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지자기(自止自棄)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노수신(盧守愼·1515~1590)이 임금에게 먼저 뜻을 세울 것을 청한 '청선입지소(請先立志疏)'의 한 대목. "대저(대체로 보아서) 뜻이란 기운을 통솔하는 장수입니다. 뜻이 있는 곳이면 기운이 반드시 함께 옵니다. 발분하여 용맹을 다하고, 신속하게 떨쳐 일어나는 것은 힘을 쏟아야 할 곳이 있습니다. 산에 오르면서 꼭대기에 뜻을 두지 않는다면, 이것은 스스로 그치는 것[自止]이 됩니다. 우물을 파면서 샘물이 솟는 것에 뜻을 두지 않는다면 이것은 스스로 포기하는 것[自棄]이 됩니다. 하물며 성현과 대덕(大德)이 되려면서 뜻을 세우지 않고 무엇으로 하겠습니까?"
등산은 정상에 오를 목표를 세우고 차근차근 밟아 올라간다. 우물은 차고 단물을 얻을 때까지 파고 또 판다. 파다 만 우물은 쓸데가 없고, 오르다 만 산은 가지 않은 것과 같다. 목표를 정해 큰일을 도모할 때는 심지를 깊게 하고 뜻을 높이 세워야 한다. 뜻이 굳지 않으면 제풀에 그만두고 제 스스로 포기하고 만다(自止自棄). 목표를 향해 밀어붙이는 힘은 굳센 뜻에서 나온다. 굳센 뜻이 없이는 추진하는 에너지가 생겨날 데가 없다.
하수일(河受一·1553~1612)은 젊은 시절 두 동생과 함께 청암사(靑巖寺)에서 글을 읽다가 절 뒷산에 올랐다. 정상에서 내려오면서 그 느낌을 이렇게 적었다. "사군자는 몸둘 곳을 마땅히 가려야 한다. 낮은 곳에 처하면 식견이 낮아지고, 높은 곳에 처하면 식견이 높아진다. 높지 않은 곳을 택한 대서야 어찌 지혜를 얻으리(士君子處身宜擇, 處下而見下, 處高而見高. 擇不處高, 焉得智)." 꼭대기에서는 시야가 툭 터져서 안 보이는 것이 없었는데, 내려올수록 시야가 좁아져서 답답해졌기에 한 말이다.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말했다. "등산을 하면서 산꼭대기까지 가려고 마음먹은 사람은 비록 꼭대기까지 못 가더라도 산허리까지는 갈 수가 있다. 만약 산허리까지만 가려고 작정한다면 산 밑바닥을 채 벗어나지도 않은 채로 반드시 그치고 말 것이다(登山期至山頂者, 雖不至頂, 可至山腰矣. 若期至山腰, 則不離山底而必止矣)."
품은 뜻이 그 사람의 그릇을 가른다. 바라보는 높이에 따라 뿜어져나오는 에너지의 양도 차이 난다. 제 깜냥도 모르고 날뛰는 것은 문제지만, 해보지도 않고 자포자기하는 것은 더 큰 문제다.
※ 노수신(盧守愼·1515(중종 10)~ 1590(선조 23)) :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대윤(大尹)의 한 사람으로 영의정에 올랐으나,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이황·기대승 등과 주자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본관은 광주.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
아버지는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를 지낸 홍(鴻)이다. 장인인 이연경(李延慶)에게 배웠으며, 휴정(休靜) 등과 사귀면서 불교의 영향도 받았다.
1543년(중종 38)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전적·수찬을 지냈다. 1544년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가 되고, 같은 해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대윤(大尹)에 속하여 인종 즉위초에는 정언을 지내면서 소윤(小尹) 이기(李芑)를 탄핵하여 파직시키기도 했다. 1545년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문정대비(文定大妃)가 수렴청정을 하자 대비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을 비롯한 소윤이 정권을 잡은 뒤, 윤임(尹任) 등의 대윤을 제거하기 위하여 1547년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그는 소윤계열인 윤춘년(尹春年)과의 친분으로 죽음은 면했으나, 이조좌랑에서 파직되고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1547년(명종 2) 정황(丁熿)과 함께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고 진도로 옮겨 19년간 귀양을 살았다. 1565년 괴산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567년(선조 즉위년)에 풀려나 교리·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을 지내고, 1573년 우의정, 1578년 좌의정, 1585년 영의정이 되었다. 1588년 영의정을 사직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한 일이 문제되어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했다.
※ 하수일(河受一.1553(명종 8)∼1612(광해군 4)) 조선 선조 때의 성리학자(性理學者)
자는 태역(太易)이고, 호는 송정(松亭)이다. 본관은 진주(晋州)로 경남 진주 출신이며, 하면(河沔)의 아들로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조목(趙穆) 등과 교유하였다. 어려서 숙부인 하항(河沆)에게서 『대학(大學)』·『중용(中庸)』 등을 배우고, 후에 조식을 사사(師事)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양곡을 비축하고 군사를 소집하였다. 1600년(선조 33)에 영산현감(靈山縣監)을 거쳐, 형조좌랑·호조정랑·경상도사(慶尙都事) 등을 지내고, 만년에는 수곡리(水谷里)에 수곡정사(水谷精舍)를 짓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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