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蛙餌料

seongsoo 2012. 1. 10. 10:02

□ 와이료(蛙餌料) 이야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와이료” 란 말이 있다. 그것은 잘 봐 달라고 “와이료” 를 한다는 것이다.

"어려운 일인데도 “와이료” 쓰니 해결 되더라"”와이료“ 없이는 아무것도 안된다.” (좀 심하지만.)

그런데 이 “와이료(蛙餌料)”가 모두들 일본어투의 용어라서 버려야 된다고 하지만 순수한 우리말 해석이이란 점을 알 필요가 있다.

일본어는 회뢰(賄賂). 뇌물(賂物)을 “わいろ(와이로)” 또는 “あいろ(아이로)” 라고 발음되지만 우리나라에 “와이료”는 해학적이고 의미 깊은 뜻을 갖고 있음을 상기하자.

 

♦ 한문 뜻을 보면

 

(와) 는 = 개구리 蛙 字 이고

(이) 는 = 먹이 餌 字 이며 [정당한 수단 아닌 먹이]

(료) 는 = 되질할 料 字 이다. [계량할 수 있는 값].

한마디로 “와이료” 는 "개구리밥의 값" 이라고 풀이 된다.

 

♦ 유래를 보면

고려 때 어느 임금이 백성들의 삶을 파악하기 위해 요즈음 말로 민정시찰을 미복으로 갈아입은 채 잠행을 하고 있었다.

임금이 궁성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 도착 했을 때 날은 어둡고 배는 몹시 고파왔다. 희미한 불빛이 있어 찾아드니 찢어지게 가난한 초가에서 선비가 낭랑하게 글을 읽고 있었다.

주인을 찾은 임금이 내가 지금 몹시 시장해 무엇이든 좋으니 요기할 것을 청했다. 선비는 지금 저희 집은 너무나 가난해서 먹을 것이라곤 물 한 사발 밖에는 대접 할 것이 없습니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주막집이 있을 터이니 오늘밤은 거기에서 유숙 하십시오. 라고 말했다.

임금이 선비 집을 막 나오려 하다 보니 그 집 벽에는 이런 글이 붙어 있었다.

"有我無蛙(유아무와) 人生之恨"(인생지한).

[나의 학문적 실력은 충만하나 개구리가 없는 게 내 인생의 한이로다.]

생전에 듣도 보도 못한 글귀라 임금은 무슨 뜻인지를 선비에게 물었다. 별것도 아니라며 부끄러워하는 선비를 재촉해서 이글의 뜻을 임금님은 얻어냈다.

 

♦ 중국 고사 우화에서

꾀꼬리와 뜸부기(까마귀 란 말도 있다)가 서로 다투는데 각각 자기 목소리가 훨씬 아름답다는 것이다. 둘만으로 서는 승부를 판가름 할 수가 없어 이웃의 황새를 심판으로 내세우고 그 결과를 3일 뒤에 듣기로 했다.

자신이 만만한 꾀꼬리는 3일 동안 기다리고만 있었고 뜸부기는 황새가 가장 좋아하는 개구리를 잡아 꾀꼬리 모르게 매일같이 바쳤다. 3일후 결과는 개구리를 뇌물(賂物)로 바친 뜸부기가 꾀꼬리 목소리보다 더 좋다는 판정을 내리고 말았다.

 

이런 우화(寓話)를 자신의 처지에 비추어 “有我無蛙 人生之恨” 은 부패한 조정(朝廷)에 대한 자탄(自嘆)의 글이라고 선비가 말했다.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임금은 조정에서 실시하는 과거가 5일 뒤에 있다는데 그것을 아느냐? 라고 물으니

이때 선비의 대답은 내가 십년을 한결같이 옳은 답을 적어 냈으나 매번 낙방인 것은 개구리밥 즉 조정의 시험관에게 뇌물로 바칠게 없어서 그렇다는 걸 알았다. 이제는 과거를 포기 하겠노라고 말했다.

임금은 나도 시골의 별 볼일 없는 서생으로 당신보다 더한 낙방을 자주 했으나 희망을 잃지 않고 이번에 또다시 과거를 보러 올라가는 길이오. 하면서 나와 같이 한 번 더 과거에 참가하자고 졸랐다.

결국 가난한 선비는 임금에게 설득되어 과거를 치르기로 결심하고 5일후에 과거장을 갔더니 시제(試題)는 이러하였다.

 

= 有我無蛙 人生之恨 ! 의 뜻은 ? =

 

모든 유생들에게는 처음 보는 생소한 글이였으니 결과는 가난한 선비의 장원으로 귀결이 되었다.

감격해 고개를 들어 보니 5일전에 배고파 찾아왔던 그 시골서생이 임금님의 용상에 앉아서 미소를 짓고 있질 않는가!.......

그래서 이 가난한 선비는 어진 성군을 만나 충성스런 신하로 천수를 다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미래까지도 인간의 역사에는 변하지 않고 거듭 되는 게 있다 면, 바로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쟁취 하고자하는 지나친 욕망뿐이다.

이 세 가지가 얼마나 많은 죄악과 피 눈물의 회한을 남기고 있는가 ?

내용을 알고 보면 현대판 “와이료” 로 요약된다. 이 와이료(蛙餌料)가 없는 세상을 우리는 만들어 가야 한다.

이렇게 되어야만 후세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조상이 될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이 선비가 바로 고려 명종 때 유명한 문신인 백운거사 이규보(李奎報)(1168~1241) 란 것을 기억 하면서 그의 시한수를 소개한다.

 

 

(吟) 井中月(우물 속의 달)

= 李奎報(이규보) =

 

 

 

山 僧 貪 月 光 [산승탐월광]

竝 汲 一 甁 中 [병급일병중]

到 寺 方 應 覺 [도사방응각]

甁 傾 月 亦 空 [병경월역공]

 

산속의 스님은 달빛이 하도 탐스러워

함께 길러내어 한 단지 가득 담았네

절에 돌아 와 문득 깨닫게 되었으니

단지를 기울여도 달은 역시 없다는 걸

 

 

(次韻)=소승:행자=

 

 

僧 去 汲 井 水 [승거급정수]

和 月 滿 盂 中 [화월만우중]

入 寺 無 所 見 [입사무소견]

方 知 色 是 空 [방지색시공]

 

스님이 우물물 길어서 가노라니

바리 속에 달빛이 함께 가득하였는데

절간에 돌아오니 보이는 게 하나 없어

옳거니 이것이 바로 색즉시공(色卽是空)

 

 

♦ 이규보 [李奎報, 1168~1241]

본관 여주. 자 춘경(春卿). 호 백운거사(白雲居士)·지헌(止軒)·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초명 인저(仁氐). 시호 문순(文順). 1189년(명종 19) 사마시(司馬試), 이듬해 문과에 급제, 1199년(신종 2) 전주사록(全州司錄)이 되고 1202년(신종 5) 병마녹사 겸 수제(兵馬錄事兼修製)가 되었다.

 

1207년(희종 3)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권보직한림(權補直翰林)으로 발탁, 참군사(參軍事)·사재승(司宰丞)·우정언(右正言)을 거쳐 1219년(고종 6) 좌사간(左司諫)으로서 지방관의 죄를 묵인하여 계양도호부부사(桂陽都護府副使)로 좌천되었다.

 

1220년(고종 7) 예부낭중(禮部郞中)·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를 거쳐 30년 위위시판사(衛尉寺判事)가 되었으나, 팔관회(八關會) 행사에 잘못을 저질러 한때 위도(蝟島)에 유배되었으며 1232년(고종 19) 비서성판사(祕書省判事)에 승진하고, 이듬해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정당문학(政堂文學)·참지정사(參知政事)·태자소부(太子少傅) 등을 거쳐 1237년(고종 24)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감수국사(監修國事)·태자대보(太子大保)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호탕 활달한 시풍(詩風)은 당대를 풍미했으며, 특히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그 감상을 읊은 즉흥시는 유명하다. 몽골군의 침입을 진정표(陳情表)로써 격퇴한 명문장가 이었다. 시·술·거문고를 즐겨 삼혹호 선생이라 자칭했으며, 만년에 불교에 귀의했다.

 

저서에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백운소설(白雲小說)》 《국선생전(麴先生傳)》 등이 있으며, 작품으로 시(詩)에 〈천마산시(天摩山詩)〉 〈모중서회(慕中書懷)〉 〈고시십팔운(古詩十八韻)〉 〈초입한림시(初入翰林詩)〉 〈공작(孔雀)〉 〈재입옥당시(再入玉堂詩)〉 〈초배정언시(初拜正言詩)〉 〈동명왕편(東明王篇)〉, 문(文)에 〈모정기(茅亭記)〉 〈대장경각판군신기고문(大藏經刻板君臣祈告文)〉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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