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뭡니까

대통령 용꿈 꾸는 돈키호테들

seongsoo 2011. 4. 10. 09:30

대통령 용꿈 꾸는 돈키호테들

 

북진통일·결혼수당 1억… 튀는 공약으로 시선 끌지만 초라한 성적표 남기고 퇴장
"떨어질 줄 꿈에도 몰랐다"

 

대한민국 대통령.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元首)로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하고 대내적으론 행정권의 수반(首班)이 되는 최고의 통치권자다. 대통령은 국가의 독립·영토의 보전·국가의 계속성·헌법을 수호할 책무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

18대 대선은 2012년 12월에 있을 예정이지만 대선을 향한 주요 주자들의 레이스는 이미 시작됐다. 헌법은 선거일을 기준으로 40세가 넘으면 피선거권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어 40세가 넘은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대통령이 될 수 있지만 유력정당의 공천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정치인 몇몇만이 국민들의 관심권에 들어올 뿐이다.

하지만 투표장에서 국민들이 받아든 투표용지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름들도 발견된다. 건국 이후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은 것은 총 10차례(2·3·5·6·7·13·14·15·16·17대)다. 10번의 직선에서 모두 70명(중복 포함)의 후보가 출마해 중도사퇴 등을 제외한 57명이 국민의 심판을 받았다. 그중 19명이 득표율 1% 이하라는 성적표를 받았다.

'카이저 수염' 진복기 對 '허본좌' 허경영

1971년 7대 대선 하면 박정희 대통령의 3선 도전과 이를 저지하려는 김대중 후보의 격돌로 기억된다. 그러나 두 유력후보에 이어 1%(12만2914표)의 지지로 3위의 성적을 거둔 정의당 진복기 후보도 화제였다. 진 후보는 북진통일, 금력·폭력선거 타파 등 파격적인 공약을 내걸었지만 국민들은 좌우 양쪽으로 길게 기른 팔자 콧수염 '카이저 수염'에 더 관심을 보였다. 고은 시인은 자신의 연작시에서 '진 후보가 무교동에 나타나면 지나가던 여고생들이 낄낄낄 웃었다'고 기록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제공
진씨는 16년 만에 다시 직선으로 치러진 1987년 13대 대선에도 출사표를 던졌으나 김대중·김영삼 후보가 단일화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출마를 포기했다. 이후 목사안수를 받은 진 후보는 1992년 기독성민당을 만들어 다시 출마를 선언했으나 민자당 김영삼 민자당 후보가 같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출마를 포기했다. 그는 "건강검진 결과 120세까지 장수한다는 예상이 나와 앞으로 정치풍토가 쇄신되면 출마하겠다"고 했으나 1997년 대선 출마도 결국 포기했고, 2000년 지병으로 숨졌다. 그때 그의 나이 83세였다.

1997년 대선에 처음 등장한 공화당 허경영(64) 후보는 '카이저 수염' 진복기를 '능가'하는 후보로 평가받는다. 그는 '핵 보유', '결혼수당 1억원 지급', 'UN본부 판문점 이전', '한라산 백록담에 양수발전소 설치' 등 기상천외한 공약을 제시했다. 1997년 0.2%(3만9055표)의 지지를 받았던 그는 2002년 다시 출마를 하려 했으나 기탁금 부족으로 출마를 포기했다. 그리고 2007년 다시 출마해 '허본좌'신드롬을 일으켰다. 당초 1000만표를 예상했다던 허 총재는 9만6756표(0.4%)를 얻는 데 그쳤지만 인기는 유력후보 못지않았다. 자신이 직접 음반을 내놓기도 했고, 한 케이블 방송에 출연해 공중부양과 축지법 논란을 빚기도 했다.

허 총재는 "대학에 가서 내가 노래하면 사람들이 웃지만 다른 정치인들은 계란 세례를 받는다"며 "젊은 세대는 내 주장에 설득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초'로 18대 대선 출마의사를 밝힌 그는 "박근혜·이재오·손학규·유시민 후보가 내 라이벌이 될 것"이고 "결국 1200만표 이상을 획득해 당선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남장후보 김옥선, 종교인·군인…

2002년 대선에서는 분홍색 바탕의 선거 선전벽보에 '믿음·희망·사랑의 정치'를 내세우고 출마한 '남장 여성' 무소속 김옥선(77) 후보도 화제가 됐다. 1975년 대정부질문에서 유신체제를 비판했다가 국회의원직을 내놓아야 했던 '김옥선 파동'으로 이미 국민들에 알려져 있던 그는 '무공약'을 공약으로 내거는 등 파격적 행보를 보였으나 0.4%(8만6292표)의 지지를 받는데 그쳤다. 김 후보는 1987년 대선에 출마했다가 선거법 규정 위반으로 등록 무효처리된 사회민주당 홍숙자(78) 후보를 제외하면 처음 대선에 도전한 여성이었다. 우리겨레당을 만들어 대선 출마를 시도했으나 "언론의 외면과 여러 분야의 보이지 않는 손 때문에 사퇴한다"며 결국 포기했다.

종교인들의 대선 출마도 계속됐다. 1987년 '한얼정신' 회복을 기치로 내건 한주의통일한국당 신정일(1999년 별세) 후보는 자신이 만든 한얼교의 교주였다. '정부축소', '비무장지대에 제3의 국가 건설' 등의 공약을 내세웠던 그는 1997년 통일한국당 후보로 다시 출마해 두 번 모두 0.2%의 지지를 얻었다. 2002년 '불심으로 대동단결' 국태민안호국당 김길수(63) 후보가 출마했지만 주요 불교계 교단들은 그를 '출마를 통해 교세를 확장하려는 이단(異端)'으로 규정하고 거리를 뒀다.

2002년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오른팔'로 알려진 장세동(75)씨가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중도 사퇴했다. 당시 전 전 대통령이 장 후보의 출마를 만류했음에도 출마해 궁금증을 남겼다. '공동체의식 회복', '국회·청와대 인원 삼분의 일로 감축' 등의 공약을 내걸었던 육군 사단장 출신 전관(67) 후보는 군사정권과는 무관한 첫 군인출신 후보였다. 2007년 출마한 그는 7161표(0.0%)를 얻어 역대 대선 최저 득표를 기록했다. 전 후보는 출마 당시 당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는지에 대해 묻자 "군인이 전투할 때 생존가능성을 보고 전투하냐"고 반문했다. 그는 "(정치적 목적을 알리기 위해) 일간지에 광고를 내는 것과 대선에 출마하는 것 중 어떤 것이 선전 효과가 크겠느냐"고 말했다. 과학기술처 장관과 대학 총장을 역임하고 2007년 출마한 참주인연합 정근모(72) 후보측은 "지난 대선과 관련된 어떠한 인터뷰도 사양한다"고 밝혔다.

5억원 기탁금제도, 줄어들지 않는 군소 후보

현행 공직선거법은 군소후보의 난립을 막기 위해 대선 출마 후보에 5억원의 기탁금을 받아 15% 이상 득표시 전액을, 10~15% 득표시 절반을 돌려주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당선 가능성이 희박한 군소후보들의 출마는 계속됐다. 지난 2007년 대선에선 1% 이하의 지지를 받은 후보가 이인제(민주당), 허경영(경제공화당), 금민(한국사회당), 정근모 (참주인연합), 전관(새시대참사람연합) 5명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대부분의 군소후보들은 대선 출마 후유증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했다. 전관 후보는 "2007년 대선 당시 진 빚을 아직도 갚지 못했다"고 했다. "당선되면 국회의원·총리를 시켜주겠다"며 지지자들에게 돈을 받아 실형을 선고받은 출마자도 있었다. 하지만 인지도가 낮은 군소후보의 출마 행렬은 계속됐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대통령 선거 출마 자체로 자신의 신분이 상승한 것과 같은 믿음을 가지게 된다"고 했다. 유력정당의 대통령 선거 경선 후보로 나섰던 한 인사는 "세상 사람들이 군소후보의 출마를 비웃어도 주변에 있는 지지자들은 그를 오히려 부추기기 때문에 실상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또 "일부 후보는 대선 출마 경력 자체를 만들기 위해 출마하기도 한다"고 했다.

1997년 대선에 바른나라정치연합 후보로 출마해 0.2%(4만8717표)를 얻은 김한식(65) 목사는 "참다운 신앙으로 정치활동을 한다면 현실 정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구체적인 계획이나 정치적 목표 없이 나가려는 사람이 있다면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1992년 대한정의당 후보로 출마했던 이병호(85) 변호사는 "그때는 당선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면 정치적 기반과 조직 없이 선거에 출마하는 것은 무모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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