)을 집대성(集大成)하여 만인의 생활실천철학(生活實踐哲學)을 심어주어 오늘날에도 인류 정신문화(精神文化)의 지주가 되는 성현(聖賢)이시며 동양삼국(韓國, 中國, 日本)의 역사를 보면 朱子學을 國學으로 정하여 백성을 다스린 기록이 있습니다.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등을 지으셨으며 「인류사상(人類史上) 가장 많은 저서(著書)를 남긴 분」이라고 국제도서관협회(國際圖書館協會) 「진귀본(珍貴本) 마이크로 필림」에 담겨있습니다.
전국의 유도(儒道)나 향교(鄕校) 등에서는 孝道의 근본을 朱子學에서 많이 익히고 있으며 「경사상(敬思想)과 주자가례(朱子家禮) 주자가훈(朱子家訓)」은 대표적인 예입니다.
徽宗皇帝曰 學者 如禾如稻하고 不學者는 如蒿如草로다 如禾如稻兮여 國之精糧이요 世之大寶 如蒿如草兮여 耕者憎嫌하고 鋤者煩惱이니라 他日面墻에 悔之已老로다.
(휘종황제 왈학자 여화여도하고 불학자는 여호여초로다 여화여도혜여 국지정량이요 세지대보 여호여초혜여 경자증혐하고 조자번뇌이니라 타일면장에 회지기로로다.)
휘종황제가 말하기를, "배운 사람은 낱알 같고 벼 같고, 배우지 않으면 사람은 쑥 같고 풀 같도다. 아아 낱알 같고 벼 같음이여 나라의 좋은 양식이요 온 세상의 보배로다. 그러나, 쑥 같고 풀 같음이여 밭을 가는자가 보기 싫어 미워하고 밭을 매는 자가 수고롭고 더욱 힘이 드느니라. 다음 날에서도 만날 때에 뉘우친들 이미 그때는 늙었도다."고 하셨다.
* 휘종 : 중국 북송의 8대 황제(1100~25 재위).
예술의 후원자이자 화가·서예가로 유명하다. 그는 정치를 멀리하고 문학과 미술에 탐닉했다. 그의 화원(畵院)에서 일하는 화가들에게, 세밀한 표현기법을 도입하여 있는 그대로의 색채와 형태로 대상을 묘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화조(花鳥)를 대상으로 한 자신의 작품 또한 정확한 색채, 정밀한 표현, 완벽한 구성 등을 이루고 있다. 그는 '수금체'(瘦金體)로 알려진 우아한 서체로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한편 3세기부터 당시까지 황실에 전해지는 많은 주요 화가들의 전기(傳記)와 그림 목록을 뽑아 〈선화화보 宣和畵譜〉를 편찬하도록 했다(선화는 휘종의 연호임). 그의 재위기간은 북송의 급격한 쇠퇴기였다. 그는 황실에 도교를 장려하고, 정원을 사치스럽게 꾸몄다. 황제가 총애하던 환관들이 조정에서 유례없이 막강한 실권을 장악하자, 보수파와 개혁파 간의 정치적 갈등은 계속되었다. 북쪽의 요(遼)나라가 세력을 뻗치며 위협하자, 그는 만주(지금의 둥베이[東北])의 여진족과 동맹을 맺었다. 요와의 전투에서 이기기는 했으나, 여진족의 세력이 점차로 커지게 되자 이에 두려움을 느낀 그는 1125년 아들 흠종(欽宗)에게 제위를 물려 주었다. 그러나 흠종이 제위에 오른 지 2년이 지난 1127년 여진족은 수도 카이펑[開封]을 점령하고 북송을 멸망시켰다. 휘종과 흠종은 만주에서 비참한 귀양살이 끝에 죽었다.
論語에 曰 學如不及이요 惟恐失之니라.
(논어에 왈 학여불급이요 유공실지니라.)
논어에 말하기를, "배우기를 미치지 못한 것 같이 하고 배운 것을 읺을까 두려워 할지니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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