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_법륜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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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 2강
안녕하세요. 25페이지 펴주세요. 오늘은 금강경 두 번째 강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1,250명의 제자들과 제다바나 기원정사에서 머무르고 계실 어느 날. 마침 식사 때가 돼서 대중의 선도에 서서 바루를 들고, 사위대성에 들어가서, 차례로 밥 빌기를 마치고, 본래 자리로 돌아오셔서 대중과 둘러앉아서 공양을 드시고, 바루를 씻어 두고 옷도 접어서 놔두고, 발을 씻고, 자리를 펴고 앉으셔서 고요한 명상에 들어가셨을 적에 대중과 함께 있던 장로수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오른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두 손을 모아 부처님을 우러러보면서 자신이 깨달은 기쁨의 노래. 부처님의 그 일거수일투족. 그 하나하나에 수행자들을 위하는 그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그들에게 바른 법을 일러 주려고 하는, 오직 중생의 요구에 수순하는 부처님의 삶을 보시고 부처님을 찬탄하고 그리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수보리가 맑은 마음이 돼서 밝은 눈을 뜨고 이제야 법의 진리에 들어서 기뻐하는 것을 보시고는 함께 기뻐하시면서 수보리를 칭찬하시고 수보리의 질문에 기꺼이 대답하겠노라.
그러자 수보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간절히 들을 그런 마음의 준비가 됐다고 부처님께 고백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대승불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 되는 그런 말씀이 이 수보리의 요청에 의해서 그리고 부처님의 응답에 의해서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그래서 제3분을 대승정종분이라고 한다. 대승불교사상에 가장 바르고 으뜸되는 내용이 이 안에 들어있다. 이 말이죠. 대승정종분이다. 대승불교의 가장 으뜸되고 바른 사상을 말하고 있다. 이 말이오.
佛告須菩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하되
諸菩薩摩訶薩 모든 보살마하살이. 보살이라는 것은 보리살타의 약자죠, 깨달음을 이루려고 발심을. 마음을 일으킨 선남자 선여인을 뭐라고 한다? 보살이다. 이렇게 말해. 또 마하살이라는 것은 마하살타의 약자다. 큰 중생이다. 이 말이죠. 보살은 의미를 그대로 세기면 깨달은 중생이다 이런 뜻이고, 마하살은 큰 중생이다. 다 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보통 중생이 아니고 깨달음을 얻겠다고 마음을 낸 중생, 또는 그 마음을 크게 일으킨 중생. 이것을 우리는 보살, 또 마하살 이렇게 말한단 말이오. 원래대로 정확하게 쓰면 보리살타, 마하살타 이런 말이 되겠죠. 모든 보살 마하살이
應如是降伏其心 마땅히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 받아라. 이와 같이 그 마음을 다스려라. 질문은 어떻게 되어 있죠? 어떻게 이 마음을 머무르며 어떻게 이 마음을 항복 받으오리까. 이렇게 질문을 했죠. 마음 가지는 것을 먼저 묻고 항복 받는 것을 뒤에 물었죠?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항복 받는 법을 먼저 지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즉, 어떻게 마음을 가져야 하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되느냐? 하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그 마음을 다스리고. 이렇게 그 마음을 가져야 하느니라. 했어. 여기는 지금 마음 다스리는 법. 마음 항복 받는 법에 대해서 나온다. 이 말이오. 여시, 이렇게. 이와 같이. 이렇게 돼 있죠? 그것이 그 이하입니다.
所有一切衆生之類 있는바 일체의 중생 무리를.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중생을. 그대로 직역하면 있는바 일체중생의 무리를 이렇게 되는데. 그냥 쉽게 말하면 모든 중생을 이 말이오. 모든 중생을, 어떤 종류든 상관없이 모든 중생을 이런 얘기요. 그 모든 중생을 하고 그다음에 괄호를 치세요. 약란생부터. 왜냐하면, 모든 중생을 다만 여기서는 예를 들어서 어때요?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 방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 하고 남자나 여자, 결혼했거나 안 했거나, 불교인이거나 불교인이 아니거나, 정토 법당에 나오는 사람들이거나 안 나오는 사람들이거나, 이런 식으로 그 모든 사람을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서 말한다. 이 말이오.
일체중생은 차별이 없느니라. 이렇게 해 놓고 일체중생을 예를 들어서 남자와 여자의 차별도 없고, 부자와 가난 이의 차별도 없고, 양반과 상놈의 차별도 없고, 인종차별, 얼굴이 붉다고 얼굴이 검다고 희다고 누르다고 차별도 없고. 어른이다. 아이다 차별도 없고. 이렇게 죽 설명을 할 수가 있겠죠. 그건 다 앞에 나와 있는 뭐에 대한 설명입니까? 일체중생. 모든 중생에 대한 설명이란 말이오. 그러니까 이 말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죠. 일체중생이라 하니까 일체중생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생각을 못하니까 모든 중생을 말한다. 그걸 예를 들어서 설명한 거에요.
있는바 일체중생의 무리를. 즉 모든 중생을 하고 괄호하고 첫 번째가 사생(四生)을 들어서 모든 중생을 말하는 게 그 다음 문장이에요. 사생. 이 세상의 모든 중생을 4가지로 나누는 법이 있습니다. 남녀로 나누는 거는 몇 가지로 나누는 거에요? 두 가지로 나누는 거겠죠? 그죠? 양반 상놈도 나누는 거도 두 가지. 여러 가지 나누는 법이 있는데 여기에는 4가지로 나누는데. 태어날 때 어떤 방식으로 태어나느냐? 태어날 때 어떤 방식으로 태어나느냐? 해서 4가지로 나누는 게 있어요. 이게 사생이다. 이 말이오. 사생이라는 말은 첫째가
若卵生 난생. 알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알로 태어나는 것은 주로 어떤 게 있어요? 조류 파충류 양서류. 이런 거 대부분 뭐로 태어나요? 알로 태어나죠? 파충류는 알로 태어나는 것도 있고, 새끼로 나오는 것도 있기는 있는데. 그래도 다 알로 태어난다고 기본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난생, 알이 나서 그다음에 새끼를 까 나오는 거를 난생이다.
若胎生 태생. 태를 가지고 태어난다. 즉, 새끼가 그냥 나오는 거를 말합니다. 대부분 포유류는 다 뭐요? 태생이죠? 태생.
若濕生 습생. 습생은 여기 있는 모든 벌레를 지칭합니다. 요즘 관점에서 보면 모든 벌레는 뭐로 태어나요? 알로 태어나죠? 그러나 옛날에는 습하면 거기 구더기가 생기고, 습하면 거기 뭐가 나옵니까? 모기가 생기고 이러죠? 그래서 이런 것을 일러서 뭐라 한다? 습생. 요즘 분류법으로 따지면 벌레들을 대부분 지칭한다. 그다음에
若化生 화생. 이 화생이라는 것은 암수가 있어서 거기에서 새끼가 나서 태어나는 게 아니고. 그 몸이 둘로 쪼개지고, 넷으로 쪼개지고, 이렇게 분열해서 태어나는 것을 화생이다 이렇게 말해. 이거는 지옥 중생들은 화생이오. 여러분들이 지옥에 가서 죽고 또 태어나고, 죽고 또 태어나고, 죽고 또 태어나고 할 때, 가만히 얘기를 들어보면 지옥에 가서 결혼해서 거기서 어미아비를 두고 태어나고 이런 게 아니고. 탁! 목을 쳐 죽여버리면 조금 있다가 또 태어난다 이 말이오. 탁! 처서 죽여버리면 조금 있다가 또 태어난다. 마치 나무를 탁 잘라버리면 다시 뭐가 납니까? 움이 터서 또 나죠? 또 탁 잘라 버리면 움이 또 튀어 나온다. 이 말이오. 이렇게 태어나는 것을 뭐라 한다? 화생 이렇게 말해.
반대로 저 높은 천상의 세계에 가도 화생이 있다. 화생. 뭐하고 비슷하냐? 꿈꾸듯이 그렇게 여러 개가 일어나는 거요. 그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데다 굳이 비교한다면? 세포 분열하는 것도 다 화생이다. 아메바가 두 마리 네 마리 하는 것은 그 몸이 그냥 쪼개지죠? 거기에 뭐 새끼가 나는 게 아니란 말이오. 이런 게 화생이다. 꺾꽂이 같은 것도 화생이다.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거나 여기서 말하는 원래 의미는 그런 게 아니라. 저 천상에 어떤 중생들 태어나는 방식, 몸에서 몸이 그냥 화해서 나오기 때문에 이런 것을 화생이다 이렇게 말해. 한마디로 귀신같은 것은 다 화생에 속한단 말이오. 난생·태생·습생·화생 이렇게 넷으로 나눕니다. 그럼 이 네 가지로 나누는 것은 네 가지 안에 모든 게 다 포함이 되니까. 모든 중생을 지칭하는데 그것을 사생으로 말한다.
우리가 예불문에서 사생자부하면 4종류에 태어남의 중생들의 자비하신 어버이다. 이렇게 말하는데. 그건 곧 모든 중생의 자비하신 어버이다. 이런 말 합니다. 아시겠어요? 약난생, 약태생, 약습생, 약화생, 알로 태어난 것이나, 태로 태어난 것이나, 습으로 태어난 것이나, 화로 태어난 것이나. 또 다른 분류법이 있어요. 이번에는 이 세상의 중생을 분류하면 일단은 이렇게 몸뚱이 모양을 가지고 있는 물질로 이루어진 이런 몸뚱이 모양을 가지고 있는 게 있고, 귀신같은 것은 몸뚱이가 물질로 이루어져 있어요? 안 있어요? 안 있죠. 이렇게 형상이 없는 게 있단 말이오. 형상 있는 게 있고 형상이 없는 게 있다. 이 말이오. 형상이 있는 것을 뭐라 한다? 유색, 형상이 없는 것을 무색. 그러니까
若有色 형상이 있는 것이거나
若無色 형상이 없는 것이거나
다시 말씀드리지만은 모든 사람을 분류할 때, 피부빛깔로 분류하는 거는 인종으로 분류하는 거고, 성별로 분류하는 방법도 있고, 신분으로 분류하는 방법도 있고. 분류법이 여러 가지가 있겠죠. 첫 번째는 태어나는 모습에서 분류하는 것은 4가지 분류법이 있고, 그 다음에 모양이 있느냐? 없느냐? 이게 무색 유색이다. 이 말이오. 모양이 있는 거나 모양이 없는 거나.
또, 존재는 생각이 있는 게 있고 생각이 없는 게 있다. 소위 정신이 있는 게 있고 정신이 없는 게 있다. 생명은 생명인데 정신적 작용이 있는 게 있고, 정신적 작용이 없는 것도 있다 이 말이오. 그래서
若有想若無想 정신이 있는 것이거나 없는 것이거나
若非有想非無想 생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것. 그런데 우리가 정신이 있느냐 없느냐 할 때는 딱 있는 것, 없는 것, 이렇게만 분류할 수가 없고, 있느냐? 없느냐? 하고. 또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또 없다고 말 할 수도 없는 그런 것도 있다. 이 말이오. 쉽게 얘기하면 사람도 정확하게 따져보면 우선 얼핏 따지면 남자와 여자, 이렇게 분류할 수 있죠. 그런데 어떤 거는 이건 남자라고 할 수가 없어.
그렇다고 여자라고 할 수도 없어. 이런 것도 있다. 이 말이야. 또 어떤 거는 남자이기도 하고 여자이기도 한 것도 있어요. 다시 말하면 남자의 상징도 없고 여자의 상징도 없는 그런 사람도 간혹 있고, 또 반대로 남자의 상징도 있고 여자의 상징도 있는 양성이 다 없는 것도 있고, 양성이 다 있는 것도 있다. 이 말이오. 제 말뜻 이해하시겠어요? 그럴 때 이것은 남자와 여자라고 두 가지만 나눴을 때는 어느 속에도 포함이 될 수가 없죠. 그러니까 그런 것처럼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을 딱 나눴을 때는 생각이 있는 것도,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 그런 것도 있다. 이 말이오. 여러분들 생물과 무생물로 딱 나누면 이건 생물이라고 할 수 없고 무생물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런 게 있어요? 없어요? 있어.
또 식물과 동물로 딱 나누면 어떤 거는 식물이라 할 수도 없고, 동물이라고도 할 수 없고 그런 것도 있죠. 자 파충류하고 조류로 딱 나눠질 때 이게 조류라고도 할 수 없고 파충류라고도 할 수 없는 그런 것도 있죠. 역사 속에서 시조새 같은 거는 이쪽으로 보면 파충류고 저쪽으로 보면 조류고. 이렇게 중간에 있는 게 있다 이 말이오. 그러니 딱 둘로만 나눠지는 게 몸뚱이로 따져도 그렇지만 정신적으로도 마찬가지예요. 여자 몸뚱이를 가지고 여자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보통이고, 남자 몸뚱이를 가지고 남자 같은 생각을 내는 게 보통이 평균적인데. 여자 몸뚱이는 돼 있는데 생각이나 이 마음가짐이 남자 같은 마음가짐을 갖는 사람도 간혹 있고, 반대로 남자 몸뚱이인데 여자 같은 마음을 갖는 사람도 있다. 이 말이오. 불법은 이런 게 이미 다 있는 거요.
그러니 남자 몸뚱이를 가지고 남자 같은 마음가짐을 갖는 사람, 여자 몸뚱이를 가지고 여자 같은 마음을 갖는 사람이 대부분 보편적이다. 이 말이오. 이럴 때는 여자는 남자를 좋아하고 남자는 여자를 좋아한다. 이 말이오. 그런데 남자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데 그 마음가짐은 그 마음은 여자 같은 마음이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남자를 좋아한다. 이거야. 남자를 보면 어떤 이성을 보는 것 같은 우리가 예를 들어서 이성을 만났을 때 느끼는 그런 감정이 일어난다.
반대로 여자 몸뚱이를 가지고 남자 같은 마음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남자 같으니까 여성을 보면 이성을 보는 거 같은 마음이 일어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나 양극,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 이것이 기본적인 윤리, 도덕으로 딱 정해지니까, 이렇게 중간에 조금 다수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 병신취급을 받게 된다. 요즘은 이런 것들이 사회의 표면에 드러난 게 뭐 있어? 동성연애자. 그러니까 이게 인권적으로 탄압을 받는다. 그래서 동성연애를 합법화해야 된다. 이렇게 문제가 나오는 거죠.
그러니까 얼른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들이 있다. 이런 얘기에요. 그럴 만한 이유들이 있다. 여기서는 생각이 있는 거, 생각이 없는 거, 생각이 있는 것도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들을 요기까지 괄호를 하세요. 요건 그냥 무엇을 설명한 거다? 일체중생 지류를 설명한 거에요. 생략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럼 문장이 어떻게 연결된다?
所有一切衆生之類 소유일체중생지류
我皆令入無餘涅槃 아개영입부여열반. 이렇게 되는 거요.
자 그 마음을 어떻게 항복 받느냐? 이렇게 항복 받는다 하고. 이렇게, 이렇게 항복 받는다 하는 여시. 이렇게가 무엇으로 연결되느냐? 무엇을 지칭하느냐? 줄을 그으세요. 소유일체중생지류 아개영입무여열반 요렇게 연결이 됩니다. 그 마음을 어떻게 항복 받느냐? 소유일체중생지류 아개영입무여열반. 요기다가 1번 이렇게 쓰세요. 어떻게 항복 받느냐? 이렇게 항복 받는다. 어떻게 다스리느냐? 이렇게 다스린다. 이렇게. 어떻게?
我皆令入無餘涅槃 모든 중생을 내가 모두(모두 皆개), 지금, 무여열반에 들게 한다. 남음이 없는 열반, 완전한 열반에 들게 한다. 이렇게 마음을 내야 한다. 이거야. 자~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느냐? 이렇게 다스려야 한다. 이렇게가 뭡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중생을 내가 다 구제하겠노라 이렇게 마음을 내야 한다. 질문이 뭐요? 어떻게 하면 나의 이 모든 괴로움과 번뇌를 없애고 저 완전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까? 이게 원래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보살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한 것이니까요.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 최상의 깨달음을 얻겠다고 마음을 낸 선남자 선여인을 한마디로 뭐라고 한다? 보살이라고 한단 말이오. 보살이 이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느냐? 이 말은 보살은 무엇을 목표로 합니까? 최상의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해. 그러면 이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최상의 깨달음을 얻습니까? 이런 말입니다. 정확하게 질문을 이해하셨어요? 이 마음 어떻게 다스립니까? 할 때 이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 하는 이 목표가 보통 사람이 중생이 제 마음 어이 다스립니까? 이런 질문보다도 더 크다. 이 말이오.
보살이 이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 이 말이오. 보살이란 게 뭐냐 하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한 선남자 선여인을 말한다. 이 말이오. 최상의 깨달음, 완전한 깨달음을 얻겠다고 마음을 턱 낸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이렇게 마음을 내면 뭐가 된다? 보살이 되겠죠. 이런 보살이 그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되느냐? 이 말은 보살이 어떻게 하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느냐?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가 있느냐? 이 말이오. 보살이 어떻게 하면 이 모든 고뇌와 모든 속박을 차고 나와서 저 해탈의 저 열반의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겠느냐? 이 마음을 도대체 어떻게 다스려야 해탈과 열반을 얻을 수가 있느냐? 이런 질문이란 말이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뭐다? 보살은 그 마음을 이렇게 다스려야 한다. 어떻게? 모든 중생을 지금 모두 다 괴로움이 없는 세계에 들도록 하겠다고 마음을 내야 한다. 일체중생을 다 구제하겠다고 마음을 내야 한다. 이 말이오. 한문을 몰라서 몰랐다고 하지마는 지금 한글로 번역이 됐는데도 이해가 됩니까? 뜻을 알아듣겠어요? 뜻을 알아듣는 사람은 굉장한 사람들이오.
왜 그러냐? 이 질문과 대답은 중생의 생각으로 볼 때는 맞지 않는 대답이오. 동문서답이오. 왜 그럴까? 여러분이 지금 괴로워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뜻하는 데로 일이 안돼서 그러죠. 자 왜 괴롭나? 왜 화가 나냐? 왜 짜증이 나냐? 왜 슬프냐? 물어보면 다 그러잖아요. 아이가 공부를 못해서 괴롭다, 남편이 돈을 못 벌어 와서, 남편이 집에 늦게 와서, 남편이 술을 먹어서, 남편이 나를 때려서, 또 시어머니가 잔소리해서, 또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또 친구가 돈 빌려 가서 안 줘서. 이거 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우리에게 있어서 나타나는 그 괴로움이란, 일체의 괴로움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를 괴롭히는 거요.
그래? 안 그래요? 그래. 다른 사람이 나를 괴롭힌다. 이 말이오. 나를 가만 안 놔둔다. 이 말이오. 애가 공부를 딱딱딱 잘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텐데. 요것도 공부를 안 하고 공부하라고 하면 TV보고 이렇게 해서 나를 괴롭히고. 남편도 직장 다니면서 돈 벌어서 집에 착 갖다 주고, 일찍 일찍 들어오고 이러면 아무 문제가 없을 텐데. 안 먹어도 되는 술을 먹지. 또 늦게 들어오지. 또 나 두고도 딴 여자한테 한 눈 팔지. 직장 생활도 잘 안 하고 직장에서 잘리지.
예를 든다면 한심한 짓을 한단 말이오. 아~ 노인도 그저 어른으로서 점잖게 안 있고, 집에 와서 이래라, 저래라, 잘했니, 못했니. 맨날 잔소리한다 이거야. 아 친구도 돈 빌려 달라고 그럴 때는 싹싹 빌어서 빌려 줬으면 고마운 줄 알았으면 쓰고 달랑달랑 갔다 갚아야 되겠죠? 이자 착착 쳐서 갔다 갚아야 되는데. 아, 이게 빌려 가고는 이자도 안주더니 이자 안 주는 것만 해도 다행인데. 원금까지 떼먹고 안 준다 이거요. 아 주식 사면 돈 번다. 그래서 뼈 빠지게 벌은 돈 주식을 샀는데 정부가 경제정책을 잘못 운용하거나 해서 도로 떨어졌다 이 말이오.
어제 그제만 해도 오른다고 난리더니 요새 그냥 팍팍 떨어지니 속이 상한다 이거야. 그래 이 괴로움이라는 거는 다른 사람이 나를 못살게 구는 거요. 아, 친정어머니 같으면 고생도 많이 하셨고, 앞으로 좀 더 살아도 되는데 죽어버렸단 말이오. 왜 죽느냐 이거야. 아직 내가 죽으라고 얘기를 안 했는데. 죽지 마라. 그랬는데 죽어버린단 말이오. 내가 미워서 죽어도 될 만한 것들도 이 세상에 많은데 그런 건 또 죽어요? 안 죽어요? 안 죽고. 꼭 죽지 말아야 될 만한 사람만 또 빨리빨리 죽는단 말이오. 나를 가만 안 놔두는 거요. 그래서 못살겠다 이거야. 못살겠다. 괴롭다 이거야. 어떻게 하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느냐?
그것은 이런 것들이 이 사람들이 나를 안 괴롭혔으면 좋겠다. 제발 나를 좀 가만히 놔 놔라 이 말이오. 왜 나를 못살게 구느냐? 이렇게 지금 생각하고 있어. 그 사람 생각으로 나를 가만 놔둔다. 이 말은 뭐요? 애는 공부를 잘하고, 남편은 돈을 잘 벌고, 일찍일찍 들어오고, 딴 여자 안 쳐다보고, 술도 먹지 말고, 먹더라도 나하고 기분 낼 때만 한잔하고, 모든 게 다 이리 되야 된다. 이거야. 내가 뭐 큰 걸 원하느냐? 내가 여왕이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죠? 나는 소박하게 고거밖에 원하는 게 없다. 이거야. 내가 욕심 많은 게 아니다. 이거야. 그런데 왜 아주 기본적인 거, 소박한 내 요 바람도 성취가 안 되느냐? 이거야. 그러니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계신다니까 내가 가서 한 번 물어봐야 되겠다 이거야.
정말 신이 있다면 왜 요런 것도 안 들어 주느냐 이거야. 부처님이 계신다고 그러면 요런 것 정도는 들어줘야 되지 않느냐? 이거야. 어떻게 하면 기도를 어떻게 해야 요 정도는 들어줄 수가 있겠느냐? 그러니 요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다 찾아온다 이거야. 찾아올 때,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느냐? 이거는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이 내가 원하는 데로 이루어지겠느냐? 이런 얘기하고 같은 거요. 여러분들이 아무리 소박하다고 하더라도 그 소박한 꿈이라는 게, 어쨌든 꿈이라는 게 뭐요? 자기가 바라는 게 꿈 아니오? 그죠? 그 꿈이 실현되는 걸 말한다 이거야. 자기가 원하는 게 이루어져야 된다. 이거요.
그 원하는 게 이루어진다는 것은 세상이 내 원하는데 기초를 두고, 기준을 두고 어떻게 해야 된다? 바뀌어야 된다. 이거요. 그런데 내 힘으로는 그게 안 된다. 이거야. 그러니 힘세다고 하는, 능력 있다고 하는, 인간보다 힘이 세다고 하는 어떤 신적 존재가 있다고 한다면. 그분을 이거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않겠느냐? 이거 정도로 해 달라 할 때는 맨입으로는 안 되잖아. 그죠? 그러니까 뭘 좀 주기는 줘야 된다. 이거요. 그래서 뭘 갔다 바치는 거요. 다 그래서 나오는 거요. 바칠게 적으면 어떻게 한다? 아양을 많이 떨어야 되고, 바칠게 큰 사람은 아양을 좀 적게 떨어도 된단 말이오.
그러니까 돈을 많이 시주한 사람들은 다리 아프게 엎드려 절하는 거를 가능하면 적게 하죠? 큰돈을 탁 내니까. 그런데 큰돈을 내지 못하는 천 원짜리 2천 원짜리 신도는 어때요? 대신 와서 엎드려 절이라도 많이 해야 되잖아요. 가만히 한 번 봐요. 옆에서. 돈을 펑펑 내는 사람들은 다 뭐 돈을 텅텅 내니까, 뒷돈을 팍팍 주니까 일이 쉽게 되죠.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요. 어디 가서 빌 때도 돈이 없는 사람은 매달리고 붙들고 울고, 빌기를 세게 빌고, 돈이 좀 많은 사람은 대신 빌기는 조금밖에 안 빌죠. 인사 정도 하고 봉투에 큰돈을 넣어 턱 주면 된다 이거요.
그런데 봉투에 돈을 적게 넣어 주는 사람은,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요 학부형한테. 우리 애 잘 봐주세요. 이럴 때, 한 돈100만 원씩 턱턱 줄 수 있는 사람은 신도가 선생한테 굽실거려요? 오히려 큰소리쳐요? 큰소리치지. “아 수고하십니다.” 이러고 턱 준단 말이오. “용돈이나 하세요.” 열어보면 몇 백만 원 들어있단 말이오. 그런데 집에서 3만원 5만원 봉투에 넣어서 가기 어려운 사람은 3만원 5만원 주면서 그저 아이고 이거 이거 몇 푼 안 되는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러면서 주고는 절을 굽신굽신굽신굽신한다. 이 말이오. 절에도 마찬가지요. 다.
자 이렇게 해서 소원성취를 하려고 그런다 이거야. 이게 우리들의 생각이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납니까? 그러면 이러 이렇게 해라, 그러면 그런 것을 들어 줄 거다. 그런 것이 해결될 거다. 이 말이오. 즉, 내가 지금 해결해야 될 괴로움이 많아요? 적어요? 많아. 내 힘으로 할 수 있어요? 없어요? 다 못해.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해탈과 열반을 위해서는 누가 좀 도와줘야 돼. 누가 내 괴로움을 좀 들고 가 줘야 된다 이거요. 그래서 그걸 좀 해결해 달라. 질문은 이거란 말이오. 그런데 대답은 어떠냐? 알았다. 그러면 내가 네 괴로움을 좀 해결해 줄게. 이렇게 대답이 탁 나와야 얘기가 된다. 이 말이오.
그런데 맨입으로 안 되면 뭐뭐뭐 좀 해라. 만 배를 해라든지. 뭐 돈을 얼마를 하라든지. 요렇게 나와야 될 텐데. 요 지금 문제가 그런 정도가 아니고. 조건이 아주 많아. 엄청나. 뭐라고? 이 세상에 있는 일체중생의 괴로움을 네가 다 해결하겠다고 마음을 내라. 아 지금 내 것도 해결 못 해서 해결을 좀 해 주십사 하고 요청을 했더니, 남의 것까지 다 하라는 거요. 그것도 한 두 사람의 한두 가지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모든 괴로움을. 모든 사람의 모든 괴로움을.
나의 모든 괴로움도 해결 못 해서 요청을 했는데. 대답은 모든 사람의 모든 괴로움을 해결하겠다고, 그거를 해결해 주겠노라고 마음을 내서 해라. 이런 얘기요. 그러니 질문을 정확하게 알아야 이 대답이 갖는 의미를 알 수가 있어요. 질문하고 관계없는 그냥 모든 사람을 구제해라 이런 얘기가 아니라. 질문은 내가 어떻게 하면 해탈을 합니까? 이게 질문입니다. 이 질문 떼버리고 그냥 네가 일체중생을 구제해라 이렇게 대답이 나온 게 아니고.
어떻게 하면 내가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납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그거에 대한 해답으로 주어진 게 모든 사람의 모든 괴로움을 다 해결하겠다고 네가 마음을 내라. 이런 얘기요. 여기서 我아는 질문한 사람을 말하는 거요. 보살을 말한다. 이 말이오. 부처님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따옴표 안에 들어가는 거요. 네가 일체중생을 다 구제하겠노라고 마음을 내라 이 말이오. 이게 1번이에요. 그러면 해결이 된다. 이 말이오.
그런데 여기에 그렇게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
而滅度之 정말 모든 사람들의 괴로움을 내가 다 해결해 마쳐 버렸다 이거요. 일체중생을 내가 다 구제했다 이거요. 멸도를 했다. 이거요. 이멸도지. 다 멸도를 했다 이거요.
38:34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이 여시 부터가 두 번째 문장이에요. 이와 같이 한량이 없고 헤아릴 수가 없고 그 끝이 없는 중생을. 무량무수무변중생. 중생이라는 것은 그 양이 너무너무 많아서 헤아릴 수가 없고, 그 수가 너무너무 많아서 헤아릴 수가 없고, 그게 어디까지인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즉 무한히 많다 하는 것을 말한 거에요. 그것을 양으로, 수로, 그 경계로, 따져서 무한하다 하는 것을 무량무수무변중생,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뭐요? 모든 중생 이 말이오. 모든 중생을 멸도. 다 구제해 버렸다. 이 말이오. 다 멸도를 했는데
實無衆生得滅度者 사실은 진짜는 멸도를 얻은 자가 중생이 멸도를 얻은 자가 없다. 이거야. 내가 일체 모든 중생을 다 구제했어. 구제 마쳐버렸다. 이 말이오. 그랬는데도, 진짜로 사실은 한 중생도 구제를 얻은 중생이 없어. 아무도 중생, 실제로는 아무도 구제받은 중생이 없다. 이 말이오. 두 번째 문장이에요. 자 첫 번째 문장은 뭐에요? 어떻게 하면 내가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납니까? 내가 이 중생의 탈을 벗고 부처가 됩니까? 이게 질문이죠.
그 질문에 대한 바로 직설적인 답은 네가 일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면 정말 네가 그런 생각을 낸다면. 그렇게 되고 싶다면. 있는바 일체중생을 하나도 남기지 말고 모두 다 열반에 들게 하겠다. 즉 일체중생을 다 구제하겠다고 마음을 내라. 그래서 모든 중생을 다 구제해 마쳐라. 이 말이오. 아시겠습니까? 이게 마음 내는 법이에요. 그렇게 해서 모든 중생이 다 구제가 됐어. 깡그리 하나도 남김없이 다 구제가 됐어. 그럴 때 다 구제가 됐다. 이젠 끝냈습니다. 할 때 잘 살펴보면 사실은 한 중생도 구제를 얻은 바가 없다 이거요. 두 번째 얘기에요.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 왜 그러냐? 왜냐하면, 이 두 번째 문장에 대한 이유입니다.
何以故須菩提 왜냐하면 수보리야
若菩薩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만약에 보살이 아상이 있고, 인상이 있고, 중생상이 있고, 수자상이 있으면 이 말이오. 즉, 만약에 보살이 아직도 상을 지니고 있으면 이 말이오. 그 상에는 4종류가 있다는 말이죠?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는데 아직도 상을 가지고 있다면. 즉비보살, 보살이 아니다. 이 말이오. 보살이 아니다. 만약에 보살이 아직도 상을 가지고 있다면 보살이 아니다. 이 말은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는 거요? 못 벗어났다는 거요? 못 벗어났다 이거요. 상이 없어야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데.
보살이 아직 상을 가지고 있다면 자기가 아직 괴로움에서 못 벗어났다 이 말이오. 그러니 내가 일체중생을 다 구제했다 하면 이미 내가 있고 너가 있고, 구제하는 자가 있고 구제 받는 자가 있고, 이렇게 상이 생겼기 때문에 이것은 보살이 아니다. 보살이 아니라는 말은 사실은 아직은 해탈을 못 했다. 이런 얘기요. 내가 일체중생을 다 구제해 마쳤다고 하더라도 그때 내가 라든지, 너라든지. 구제했다 라든지. 이런 생각까지도 없어야 보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야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거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있으면 아직도 보살이 아니다. 내가 일체중생 지류를 다 구제했다 하더라도 사실은 하나도 구제된 바가 없다. 하나도 구제된 바가 없다. 이 말은 구제했다는 생각이 있다는 거요? 없다는 거요? 구제했다는 생각이 없어요. 구제했다 하더라도 구제했다는 생각이 있으면 아직도 니르바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거다. 이런 얘기요. 우선 마음을 어떻게 낼 거냐 하는 게 하나 있고, 그 마음을 내서 실천했을 때, 야 여기에 이르렀구나. 할 때, 그 것에 대한 위험에 대해서 다시 경고하면서 어떻게 해야 보살이라고 할 수가 있느냐? 즉 해탈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 지금 얘기하고 있다 이 말이오. 그럼 문장을 정확하게 아시겠어요?
자, 이것을 우리가 지난번에 반야심경 공부할 때, 보디사트바, 보살이 뭐냐? 하는 공부를 한 적이 있어요. 보살이라는 말은 보디사트바(깨달은 중생)의 준말이다. 이거요. 보디라는 것은 깨달음이고 사트바라고 하는 것은 중생이다. 그러니까 보살은 깨달은 중생이다라는 이런 뜻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표시를 하면 둥근원에 아주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것을 우리가 보디. 즉, 깨달음, 부처라고 하고. 둥근원이 새까맣고 깜깜해 있는 것을 사트바. 중생이라고 한다. 한쪽에 밝은 태양 같은 보디가 있고, 다른 한쪽에 칠흑 같은 사트바가 있고, 그 사이에 한 원이 있다. 이거야.
그럴 때 그 사이에 있는 이 원은 보디 쪽으로 향한 면은 이 밝은 태양의 빛이 비쳐서 역시 밝고, 그게 반사가 돼서 밝고, 또 반대 이 사트바 쪽의 면은 사트바의 어둠이 비춰서 또 어둡다 이거야. 그래서 한 면은 밝고, 한 면은 어두운 이런 존재가 있다면 이런 존재는 보디 + 사트바가 된다 이거야. 그래서 이런 것을 우리가 보디사트바. 즉 보살이라고 한다. 그러면 보살은 깨달은 중생이다. 깨달음과 어둠이, 밝음과 어둠이, 깨달음과 무지가 함께 있다 이런 얘기죠. 그러니까 이 무지의 중생이 부처가 되려고 한 생각을 일으키면 밝음이 거기에 조금 비치게 된다.
그러면 그는 보디 사트바가 된다. 그러니까 보디사트바의 원은 바로 한량없이 부처의 세계로 나가서 완전하게 밝아지는 것이 목표다. 그래서 중생을 멀리하고, 중생계를 떠나서 부처의 세계로 계속 나아간다. 나아가고 나아가게 되면 밝음이 10에서 20이 되고, 50이 되고, 그다음에 80이 되고, 90이 되고, 99가 되고 99.9가 된다. 그래서 중생의 측면에서 볼 때는 완전한 부처와 같아 보인다. 그러나 부처의 측면에서 보면 아직도 중생의 그림자가 아주 작지만 남아있다. 아무리 아무리 가도 중생의 그림자기 조금은 남아있다.
보살이 자기가 지향하는바 가고자 하는 바는 부처의 세계로 가고자 하죠. 이것을 일러서 상구보리다. 그런데 실제로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느 쪽으로 가야 되느냐? 중생을 향해 가야 돼. 중생을 향해 갈 때는 실천의 과제가 뭐요? 중생의 세계를 없애버리는 거요. 그 말은 일체중생을 다 구제한다. 이 말이오. 그래서 중생의 세계를 없애 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자기한테 비칠 어둠이 없어지겠죠? 그러니까 바로 뭐한다? 붓다가 완성된다. 부처의 세계에 이르게 된다. 부처라는 것은 하나하나 얻어서 부처가 되는 게 아니다. 이거요. 거기에 덮어씌우고 있는 어둠이 사라지면 어때요? 그냥 부처가 되는 거다.
마치 흙에 묻은 구슬이 흙을 닦아내면 본래의 영영한 모습을 나타내는 거지. 흙을 닦으면 흙이 바짝바짝 빛이 나서 구슬이 되는 게 아니다 이 말이오. 이 방안에 어둠이 있는데 불을 탁 켜면 그냥 밝아지는 거다. 그래서 일체중생을 구제하면 뭐가 된다? 자신이 성불하게 된다. 이게 이 질문과 대답하고 똑같습니까? 안 같습니까? 똑같죠. 어떻게 하면 붓다가 될 수가 있느냐? 그래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고 마음을 내서 그 모든 중생을 구제해 마치면 바로 부처가 된다. 부처가 된다는 말은 네 모든 괴로움과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니 깨달음을 얻고 할 일이 없어서 중생을 구제하는 것도 아니고, 중생 구제 먼저 해 놓고 나중에 부처를 이루는 것도 아니고. 바로 붓다를 이루는 거, 부처가 되는 길이 바로 뭐다? 중생을 구제하는 길이다. 선후의 문제도 아니고 좌우의 문제도 아니고 이것은 동시로 함께 하나로 되어있는 거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예불문 같은데 보면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 동시에 함께 성불에 이르게 된다. 이것을 우리의 생활문제로 가져와 보자. 이 말이오. 생활 문제를 가져와서 이제 각자 자신에게 부닥친 문제로 한 번 보자. 이거요.
어제 어떤 젊은 처녀가 질문했습니다. 지금 결혼을 하려고 하는데. 결혼해도 좋을지 안 좋을지 모르겠다. 왜 그러냐? 할머니가 지금 계십니다. 많은 연세 드신 할머님이 계시는데 즉, 외할머님이에요. 그런데 그분이 어머니를 자기가 볼 때는 너무 못살게 군다 이거요. 그러니까 어머니 인생이 너무 불행하다 이거요. 자기가 볼 때는 정말 너무 가슴이 아프고 안타깝다 이거요. 할머니가 너무너무 소위 밉다. 증오가 되는 거요.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고. 나는 절대 결혼을 안 해야지. 결혼해서 저런 부모와 자식 관계가 되는 것은 정말 몸서리쳐지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해서 자기는 결혼을 안 하겠다고 맹세를 했다. 이거야. 그런데 살다 보니까 친구가 생기고 또, 결혼해야 할 지경에 이르게 됐다. 그런데 스님 법문을 들으니 이 결혼이 쥐가 쥐약을 먹는 것과 같지 않으냐? 이런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예를 들면 이런 질문이오. 맞다. 그게 바로 쥐약이다. 그러니까 결혼하면 안 된다. 백발백중이다. 이게 쥐약이다. 이러면 안 먹으면 되죠. 그런데 왜 이게 고민이 될까? 쥐약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이 되는 거죠. 또, 이게 아닐지도 모른다. 아마 아닐 거야. 이렇게 생각이 드니까 고민이 생기는 거요. 이게 쥐약이다. 이러면 고민이 생길 게 없다. 이 말이오.
그러니 쥐약이다. 하면 하나도 두려움도 없고, 아무 일도 없죠. 그냥 그런 친구는 친구고, 그런 조건이 되면 되는 거고, 내 갈 길은 내 갈 길이 있는 거고, 그게 무슨 문제가 돼요. 내가 길을 가면 옆에서 돈 달라는 사람도 있고, 여기 있어도 찾아와서 돈 달라는 사람도 있고, 뭐 해달라는 사람도 있고. 온갖 사람이 다 있어요? 없어요? 있죠. 거기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할 수 없는 일은 못하고 그렇지.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그러니까 가볍게 생각하면 되는데. 바로 아닐지도 모른다. 먹고 싶다. 이 말 아니오. 그죠? 먹고 싶으며 먹으면 되지. 쥐약 생각 안 하면 되겠지. 배 아플 때 배 아프더라도. 그런데 법문은 들었겠다. 보니 아무래도 쥐약일 거 같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론 에이 절대 아닐 거야. 이런 생각도 드니까 질문을 한 거요. 질문 잘했어요. 그러니 쥐약이다. 이렇게 한마디로 끝나는 거요. 결혼하지 마라. 이 말이죠. 그러면 나 같은 이런 업은 결혼 하면 안 되느냐? 이건 조금 틀려요. 결혼하려면, 결혼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결혼을 안 하든지, 결혼하려면 수행을 해야 된다. 괴로움의 씨앗을, 앞으로 잉태할 괴로움의 씨앗을 막아야 된다. 없애야 된다. 그럼 어떻게 기도해야 되느냐? 그건 뭐 한 생각 바꾸면 하루 만에 끝날 수도 있지마는 보통 얘기해서 이럴 경우에는 한 천일은 정진을 해야 된다. 그래야 뭔가 가능성이 있다. 일체 법이 공하니까 하면 된다. 안 된다. 이렇게는 될 수가 없겠지. 어떤 것이든 길은 있다. 이거요. 하겠다면 할 수도 있고.
그러니까 업을 그대로 지니고 살려면 그나마 나은 길은 안 하는 게 낫고, 하고 싶으면 업을 바꾸면 되는 거요. 어떻게 기도를 해야 될까? 할머니한테 참회기도를 해야 된다. 할머니가 정말 고마우신 분이고, 이 세상에 할머니 같은 분이 없는 줄 알 때까지. 이게 형식적이 아니고, 마음에서 그렇게 느껴질 때까지 참회를 해야 된다. 그렇게 정말로 이 세상에 둘도 없는 그 할머니라는 생각이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면 비록 다생겁래로 지은 인연의 씨앗이라도 말끔히 없어진다. 누가 잘했다? 내가 잘하고, 제일 문제가 있는 사람이 누구다? 할머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정말 훌륭하신 분이고, 아, 내가 정말 생각을 잘못했구나. 이게 완전하게 다가온다면 결혼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지금 사귀고 있는 그 남자를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떤 남자하고 결혼해도 상관이 없다. 이거요. 이런 문답이 결혼하려는데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아, 그 결혼 안 하는 게 낫다. 이렇게 턱 들으면 여러분들이 오해를 하겠죠? 꼭 그래도 하려면 어떻게 합니까? 예. 할머니한테 참회기도 하십시오.
그러면 아니 이 남자하고 결혼하는데 왜 할머니한테 참회기도를 하느냐? 갑자기 뚱딴지 같이. 이렇게 생각이 들 수가 있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늘 이 마음의 어떤 이치를 잘 몰라서 그러는 거요. 그럼 이 경문에다 비춘다면,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괴롭다? 할머니 때문에 괴롭다 이 말이죠. 할머니만 저래 안 해줬으면 내가 얼마나 좋겠냐? 저런 할머니가 내 인생을 망치고 있다. 이거요. 나를 결혼도 못하도록 결혼에 대해서 진저리를 치도록 나를 만들고 있다. 할머니가 내 인생에 괴로움의 큰 덩어리 가운데 하나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걸 없애느냐? 부처님의 가르침. 대승 보살의 가르침에 의한다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 그 할머니의 괴로움을 덜어주려고 마음을 내야 된다. 연세 드신 할머니가 그 분이 살아온 평생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그분이 혼자 살아오고, 그분이 그렇게 자식에게 집착하고 그분이 살은 삶 하나하나를 다 그분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이해한다. 이 말이오. 왜? 그분을 구제한다는 것은 뭘 말합니까?
그분이 바라는 것이 다 이루어지면 그분은 괴로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분의 괴로움이 없다는 것은 그분이 원하는 게 다 이루어진다. 이 말이오. 그분이 원하는 것을 다 이루어 주려면 그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 이해를 해야 됩니까? 안 해야 됩니까? 이해를 해야 되겠지. 그분이 원하는 그렇게밖에 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그분의 입장을 다 완전하게 내가 이해를 한단 말이오. 그리고 그 요구에 내가 다 따라 준다. 이 말이오. 그러면 그분은 적어도 그 문제에 있어서는 구제가 됐다. 이런 표현은 그런 뜻이거든요. 그럴 때, 누구 괴로움이 없어지느냐? 나의 괴로움이 없어져 버린다. 이것이 바로 보디사트바의 수행법이다.
01:00:15
남편이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온다.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이해할 수가 없죠. 술을 먹으면 건강에 나쁘죠. 돈 버리죠. 또 술 먹고 나면 사람이 여러 가지 실수를 할 위험이 있죠. 또 술 먹고 운전을 하면 요즘 또 벌칙도 크고 생명의 위험도 있죠. 그런데도 술을 먹고 들어온다. 이 말이야. 그리고 술을 먹고 들어오니까 늦게 오게 되죠. 늦게 오게 되니까 애들하고 대화할 시간도 없죠.
아이들 생각에는 아빠는 늘 술 먹고 늦게 오는 사람. 이렇게 나쁜 이미지를 주니까. 자식한테까지 존경을 못 받죠. 나하고도 대화할 시간이 없죠. 이런 걸 생각해 보면 저 사람이 왜 저럴까? 술을 먹지 않으면 일찍 들어오죠. 돈 안 들죠. 건강 좋죠. 교통사고 날 위험이 없죠. 애들하고 대화할 시간이 있죠. 애들한테 존경받죠. 나하고도 부부간에 정이 좀 나죠. 이렇게 좋은 길을 뭣 때문에 저분은 안가고 꼭 그 백해무익한 행동만 할까? 이렇게 생각하면 할수록 이해가 안 된다. 이거야. 이해가 안 되면 안 될수록 더욱더 뭐가 납니까? 부화가 터진다. 이 말이오. 그죠?
이해가 그래도 좀 되면 몰라도. 도무지 뭐 때문에 저러는지 모르겠다 이거야. 이렇게 생각이 들수록 내 괴로움이 커진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왜 저 짓 하는지. 이런 생각이 들면 들수록 나는 어디에 점점 가까워지고? 성인에 가까워지고. 상대는 점점점점 어디에 가까워진다? 마귀에 가까울수록. 그런데 누가 더 괴로워진다? 내가 더 괴로워진다. 내가 성인에 가까워지고 그는 마귀에 가까워 져서. 나는 100% 옳고 그는 100% 틀렸다 할수록 내가 점점점점 지옥에 가까워지고 있어. 내 삶이. 지옥에 떨어지고 있는 중이오. 내가 옳을수록 내가 지옥에 떨어지고 있는 거요.
그러니 나를 구제해 달라고 아우성을 친단 말이오. 이렇게 착한 나를, 이렇게 지옥에 떨어뜨려서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지. 그렇다면 하느님도 불공평하고 부처님도 있으나 마나 한 존재 아니오. 그러니까 내가 기도하면 내 기도는 반드시 성취될 수밖에 없죠. 그것도 안 해주면 그건 뭐 하느님이나 부처님도 나쁜 사람이란 말이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게 뜻대로 안 되면 뭐라 그래요? 아이고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이런 말 하죠? 그래 안 그래요? 그렇단 말이오. 그게 원망하는 마음이란 말이오.
이랬을 때 어떻게 하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느냐? 이 말은 어떻게 하면 저 어리석은 남편을 고치느냐? 이 말이오. 그 무슨 비법이 없느냐? 제가 돈 100만 원 갔다 드릴 테니까 부처님 비방하나 일러주세요. 49재를 지낼까요? 천도재를 지낼까요? 뭘 어떻게 할까요? 스님 시키는 대로 내 뭐든지 하겠다. 이거야. 이래서 다 이 세상에서 이렇게 하면 된다. 신에게 기도하면 된다. 무슨 비방을 쓰면 된다. 무슨 부적을 하면 된다.
그래서 벼락 맞은 대추나무에다 뭐라 써가지고 남편 베개 밑에 넣어놓으면 된다. 지갑 속에 넣어놓으면 된다. 뭐 어떻게 하면 된다. 저떻게 한다. 온갖 비방이 비법이 나오게 되죠. 나아가면 조상묘까지 잘못 써서 그렇다. 이렇게 되는 거요. 옛날 같으면 그렇게 된 거는 작년에 서쪽에 대장군이 있었는데 서쪽에 있는 헛간을 고쳤다 이 말이오. 그래서 그것 때문에 그렇다. 그 담장을 고쳤다. 그것 때문에 그렇다. 자 이럴 때 이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한다면 너가 이 괴로움에서 이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남편을 구제하라 이거야.
남편을 구제한다는 것은 남편을 구제하려면 우선 남편을 이해해야 되요 안 해야 되요? 구제하려면 제일 먼저 남편을 이해해야 되요. 왜 술 먹을까? 왜 술 먹지? 할 때는 이해를 못 하겠다. 여기에서 이제는 왜 먹을까 하는 똑같은 질문 같지마는 이제는 탐구. 마치 애들이 개미를 보고 개미집을 보고 연구하듯이 이제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걸 보고, 왜 사과가 밑으로 떨어질까? 이렇게 탐구하듯이 연구를 하기 시작한다. 이거요.
그래서 남편을 가만 어린 시절에... 자라온 어린 시절도 살펴보고, 회사에서 일어난 일, 친구 사이. 이런 걸 가만히 살펴본다 이거야. 살펴보니까 어릴 때 우선 시골에서 자라면서 부모에게 사랑을 못 받았다 이거야. 친정, 시댁 어머니 아버지가 살기 어려우니까 싸우고 그런 속에서 외롭게 자랐고, 사랑도 못 받고, 구박받고 자랐다. 그래서 늘 가슴 하나가 허전하다 이거야. 그래서 또 학교 다닐 때도 친구들하고 잘 못 어울리고 늘 그렇게 외롭게 자랐다. 이렇게 자라면 어떻게 되느냐? 이성에 눈을 빨리 뜹니다. 아시겠어요? 외로우니까. 누군가가 자기를 약간 좋아하고 위로해 주는 사람 있으면 빠진단 말이오.
그런데 이런 사람은 사랑을 갈구하기 때문에, 또 상대가 허전한 사람을 보면 또 연민의 정을 자기 처지하고 견주어서 빨리 알게 됩니다. 그러니 그 사람한테 잘해주죠. 잘해주니까 그 사람도 채워지니까 그 사람도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죠. 그런데 이 분이 그 아픔을 자기 아픔처럼 느껴서 잘해주지마는 근본적으로는 자기 아픔을 채워주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그런 사이는 빨리 만나서 금방 좋아지면서도 오래 지속이 못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어떠냐? 자꾸 사람이 바뀌게 되는 거요. 이렇게.
자꾸 바뀌게 되면서 어떻게 느끼느냐? 사람에 대해서 불신이 생겨. 남자 같으면 여자는 못 믿겠다. 이런 마음이 생겨. 한편은 갈구하면서 한편은 불신이 생겨. 그 불신이 생기니까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미리 겁을 낸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관계가 더 빨리 끝나죠. 그래서 이렇게 전전하게 되는 거요. 예를 든다면.
그러면 남편이 나하고 특별히 불만이 없는데도. 얘기 들어보면 뭐 다른 이유도 별로 없는데도 어떠냐? 자꾸 외박하거나, 다른 여자를 사귀거나 이래요. 그래서 가끔 와서 하시는 분이 아니 한 여자를 정해놓고 사귀어도 괜찮겠는데. 자꾸 여기 집적, 저기 집적, 여기 집적. 그러니 더 미치겠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그런데 사실은 한 여자를 정해놓고 안 사귀기 때문에 가정이 유지가 되죠. 또 어떤 사람은 이래요. 그냥 남자들이 그냥 여자들 사귀는 정도면 내가 이해를 하겠는데. 이 남자는 한 여자를 딱 정해놓고 살림을 차리니 못살겠다. 이런 사람도 있어요? 없어요? 있어. 다 이유를 대는 건 다 다르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렇게 했다고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니까. 그런 걸 하나하나 살펴보면 그런 이유들이 다 있다. 이 말이오. 그러면 그러니까 가슴이 늘 허전하니까 그걸 가지고 부인하고 얘기를 해 보니. 부인은 자기요구, 만나기만 하면 애들 문제, 돈 문제, 뭐 자기 생활문제, 불평불만만 한단 말이오. 그런 부인으로서는 연애할 때나 초기에는 자기 허전함이 채워졌는데, 일상생활 속에서는 도저히 안 채워지니까. 부인하고는 얘기할게 없단 말이오. 얘기하면 속이 더 답답하단 말이오. 그럼 자꾸 신경질 내고 하니까. 그렇다고 부인이 뭐 싫은 것도 아니고 이러니까. 늦게 들어가는 게 상책이란 말이오. 늦게 가서 안 부닥쳐야 되니까.
그러니까 바깥으로 맴도니까 술을 먹어야 된다. 포장마차. 이래 술을 먹다 보니까. 술 먹는 습관이 들게 된단 말이오. 또 허전하니 술로 먹고 때워야 된단 말이오. 그러니까 그 허전한 마음을 때우는 일은 술이니까. 그 순간에서 보면 술은 약이에요. 그런데다가 또 회사에서의 이런저런 일이 생기고, 장사가 안되고, 돈을 떼이고. 그런 얘기를 다 집에 와서 할 수도 없단 말이오. 또 남자들은 그런 얘기를 여자들한테 다 하는 게 옳은 게 아니다. 이런 생각도 있단 말이오. 별것 없는 사람들이 요즘 남자들 별 볼 일 없잖아. 그죠?
그런 주제에 내가 남자네. 이런 건 또 있어요. 아시겠어요? 남자 값은 또 하려고, 딴 데 가서 해야 되는데. 그리고 또 혼자 떡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단 말이오. 이런 데서 그의 방황과 그의 아픔이 있단 말이야. 이걸 만약에 부모가 자식을 보듯이. 부모가 자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힘들어하고, 방황하는 걸 가만히 보면 그런 아들을 이해하고, 좀 달래주고 하면 며느리가 얼마나 예쁘겠어요. 그런데 그런 아들을 박박 긁고, 못되게 굴고. 더욱더 바깥으로 내 쫓고 이런 걸 부모가 보면 며느리가 밉겠죠. 그러니까 내가 볼 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마는 그걸 만약 엄마가 돼서 자식을 가만히 본다 하면, 정말 너무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엄마가 아들을 보듯이 그런 아픔을 가지고 봐라. 누구를? 남편을, 그런 남편을. 그게 바로 그를 뭐하는 거다? 보살피고 그를 구제하는 거다. 그런 입장에서 그를 보면 저녁에 벨을 누르고 늦게 들어오면 마음을 절에 와서 법문을 딱 듣고는 그래 우리 남편 오늘부터 내가 잘 해줘야지. 이렇게 하다가도 술 먹고 늦게 들어오는 얼굴을 탁! 보는 순간 불법이고 뭐고 다 없어지고 성질이 팍 난단 말이오.
대문간에는 겨우 참고 맞아들였는데도 늦게 들어온 주제에, 미안하다 하고 방에 가서 자는 게 아니고. 이리 나와 봐~ 이래 불러놓고 술을 먹으면 지 혼자 먹고, 늦게 오려면 지 혼자 늦게 와서 자지. 자는 사람까지 깨워서 또 밤에 잔소리하고 이러쿵저러쿵. 그런데 이런 걸 어떻게 참느냐 이거야. 스님 맨날 그런 소리 하는데, 자기가 여기 와서 내 꼬라지 한 번 당해보지. 그런 소리 할랑가? 이런 생각까지 든단 말이오. 이게 우리들의 삶인데. 그러니 이 보살의 길이라는 것은 그를 정말 이해하게 되면 늦게 들어와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죠?
오늘 일찍 들어와서 나하고 잔소리하느니 늦게 들어오는 게 약이고, 그런 나하고 얘기하고 싸우는 거보다는 술 먹고 풀고 오는 게 약이고. 그러니 한 서너너덧 시간 나하고 다투느니 술 한 잔 먹고 늦게 들어오는 게 그 사람한테도 좋고 나한테도 좋은 일이니. 술을 많이 먹고 온 날은 술국 좀 끓여주고, 적당히 먹고 온 날은 양말 벗기고 지압이나 좀 해서 재우고. 또 적게 먹고 온 날은 눈치 봐서 한 상 차려서 좀 더 먹이고. 이렇게 마음을 만약에 낸다. 여러분들이 그게 안 나죠.
그렇게 돼 지지를 않겠지. 이렇게 마음을 내서 그를 보살피고. 체했다고 등을 두드려 주고, 토하면 닦아주고, 자는 거 넥타이 벗기고, 옷 벗기고, 발 씻겨 애 재우듯이 그렇게 재워주면. 자~ 그날 저녁에 내 마음이 괴롭겠어요? 안 괴롭겠어요? 저 놈 첨지 또 술 먹고 와서 이렇게 생각하고 그걸 갖고 다투고, 그래서 딴 방에 와서 이불 뒤집어 지고 자면. 우선 분해서 잠이 안 오고, 지나간,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이 다 후회가 되고.
그러니까 집에 들어온 뒤 한두 시간 싸우느라 괴롭고. 그래서 딴 방에 가서 누워있는데 억울하고 분하고 잠이 안 오고. 이렇게 시간이 흘러간단 말이오. 그런데 그 싸우고, 다투고, 두드려 패고, 뚜드려 맞고, 살림 깨지는 그 시간에 해장국 끓이고, 옷 벗기고, 갖다 주는 게 훨씬 더 실제로 나한테 낫고. 이러고 나서는 딴 방에 가서 자든지, 같이 자든지, 잠도 잘 오고, 분한 생각도 없으니까. 실질적으로 누구에게 이롭다? 나한테 이롭다. 이 말이오. 그런데 이게 이렇게 하면 나만 이롭냐? 남편에게도 좋은 일이오? 나쁜 일이오? 좋은 일이다.
여기서 좋은 것이 나는 내가 마음을 바꿨기 때문에 좋은 일이고. 내가 인을 바꿨기 때문에 좋은 일이고. 남편은 어떻게 해서 좋은 일이 생겼다? 연이 바뀌었으니까 자기에게 좋은 일이 생긴 거요. 남편은 자기가 수행해서 좋은 일이 생긴 게 아니고, 환경이 변해 좋은 일이 생겼고. 나는 환경이 바뀌어서 좋은 일이 생긴 게 아니라. 나 자신의 마음가짐이 바뀌어서 좋은 일이 생긴 거요. 두 사람이 다 좋은 일이 생겼지마는 하나는 인이 바뀌어서 좋은 일이 생겼고 하나는 연이 바뀌어서 좋은 일이 생겼단 말이오. 그러니까 둘 다 좋은 일이 생긴 거요.
그러니 그렇게 얼마를 지나면 남편은 아내로 받는 스트레스가 없어지겠지. 술을 당장 끊는 것은 아니지마는 그 만큼 덜 먹게 되고. 먹더라도 덜 싸우게 된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것은 실제로 문제가 해결되는 쪽으로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게 된다. 이 말이오. 그래서 정성을 다해서 기도하게 된다. 기도하게 된다는 건 뭘 말하느냐? 이렇게 하는 게 뭐다? 수행이고. 이렇게 하는 게 뭐다? 기도다.
그런데 이게 현장에 딱 부닥치면 마음이 뒤집어 지니까. 그러니 시간을 정해서 남편이 보살입니다. 남편의 아픈 마음을 제가 잘 이해하겠습니다. 이게 다 제 지은 업입니다. 제가 전생에 진 빚을 이생에 갚으러 왔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딱 돌이켜서 매일 엎드려 절을 하게 되면. 어제저녁에 잘하다가도 한바탕 싸웠으면 다시 마음을 원래 자리로 돌이키는 거고. 이렇게 해서 그 위험한 고비들을 넘긴다. 이 말이오. 그러니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기도에요. 실천이 곧 기도다. 이 말이오.
그런데 또 따로 시간을 정해 기도하는 거는 실천이 기도지만은 실천을 바르게 하지 못할 때는 거기에 딱 경기에 끄달려 사로잡혀 생각을 못 돌이키니까. 경계를 떠나서 또 한쪽에서 이렇게 시간을 내서 기도하면 다시 정신을 차리게 된다. 정신을 차리고 또 가서 해보면 또 헷가닥해서 또 정신을 잃게 되면, 또 와서 정신을 차린단 말이오. 그래서 나중에 그 부딪치는 경계 속에서도 정신을 잃지 않으면, 이제 行住坐臥 語默動停(행주좌와 어묵동정)이. 즉 하는 것마다 다 수행이 되는 거다 이 말이오. 수행이라고 이름 붙여 따라 할 것이 없다. 이 말이오.
자 이렇게 되니까 이 말씀이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맞다 이거요. 그런데 아이고 어떻게 중생이 그걸 합니까? 그거는 사람이 병이 들고, 가정이 파탄되고 이래서 딱 살펴보니까. 이 아편 중독에 걸려 그래. 그러니 아편을 끊으면 됩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아편을 끊으면 되는 길이 있다. 이 말이오. 그런데 아편을 못 끊겠다 하면 알아도 소용이 없는 거죠. 아편을 끊으면 되는 거요. 이렇게밖에 살 수 없도록 정해진 것은 아니다. 이 말이오. 아시겠어요?
01:19:30
오늘날 우리나라가 요렇게 밖에 되는 길이 없고, 여러분 인생이 요렇게 밖에 되는 길이 없다는 아니다. 이 말이오. 다른 길도 얼마든지 있다. 이 말이오. 그런데 현재 여러분들이 요런 생각으로 나라의 정치가 요런 식으로만 가면 요렇게 밖에 갈 수가 없는 거요 그거는. 누굴 탓할 게 없다. 이 말이오. 길을 몰라서 그렇게 간 거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이제 길을 알았으니까 여러분들이 선택을 해야 된다.
요렇게 가려거든 그냥 가세요. 누가 뭐라 그래요. 먹고 싶으면 먹어라. 이거야. 쥐약이라도. 배불리 먹고 죽으라. 이 말이야. 그러나 죽기 싫거든 먹지 마라. 이거야. 배가 좀 고프더라도 좀 참아라. 이거야. 다른 음식이 올 때까지 기다려라. 이거야. 그래 눈앞에 보이는 쉬운 길을 가지 마라 이거야. 조금 수고스럽지만, 저 멀리 가서 쓰레기통이라도 좀 뒤져라. 이 말이오. 이렇게 삶을 바꾸어 나가야 되는데. 바로 여기에 그런 말씀을 하고 있다 이 말이오. 그럼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네.
我皆令入無餘涅槃 내가 모두 지금 남음이 없는 열반. 즉, 모든 괴로움을 내가 다 소멸시키겠다. 이 말이오. 그런데 이렇게 해서 남편이 좋아졌다. 이 말이오. 첫째 이렇게 마음을 탁 내면 술 먹는 남편, 늦게 들어오는 남편, 뭐 이 여자 저 여자 찍접찍접하는 남편, 정말 지옥같이 하루도 못 살 거 같더니. 마음을 탁 바꾸면 그런 현실은 두고라도 편안해집니까? 안해집니까? 편안해 져. 왜 그럴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람은 내 남편도 아니고 내 자식도 아닌데도 이런 사람, 술 먹고 길거리에서 행패 피우고, 길거리에 자고, 쓰러져 있는 유랑민들. 이런 사람 모아서 따뜻이 감싸는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내 자식도 아닌데도 정신박약아가 돼서 온갖 고생한 사람 모아서 보살피는 사람 있어요? 없어요? 있지. 그런 일이 참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는 스님 당신이 한 번 내 입장이 돼서 한번 해 보세요. 이러지마는.
이 세상에는 그런 성인이라는 이름 말고도, 자기 남편도 아니고 자기 자식도 아닌데도 그런 사람을 모아서. 여러분 남편보다 여러분 자식보다 더한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도 모아서 보살피는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있단 말이오. 한두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을 말이오. 그런데 여러 명도 아니고 한 명, 남도 아니고 내 자식이나 내 남편인데 왜 못해 그거를. 이렇게 생각하면 아주 쉬운 일이란 말이오. 그런 일도 안 하고 뭐하겠다는 거요? 그저 눈만 뜨면 지 심보대로 세상을 한번 해 보겠다 이거지. 해보지 그러면. 그러니 이렇게 딱 마음을 먹으며 그냥 놔 놓고도 나한테 금방 내 괴로움이 없어져.
내가 100% 옳으면 옳을수록 내가 지옥에 간다는 걸 알아야 되요. 아이고 생각이 서로 다르구나. 이렇게 반반씩 받아들이면 내가 인간계에 사는 거고, 아이고 내가 어리석어서 생각을 잘못했구나. 아이고 당신 옳습니다. 이렇게 내면 나는 이미 천상에 가 있어. 내가 괴로울 일이 없어져 버려. 이렇게 해서 시간이 흘러가면, 첫째 내가 딱 금방 좋아져요. 그 여러분들 절에 와서 법문 듣고 뭘 하면 어때요? 뭐 오늘 집에 가서 못할 값에 지금 법문 듣고 있는 동안은, 남편이고 뭐고 별일 없을 거 같죠? 지금 괜찮잖아.
왜 괜찮을까? 꽁하든 게 지금 풀어져서 그래. 그렇게 탁 보면 어때요? 도로 꽁해지니까 괴로운 거요. 법당에는 되고 집에 가서는 안 되는 게 아니고, 법당에는 마음을 내려놓고, 집에 가서는 다시 자기 식으로 잡으니까 안되는 거요. 그런데 그게 어느 정도 되면 내 마음이 편안해지는 거요. 저는 그런 남편을 두고도 영원히 사랑하고 살아라. 내가 지금 이런 얘기 하는 게 아니오. 질문 자체가 누가 해탈하고 싶다? 내가 해탈하고 싶다니까 내가 어떻게 해탈하느냐? 이 얘기를 지금 부처님이 하는 거지.
남 얘기하는 게 지금 아니에요. 우리가 언제 당신들 남편 봤다고, 당신 남편을 위해 줄 마음을 왜 내겠어? 눈앞에 와서 괴롭다고 하는 사람을 위해서 일러주는 얘기지. 상대를 위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란 말이오. 찾아와서 내 앞에서 괴로워하는 그 처녀를 위해서 내가 얘기를 하지. 왜 내가 보지도 못한 할머니를 위해서 내가 왜 그런 얘기를 하겠어요. 내 눈앞에 있는 것도 다 처리를 못 하는데. 여러분들 생각할 때는, 아이고 스님이 우리 남편을 위해서 내보고 또 희생하라고 그러는구나.
그러면서 돌아가면서 또 뭐래요? 아이고 중이라도 남자는 남자 편이네. 이러고 돌아가는 거요. 그런 게 아니에요. 이렇게 하면 여러분들 첫째 좋아져요. 그런데 시간이 조금 경과되면 그 몇 십 년간 잔소리해도 안 고쳐지던 남편의 생활태도가 조금씩 바뀝니다. 그걸 바뀔 때 여러분들이 놀라는 거요. 와~ 정말 기적이 일어나는 거 같애. 어째 이런 일이 이렇게 되는 거요. 그러니까 스님이 처음 얘기할 때는 억울해하고. 자기심정을 몰라준다. 스님이 얘기도 듣지도 않고, 몇 마디 탁 꺼내니까 말 자르고 이래라 이러니까. 지가 뭐 안다고?
그래서 기도문 주면 “내 하고 안 맞습니다. 딴 거주세요.” 이래요. 여러 명이 같이 받으면 “딴 사람하고 바뀐 거 같은데요.” 그래서 처음에는 억울하고 분하고 아예 기분 나빠 안 오는 사람이 있고, 그래도 생각 조금 바꿔서 그걸 따라 해보다가 현실에선 절에서는 맞는 거 같은데 현실에서 해보니 도저히 이건 맞지 않는 얘기야. 이래서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이 있어. 어쨌든 이런 사람 중에 실제로 해서 마음이 좋아지니까. 아 눈물 흘리면서 불법이 정말 위대하구나. 첫째 자기가 좋아지니까. 조금 더 경과하면 바로 상대가 변하는 것을 느끼는 순간은 기적이 일어나는 것 같단 말이오. 너무너무 좋아요.
그러면 스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그래. 자기 좋은 정도는 스님께 까지 인사드릴 거는 없는데. 남편이 변하는 걸 볼 때는 자식이 변하는 걸 볼 때는 부모가 변하는 걸 볼 때는 이거야말로 기적이죠. 그러니까 스님한테 찾아와서. 처음에는 자기가 괴로우니까 나를 죽기 살기로 만나자 했다가. 요번에는 스님을 만나 고맙다 인사하고 돈이라도 좀 드리려고 또 죽기 살기로 만나자 그러는 거요. 만나서 너무너무 좋아하죠. 왜 좋으냐를 내가 딱 물어봅니다. 그런데 이유가 다 그래. 남편이 변하는 걸 내가 좋아해. 스님 그 평생 안 변할 거 같은 우리 남편이 요즘 바꿨어요.
아~ 스님 덕이라 그래. 그러면 제가 말하죠. 보살님 기도나 하세요. 내가 이래. 기도 하고 있어요. 이래. 기도 똑바로 하세요. 아이고 스님, 원래 스님이 써주기를 나한테 108배 하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300배 해요. 기도 안 한다. 아이고 스님 참 이상하시다. 좀 잘하면 칭찬도 좀 해 줘요. 스님은 내 이렇게 무슨 심보라고 자꾸 잘하는 사람을 보고 못 한다고 자꾸 그러냐고 이렇게 얘기하거든요. 기도 열심히 한다 이거야. 재미가 나서 요샌 물불 안 가리고 하는 거요. 그런데 왜 기도 안 한다고 그럴까? 이걸 생각해야 되.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기뻐서 못사는데.
그래서 스님한테 돈도 갖다 드리고, 먹을 것도 사 드리고, 세상이 새로운 거 같아서 기분이 이렇게 좋아하면 칭찬도 해주고 이래야 되는데. 그런데 또 심보가 중이 더러워서 또 기도 안 한다 이래. 기도하라는 것보다 더 하는데 말이야. 그런데 조금 지나면 또 괴로움이 시작되죠? 왜 그럴까? 남편이 변하는 거로 좋아한다는 것은 또 원래로 돌아갔다는 얘기에요. 또 뭘 하는 거다? 상대를 처음에는 바꾸려다가 안 바뀌어져서 괴로웠는데. 이제는 상대가 바뀌는 것 보고 즐거워한다는 것은 이 원래대로 돌아간 것의 옛날 생각의 중생심에 의한 기쁨이란 말이오. 그 기쁨이. 제 말 이해하시겠어요?
그러니까 그 변하는 거에 대한 생각이 일순간에 기뻐하는 순간에 이미 생각이 딱 바꿔서 그 변하는 걸 보고 좋아한단 말이오. 조금만 내가기도 더 하면 더 빨리 변하겠다. 아시겠어요. 그래서 기도를 더 열심히 하는 거요. 조금 만 더 내가 잘하면 더 빨리 변하겠다. 빨리 변하겠다. 더 잘되겠다. 그때는 이미 벌써 처음에 왔을 때 기도하는 심보로 다시 돌아가 버렸단 말이오. 그래서 내가 기도를 안 한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절하는 걸 보고 얘기하는 게 아니란 말이오. 그게 그 뒷 문장이란 말이오. 이렇게 해서 남편이 좋아졌다 하더라도.
즉 중생을 구제해 마쳤다 하더라도 내가 중생을 구제했다. 아~ 내가 이러니 남편이 저렇게 변하구나. 이렇게 하면 다시 기대를 걸게 되고. 그 기대를 성취시키기 위해서 내가 더 열심히 하게 되면 바라는 마음이 더 커지고, 그러면 그걸 못 따라오는 남편을 보면 실망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또 마음에서 분별심이 생기고. 아이고 저놈의 첨지는 안 돼. 되는 것 같더니 역시 도로아미타불이야. 이러면서 또 상대를 탓하게 된단 말이오.
실로는 한 중생도 멸도를 얻은 자가 없다. 이 말이야. 그건 내가 해서 변한 게 아니에요. 그건 그 사람 인생이 그렇게 변했어. 그건 그렇게 변해도 되고, 그렇게 안 변해도 되고, 그건 누구 인생이다? 그 사람 인생이야. 변했다고 좋은 거고 안 변했다고 나쁘다 이 생각을 버려야 된다 이 말이오. 평생 안 변하고 그대로 있어도 상관이 없고, 변해도 상관이 없고. 변했다고 더 좋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라. 이 말이오. 그러면 또 덜 변하는 모습을 보면 또 괴로움이 생긴다.
그런데 여러분들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는 그렇게 편하지마는 남편은 그냥 놔 놓으면 술 먹고 빨리 죽으면 안 되잖아요. 이렇게 남편 걱정하는 거 같은데. 절대 인생은 남을 걱정할 수가 없는 게 우리 중생이다. 이거 생각해야 되요. 여러분들이 남을 걱정한다는데 이건 거짓말이에요. 남편이 죽으면 다 붙들고 먼저 간 남편을 슬퍼하는 거 같은데, 다 거짓말이라니까. 붙들고 뭐라 그런다 그랬어요? 아이고 여보 당신 죽고 나는 어이 사노? 저 자식들 데리고 어떻게 사노? 이런단 말이오.
누구 걱정하고 있다. 지금? 죽은 사람 걱정 안 하고 살 자기 걱정하고. 아이 걱정하는 게 아니라 아이 데리고 살 자기 걱정을 하는 거란 말이오. 인생은 그래. 그러니까 남편걱정 한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오산이에요. 그게 다 자기 걱정인 줄 알아야 돼. 자기 걱정이 없으면 인생은 그냥 좋아지는 거요. 남편이 변하는 거는 그 사람 알아서 변할 거니까. 그 몫을 그 사람의 몫으로 돌려야 돼. 그걸 내가 구제하는 걸로 생각하면 안 돼. 이미 내가 하는 것은 이미 여기에 바라는 마음이 있고, 그것은 곧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이미 괴로움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다는 거요.
그러니까 조금 있으면 찾아오죠. 그런데 이 두 번째 고비를 주로 못 넘깁니다. 그래도 첫 번째 고비는 그래도 어지간하게 공부를 해서 넘기는데. 이 두 번째 고비에 딱 걸린단 말이오. 선방에서 공부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공부하다가 탁해서 막 세상이 훤하게 보이니, 업식이 맑아지면서, 상대의 전생 후생이 보이는 것 같고,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니 다 공부 다했다. 이러고 하면 원래 속에 있던 자기의 그 욕구, 그 잘나고 싶은 거 하고 딱 결합을 해서 깨달았다. 내가 부처다. 이러고 나온단 말이오.
이런 잠꼬대는 정말 병 고치기가 어렵다. 이 말이오. 그래 이 서두에 이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어도 부처님의 삶이 어떤지를 보여줬죠. 그러니 이런 저런 얘기를 할 때, 그냥 가만히 듣고 있지마는. 이미 잠을 깬 사람은 어떤 잠꼬대를 한다 해서. 그게 잠꼬대인지 잠꼬대가 아닌지 구별하기 어려운 게 아니란 말이오. 사람이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있고. 아시겠어요?
그냥 이런저런 야~ 내 신발이 어디 갔냐? 내 밥 왜 안주느냐? 이런 얘길 갖고. 아이고 지도 몇 개 없는데 지거 찾네. 이런 식의 얘기는 옳지가 않아. 그게 동산이 아니지만 세상 사람 따라 동산이라 부르는 거요. 그런 걸 갖고 검증하는 게 아니란 말이오. 딱 보면 그게 아직 꿈 깬 소리인지, 꿈꾸는 소리인지 알 수가 있다 이 말이오. 속일 수가 없어요.
자 아개영입 무여열반 이멸도지. 즉, 일체중생을 구제하라. 즉, 타인의 아픔을 내가 돌아가서 그것을 구제하려고 마음을 내라. 이게 보살의 첫 출발입니다. 화엄경에 보살이 열 개의 단계로 올라가는데 제일 첫 번째가 대비심. 아파하는 마음을 내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도 딱 이거와 일치하는 거요. 아시겠어요? 대비심으로 출발하는 거요. 이렇게 해서 올라가는 거요. 그런데 맨 마지막에 화작한단 말이오. 나라 하는 게 없고, 그저 중생의 요구 따라 몸을 나툴 뿐이란 말이오. 내가 너를 이라는 게 없단 말이오. 그냥 인연을 따라서 그냥 나툰단 말이오. 물이 본래 자기 모양이 없기 때문에 그릇의 모양 따라 그냥 모양을 나투 듯이.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得滅度者
사실은 한 중생도 구제를 얻은 바가 없다. 그 말은 내가 중생을 구제했다. 이런 생각을 가지면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런 생각을 갖는 건 곳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다. 그런 생각을 가지면 곧 또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 그러니 우리가 지난번에 어제 그저께 원효대사 얘기를 했었지 않았습니까? 그죠? 그러니까 원효대사가 바로 그 불쌍한 중생을 구제를 해야 되는데 그 불쌍한 중생도 외면하고 분별심을 내 놓고는 그런 유창하게 중생구제니 중생구제니 해 놓고는 막상 중생을 눈앞에 보니까 도망을 갔죠.
그러니까 다시 마음을 내서. 정말 눈앞에 있는 중생을 현실적으로 구제하려는 마음을 내라. 그건 뭐요 앞에 1번이겠죠? 그죠? 1번이란 말이오. 그런데 그 방울 스님을 만나서 깨달은 세계는 뭐요? 중생이 본래 중생이 아니라는 거지. 그게 다 내가 일으킨 망념이죠. 내가 중생이라고 모양 지어놓고, 또 중생을 뭐 한다? 중생을 구제한다고 하는 거죠. 실로는 여기 한 중생도 구제한 바가 없다는 거는 그는 본래 중생이 아니에요. 중생이 아니니까 구제할 것도 없죠.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라. 이 말이 아니라. 중생을 구제하되. 바로 내가 중생을 구제한다. 이런 생각이 없어야 된다 이거야. 배고픈 사람이 와서 밥을 먹을 때 아이고 불쌍하다. 내가 니 밥줄 게. 먹고 배불르그래이. 아이고.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다. 당연히 배고픈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하는 거요. 그러니까 자기 밥 자기가 먹는 거지. 내가 그를 보살핀 것도 아니다. 마침 그 밥이 나도 모르게 내 옆에 있어서 줬다. 이렇게 봐야 한다. 이 말이오.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 실무중생득멸도자다.
何以故須菩提 왜 그러냐? 수보리야
若菩薩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만약에 보살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으면
則非菩薩 보살이 아니다. 그러니까 상이 있어야 된다는 거에요. 없어야 된다는 거에요? 없어야 돼. 없애는 게 좋다. 없애야 된다 이런 게 아니라. 실제는 상이 일어나지가 않는 거요. 여러분들이 수행을 하면서도 또 없앤다는 상을 하나 만들고, 자꾸 상을 그리기 때문에 늘 극단에 치우치게 된다. 그래 여기서 경계하는 거요.
첫째는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을 내야 하며, 그렇게 해서 행동을 하게 되면 누구의 괴로움이 없어진다? 나의 괴로움이 없어지죠? 그다음에 세월이 흐르다 보면 상대편이 좋아지게 눈에 보여요 안 보여요? 좋아질 때 이걸 내가 잘해서 저 사람이 변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 그 사람도 아~ 저 사람도 수행해서 아~ 저 사람도 자기 인생을 변화시켜 나가는 거구나. 고마워요? 안 고마워요? 참 고맙다. 이런 생각을 해야 되.
아~ 저 사람도 수행하시는 거구나. 아~ 요거는 내가 지금 좋은 건, 내가 공부해서 되는 거고. 저 사람 지금 잘 되는 거는, 좋아진 거는 내 덕에 좋아지는 거다. 요렇게 생각하면 안 된단 말이오. 남의 인생에 간섭하면 안 된다. 그건 그 사람의 인생이다. 그래서 상대가 변한 걸 보고 그저 오직 감사하는 마음만 내게 되면 좋은데. 내 덕이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반드시 괴로움의 씨앗이 생겨서 또 괴로움의 과보가 열리게 된다. 도로아미타불이 된다 이거야.
보살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 즉 해탈할 수가 없다. 아시겠습니까? 여기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대해서는 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 전체 경문은 이걸 설명하는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죠. 아시겠어요? 그러나 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는 것은 조금의 지식적이거나, 논리적인 설명이 필요한 건 남지마는.
그러나 이 경문 전체로 봐서는 그런 어떤 내다 하는 상이 있으면 바로 괴로움이 또 생긴다. 이렇게만 이해하시면 되기 때문에 이 문장 자체는 그렇게 중요한 요지가 아니다. 이 말이오. 그러나 요것은 다음 시간에 또 필요하니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오늘 가서 공부를 다시 하셔야 됩니다. 아는 것과 뭐가? 알고, 믿고, 행해야 되겠죠. 아~ 이렇구나 하고 알면, 바로 믿음이 생기고 그럼 오늘 해 봐야 되요.
(下)......3강
안녕하세요. 금강경 3번째 강의 시간입니다. 금강경 제3 대승정종분 펴 주시기 바랍니다. 대승의 가장 바르고 으뜸 되는 가르침이다.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수행자는 즉,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행복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느냐? 있는바 일체중생의 그 갖가지 괴로움을 내가 다 해결해 주겠노라. 모든 중생을 내가 다 구제하겠노라. 이렇게 마음을 내고, 그렇게 실천을 해야 한다. 모든 중생의 괴로움을 내가 다 구제를 하려면 그 중생의 괴로움에 대해서 그 원인에 대해서 낱낱이 다 알아야 된다.
즉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하는 그 상대편의 마음을 낱낱이 다 이해하고 그 사람 입장이 돼서 그것을 다 편안케 해 주려고 하면 어느덧 나의 괴로움이 다 사라져 버린다. 나의 괴로움이 사라지니 첫째 내가 좋고, 그의 괴로움을 덜어주니 그가 좋다. 내가 좋은 것은 대승 보살의 길을 따라 수행을 했기 때문에 내가 편안해진 거고, 그가 좋아진 것은 중생이 자기 원하는 데로 되기 때문에 그가 좋아졌다.
비유를 들어서 말하면 두 사람이 서로 깡통을 뒤집어쓰고 살게 된다. 서로가 사랑한다고 껴안아도 깡통이 부딪치고, 밉다고 부딪쳐도 또 깡통 소리가 난다 이거야. 내가 먼저 뒤집어쓴 깡통을 벗어 버리게 되면 내가 훤하게 밝아서 좋다. 내가 다 보이니 눈 어두운 그를, 깡통을 뒤집어 쓴 그를 만나서 부딪칠 일이 없다. 나는 그와 만이, 안 부딪치는 게 아니고. 모든 사람과 부딪치지 않게 된다. 그러나 그는 나와 만이 부딪치지 않게 된다. 이런 얘기요.
그러니까 내가 아상을 깨뜨렸을 때, 내가 좋아지는 것 하고 그로 인해서 그가 좋아지는 것 하고는 비교할 수가 없다. 이 말이오. 그러니 수행을 통해서 관념의 벽을 허물고, 지혜의 눈을 열은 사람하고, 그 보살의 덕에 편안해지는 중생의 그 얻은바 공덕하고는 비교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일단 내가 좋아지고 그도 좋아진다. 그럴 때 그가 좋아지는 모습을 보고, 그가 변해가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면 즉, 나로 인해서 저 사람이 좋아지는 거구나 이런 생각을 내게 되면은 곧 그것은 또 문제의 원인을 상대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괴로워진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첫 번째는 중생을 교화하겠다고 마음을 낸다 하는 것은 보살의 수행법을 말하는 거고. 다시 내가 일체중생을 다 구제해 마쳤다 하더라도 실로는 한 중생도 구제를 얻은 바가 없다는 것은 내가 중생을 구제했다 하는 이런 생각을 내게 되면 이미 이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다만 내가 눈을 떠서 그와 부딪치지 않았지. 내가 그를 위해서 내가 피해줬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러니까 금강경 후반부에 가면 보살은 복을 짓되 복을 받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복을 탐착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가 나와요.
相에 대하여....
왜냐하면, 보살은 아상·인상·중생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느니라. 보살이 아니라는 말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런 얘기죠. 오늘은 이 아상·인상·중생상에 대해서 조금 더 집중적으로 공부해 보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첫째 이 상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데요. (모양 相상)자죠. (모양 相상)자죠. 불교에서는 이 상을 참 많이 씁니다. 상이 있다. 상을 없애야 한다. 이런 여러 말을 쓰게 되는데. 이제까지 우리가 배웠던 이 상자가 하나 있었어요. 諸行無常 할 때 常상자를 썼죠. 그런데 그때 常상자는 (항상 할 常상)자입니다. 영원하다. 이런 의미의 常상자란 말이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존재는 영원하지가 않다.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한다. 이런 의미로 무상이란 말을 썼단 말이오. 항상 함이 없다. 그런데 여기서 나오는 相자는(항상 할 常)자가 아니고 (모양 相)자입니다. (모양 相)자. 이 모양이라는 게 뭐냐? 자 여기 컵이 있다. 여기 컵이 있습니다. 또는 물 잔이 있다. 이럴 때 이렇게 물을 담을 수 있도록 생긴 이 그릇의 모양이 뭐다? 우리가 말하는 相이다. 아시겠어요? 물 잔이다. 하면 여러분들이 벌써 어떻게 생긴 그릇인지가 딱 떠오릅니까? 안 떠오릅니까? 떠오르죠? 그게 相이다 이거야. 모양이다.
그러면 이러한 그릇을 어떤 용도에 쓸 거냐 하는 용도는 또 별도로 있어요. 그래서 아함경의 즉 소승교리로 말하면 물 잔이다~ 할 때는 두 가지가 결합이 돼 있다. 하나는 이러한 존재의 모양, 즉 물질, 물질을 말한다. 이 물질을 색이라고 말하고. 그 물질의 사용용도... 그것을 이름이라고 말해서 명이라 그래요. 그래서 물 잔이다. 할 때는 두 가지가 겸해있다고 그랬죠. 색과 명이. 그래서 명색이다. 이렇게 말한단 말이오. 더 크게 말하면 인식의 대상이라는 차원에서는 그냥 한마디로는 색이다. 이렇게 말하지마는, 분류하면 거기서는 그러한 물질적 존재를 색이라 하고. 그것의 용도를 명이라 이래서 명색 이렇게 나눈단 말이오.
그럼 이러한 용도도 항상 하는 게 아니고 늘 바뀌죠. 또 이러한 모양도 항상 하는 것이 아니라 바뀌죠. 또 이러한 용도도 경우에 따라서 다른 용도로 쓰이기 때문에 항상 이런 용도로 써야 한다고 하는 그런 실체가 없고, 이런 모양도 항상 이런 모양으로 있다고 할 만한 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무상과 무아를 말했다. 이것을 대승불교에서는 한마디로 공이다.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은 용도에 대해서 집착을 하고 있기 때문에 명이 공하다. 이런 의미로 공을 많이 씁니다. 다시 말하면 물 잔이 텅 비어있을 때는 물을 담으면 물 잔이 되고, 술을 담으면 술잔이 되고, 커피를 담으면 커피 잔이 되고, 주스를 담으면 주스 잔이 되고,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 되고, 국을 담으면 국그릇이 된다. 이럴 때 비어있다면 뭐든지 담을 수 있겠죠. 즉 이 그릇은 공하기 때문에 인연을 따라서 무엇이든지 될 수가 있다. 이렇게 얘기를 한다. 이 말이오.
법성게의 비유를 빌리면, 말씀을 빌리면 불수자성 수연성(不守自性 隨然性)이다.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아니하고 인연을 따라서 이루어진다. 이럴 때는 명이 공함을 말하는 거다. 또 우리가 오온이 모두 공하다 할 때 색이 공한 것도 설명했었죠. 그러니까 이것이 물리적인 변화, 화학적인 변화. 핵 변화. 이런 여러 가지 물질적인 현상을 설명하기도 하고. 또 그런 것들을 옛날 말로는 이 물질세계. 우주는 성주괴공(成住壞空)한다. 이래서 그 물질적인 어떤 실체도 없고. 항상 함도 없다. 그래서 제행이 무상이고, 제법이 무아다. 그렇게 말하기도 하고. 또 대승에서는 공이다. 이렇게 말을 했단 말이오.
그런데 이제 이 대승의 사상이 점점 깊어지면서 어떤 이런 존재를 3가지 관점에서 보는 게 있습니다. 체_상_용 이다. 그러니까 금이다 하면 금, 그 자체가 체입니다. 그러나 그 금은 여러 모양으로 만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러 모양으로 만들 수 있죠. 그럴 때 그 모양을 뭐라고 한다? 상이다. 이렇게 말한다. 그 다음에 그러한 모양은 또 여러 용도로 쓸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쓸 수가 있죠? 그걸 용이라 그런다. 그래서 체상용의 도리로도 설명하기도 한다.
아무튼, 여기서 상이다 할 때는 그것은 모양을 말합니다. 소승교리로 말하면 색을 말하고, 그다음에 두 번째 이상이다. 할 때는 이런 인식의 대상인 물질적인 어떤 모양만을 말하는 게 아니고. 우리들의 고정관념, 고정관념을 다 모양이다. (모양 상)자를 쓰는 거요. 즉 이것은 더럽다. 이것은 깨끗하다. 이것은 선이다. 이것은 악이다. 하는 것은 다 한 생각을 일으켜서 선이라고 한 생각을 일으켜서 선이라고 모양을 탁 지어 버리는 거요.
이것은 어떤 형상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들의 어떤 관념이란 말이오. 뱀을 보고 징그럽다. 돼지보고 욕심 많다. 소보고 어리석다. 이런 것은 실제로 그 존재가 그런 게 아니죠. 우리는 그렇게 한 생각을 일으켜서 그 고정관념을 만든단 말이오. 그 고정관념을 만들어 놓고는 마치 그 물질이 정말, 그 존재가 정말 그런 양 착각을 한다 이거야. 다시 말하면 색깔이 있는 안경을 끼고 벽을 보고는 그 색깔에 의해서 그 벽 색깔을 자기가 보는데도. 그 벽 색깔이 정말 푸르든지 누루든지 그런 줄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상이다 할 때는 이렇게 한 생각을 일으켜서 무엇이라고 정하고 그것을 항상 하는 걸로 착각할 때. 그걸 우리가 모양을 짓고 그 모양에 집착한다. 그러니까 그것이 항상 하는 실체가 있다. 그 모양에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니 집착이 일어나겠죠. 그 모양이 사실은 헛깨비 같고, 꿈같은 줄을 탁 깨버리면 거기 집착을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안 하겠죠. 선하다 하면 그 정말 선한 그 어떤 요소가 있다고 생각을 한단 말이오. 그게 바로 실체가 있단 말이오. 그러니까 거기다가 집착을 하게 되는 거요.
그 다음에 우리가 이거 하고 비슷한 용어가 또 뭐 있느냐? 一切有爲法(일체유의법)이다. 또는 有無를 말할 때 有다 하는 有 자를 많이 쓰죠? 이럴 때 有도 사실은 이 모양 相 자가 대체될 때가 있다. 같은 개념으로 쓰인다. 그런데 모양이 없다고 하는 하나의 고정관념을 갖게 되면 그것 또한 뭐가 될까? 모양이 되겠죠. 전에 말씀드린 대로 동산이다 서산이다 하는데,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고 그것은 비동비서산이다. 이렇게 정답을 만들면 이것도 또 하나의 相이 된다.
그러니까 相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적인 모양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한 생각을 일으켜서 내는 고정관념, 요즘 쉬운 말로 하면 고정관념이라고 해야 되겠죠. 그런 고정관념은 다 뭐에 속한다? 여기에 금강경에서 나오는 이 相에 속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이 相은 즉 我의 개념이다. 원시불교로 따지면 뭐의 개념이다? 我의 개념이거나 또는 항상 할 常의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모양이 없다 할 때 무상이라고 쓰는 말은 다른 용어로 말하면 공이라는 용어가 되고. 소승 교리로 말하면 무상과 무아의 개념이 된다. 이 말이오. 이해하겠습니까?
여기서 만약에 보살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 이 말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다는 것은 곧 제법이 공하다는 것을 아는 거요? 모르는 거요? 모른다는 얘기가 되니까. 이것은 보살이라고 할 수가 없죠. 제법이 공한 줄을 모르니까. 괴로움이 생기겠어요? 안 생기겠어요? 생기고. 또 속박도 생겨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보살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말하느냐?
내가 중생을 구제했다. 내가 너를 구제했다 할 때는 이미 나라고 하는 고정불변하는 상을 취하고, 너라고 하는 하나의 상을 만들고. 또 구제하는 자가 있다는 하나의 상을 만들고, 구제받을 대상이 있다는 또 하나의 상을 만들고, 또 구제해야 된다고 하는 또 하나의 상을 만들기 때문에 갖가지 상이 벌어진다. 자 그래서 이렇게 상을 갖게 되면 그것은 보살이 아니다. 상이 허망한 줄을 알고, 상이 없는 줄을 알아야 보살인데. 바로 상을 갖고 있다는 것은 실체가 있다는 말이고. 영원한 것이 있다는 말이 된다. 순간적으로 이런 착각을 일으키게 되는 거요. 자~ 그럼 여기서 그냥 상이다 하면 되는데 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이렇게 4가지, 4상. 4가지 상으로 분류를 했느냐?
사실은 그냥 4가지로 굳이 분류를 안 해도 됩니다. 모든 상. 이러면 되죠. 제상. 모든 상은 다 허망하다. 이렇게 말해도 되는데. 그 상이라는 것이 형편에 따라서 이런저런 모양이 있다. 이런 얘기요. 아시겠어요? 모든 사람, 이렇게 하면 되는데. 그 모든 사람을 분류하면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아이도 있고, 어른도 있고. 이렇게 분류를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아상은 없는데 중생상은 있다든지. 중생상은 없는데 아상은 있다든지. 이런 얘기가 아니에요. 상을 가지고 있다. 모든 상은 다 허망하죠. 그 상을 갖고 있게 되면 보살이 될 수가 없다. 이런데 그 상을 우리가 보면 어떤 상은 없으니까. 아~ 저 사람 깨달았나 보다 이렇게 하지마는, 그는 또 다른 상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반야심경 할 때 공부를 했잖아요. 부처님께서 저 높은 산에 올라 가거라.. 했을 때는 걸림 없이 모든 것을 다 있는 그대로 보라 이런 말이죠? 사실은 이 골짜기에 가려 있어서 제대로 못 보고. 그 속에서 갖가지 착각을 일으켰으니까. 그러나 그 높은 곳에 올라갔지마는 사실은 더 높은 곳에 올라가서 사면이 다 확 트이게 봐야 되는데. 중간 봉우리에 올라가서 여기가 부처님이 가리킨 산의 봉우리다. 이렇게 할 때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모양을 짓고 거기에 집착하는 게 되겠죠. 이걸 우리가 뭐라 그래요? 법상이다. 이러죠.
자기가 내가 옳다. 내가 최고다. 이러면 아상이라 하지마는, 법이 최고다. 법이 옳다. 무조건 법대로 돼야 된다. 이러면 이건 법상이다. 이렇게 말한다. 이 말이오. 자 그래서 아상은 없지만은 법상이 있다. 이렇게 말은 하지마는 상이 있기는 마찬가지죠. 그러니까 범부 중생의 입장에서 볼 때는 아상이 없고, 법상이 있으면 아상 때문에 생긴 갖가지 괴로움은 없어지죠. 그러나 법상 때문에 있는 괴로움은 또 남게 되지. 그러나 대승의 입장에서 볼 때는 괴로움이 남아있다는 차원에서는 마찬가지죠. 그러니까 이걸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다. 이 말이오. 아상이든, 법상이든, 이건 없어지면 굉장히 좋고. 저건 좀 남아 있으면 괜찮다 이런 얘기가 아니란 말이오.
여기서 이렇게 나눴는데. 여기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대해서는 해설하는 방법이 다 조금씩 다르다. 즉 아상이 뭘 지칭하느냐? 중생상이 뭘 지칭하느냐? 여기에 대해서는 조금씩 사전적 해석이 서로 다르다 이 말이오. 그러나 제가 오늘 말씀을 드리는 거는 이것이 우리의 생활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고, 또 이것이 옛 가르침에도 맞고. 이것이 오늘 날 어떤 과학적인, 소위 말해서 여러 불교 이외의 다른 학문의 변화하고도 연관했을 때도 수긍이 갈 수 있는 그런 쪽으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23:30
아상
우선 아상이다 하는 이 아상은 내다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다. 그럼 내다 또는 나다 할 때 무엇으로 나를 삼습니까? 바로 오온으로 나를 삼는다. 오온이라는 것은 이 몸뚱이하고 이 마음을 가지고 나로 삼는다. 이 몸뚱이가 색이고 그다음에 우리가 마음이다 또는 생각이다 정신이다 하지마는 그건 분류하면 수상행식이 되겠죠. 이 오온의 가합상으로, 이 오온이 쌓여있는 이것으로 나를 삼는다. 이걸 아상이라 그래요. 다시 말하면 여러분들이 몸뚱이를 나로 삼아서 어떤 반응을 일으키면 이것은 뭐에 사로잡혀있다? 아상에 사로잡혀 있다. 이렇게 말한단 말이오.
이 아상을 기초로 해서 나의 것이다 하는 것이 있어요. 이건 내 꺼다. 이건 내 옷이다. 이건 내 연필이다. 이건 내 방이다. 이건 내 집이다. 이런 것을 또 아상에 속합니다. 또 원시불교로 따지면 내다 이 몸뚱이와 이 마음을 가지고 내다 하는 이 집착을 我라 그러고. 그다음에 이걸 기초로 해서 내 꺼다 하는 거를 我所다. 이렇게 말해요. 옛날에 공부 했었죠? 我所, 내 꺼다. 그다음에 자신이 일으킨 견해. 이러면 좋겠다. 저러면 좋겠다는 그 견해를 자기로 삼아서 그것을 고집하는 것을 我執이다. 이렇게 말해. 즉, 나다, 나의 것이다, 나의 생각이 옳다. 내가 옳다. 나다, 나의 것이다, 내가 옳다. 내가 옳다는 말은 뭐가 옳다는 거요? 나의 견해가 옳다. 이 말이오.
이 세 가지를 한문으로는 我, 我所, 我執 이렇게 말해. 이것은 다 근본은 뭐를 기초로 하고 있다? 아를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상이라 할 때는 이 세 가지를 다 통틀어서 뭐라고 한다? 아상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나다, 나의 것이다, 나의 견해가 옳다. 이것을 아상이라고 말한다. 이 아상을 갖게 되면 부부지간에도 싸우겠어요? 안 싸우겠어요? 싸우게 되겠죠. 이건 나고 이건 너다. 이 말이오. 그죠? 그다음에 이건 내 것이고 이건 네 것이다. 이건 내 의견이 옳고, 너는 틀렸다. 이거요. 그 요즘 부부간에 다 싸우는 게 뭣 때문에 싸운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상 때문에 싸운다. 아상 때문에.
옛날 사람하고 요즘 사람하고 비교해보면 누가 아상이 더 강할까요? 요즘 사람이 아상이 더 강합니다. 그러니까 부부지간에도 화해가 안 되고, 부모자식간에도 화해가 안 되는 거요. 더 심하게 가면요, 더 심하게 가면, 나다 하는 것도. 또 이 안에서 이 몸과 마음 안에서 또 나다 하는 것을 별도로 하나 따로 만들어 놓고, 따로 하나 만들어 놓고 이 몸뚱이나 이 말하는 거나 행동을 내려다보면서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경우가 있어요. 이게 뭐냐? 내가 내 맘에 안 드는 거요. 자기가 못마땅한 거요. 자기가 못마땅하다? 캬~ 난 왜 이럴까? 내가 못마땅하다. 이 말은 못마땅하게 여기는 나 따로 있고 못마땅한 나 따로 있어요. 이걸 뭐다?
자기 분열이라 그래. 아를 또 나눠서 자기 분열현상이라 그래. 자기 분열현상이 일어나면 남을 갖고 괴로워하는 게 아니라 자기를 두고 또 괴로워하는 거요. 이걸 아상이다. 이렇게 말해. 자~ 몸과 마음, 또는 정신과 육체, 또는 오온의 가합상. 여러 가지 말을 할 수 있겠죠? 쉽게 말하면 여러분들이 지금 갖고 있는 육신으로, 육신과 관계되는 이 정신으로 나를 삼는 거요. 이것이 나다 이거야. 그래서 이건 내 옷이고, 이건 내 생각이고, 이런 것들을 아상이다 이래. 그런데 사실은 “니가 누고?” 이렇게 물어봐요. “나는 내다.” 이러죠. “니가 정말 누고?” 이러면. “법륜입니다.” “그게 니 이름이지 너냐?” “그게 왜 내 아니냐?”
“그럼 니 이름 바꿔도 네가 변하느냐? 그대로냐?”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면 다만 네 이름이지 그게 어디 너냐?” “아~ 내 이름이구나.” “그럼 또 넌 누구냐?” “몸뚱입니다.” 그럼 몸뚱이라는 건 6개월만 지나면 부속품이 100% 다 바뀌어 버립니다.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먹은 음식이 지금의 세포를 구성해서 이 몸뚱이를 이루고. 현재 이루고 있던 거는 다 없어져 버려요. 그러면 “네 몸뚱이가 변했으면 6개월 후에 변했으면 너 아니지 않느냐?” “몸뚱이가 너냐?” 이거야. “지금 숨 딱 떨어지면 시신인데 네가 시신이냐?” “아닙니다.” “그럼 니는 누구냐?” “생각입니다”. “야 이놈아 생각은 시시때때로 바뀌는데 어느 게 너냐?”
이렇게 자꾸자꾸자꾸 따져 들어가면 나다 하긴 하는데 뭘 갖고 나다 하는지 잘 몰라. 그러니 잘 살펴보면 나랄 게 없어. 나다 하는 것은 한 생각이 어리석게 일어나서 그걸 모양을 짓고 딱 집착해 있는 거요. 그러니까 아라고 하는 모양을 짓고 있는 거지. 아라고 하는 게 실제로 없다.
인상
자~ 인상이다. 인상. 인상이라는 건 사람이다 하는 상이다. 이 말이오. 사람이다. 이 사람이다 하는 상은 어떻게 설명해야 되겠느냐? 이것은 나와 너로 구분 짓는, 즉 무리 짓는 생각이오. 무리를 지어서 나다 하는 생각입니다. 즉 우리가족 할 때. 우리가족 하고 다른 가족하고 다툴 때는 어제저녁에 술 먹고 늦게 들어왔다고 남편하고 나하고 싸운 거는 아상에 사로잡혀 그렇다. 이 말이오.
그런데 오늘 이웃집에 돈 빌려 준거 받을 때는 나하고 남편이 한패가 됩니까? 안 됩니까? 한패가 되죠. 나하고 남편 사이에 아무런 재산상의 니꺼 내 것도 없고. 견해에도 니꺼 내께 없고. 몸뚱이도 마치 몸이 둘이지 마음이 하나같이 일심이 딱 됩니다. 우리 한단 말이오. 우리. 이렇게 이 우리라고 하는 어떤 그룹을 자기라고 생각하는 게 인상이에요. 그런데 이 그룹 짓는 마음은 제일 적은 게 가족 단위에요. 2명, 3명, 4명, 5명 이렇게 가죠. 조금 더 넘어가면 우리 최씨, 우리 김씨. 씨족과 일가친척까지 우리 친척, 이래서 마을 안에서도 김씨네 박씨네 이렇게 친척끼리 대립해서 싸웁니까? 안 싸웁니까? 싸우죠.
조금 더 가면 우리 동네. 동네로 그룹 지어서 이웃동네하고 이해관계를 다투게 되죠. 더 나아가면 경상도 전라도. 이런 식으로 다투게 된다. 또 학벌로 우리 학교 우리 동문이다. 이런 식으로 그룹을 짓죠. 더 넓혀 가면 우리 사회 같으면, 남한이다 북한이다. 이러죠. 그러니까 자~ 한번 보세요. 나다 너다 할 때는 나 아닌 너는 죽든지 살든지 관심이 없어요. 두 부부가 서로 싸울 때는. 자기에게 딱! 사로잡히면 상대편은 죽어도 그만인 것처럼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 가족 이렇게 잡힐 때는 저쪽 편은 죽어도 상관없어요. 우리 자식은. 자~ 나다 너다 할 때는 상대가 손가락이 떨어지든지는 어떻게 하든지는 관심이 없고, 내 몸에 가시 박힌 것만 관심이 있겠죠?
그런데 우리 자식 할 때는 내 자식 손끝에 가시 박힌 거는 관심이 있지만 남의 자식은 못이 박혀도 관심이 없다. 이 말이오. 그런데 경상도 전라도 이렇게 편을 가를 때는 경상도 사람이 직장에서 하나 떨어지거나, 국회의원이 뭐하나 뭐가 잘못되면 경상도 사람 차별했다고 난리 나죠? 또 전라도 사람이 그랬다면 난리가 나지 않습니까? 그죠? 그러니까 광주사태 때 전라도 사람이 군인들한테 그만큼 죽어도 전라도 사람들은 난리가 나고 이럴 수가 있느냐? 하는데, 경상도 사람들은 또 뭐라 그래요? 데모를 하니 그리되지. 이리 생각한단 말이오. 국가에 반대하면 반역이지. 예를 들면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오.
남편이 다른 집에 어려운데 가서 도와주고 그다음에 치료비를 내 주거나 이렇게 오면, 아내가 어디 갔다 왔느냐? 돈 어디 썼냐? 그러니까. 이러이러한 데 썼다 하니까. 당신이 왜 쓸데없이 거기 가서 왜 돈 쓰냐? 거기 가서 뭐 하러 일 해주냐? 그렇게 돈이 많고 할 일이 없으면 내 옷이나 사주지. 나하고 얘기할 시간이 없다면서 거기 가서 남 위로해 줄 시간은 있어? 이럴 경우가 많이 있어요? 없어요? 있죠. 그게 뭐냐? 인상이란 말이오. 인상. 우리라고 하는 울타리를 치고 나머지를 빼낸단 말이오. 이게 큰, 가장 작은 게 인상 중에는 가족이고, 점점점점 커져서 남북으로 커지고.
그다음에 우리 민족. 우리 민족. 우리 민족 해서 앞으로 천지가 어떻게 개벽이 되면 한국이 반도가 중심이 되고, 일본은 물에 가라앉고, 중국은 지진이 나서 어떻게 되고. 그러니까 일본 사람이라. 일본사람은 물에 다 가라앉아도 되고, 일본사람은 다 죽어도 속이 시원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요. 이게 뭐냐? 이것도 인상이다. 이거야. 우리 민족, 우리 민족.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래서 우리가 인도에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서 학교를 세우고 뭘 하면 다 사람들이 이렇게 묻거든요? 왜 우리나라도 어려운 사람 많은데 거기 가서 도와주느냐? 이렇게 물어요. 두 번째는 학교 짓는데 한글 가르치는 학교입니까? 아니요. 이러면.
거 왜 한글도 안 가르치면서 인도어 가르치는 거 뭣 때문에 합니까? 또 거기서 절 짓습니까? 아니요. 아니 불자가 돈 낸 걸 갖고 절을 지어야지 인도는 절도 없다는데 왜 딴 짓 하느냐? 이런 게 다 인상이에요. 아시겠어요? 우리 거다. 우리 거. 제가 며칠 전에 어떤 토론회에 나갔어요. 토론회요. 거기서 북한에 대한 실정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그 다음에 거기에 대해서 도와줘야 된다는 얘기를 하고 우리가 어떻게 돕고 있다고 얘기를 했더니. 그 질문하는 사람이 아주 사회저명 저명인사는 아니지만, 사회 고위 공직자에 속해요. 중요한 국가 기구에 있는 사람들이, 거 강의 대상이 그래요.
자기가 세 가지 질문하겠다는 중에 질문 한 가지가 뭐냐? 스님은 지금 우리나라에 결식아동이 몇 명인지, 그들을 위해서 당신 뭘 했는지 얘기를 해보라. 그것도 안 하면서 당신은 왜 북한을 왜 돕느냐? 이거요. 예를 들면 이런 질문 자체가 뭐요? 어떻게 보면 충분히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질문이죠. 그러나 이것을 우리가 크게 인간의 삶에서 본다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어렵다 하는 것은 굶어 죽는 사람에 비해서는 어려운 게 아니다. 나라 라는 생각을 뛰어넘어서 보면 여기서 못산다 하는 것은 저기서 굶어 죽는 사람에 비해서는 100배도 더 잘 산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단 말이오. 시급한 것으로 따지면 저기는 며칠 만에 죽고 이쪽은 사는데 지장이 없다. 이거야.
그리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다 사람은 인상이 있으니까. 내 나라, 내 민족, 내 아이, 이런 데는 우리나라 정도 되면 애들이 굶주린다 하면 결국 죽기 전에 정부가 관심을 갖겠어요? 안 갖겠어요? 관심을 갖겠죠? 또 여러분들이 이웃에 그런 일들이 있으면 다 관심을 가져요? 안 가져요? 갖지. 그런데 저 보이지 않는 데서는 사람이 관심을 갖기가 어렵죠. 그러니 역할 분담이 필요하단 말이오. 이런 일은 가만히 보니까 여기도 굶어 죽는 사람이 있다. 그럼 당연히 해야 되겠죠. 그러나 여기 일은 할 사람도 많이 있고, 열악한 점도 낫다. 그러면 여기는 아무도 돌보는 사람도 없고. 그 상황이 급하다 하면 우리는 아~ 나는 여러 가지 일 중에 이쪽 일을 해야 되겠다. 이렇게 역할분담이란 게 있단 말이오.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해서 몰아가죠.
이런 것들이 바로 나쁘다 좋다 이런 얘기가 아니에요. 그 사람 나쁜 사람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안 돼요. 그 순간에 뭐에 사로잡혀 있다? 인상에 사로잡혀 있다. 인상. 인상이 뭔지 이해하시겠어요? 더 나아가면 사람고기를 먹으면 안 되도 다른 고기를 먹으면 된다. 그러니까 사람이다. 이거요. 사람. 그러니까 사람은 죽이면 안 되고, 사람은 사람고기를 먹으면 안 되지마는 다른 짐승을 죽이고 다른 고기를 먹어도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 어떤 종교의 성경에 보면 그런 얘기 나오죠. 뭐라고? 사람이 다른 동물은 다 먹고 쓰고 하도록 권리가 주어져 있다. 여기까지가 뭐냐? 인상이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자~ 그러니까 사람을 자기 개인을 넘어서서 그룹을 지어서 우리라는 울타리를 지어서 그 밖과 안을 구분 짓는 것을 뭐라고 한다? 인상이다. 이렇게 말해요. 내 가족, 내 가족 아닌 사람 이렇게 짓거나. 우리 경상도, 너그 이렇게 짓거나. 우리나라, 우리나라 사람 아닌 거 이렇게 짓거나, 사람, 사람 아닌 것 이렇게 분류할 때까지를 인상이다. 그러니까 상이라는 것은 이 세상을 무엇인가 선을 그어서 모양을 짓는 거에요. 예를 들어서 밀가루가 있으면 그 가운데 툭 하나를 잘라서 뭘 만든다. 이 말이오. 잘라내서 만드는데 자기의 몸뚱이 요거 하나만 이 세계로부터 딱! 분리시켜서 뭐라고 하는 것을 뭐라고 한다? 아상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그 다음에 몇 개 그룹을 지어서 그 울타리 안과 밖으로 나누는 것을 뭐라고 한다? 인상인데. 가장 작은 울타리가 두 사람. 자기와 자기 애인이든, 자기와 자기 부모든, 이렇게 해서 가족단위부터 가장 크게는 인류, 우리 인류. 인류. 이러죠. 그래서 이 세상에 가만히 보세요. 다른 건 다 진화를 했다. 이래도 수긍을 하면서 사람은 진화했다 하는 건 수긍하기가 어렵죠. 사람은 그러면 사람의 가치가 뭐에요? 떨어진다. 사람은 뭔가 다르다. 이렇게 생각을 자꾸 한단 말이오. 사람은 다른 동물과 뭔가 달라야 되요. 같으면 그건 뭔가 인간을 모독하는 거 같애. 이 상은 참 많습니다. 남자끼리 모아서 남자는 여자보다 낫다. 이거도 뭐에요? 상이겠죠?
또 피부빛깔로 백인은 아주 우월한 존재고 나머지는 열등한 존재다. 유색인종이다. 이렇게 분류를 한다든지. 그다음에 양반은 우월한 존재고 상놈, 양반상놈으로 나눈다든지. 부자는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 부자 되고, 가난한 놈들은 전생에 나쁜 짓을 많이 해서 가난하게 됐다. 남자는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 남자가 되고. 여자는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 여자 몸을 받아 애도 낳고, 이 세상에 와서 남자한테 구박도 받고, 뭐 한다더라. 이런 식으로 한다든지. 또 여자는 뭔가 부정하고 모자라고 나쁘다 하니까 그 나쁜 이유를 전생에 죄를 많이 지었다 그러든지. 하느님 말을 안 듣고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남자를 꼬셔서 따먹게 했다.
그러니까 뭔가 여자는 좀 문제가 있다. 그래서 애기 낳는 고통을 주고, 죽어라 하고 땅 파고 일해야 먹고 사는 고통을 줬다. 뭐 이런 식의 옛날 얘기들이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느냐? 이미 여성은 무엇인가 부정한 존재다. 이런 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상을 갖고 있는데, 왜 그런 상이 있느냐를 상이 헛건데. 허상을 지어놓고 그 상에 대해서 뭔가 이유를 대야 된다 말이오. 거기서 온갖 이론이 나오게 된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그러니까 가문의 자기 가문만 중요하면 가족사, 씨족사에서는 아주 중간에 중흥시켰다 그러잖아요. 중흥조라 그러죠. 자기 시조의 몇 대조가 중흥조라 그러잖아, 그죠.
그러니까 우리가 남의 나라를 침범해서 영토를 넓히면 우리 민족이 볼 때는 어때요? 굉장한 영웅이고, 다른 민족이 볼 때는 이를 가는 사람이 되겠죠. 이런 식으로 그 인상은 그 그룹 안에서는 이익이지만은 그 그룹 밖에서 볼 때는 전혀 다른 평가를 받게 되는 거요. 그래 우리가 인류의 스승이다. 이런 사람 중에도 다른 동물이 볼 때는 어떻겠어요? 엄청나게 고통을 준 그런 사람도 있을까? 없을까? 있죠. 그래서 우리가 보통 말할 때, 성인이다. 인류의 스승이다 하는 사람은 보통 뭘 뛰어넘어요? 민족을 뛰어넘죠? 보통 우리는 아무리 뛰어넘어도 뭘 못 뛰어넘습니까? 민족과 나라를 못 뛰어넘을 때가 굉장히 많잖아. 그죠?
그런데 그 민족과 나라를 뛰어넘으면 성인이 되죠. 그 성인이 되면 다른 민족도 그 사람 받아들이겠어요? 안 받아들이겠어요? 받아들이지. 그러니까 성인들은 제 민족 안에서는 환영을 못 받습니다. 제 민족의 이해만 생각해야 되는데 그 밖에까지 이익을 같이 생각하니까. 이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환영을 받기 어렵죠. 그러니까 예수가 유대인들로부터는 유대인들은 유대인만 세상에 제일 낫고, 그것만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았다 이러니까. 유대교들은 그냥 있어요? 없어요? 그냥 있죠. 그러나 바로 유대인이 아닌 선한 사마리아인. 이런 말 들어보셨죠? 그러니까 그 인종 밖의, 그 민족 밖의 사람도 선한 것이 중요하다.
또 창녀보고 죄 있다고 돌멩이 던지니까 예수가 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이런 것들은 다 그것의 울타리를 벗어나고 있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다른 민족이나 다른 계급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받아들일 수가 있게 되는 거요. 그러니까 힌두교나 이런 민족주의 종교가 그 나라 안에서는 꽉 잡는데 그 나라 밖으로는 못 나가죠? 그러니까 이제 예를 들면 기독교라든지 불교 같은 것도 인도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죠? 그러니까 중국에서도 받아들일 수 있고, 한국에서도 받아들일 수 있잖아요. 그런데 정작 자기 나라에서는 어때요? 배척을 받을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애국 활동을 하려면 나라 전체가 애국자라는데, 그 가문에서는 부모 속 썩이고 온갖 것 해서 역적이 된 사람이 있죠? 가문 안에서는. 마찬가지에요. 그러니까 사회정의를 위해서 민주화 투쟁을 한 젊은 사람들 중에는 부모가 볼 때 인종 말자 같이 생각하는 사람도 있단 말이오. 아~ 그래 논밭 팔아서 대학 보내놓으니까 집안은 외면하고 대모나 하고 감옥이나 가고 이렇게 된단 말이오. 그러니까 오늘날도 남북을 통일하려면 남한에 있는 사람이 북한사람의 심정도 이해하고 그 이익도 대변해 주는 마음을 가져야 서로가 화합이 되겠죠. 그러니까 우리가 북한의 입장과 심정을 함께 껴안는 생각을 하면 남한에서는 맞아 죽게 되는 거요.
그러면 한국사람이 세계화되는 추세에서 한국을 뛰어넘어서 전 지구상에 있는 어려운 사람까지 생각하면 한국 내에서는 환영을 못 받겠지? 왜? 그 이익중심으로 사람이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남편이나 여러분들의 아내나, 여러분들의 자식이 훌륭한 사람이 되기가 틀렸어요. 왜? 여러분들이 집안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그 바깥의 이익을 생각하고 돌아오면 집에서 환영을 받을 수가 없어. 남자치고 바깥에서 좋은 친구로 소리 듣는 사람치고 마누라한테 좋은 남편 소리 듣기가 어렵단 말이오. 그저 종 땅! 치면, 땡 하면 집에 가고. 자기 마누라만 생각하면 친구들 사이에서는 다 욕 얻어먹죠. 다 욕 얻어 먹는단 말이오.
여러분들이 절에 와서 온갖 것 봉사면 집의 남편한테 욕 얻어먹죠? 할일 없나? 왜 거기 가서 그 짓 하느냐? 이렇게 된단 말이오. 그런데 절에선 다 뭐라 그래요? 아이고 보살님 훌륭하시다고 이래. 여러분들이 만약에 돈이 있어 절에다 100만 원 200만 원 보시를 했다. 그러면 집에서는 물론이고 일가친척이 들으면 뭐라 그럴까? 거기 갖다 줄 돈 있으면 나나 주지.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오. 이게 다 우리가 지금 어떤 상에 이렇게 사로잡혀 있다. 그러니까 훌륭한 지도자다 하는 것도 다 그 울타리 안에서의 얘기에요.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말한 인류에서의 성인이라 하는 것도 사람의 울타리 안에서 모든 사람을 생각하면 이제 사람들이 성인이다. 이렇게 말한다 이거요.
그런데 사람의 울타리 밖에까지 생각해서 다른 생명, 동물이라든지 다른 생명까지 다 생각해서 얘기하면 이번엔 사람들로부터 환영받기가 좀 어려워. 그러니까 부처님은 살인하지 마라. 그랬어요? 살생하지 마라 그랬어요? 예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독교하고 불교하고 똑같다 생각하는데 전혀 틀립니다. 기독교의 5가지 계율에는 살인하지 마라. 이렇게 돼 있어. 그런데 불교에서는 뭐라고 한다? 살생하지 마라. 기독교에서는 원래 도둑질하지 말라 이렇게 돼 있는데, 불교에서는 주지 않는 남의 물건을 갖지 마라. 이것도 사실 차이가 엄청납니다. 자 그 인상을 넘어서면 어떠냐?
많은 생명들을 다 같이 보는 거요. 거 왜 이러냐? 나만 생각하지만 나 혼자 존재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죠? 부모와 형제와 이 사회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내가 존재하죠. 내가 입는 이 옷도, 내가 끼는 안경도 수많은 사람의 노고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모든 사람의 은혜를 생각할 줄 알 때 뭐를 벗어날 수 있다? 아상을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사람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소위 노동가치설 하면 노동, 이 상품의 가치가 이게 100원이다 하면 100원이 왜 생기느냐? 요걸 만드는데 사람이 얼마나 요기다 노동을 들였느냐? 이것만 가지고 계산하는 거. 이게 다 인상에 사로잡혀서 나온 얘기란 말이오.
사실은 이러한 물질이 생성되려면 수도 없는 다른 생명들이 작용을 하고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단 말이오. 식물이 있어야 동물이 있고, 그 작은 세균과 지렁이와 온갖 것들의 노고에 의해서 그 생명의 작용에 의해서 오늘 사람이 그 위에 있는 거란 말이오. 그런데 사람들이 그걸 모르고 자기에 사로잡혀서 자기 삶을 있게 한 아내와 자식과 부모와 형제를 고통스럽게 하고 죽이는 것이 패륜아죠. 그것처럼 자기를 있게 한 이웃을 다, 자기를 있게 한 이 세상 사람들을 다 적으로 돌리는 거. 그게 우리가 결국은 자기의 죽음으로 간단 말이오. 그런데 사람만 중심으로 생각하지. 사람밖에 있는 수많은 생명들이 사람과 분리될 수가 없어.
역사적으로 진화로 따져도 어디부터 사람이다. 이렇게 사람만 종자가 따로 있은 것도 아니고. 현재 존재하는 이 삶을 봐도 모든 게 다 연결되어 있어. 그런데 아무데다 금을 싹 그어서 요 안에 것만 중요하고, 요 밖에 거는 필요 없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이 인상이 무너져야 되. 그래서 모든 생명들, 모든 생명들을 한 울타리로 탁! 봐야 된다 이거야. 오늘날 환경 문제도 다 뭣 때문에 생긴 거다? 인상 때문에 생긴 거요. 가정의 불화는 아상 때문에 생긴 거고. 오늘날 사회적인 제 갈등들, 이런. 전쟁, 불화, 이런 것들은 그룹 그룹 패를 지어 서로 이익을 쟁취하는 인상 때문에 생긴 거다.
중생상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겨우 요즘 눈을 떠가지고 생명, 생명, 생명의 가치관, 생명이 어쩌구 이런 말 많이 씁니까? 안 씁니까? 쓰죠? 이럴 때 이 생명이라는 말 속에 물이나 공기나 돌멩이나 흙은 빠져요? 안 빠져요? 빠져. 소나, 말이나, 개나, 이런 것부터 해서 야생동물, 야생식물. 생명이라는 어떤 울타리를 떡쳐놓고, 그 밖에 거는 함부로 해도 돼. 산을 깨부수거나, 돌을 깨거나, 예를 든다면 뭐 물을 더럽히거나. 물속에 사는 생명이 죽으면 문제지. 물 자체는 문제로 안 삼는단 말이야. 공기 이런 거. 이게 뭐냐? 중생상이다. 생명 가진 것은 중요하고 생명 가지지 않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사실은 이 생명 가진 것들이 생명 갖지 않은 것들과 분리가 될 수 있어요? 없어요? 분리 될 수가 없어. 이 수많은 생명이 다 생명 아닌 것이라고 우리가 분리하는 그 땅으로부터 그 공기로부터 그 물로부터 이게 다 생겨나는 거란 말이오. 오늘날 환경파괴는 바로 이 생명을 중심에 놓고, 사람을 중심에 놓고. 보는 거와 생명을 중심에 놓고, 생명 없는 것들에 대한 파괴. 이것이 오늘날 환경문제의 큰 요인이다. 자~ 다른 동물을 죽이고, 살림을 다 파괴하고 하는 거 이런 것들은 이런 작용은 소위 말해서 인상과 관계가 있지마는. 여러분들이 지금 물을 더럽히고, 공기를 더럽히고, 오존층을 파괴하고. 이런 것들은 다 생명에 대한 관점이 지금 잘못돼있어요.
그래서 겨우 민족신앙, 그저 아상과 인상에 사로잡혀 있는 그 수준에서 겨우 세계적인 종교, 그것을 뛰어넘었다고 세계적인 종교라고 하는 이런 몇 가지 종교들이. 요즘 생명이 어쩌니, 생명관이니 해서 겨우 넓혀봐야 사람에서 어디까지로? 원숭이나, 소나, 개나 뭐 여기까지밖에 안 넘어갑니다. 그러니까 이 철학 자체가 이 상을, 상을 떠나서 있는 게, 일체의 세계를 하나로 보는 게 아니고. 뭔가 상을 지어놓고 보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중생상이다 하는 것은 울타리를 딱 쳐놓고 거기 소나 개는 들어올 수 있는데. 돌멩이는 들어온다? 안 들어온다? 안 들어와. 이렇게 구분 짓는 거다.
오늘날 환경 파괴는 다 이런 중생의 무지로부터 생기는 거다. 아상에 사로잡힌 사람이 자기 마누라 두들겨 패고. 자기 부모 학대하고 한 게 지한테 이익인 것처럼, 어리석은 생각이 결국은 자기를 파괴하는 거와 같이. 아상에 사로잡힌 사람이 그러죠. 인상에 사로잡힌 사람이 자기 집안, 자기 가족, 자기 민족만 생각하고. 다른 민족, 다른 가족, 다른 지방 사람은 없는 게 나은 것처럼 생각해서 갖가지 갈등을 일으키는데. 요즘은 우리가 유럽연합 같은데 보세요. 저그 민족만 잘났다고 하다가 요즘은 생각이 바뀌었죠?
예. 서로가 돕는다 해서 연합체를 구성하잖아요. 요즘 환경문제가 제기되면서 사람들이 이 자연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죠. 이렇게 의식의 폭이 넓어지는 거요.
수자상
그런데 수자상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이렇게 의식의 폭이 완전히 넓어졌다 하더라도. 존재, 돌멩이든, 물이든, 공기든 이런 건 존재합니까? 안 합니까? 존재하죠. 이 존재하는 것들만을 중심으로 해서 사고방식을 해요. 그 이 존재하는 이 모든 것들은 다 어떻게 됩니까? 성주괴공하고, 생로병사 하죠. 그러니까 이건 생기면 반드시 뭐하게 됩니까? 사라지게 되죠. 이 생기면 사라져야 되니까 사라지고 싶어요? 안 사라지고 싶어요? 안 사라지고 싶죠.
그러니까 목숨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또는 목숨이 있다 이 말은. 이거는 태어나면 반드시 죽어야 하고, 생겨나면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이게 무얼 중심으로 해서 관찰한 거냐? 존재를 중심으로 해서 관찰했다. 존재라는 게 뭐냐? 인식이 되는 걸 중심으로 한다. 육근을 통해서 인식되는 걸 중심으로 한다. 그래서 여기에서 유무를 나누죠. 있고 없음을 나누고. 우리가 있는 것이 왜 있느냐? 뭐가 사라졌다 버리면 없다 하고, 또 생겨나면 없는 데서.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이런 말 많이 쓰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다.
여러분들이 초를 태우면 없어진 것 같지마는 사실은 내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어때요? 그대로 있어요. 그러니 이 세상에 참모습은 있고 없는 것을 떠나 있습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야. 다만 우리에게 인식되면 ‘있다.’ 이러고, 인식이 안 되면 ‘없다.’ 이러죠. 그러니까 하나의 형상이 우리 눈에 인식됐다가, 우리의 육근 경계에서 인식됐다가. 또 인식이 안 됐다가. 인식됐다가 인식이 안 됐다가 하면 있다. 없다가 되고 생기고 사라진다. 이런 견해가 생긴단 말이오.
그걸 양쪽을 다 통틀어서 보면 그것은 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생기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수자상이 딱 없어져 버리면 존재 비존재의 논쟁이 사라지니까. 여기는 생멸도 없는 세계고, 유무도 없는 세계다. 거기가 뭐다? 완전한 깨달음의 세계다. 자~ 그러니까 우리가 범위를 적게 치든, 많이 치든 경계를 딱 치게 되면 뭐가 된다? 상이 지어지는 거다. 그러니까 그 상을 지은 것은 상을 짓게 되면 그것은 반드시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왜? 존재는 그렇게 될 수가 없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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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서는 보살이 상을 짓게 되면 모양을 짓게 되면 곧 보살이 아니다. 이렇게 한마디로 얘기할 수 있습니다. 굳이 네 개로 나눌 필요가 없죠? 여기서는 어떤 상이던 이 말이에요. 그게 뭐 아상이든, 인상이든, 중생상이든, 수자상이든. 어떤 상이든 상을 갖게 되면 그것은 보살이 아니다 이런 얘기에요. 자 여기서 우리가 사상이라는 것이 뭐라는 것을 공부하다 보니까. 이것이 마치 중요한 과제 같지마는 정종분에서의 요지는 이 상을 설명하는 데 있는 게 아니에요. 아시겠어요?
자~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고 마음을 내고 그렇게 실천하는 게 첫째고. 그럴 때 내가 너를 구제한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이것은 해탈의 길에서 멀어지게 된다. 이럴 때 이미 내가 하면 이미 아상이 생기고. 너를 하면 벌써 인상이 생기고. 중생을 구제한다 하면 벌써 중생상이 생기는 거다. 이거요. 자 그러면 이 상이 없다 하는 것은. 이게 상을 딱~ 여의게 되면 일체가 다 뭐요? 나와 한 몸이죠. 부인과 자식과 부모도 다 나와 분리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죠. 이것만 분리 안 되는 게 아니라 뭐도 분리 안 된다? 이 세상 사람 모든 사람도 분리가 안 되죠. 다 연관 맺어져 있다.
사람만 이래요? 역시 모든 식물과 동물도 다 연관되어 있죠. 그럼 이 생물만 그래요? 아니다. 우리가 소위 이름 짓는 무생물이라고 이름 짓는 것까지 다 연관이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가 괜히 선을 떡 그어서 이쪽 것은 생물, 저쪽 것은 무생물. 선을 떡 그어서 이쪽 건 사람, 저쪽 건 사람 아니고. 선을 떡 그어서 이건 나, 이건 내가 아니고. 이렇게 해서 상이 지어진 거지 존재 자체는 금을 그을 수가 없다. 편의상 우리가 그렇게 해서 이름 부를 수는 있지마는 상을 지을 수가 없는 거다.
그리고 존재 비존재다 이렇게 둘로 나누어져 있는 게 아니다 이거요. 이것은 오늘날 과학이 발달하면서 이것은 다 실제로 보여주고 있는 거다. 그러니 일체의 세계는 다만 그렇게 존재하고 있을 뿐이요. 존재 비존재를 떠나서 존재하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 이건 말의 사용이죠. 그 다음에 그런 것들은 다 그냥 그 모양으로 다 완전한 겁니다.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는 거는 떨어지는 데로 완전한 모습이고, 싹이 돋는 것은 싹이 돋는 대로 완전한 모습이에요.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것은 그것대로 완전한 모습에 속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다 분별을 일으켜서 이거를 분리해서 하나하나 이 생명을 별개로 보니까 여기에 갖가지 갈등이 생기는 거요.
그러니 우리가 원효대사의 얘기에서 내가 중생상을 지어서, 중생이라고 상을 지어놓고 또 중생을 구제한다 하는 상을 하게 되죠. 본래 중생이 아닌 줄을 알게 되면 구제할 것도 없게 되죠. 여러분들은 구제할 게 없다. 이러면 아무것도 안 하고 놀아야 되겠네요. 이렇게 생각해요. 그건 또 놀아야 된다는 상을 또 지으니까 그런 거요. 그러니 이것이 내 꺼다 하고, 저건 니 꺼다 하고 상을 지으니까 내 것에 집착하고 이러죠. 그런데 내 것도 아니고 니 것도 아니고 누구 것도 아니다 하고 상이 딱 떨어지면 그러면 다 줘버려야 됩니까? 주고 안 주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거야.
그러니까 필요에 의해서 그냥 쓰여질 뿐이다. 이 세계는 인연을 따라서 그렇게 움직이는 거에요.
자 그러면 한 가지 옛날 얘기를 한번 해 볼게요. 경전에 이런 얘기가 있어요. 옛날에 어떤 나라에 임금이 정치를 잘해서 백성들이 잘 살았어요. 그런데 임금의 딸로 태어난 공주는 아버지 덕에 잘 살았단 말이야. 옛날에 여자들은 사람 취급을 못 받았다고 내가 맨날 얘기했죠? 옛날에는. 사람이 아니에요. 남편에 붙어서, 아버지에 붙어서, 또는 자식에게 붙어서 대우를 받는 거란 말이오. 여러분들 대통령 옷은 대우 받아요? 안 받아요? 받지. 대통령이 키우는 개는 대우 받아요? 안 받아요? 받지. 사람보다 대우 더 잘 받는단 말이오.
그런데 그 개 때문에 그런 게 아니고, 그 옷 때문에 차 때문에 그런 게 아니고, 그 대통령이라는 사람으로 인해서 그렇게 주어지는 거란 말이오. 그러니까 누구 덕이다? 대통령 덕이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잖아. 그죠? 그런 것처럼 이 공주는 자기가 뭐 잘나서가 아니라 아버지를 잘 둔 죄로. 아버지한테 붙어서, 그래서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부러움을 사고 있단 말이오. 그래 아버지가 어느 날, 공주보고 “얘야.” “예.” “너는 어떤 이유로 이렇게 세상 사람들로부터 좋은 대우를 받고, 이렇게 잘 먹고, 잘 살고, 편안하게 사는 거 같으냐? 이게 누구 덕이냐?” 이렇게 물었어.
그러면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정답이 뭐요? 아바마마 덕입니다. 이래야 된단 말이오. 특히 임금이 물었는데. 아무리 부모자식 간이지만. 그런데 “내 덕이오.” 이랬어. 그래 임금이 딸이지만 기분이 나빠? 좋아? 나쁘단 말이오. 또 물었어요. “역시 내 덕이오.” 이래. 또 물었어. 또 “내 덕이오.” 이래. 임금이 화가 났어. 네 덕인이지 아닌지 한 번 깨쳐봐라. 잘라 버렸단 말이오. 부녀간의 선을 잘라버렸어. 잘라서 성 밖으로 내 쫓아서 지나가는 거지하고 부부인연을 맺게 했어. 거지한테 명해서 너 이 공주하고 살아라. 너 만약에 같이 안 살면 너는 그날로 죽여 버린다. 그리고 부부로 턱 맺어줬어.
그래도 네 덕이냐 이 말이죠. 그래도 네 덕이냐? 그래 이제 거지하고 부부가 됐는데. 거지가 생각할 때는 그 당시의 윤리도덕으로는 공주 옷깃의 손만 닿아도 천민은 칼로 갖고 죽여 버린단 말이오. 그래도 죄가 안 된단 말이오. 그런데 어떻게 공주를 아내로 맞이할 수가 있어요? 그건 불가능한 일이죠. 그래 공주한테 엎드려서 좀 제발 봐 달라고. 궁중으로 제발 돌아가라 이거야. 당신 때문에 내 죽게 생겼다 이거야. 자~ 공주를 아내로 안 받아 들이면 왕명에 의해서 죽게 되고. 공주 몸에 손을 대게 되면 천민이 귀족에게 몸에 손을 뎄으니 이것은 윤리 도덕상으로 이거는 죽게 되는 거란 말이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단 말이오.
그런데 공주가 이건 아바마마의 명이니까. 난 이제 더 이상 공주가 아니다 이 거지. 아버지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니까. 임금이 옷을 쓰레기통에 버려버리면 임금 옷이에요? 아니에요? 아니란 말이오. 그냥 쓰레기지. 그래도 이 거지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거요 난 당신하고 가까이할 수 없고 부부가 될 수 없다. 이거야. 아무리 같다고 얘기를 해도 이미 나는 아니라고 얘기를 해도 안 되는 거요. 그러면 너 결국은 나를 버리게 되면 왕명에 의해서 죽게 되는데 죽을래? 이러니까. 죽기는 싫단 말이오. 그래도. 그래서 타협점을 본 거요. 일단은 형식적으로는 뭐로 돼서 살자? 죽으니까. 부부가 돼서 살자. 이렇게 타협점을 봤어.
그래 공주가 이 거지 아내가 됐어. 그래서 거지보고 네 고향이 어디냐? 당신 고향이 어디요? 하고 이 공주는 깍듯이 이 남편으로서 예우했는데. 자기 고향 모른다는 거요. 그래도 잘 생각해 보라고. 모른다는 거 그래도 생각해 보라고. 자꾸 얘기하니까. 아주 어릴 때 기억이 나서 어디 어디서 내가 살은 거 같다고. 그래서 그 거지의 고향을 찾아갔어요. 찾아가서 보니까 이 거지가 아마 23살 되는 모양인데, 20년 전에 그 동네 아주 부잣집 아들이었어. 그런데 그 집에 마치 수십 명의 강도 떼가 와서 사람을 다 죽이고, 집을 불 질러 버리고. 그렇게 해서 다 가족이 전멸해 버렸어.
그래서 마을 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그 집터에는 잡초만 콱~ 우거져 있는 거요. 그런데 그 집 아들이 하나 안 죽고 그 난리 통에 살긴 살았는데. 이것도 누가 가서 키우는 것도 재산이 남았거나 먼 친척이 있거나 할 때 누가 데려다 키워서 나중에 보상이라도 받지. 완전히 전멸해 버렸는데 누가 갔다 키우겠어. 그래서 떠돌이 됐다는 얘기만 들은 거요. 동네 사람한테 확인해 보니. 그래서 알아봤더니 이 거지가 종자는 아주 좋은 종자에 쉽게 얘기하면 부잣집 아들이오. 신분도 높은 사람이오. 그래 공주가 폐가가 된데 가만히 가서 주위를 둘러봤어.
여기저기를 둘러보면서 온갖 것이 불이 타서 쓰러져 있고 쌓여 있는 속에 창고 자리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죠? 창고 자리가. 창고자리를 떡 찾아서 남편보고 여기 파보라고 그랬어.
아무 연장도 없으니까 부인이 이웃 동네 가서 연장을 얻어다가 남편보고 파 보라. 거길 파니까 그 보물창고 자리를 찾아낸 거요. 그랬더니 그 안에 엄청난 보배가 들어있었던 거에요. 그래 그걸 가지고 팔아서, 이 그걸 찾아서, 누구 거요? 지금? 이게 공주 거요? 거지 거요? 예? 이게 공주 거요? 거지 거요? 공주가 찾았으니 공주 거 아니오? 그런데 거지는 공주가 찾았으니 이 공주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아이 당신이 찾았으니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이래. 이건 당신 거라고. 나는 이건, 당신 부모가 남긴 거라고. 이렇게 해서 그걸 팔아서 집을 크게 대궐같이 짓고, 옷도 좋은 거 입고, 이렇게 딱 해서 사니. 이 거지가 뭐가 됐어요?
그냥 그대로 왕같이 돼서 산단 말이오. 그래 임금이 딸이 제가 잘못했습니다. 모든 게 다 아버지 덕입니다. 이렇게 하고 올 줄 알고 한 달을 기다고, 두 달을 기다리고, 1년을 기다리고. 2년을 기다리고. 속은 타고 궁금해 죽겠는데 안 오는 거요. 이 ㄴ 여 ㄴ 이. 그래서 사람을 시켜서 좀 찾아보라 그랬어. 하도 답답하니까. 찾아봤더니 대궐같이 지어 놓고 산다는 거요.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직접 가봤어. 가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궁전처럼 지어놓고 그렇게 두 부부가 살고 있는 거요. 그래서 이 왕이 그때야 자기가 잘못했다고. 네 복인 줄, 네 복인데 내 복인 줄 착각했구나. 그래 화해를 했는데.
이 얘기는 무엇에 대한 비유냐 이거야. 이 거지가 바로 중생에 대한 비유에요. 이 공주는 보살이란 말이오. 그러니까 이 거지가 뭔가 노력을 해서 부자가 되는 게 아니고. 거지는 비록 거지 행색을 하고 있어도 뭐다? 부자다. 이 말이오. 왜? 이미 자기가 물려받을 보물창고를 땅속에 묻어 있어도 부자다. 그러니 이 거지가 그 자기 꺼, 본래 자기 꺼라 이거야. 그 본래 자기 거를 찾아서 이렇게 부유하게 사는 건 뭐냐? 중생이 중생중생 하지마는 지금 중생 놀음을 하고 있지. 본래는 뭐다? 부처다 이거야. 그러니 이것은 보살이 이 중생을 부처로 만들어 준거냐? 다 지 모습을 그냥 찾아낸 거요? 자기 모습을 찾아냈다.
보살이 뭐 재산을 준 게 아니다 이거야. 보살은 다만 중생이 자기 모습을 잃고 헤맬 때 자기 본래 모습을 찾도록 도와주는 거니까. 다시 말하면 보살은 그 어떤 재물도 이 공주 재물이 아니다. 이런 비유로서 나와 있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여기서 지금 조금 여러분들이 이해를 못 할 거 같아서 지금 얘기로, 경전에 나와 있는 얘기를 하는 거요. 그러니 이 사람을 거지를 부자가 되도록 했다 이 말이에요. 그의 마음이 되고 그의 편이 돼서 그가 부자가 되도록 하니, 공주도 덩달아 부자가 됐어? 안됐어? 부자가 됐지. 그럼 이 부자를 만들어 준 게 공주가 한 거요? 자기, 그 거지, 남편의 자기 몫이요? 자기 몫이란 말이오. 그게 공주께 아니다. 이 말이오.
그와 같이 여러분들은 지금 한 생각 어리석은데 사로잡혀서 지금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지마는, 이게 마치 꿈 깨듯이 깨고 나면 여러분들이 다 그대로 부처다 이거야. 지금 부처는 부처인데 부처로서의 뭘 못하고 있다? 역할을, 작용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 이 말이오. 상이라는 것을 얘기하면 여러분들은 지금 무슨 상? 나는 중생이다 하는 상에 사로잡혀 있어요. 그래서 거지보고 아무리 부처라고, 이 공주가 와서 자기하고 평등하다고 얘기해도 들어요? 안 들어요? 안 듣지. 자기는 거지다 하는 상에 사로잡혀. 그래서 부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보고 너희들이 다 그대로 부처다 해도 귀에 안 들어와. 거지로서 이웃집 다니면서 밥 한 끼 얻어먹는 거 그게 중요하지. 자기 본래 재산 찾으려는 생각은 없다. 이 말이야.
그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고 찾다가 굶어 죽으면 어떻게 하나? 지금 그 걱정만 하고 있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종노릇을 오래 하다 보면, 거지 노릇을 오래 하다 보면 자기가 본래 거지인 줄 알고. 거지로서의 일은 그저 밥 한 끼 얻어먹는 게 인생의 목표가 된다. 오늘 우리가 맨 여기서 지지고 볶고 의식주에 사로잡혀 사는 거는, 거지가 밥 한 끼 얻어먹는 거로 행복으로 삼고 사는 것과 같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며칠 밥 얻어먹으러 못 다니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서 그 자기 보물을 찾아내야 된다.
자~ 상에 관계되는 얘기니까. 한 가지를 더 하게 되면요. 또 이런 얘기가 있어요. 옛날에 큰스님이 도를 이루시고 이렇게 많은 분들에게 법문을 하니, 모든 사람이 다 존경을 하고 따랐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구름 떼처럼 와서 묻고, 또 나중엔 큰스님이다. 이래서 형상에 집착해서 오는 사람도 많이 있죠. 이러니까 이건 도저히 번다 해서 못살겠어. 그래서 없어져 버렸어. 그래서 저기 낙동강 가에 가서 나룻배 젓는 사람이 있죠? 뱃사공이 돼서 나룻배를 젓고 있었어. 이쪽에서 절로 가자 하면 사람 건너 주고, 뱃삯이나 받아서 편안하게 먹고 살고, 손님 없으면 하루 종일 낮잠이나 자고. 갈대밭에서.
그런데 스승이 없어졌으니까 제자들이 스승을 찾아온 천하를 찾았는데 찾을 수가 없어. 왜냐하면, 어느 절에 있으면 어느 절이든지 찾아가서 찾겠는데. 머리를 기르고 변복을 하고는 뱃사공을 하고 있으니 찾을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단 말이야. 그렇게 몇 년을 찾다가 그 제자 중의 한 명이 낙동강을 건너다가. 그 뱃사공이 어디서 본 사람 같단 말이야. 그 스승이란 생각은 들 리가 없죠. 왜? 스승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상상을 안 하니까. 어디서 본 듯하다. 참 처음 보는 사람인데, 내 여기 처음 왔는데 웬일인가. 이렇게 해서 출발해서 끝날 때까지 본 듯하다는 그 의심만 하고 갔단 말이오. 배에서 딱 내리면서 그때야 생각이 탁 든 거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딱 엎드려서 스승님 이게 웬일입니까? 그렇게 절을 하고 웬일이냐고 하면서 사람들이 기다리니까. 절로 돌아갑시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턱 보니까 이미 벌써 스승이 머리가 떡 길러 있단 말이오. 그래서 아이 스님은 머리는 왜 길렀습니까? 그러니까 스승님이 하는 말이 “도가 머리털에 있느냐?” 이놈아. 이러는 거요. 이 뭐요? 상에 집착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 스승은 이런 모습이다 하는 생각을 갖고 스승을 찾으니 스승이 찾아질 이가 없죠. 그리고 또 스승을 찾아도 그렇게 상을 갖고 논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 어떤 게 고승이냐? 어떤 게 도사냐? 이런 게 다 상을 가지고 있단 말이오.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뭘 먹는 걸 기준으로 삼든지. 자는 걸 기준으로 삼든지. 옷을 기준으로 삼든지. 이래서 무슨 기준을 떡 삼아서, 그 안에 들어오면 괜찮고. 그 밖에 나가면 이건 안됐다. 이거야. 그래 상을 갖고 있다 이 말이오. 이게 다 상이에요. 우리가 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이런 글자 속에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남편이 하는 말 가만히 들어보면 스님 하는 말 하고 똑같은 말 할 때가 있어요? 없어요? 있지. 말만 가만히 듣고 자기에 견주어서 보면 거기 부처님 같은 말씀을 많이 하시는데도, 남편 하는 말은 무슨 말을 해도 돼도 안 했다 이렇게 생각하고. 스님 하는 말은 어떤 말을 해도 다 맞는 거 같고. 이래도 안 된다. 이 말이오.
상을 버려야 우리가 공부가 진척된다.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서 스님 법문도 귀에 안 들어오는 사람도 상이고, 자기 생각 버렸다 하면서도 또 스님이라는 또 법문이라는 상을 하나 지어서 그것만 옳고, 딴 건 다 틀렸다. 이렇게 상을 지어도 안 된다 이거야. 그 여러분들 중에는 불법을 모르고 늘 무당집에나 다니고, 예를 든다면, 복이나 빌러 다니고 이렇게 헤매다가 말이오. 다 이렇게 스님 법문 듣고 이게 불법이구나 하고 여러분들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단 말이오. 그런데 이렇게 턱! 깨달았는데 깨달았다 하는 상에 빠져. 이게 정법이구나 하고 또 상에 딱 빠지면 어떠냐?
그러면 우리 시어머니 그 무당 같은 절에 다니는데 그건 불법이 아니다. 내 친구 교회 다니는데 그건 어리석은 자다. 이렇게 상을 지어서 이번에는 또 정법이라는 이름으로 또 시어머니하고 다투게 되고, 친구하고 또 다투게 된다. 이 말이야. 아시겠습니까? 그럼 이게 상을 여읜 게 아니다. 상을 여읜 사람이라면 전에는 그런 미신이니 샤머니즘이니 해서 그걸 이해를 못 해 왜 저런 쓸데없는 짓을 하나 했는데. 상을 딱 여읜 사람은 그게 옳다 그르다를 넘어서서 그 사람이 그렇게 하는 심정을 이해하게 되고. 그것이 때론 문화적일 때는 좋다 나쁘다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런 데서 우리가 이해의 폭을 넓혀야 된다 이거야.
아직도 싸워서 이기고 지는 걸로 보면 안 된다. 이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자기 생각이 옳다고 고집해서 싸우다가 힘에 밀리고. 그러니까 시어머니한테는 나이로 밀리고, 남편한테는 여자라고 밀리고, 이래서 힘을 발휘를 못하고 불만을 갖고 있다 절에 와서 스님 법문을 딱 들어보니 자기 생각하고 부처님 생각하고 똑같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제는 남편한테 뭐로? 내 생각이라고 안 그러고 부처님 생각이라고. 이걸 간판을 갖고 또 다투게 된단 말이오. 이런 경우가 많아요. 사실은. 뭔가를 끌어 온단 말이오. 그냥 있는 그대로 아~ 이거는 현실 속에서 이러이러한 것은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토론을 안 하고. 꼭 이.. 이길라고.
그런데 자기는 힘이 없으니까. 옛날 얘기, 법조문을 대던지, 윤리 도덕을 끌어들이든지, 스님 법문을 끌어들이든지, 부처님 경전을 갖고 오던지. 이런 걸 근거로 삼아서 자기가 옳다는 주장을 하려고 한단 말이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일찍이 말했잖아요? 진리라는 것은 과거로부터 전승되어 내려오는 윤리나 도덕이나 관습이나 습관이나 경전이나 문헌으로 검증할 수가 없다. 그런 걸 다 내려놓고 봐야 됩니다. 자~ 상이라는 것은 이렇게 우리가 상을 여읜다 하면서 또 다른 사람이 뭔가 고집하면 뭔가 또 주장하게 되면 야~ 너 상에 집착했다. 상 내려놔라 했는데 왜 상에 집착 하노? 이래서 또 상을 없애야 된다는 상에 또 빠져서. 이렇게 해서 다투는 사람이 또 있다.
그러니까 상을 여의었다 하는 것은 어떤 상도 여의어야 된다 이 말이오. 어떤 상도 여의어야 된다. 어떤 상도 여읜다. 이 말은 모든 것들을 다 있는 그대로 본다. 다른 종교도 있는 그대로 봐요. 여러분은 늘 옳다 그르다 시비를 삼기 때문에 이게 오르느냐 저게 오르느냐? 이런 관점에 보기 때문에 끌려가거나, 안 그러면 경계를 지어서 폐쇄되거나 이렇단 말이오. 화단에 꽃들이 자기 꽃 예쁘게 피고도 옆에 꽃 핀 것도 봐 줄 수가 있죠. 그런데 우리는 늘 이기고 지는 관점에서만 본단 말이오. 그러니까 뭘 알아야 되고. 안 먹어야 되고, 나쁘고 자꾸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요. 그렇게 되므로 해서 내가 괴롭고 남도 괴로운 거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공부를 오늘부터 했으면 아시겠어요? 오늘부터 상을 딱 내려놓으란 말이에요. 상을 짓지 않으면 이 상이라는 것은 자기가 일으킨 한 생각으로 지은 거고, 거기에 집착을 하는 거란 말이오. 이걸 딱 내려놓게 되면 이젠 그냥 볼 수가 있어요. 남편이 화를 내면 왜 여보 화를 내느냐? 부처님 경전에 말하기를 화를 내지 말라고 그랬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단 말이오. 화를 내면 아~ 저 사람이 지금 뭔가 자기 뜻대로 안 돼서 저러나 라든지. 내가 뭘 잘못해서 저러나? 라든지. 내가 뭘 잘못했다 이 말은 나로 인해서 오해가 생겼느냐 이런 말이지. 내가 뭐 죄를 지었다. 이런 뜻이 아니에요.
이렇게 해서 상대를 이해하라 이 말이야. 상대를 이해면 화내는 사람을 보고도, 욕심내는 사람을 보고도 상대를 이해하면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된다. 그러니까 기독교인이 와서 막 열심히 전교를 하면 여러분들도 어디 가서 북한 돕기를 하든지, 뭘 하든지, 열심히 전교하거나 팸플릿을 나눠주는데 안 받아주고 쉭~ 가버리는 사람 좀 민망할 때가 많죠? 그러니까 그런 사람 생각해서 어때요? 아이고 저것도 밥 먹고 뭘 좋은 일 한번 해 보느라 열심히 왔는데 시간이 없으면 어떻게 한다? 사양하면 되고. 시간이 없는데도 할 수 없이 붙어 있는 것도 괴로움이죠. 그렇게 할 거까지는 없죠.
시간이 없으면 뭐라 한다? 없다고 얘기를 하고. 아이고 고맙습니다만 시간이 제가 없으니까 이렇게 얘기하면 되고. 시간이 또 있고 할 일이 없으면 뭐한다? 들어주면 되잖아 그죠? 들어주면 그 사람한테도 좋고. 나도 또 혹시나 하나 새로운 걸 배울 수 있을지. 얘기하다 보면 옳으니 그르니 논쟁할 필요가 없고. 그냥 가만히 들어만 줘도 그 사람은 또 그 사람대로 한 사람 전교했나 보다 해서 기뻐한단 말이오. 남 기쁜 거를 굳이 배 아파할 필요가 없단 말이오. 그럴 때 누가 더 크게 사람이 더 오래가느냐? 그렇게 여유가 있는 사람이 오래가게 된다. 그래 말을 많이 하다 보면 허점이 생겨요? 안 생겨요? 생기지.
꼭 집어서 애 먹이려고 얘기하지 말고. 그냥 내가 봐서 허점이 좀 보이면 질문 하는 척 하고 얘기도 해 주고. 또 그게 내가 보기에 더 낫다 싶으면 다녀도 되지. 교회 다니면 안 될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없잖아. 좋아 보이면 다녀 보면 되죠. 일체가 유심소조라. 다 마음이 짓는 바인데. 그것도 다 마음에서 생긴 거요. 안 생긴 거요? 다 생긴 거요. 그래서 우리가 같이 어떻게 하면 이 깨달음의 길로 나갈 거냐? 불교의 형식이 필요하면 형식을 지키고, 문화가 필요하면 문화를 지키고, 문화가 장애가 되면 문화도 버리고, 형식이 장애가 되면 형식도 버리고 우리는 오직 그 밝은 깨달음의 지혜로 나가야 된단 말이오.
내 말씀드렸지마는 일체중생 안에 기독교인도 포함이 돼요? 안 돼요? 포함되지. 굿하는 무당도 포함이 돼요? 안 돼요? 된단 말이오. 살인하고 감옥에 있는 사람도 포함이 돼요? 안 돼요? 포함이 된단 말이오. 북한 사람도 포함이 돼요 안 돼요? 되요. 일본 사람도 포함이 돼요? 안 돼요? 된단 말이오. 그러니까 일단 사고를 크게 가지셔야 되요. 그런 입장에서 우리가 또 인연을 따라서 이루어진다 했으니까 그 인연 그 인연에서는 순간순간 옳고 그른 게 생겨요? 안 생겨요? 생기지. 그러나 그것이 영원하게 옳은 것도 아니고, 그 상황에 따라 생기는 거란 말이오. 밥은 몇 그릇 먹어야 되느냐? 정할 수가 없단 말이야.
그러나 그 인연에서는 한 그릇 지 양껏 먹어야 될 때도 있고, 그런 양이 있지마는 형편이 반 그릇밖에 못 먹을 때도 있고. 그 반 그릇마저도 남 줘야 될 때도 있고. 살다 보면 그렇단 말이오. 그 인연 인연을 따라서 우리가 일어나는 거란 말이오. 일본 사람을 비판해야 될 때도 있고. 또 그 사람 의견을 수용해 줘야 될 때도 있고. 함께 가야 할 일도 있고 이래. 우리가 이 과거에 대해서 너무 집착을 하면 남편이 옛날에 네가 나한테 했는데 어했는데 이래 너무 생각하면 현재와 미래를 다치는 것처럼. 그리고 또 과거에 뭐를 너무 잊어버리고 아무것도 없이 하면 또 미래에 대해서 여러 가지 실수를 행하게 되죠.
그러니까 한일관계도 옛날에 과거의 역사는 역사대로 알되. 상처는 치유해야 된다. 상처를 가지고 대응하면 친구가 될 수가 없어. 기독교인들이 하는 여러 가지 태도를 우리가 알아야 되요? 몰라야 되요? 알아야 되. 저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하는지 잘 알아야 되. 그러나 그 사람들도 과거에 그랬다 하더라도 앞으로 변할 수가 있어요? 없어요? 있어. 그러니까 늘 열린 마음으로 지켜보고 함께 가야 되. 그 사람들이 자기 한계를 못 벗어나는 걸 보고 불쌍한 마음을 내서 도와줘야지. 그걸 갖고 서로 시비를 하게 되면 어떠냐? 결국은 남편이 이러니까 나도 안 싸울 수가 없다.
이렇게 가면 결국은 나중에 보면 남편을 닮아 가게 되고. 우리도 자꾸 시비하는 기독교인들 자꾸 이렇게 하나하나 대응하다 보면 우리도 모르게 나중에 닮아가서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을 하게 된다 이거야. 북한이 어떻게 하든 우리가 좀 더 넓은 입장에서 대응하면 되는데. 그 하나하나 다 하다 보면 우리도 모르게 같은 방식으로 닮아 가게 된다. 이 말이오. 그걸 우리가 잘 살펴야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수행하는 이 개인의 삶이 수행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우리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 그리고 우리 민족의 문제, 인류의 문제, 닥친 문제. 다 그대로 적용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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