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제(眞諦)와 속제(俗諦) - 이제(二諦)>
불교에서 진리를 진제(眞諦)와 속제(俗諦) 두 가지로 구분하며, 이를 합쳐서 이제(二諦)라고 한다. ‘제(諦, satya)’는 변치 않는 진리를 말한다.
부처님께서도 설법을 하심에 진제(眞諦)와 속제(俗諦) 두 가지 진리로 나누어 설하셨다. 때문에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부처님이 설한 교설의 깊은 진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진제(眞諦, 산스크르트어 Paramārtha-satya)는 절대적 진리, 실상법(實相法)에 따른 최고의 진리를 말하며, 세속적 입장을 초월한 진리, 세속을 초탈한 출세간적 세계의 진리, 즉 궁극적 관점에서의 진리를 뜻하며, 일명 승의제(勝義諦) 혹은 제일의제(第一義諦)라고도 한다. 절대적인 진리인 진제는 반야바라밀, 공(空), 진여(眞如), 실상(實相), 해탈(解脫), 열반(涅槃) 등 최상(最上)의 진리를 이른다. 일체를 부정하고 언어를 초월하며 불생불멸하고 비인비과(非因非果)인 것을 말한다.
속제(俗諦, 산스크리트어 Samvriti satya)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세간적인 진리, 세속적 진리, 세간의 이치를 기준으로 할 때 타당한 진리,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통속적 진리, 여러 가지 차별이 있는 현실생활의 현상법(現相法)에 따라 알기 쉽게 설명한 진리를 말한다. 세속제(世俗諦) ․ 세제(世諦)라고도 한다.
속제는 모든 것은 인(因)과 연(緣)으로 이루어진 과(果)이고, 모든 것은 생멸의 원리로 돼 있으며, 신진대사의 원칙에 따르고 있다는 등의 비교적 초보적인 이치를 말한다. 즉, 현실의 인과법이 적용되는 일상적 관점에서의 진리를 뜻하는데, 이와 같은 속제에는 무상(無常) ‧ 무아(無我) ‧ 고(苦) 등이 이에 속한다.
따라서 무상 ‧ 무아 ‧ 고는 속제에서는 진리이지만 진제에서는 진리가 아니다. 속제는 한 마디로 번뇌의 세계로 정의하고, 진제는 번뇌를 여읜 세계로 정의한다.
속제란 무명의 중생이 보는 것으로 중도(中道)를 바로 보지 못한 변견을 말하는데 비해, 진제는 진리의 참 모습인 중도를 말한다. 이와 같은 원칙을 기준으로 해서 점차로 고차적인 이치를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진제와 속제, 이제에 대한 설명이 종파에 따라 다소 다르지만 여기서는 보편적인 설명이다.
그런데 진리에 무슨 세간적이니 출세간적이니 하는 차별이 있을 수 있는가 하고 의아해 할 수도 있으나 불법에서는 구별을 한다. 그래서 용수(龍樹)의 저서 <중론(中論)> 제24품에서 “제불(諸佛)은 이제에 의거해 법을 설한다. 세속제와 제일의제가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늙어 죽는다는 사실은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이러한 현상의 이치가 속제에 해당한다. 그러나 진제의 세계에서는 늙음도 죽음도 없다는 초자연적인 것을 말한다. 인간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어 죽어가는 모든 과정이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반야의 도리에서는 그 일체가 없다는 것이다. 즉, 그 모든 과정의 다 하고 끝남도 텅 비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불교도 기독교처럼 천국에 대한 개념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속제에 해당한다. 부처님께서는 해탈이 어려운 중생에게는 천상세계에 가게끔 계율을 지키고 선행을 할 것을 강조하셨다. 5계를 지키고, 착한 일을 하면, 그 과보로써 천상계에 태어난다는 내용이다.
헌데 이것은 세속적 진리에 입각해서 설하신 것이다. 진제에 있어서는 천상도 없고, 지옥도 없으며, 윤회도 없다. 천상에 태어나야 할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공(空)이기 때문이다.
<아함경(阿含經)>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처음엔 주로 속제로 설하셨다. 그래서 계율에 ‘불사음(不邪淫)’, 즉 삿된 음행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있다. 음행을 전적으로 금한 것이 아니라 삿된 음행만 금하신 것이다. 하지만 진제인 절대적인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려면, 즉 해탈을 하려면, 음욕을 완전히 끊어야 한다. 제대로 수행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해탈을 위해서는 반드시 색욕을 끊으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속제와 진제가 다르다.
부처님은 초기경전엔 무상(無常)ㆍ고(苦)ㆍ무아(無我) 삼특상(三特相)을 설하셨다.
우선 무상(無常)을 왜 설하셨는지에 대한 것부터 검토해보자. 부처님께서 무상을 설하신 것은 중생이 모든 게 영원하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먼저 그 전도몽상(顚倒夢想)을 깨버리려고 방편으로 설하신 것이다.
무상하다 함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속제의 차원에서 보면 태어나는 것도 있고, 죽는 것도 있다. 몸이 태어나고, 또 몸이 죽는 것을 생사(生死)라고 한다. 이처럼 속제에서 살펴보면 모든 게 무상하다. 영원하지 못하다. 그래서 결국 사람은 죽는다. 이와 같이 속제에서는 죽음이 있고, 윤회가 있고, 그로 인해 천상계와 지옥이 있다.
그러나 진제에서는 죽음도 없고 윤회도 없다. 모든 게 다 무상하다면 해탈 ‧ 열반도 무상하다는 뜻이 된다. 해탈 ‧ 열반이 무상하다면 그것은 해탈 ‧ 열반이라고 할 수가 없다. 따라서 무상이라는 것은 절대 진리인 진제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세속제이다. 즉, 무상이란 진리로 접어드는 문일 뿐, 그것 자체가 절대적 진리는 아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역무노사진(亦無老死盡)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 ”라는 구절을 이해하지 못해서, 왜 불교에서는 윤회가 있다고 했다가 없다고 하는가 하고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현상 역시 진제와 속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어떨 때는 윤회를 한다고 하시고, 또 어떤 때는 윤회하는 주체가 없으므로 윤회가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둘의 차이가 바로 진제와 속제이다. 속제는 연기법(緣起法)에 해당하고, 진제는 공성(空性)에 해당한다. 속제에서는 윤회가 있다. 그게 육도윤회(六道輪廻)이다. 그러나 진제에서는 윤회가 없다. 윤회하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윤회가 있을 수 없다.
<대지도론(大智度論)>의 설명에 의하면,
『모든 것의 자성(自性)을 부정하는 공(空)의 진리는 마치 음식에 넣어 먹는 소금과 같다. 우리는 소금만 먹고 살 수 없다. 그와 반대로 소금이 들어가지 않은 반찬은 제 맛이 나지 않는다. 반찬에 소금이 적절히 혼합돼야 음식은 제 맛을 내고 우리를 건강하게 만들어 준다. 연기(緣起), 사성제(四聖諦), 삼법인(三法印) 등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이에 근거해 수행을 할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연기ㆍ사성제와 삼법인에 대한 경전의 설명을 확고부동한 진리라고 말할 수 없다. 아무리 부처님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언어에 의해 표현될 때는 논리적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이런 자각 아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우리 심성의 향상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때, 부처님 가르침이 진가를 발휘한다. 다시 말해 분별적 언어에 의한 부처님 가르침을 철저히 신봉하며 공부하고 수행하되, 그것이 언어인 이상 내적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 역시 철저히 자각하고 있어야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전자는 속제적 실천이고 후자는 진제적 조망이다. 이렇게 모든 분별을 해체시키는 진제와, 분별에 의해 불교적 세계를 구축하는 속제를 함께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불교신행 모습이다.』라고 했다.
모든 것이 공하다면, 사성제(四聖諦)가 부정되고,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이 부정되고, 삼보(三寶)가 부정된다고 비판할 수 있다. 겉보기에 모든 것이 공하다는 가르침과 사성제 ‧ 사향사과 ‧ 삼보의 가르침이 상반되는 듯하기 때문이다.
공하다는 쪽은 모든 것의 실체를 해체하는 가르침이고, 이를 부정하는 쪽은 분별에 토대를 둔 가르침이다. 만일 이 두 가지 가르침이 같은 차원에서 베풀어졌다면 불교의 가르침에 모순이 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공하다는 가르침은 진제의 가르침이고, 분별에 토대를 둔 가르침은 속제의 가르침이다. 전자의 가르침은 분별을 떠나, 있는 그대로 본 참된 가르침이고, 후자의 가르침은 일반인들의 분별적 사고방식에 맞추어 베풀어진 가르침이다. 두 가르침 모두 불교적 가르침임엔 다름이 없다. 진제의 가르침에서는 우리의 모든 분별적 사고를 해체시킨다. 그러나 속제의 가르침은 분별적 사고에 입각한 체계적 가르침이다.
예를 들면,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다고 말하며 시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진제의 가르침이고, ‘수행자는 오후에 식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시간의 존재를 인정하는 가르침은 속제의 가르침이다. 선도 악도 없다고 말하는 초윤리적 가르침은 진제이고, 악을 행하지 말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윤리적 가르침은 속제이다.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아의 가르침은 진제이고, 자아의 존재를 설정하는 윤회와 인과응보의 가르침은 속제이다. 진제와 속제 두 가지 모두 우리가 배우고 따라야 할 소중한 진리들이다.
따라서 이제(二諦)의 구분을 모르고 <중론(中論)>을 공부할 경우 진제의 극단, 공의 극단에 치우쳐 허무주의에 빠질 수가 있다. 이런 허무주의를 공견(空見)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공(空)을 공부하고 수행하다가 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공견에 빠질 경우 모든 가치판단이 상실돼 선ㆍ악의 구분을 무시하는 폐인이 되거나 공사상이 잘못됐다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일상적ㆍ세속적 삶은 진제가 아니라 속제의 규범이 지배한다. 우리의 모든 행ㆍ불행은 다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기에 우리는 항상 착하고 고결하게 살아야 하며, 수행자들은 열심히 수행을 해 자신의 번뇌를 녹여야 하고, 모든 중생은 부처님을 우러르며 그 가르침대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 속제적 가르침이다.
우리 불교계, 또는 동아시아 불교계의 문제점은 속제를 무시하고 진제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는 점이다. 속제를 무시하는 분들의 증상은 ‘막행막식(莫行莫食)’이다. 아무 행동이나 막 하고, 아무 것이나 막 먹고 마신다. 계율을 지키지 않는 삶이다. 그 이유는 공만 추구하다가 세속적 가치판단이 상실됐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불교계에서는 이렇게 막행막식하는 사람을 ‘깨달은 도인’으로 착각하는 풍조가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공병(空病)에 걸렸을 뿐이다. 공병(空病)을 유식불교에서는 악취공(惡取空)이라고 한다. 티베트의 불교계에도 그런 사람들이 가끔 출현했는데, 그들을 광(狂)라마(Lama), 즉 미친 스님이라 했다. 그런 사람은 계율을 어겨도 전혀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선과 악의 분별을 내지 않는다.”고 자기 합리화를 하는 모순에 빠져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실히 이해하려면 진제와 속제, 이 둘을 잘 이해해야 중도(中道)를 지켜나갈 수 있다. 그래야 단멸론(斷滅論)이나 상주론(常住論)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헌데 공(空)은 쉽게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무상(無常)으로 접어들어야 한다. 그래서 삼법인(三法印)에 무상의 진리가 첫 번째에 등장한다. 무상의 진리를 배우다가 진제인 공(空)을 터득해야 한다. 무상이라는 것은 방편이다. 모든 게 영원하다는 집착을 없애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속제로서 무아(無我)를 설하셨다. 이것은 고정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아(我-아트만)가 없다는 뜻이다. 무아는 무상(無常)이 ‘나(我)’에게 적용됐을 때 깨닫게 되는 경지로서 연기법에 대한 공간적인 해석을 의미한다.
모든 것이 고정된 변하지 않는 그러한 실체가 없듯이, ‘나’라는 존재 또한 무수한 인과 연들에 의한 작용,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말이다. ‘나’라는 것은 이 몸과 마음에 의해서 이름 붙여진 것에 불과하다. 무아라는 것은 본래 있던 나를 없애서 무아가 된 게 아니고, 원래 ‘나’라는 건 없다는 의미이다.
부처님 당시 인도전통종교인 브라만교에 있어서의 가장 기본적 개념이 아트만(atman=我相)이었다. 이 아트만은 인간존재의 영원한 핵, 변치 않은 실체, 또는 변치 않는 자아(自我), 변치 않는 본질이라는 뜻으로 죽은 뒤에도 살아남아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했다. 당시 인도사회는 이런 고정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아트만사상에 빠져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아트만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아상(我相) 타파를 위한 속제로서의 설법이 바로 ‘무아교설’이었다.
그리고 무아의 ‘내(我)가 없다’는 것에서 ‘나’라는 것은 ‘나’ 개인뿐만 아니라, 인간을 넘어서 사물까지, 이 세상의 일체 모든 존재를 의미하는데, 사람이나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 나무나 풀이나 돌이나 지구, 태양, 우주 또한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이고,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 사건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온갖 일과 사람들의 감정들까지 모든 것이 고정적인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 우주법계에 존재하는 일체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든 생명과 모든 사물들은 변치 않는 실체가 없어서 끝없이 변한다. 따라서 생명체 역시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는 없다고 하는 것이 무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인도사회뿐만 아니라 오늘에 있어서도 변함없이 중생들은 이 아상(我相-자아)에 집착하고 있다.
이 몸과 마음을 가지고 ‘나’라고 생각하고, 이 몸뚱이에 나의 본질적인 근원을 설정하고, 그러한 ‘나’에게 집착한 나머지 재산과 명예와 권력이 영원히 제 것으로 착각해서 탐욕을 부리고 남을 억압하며 서로 다투고 있다. 이와 같이 아상에 집착한 자기중심의 행태를 떨쳐버리기 위해 속제로서 무아가 설해진 것이고, 이러한 무아의 개념이 진제에 있어서는 공(空)으로 발전한다.
‘나(我)’란 존재는 무상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원한 것도 아니다. ‘나’라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왜냐면 불생불멸이기 때문이다. 본래 태어난 게 없기 때문에 죽을 수도 없는 것이고, 본래 뭐가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영원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사라져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본질적인 자아(自我)도 사실은 실체가 없는 것임을 의미한다. 공(空)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도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봐야 한다. 생(生)과 사(死)가 같다는 것은 진제의 측면에서 설명해야 한다. 진제는 불생불멸을 말한다. 따라서 태어난 게 없다는 것과 죽는 게 없다는 것이 같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기로써 존재하며, 연기라는 것은 상호 인연화합을 말하는데, 그러므로 독립적인 실체가 없다. 그러므로 무아이며, 이 무아가 발전한 것이 공(空)이다. 이처럼 공은 무아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지만, 그보다 더 철저히 발전된 개념이다.
공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본성이 공하다, 비어있다는 의미이다. 공은 불이(不二) 즉 이원적 대립의 극복으로 요약된다. <반야심경>에서도 공을 부증불감(不增不減)으로 설명한다. 부증불감은 증가와 감소를 동시에 부정하는 것으로 이와 같이 대립되는 개념 전체를 동시에 부정함으로써 공은 새로운 차원의 철학으로 전개된다. 대립과 갈등에서 벗어나 절대평등의 세계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고(苦)도 마찬가지이다. 고통이라는 것은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몰라서 집착할 때에 발생하는 것이다. 제법실상을 알아서 마음이 오염되지 않는 상태라면 고통이 아닌 게 된다. 그리하여 해탈하면 고통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고(苦)도 역시 속제에 해당한다.
그리고 <반야심경>에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라고 한 것은 속제인 사성제(四聖諦)를 부정하고 있다. 지혜의 눈으로 우리 인생을 관찰해 볼 때 삶의 근본이라고 하는 몸과 마음은 텅 비어(공이므로) 아무것도 없으므로 그 몸과 마음을 의지해 일어나는 온갖 고통은 아예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고(苦)의 원인도, 고가 소멸된 경지도, 고를 소멸하는 방법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야바라밀에는 고집멸도가 본래 없다. 반야바라밀은 불생불멸의 실상으로서 고(苦) ‧ 집(集)이 없으니 멸(滅) ‧ 도(道)도 또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을 이루지 못하고 무명의 굴레에서 맴도는 중생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고 <반야심경>에서는 12인연도 모두 텅 빈 것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인간의 존재 방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텅 빈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없기도 하며 있기도 한 것이다. 있다는 것은 인연에 의해 잠깐 나타난 것이고, 그것은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없기도 한 것이다. 결국 12연기와 윤회를 부정한 것이다. 부처님은 12연기에 연연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해탈을 외치신 것이다.
이래서 진제를 깨달아야만 대승경전이 이해가 된다. 그 전에는 대승경전이 그냥 허황된 내용처럼 들린다. 그래서 소승에 빠진 사람들 중에 대승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승은 변질된 불교라는 것이다. 이게 바로 속제에만 근거하기 때문이다. 불교를 이해하려면, 진제와 속제를 둘 다 이해하고 병합시켜야 한다.
헌데 속제는 누구나 이해하기 쉽지만, 진제라는 절대 진리는 알기가 어렵다. 이러한 진리는 본인이 직접 체득해야지 말로 설명될 문제가 아니다. 위없는 최상의 깨달음이라고 표현하는 그 깨달음을 직접 깨달아야 진제를 이해할 수 있다. 해탈의 관건은 무상 ‧ 무아 ‧ 고가 아니라 공(空)이다. 「무상ㆍ고ㆍ무아」는 속제에 해당한다. 소승이든 대승이든 진리의 바탕은 같다. 진제는 공성을 터득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 해탈은 공(空)에 의해 이루어지지 딴 방법은 없다.
드러난 현실세계는 인연, 즉 연기로써 계속 이어지고. 그 이면은 텅 비어 있으니, 공성에 해당된다. 그래서 초기경전은 주로 진제보다는 속제에 많이 치우쳐서 설해져 있다. 그리고 대승경전은 주로 진제에 속한다. 공성(空性)을 이해 못하거나 보리심(菩提心)이 없는 사람은 대승경전을 이해하기 힘들다. 경을 볼 때는 이 진제와 속제를 잘 구분해서 봐야 한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안 된다.
다만 진제와 속제가 둘이 아니다. 깨달으면 일체가 진제이고 그렇지 못하면 일체가 속제이다. 속제와 진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이 다를 뿐이다. 애인과 다정하게 얘기 나누면서 바라본 달과 애인과 헤어져 슬픈 마음으로 본 달이 다르지 않지만, 웃고 있는 달과 슬픈 달이 있는 것과 같다.
무명에 싸여 있어서,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탐ㆍ진ㆍ치와 집착에 따라 번뇌 망상이 들끓으면 그것이 속제이다. 이런 마음은 자기를 해치고 남도 해친다. 무명을 벗고 탐ㆍ진ㆍ치와 집착을 여의어 번뇌 망상이 쉬었다면 그것이 진제이다.
드라마에 부자들이 등장한다. 그것을 보고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나는 왜 저렇게 되지 않을까 한탄하면서 보는 수도 있고, 그냥 재미있는 드라마로 보는 수도 있다. 동일한 드라마의 한 장면이지만, 그가 어떤 마음에 따라 괴로운 장면이 되기고 하고, 재미있는 장면이 되기고 하는 것처럼 진제와 속제는 그의 마음에 달려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진제’를 무명 중생이 보는 것을 속제라 하고, 속제를 깨달은 정견으로 바로 보는 것을 진제라 할 뿐 진제가 즉 속제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
'불교 > 불교 일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Ⅵ. 중국불교의 화엄사상(華嚴思想) 2. 화엄교학의 역사 (0) | 2017.12.11 |
---|---|
[스크랩] Ⅵ. 중국불교의 화엄사상(華嚴思想) 1.화엄경(華嚴經) 해제 (0) | 2017.12.11 |
신묘장구대다라니 - 산스크리트어 본 (0) | 2017.02.08 |
신묘장구대다라니 해설(수정) (0) | 2017.01.27 |
五觀偈(오관게) (0) | 2016.1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