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도야 우지마라/김해가 낳은 최고의 명가수 김영춘(1918~2006)
- 구슬픈 멜로디에 빼앗긴 조국도 기구한 삶의 민초들도 함께 울었다 -
'이야기에는 거짓이 있어도, 노래에는 거짓이 없다'는 말이 있다. 노랫말은, 또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음색은 듣는 이의 가슴에 직접적으로 와닿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1939년에 처음 나온 '홍도야 우지마라'가 바로 그런 노래이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가 김해 사람 김영춘이다. 김영춘의 노래 '홍도야 우지마라'와 연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 얽힌 이야기를 먼저 소개하고, 이어 김해에서 살고 있는 유족들을 통해 김영춘의 삶과 고인의 김해에 대한 사랑을 다룬다.
▲ 영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부주제곡이었던 '홍도야 우지마라'는 주제곡을 훨씬 뛰어넘어 대히트를 쳤고, 가수 김영춘은 당대 최고의 명가수로 떠올랐다.
김영춘(金英椿·본명 김종재·金宗才·1918~2006)은 1918년 6월 29일 김해 어방동 471에서 부친 김치관 씨와 모친 박소분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해보통학교(현 동광초등학교)와 김해농고를 졸업했다. 김영춘은 청소년기까지 김해에서 살았으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타향에서 늘 고향 김해를 그리워했다.
김영춘은 한국 대중가요사에 한 획을 그은 노래 '홍도야 우지마라'를 부른 가수다. 일제강점기였던 1929년 전기식 축음기가 조선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1926년 가수 윤심덕의 '사의 찬미'가 대히트를 치면서 사회적으로 레코드와 유행가에 대한 관심이 촉발됐던 터라, 사람들은 다투어 축음기를 들여놓고 레코드를 듣기 시작했다. 대형 음반회사들이 등장했고, 바야흐로 대중가요시대가 열렸다. 당시 가장 유명했던 레코드 회사는 '빅타'와 '콜롬비아'. 콜롬비아 레코드는 '조선 팔도에 숨은 천재'를 찾는다며 전국 10곳에서 예선을 치르는 콩쿠르대회를 개최했다.
<번지없는 주막-한국가요사의 잃어버린 번지를 찾아서>라는 책을 낸 이동순 시인(영남대 국문과 교수)의 말이다.
"김영춘은 스무 살이었던 1938년에 콜럼비아 레코드사가 주최한 전국 가요콩쿠르에 출전해 입상하면서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 김영춘의 첫 데뷔곡은 그해 11월에 발표된 '항구의 처녀설'(처녀림 작사, 김송규 작곡)이다. 그는 30여 곡의 노래를 불렀지만, 1939년에 발표된 '홍도야 우지마라' 한 곡의 인기가 워낙 하늘을 찌를 듯했기 때문에, 다른 노래들은 상대적으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이 노래 덕에 김영춘은 콜럼비아 레코드사의 대표가수 자리에 올랐다."
1936년 봄, 서울의 '동양극장(서대문구 충정로에 있던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 전문극장. 1935년 설립. 객석 600여 석)'에서 극단 청춘좌가 연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공연했다. 임선규(1910년 출생 추정, 1970년 사망 추정. 연극인·극작가)가 1936년에 쓴 4막5장의 희곡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기생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화류비련(花柳悲戀·기생의 슬픈 사랑을 다루는 작품류)의 멜로 드라마였고, 동양극장의 주된 레퍼터리였다.
줄거리는 이러하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오빠의 공부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홍도는 스스로 기생이 된다, 오빠는 홍도의 도움을 받아 순사가 된다, 홍도는 기방 일을 그만두고 오빠의 친구와 결혼을 한다, 시어머니는 기생 출신 며느리를 못마땅해 하고 마침내 쫓아낸다, 홍도를 오해한 남편마저 부잣집 딸과 재혼을 하고 홍도는 절망한다,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홍도는 남편의 새 여인을 살해한다, 그제서야 홍도의 결백이 밝혀지고 남편도 오해를 풀지만 홍도는 순사인 오빠에 의해 손목에 수갑을 찬 채 경찰서로 끌려간다….
당시 조선인 관객들은 이 연극을 통해 일제에 핍박받는 현실세계를 반추했고, 홍도의 삶에 자신의 삶을 대입시켰다.
이 연극은 조선 연극 사상 최장 공연 기록을 세웠다. 기생이 주인공이다 보니 기생들 사이에서 특히 인기가 높았다. 권번 기생 500여 명이 일시에 연극 구경에 나선 날에는 서울의 요정이 텅텅 비었다는 일화도 전해져 온다. 주인공 홍도 역을 맡았던 여배우 차홍녀(1919∼1940)의 인기를 말하는 건 새삼스럽다.
이 연극은 1939년에 영화로도 제작됐다. 이명우 감독(1901년∼6·25때 납북 이후 생사 미확인. 촬영기사·영화감독. 1935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발성영화인 '춘향전'의 감독·촬영·편집)이 메가폰을 잡고, 차홍녀가 영화에서도 주연을 맡았다. 사람들은 다시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홍도야 우지마라'는 영화의 부 주제곡이었는데, 영화가 히트를 치면서 당연히 주가가 높아졌다. 1939년 4월에 음반이 발매됐는데, 수만 장이 넘게 팔려나갔다. 동양극장 전속 극작가였던 이서구(1899∼1982. 극작가 겸 연출가)가 노랫말을 쓰고, 김준영(1907~1961. 대중음악 작곡가)이 작곡했다. 영화가 연일 대만원 사례를 이루면서 '홍도야 우지마라'는 대히트곡이 됐고, 김영춘은 당대 최고의 명가수로 올라섰다.
▲ 1939년에 발표된 '홍도야 우지마라'는 지금도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지만, 정작 가수 김영춘의 이름은 잊혀져가고 있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극장 안은 손수건을 미리 준비해 온 여성관객들로 미어터졌다. 오빠가 지쳐 쓰러진 홍도를 위로하는 장면에서 김영춘의 '홍도야 우지마라'가 흘러나왔는데, 그러면 객석은 눈물바다가 됐다. 이 영화를 본 한 기생이 처지를 비관해 한강에 투신한 일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이 노래는 더욱 유명해졌다.
인터넷에서 '홍도야 우지마라'를 부른 가수를 검색해 보면, 김영춘 외에도 박재홍·남일해·박일남 등 많은 후배가수들의 이름이 뜬다. 영화 역시 1965년에 전택이(1912∼1998) 감독이 리메이크했다. 이 영화에서는 당대 최고의 인기배우였던 신영균, 김지미가 주연을 맡았다.
'홍도야 우지마라'는 여성들 뿐만 아니라 남성들의 심금도 함께 울렸다. 고단했던 시절에 이 땅에서 부모와 형제를 위해 희생의 삶을 살아야 했던 누이들이 어디 한 둘이었는가. 그러니 이 땅의 많은 남성들도 '홍도'라는 누이 앞에서 눈물을 훔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현재 경기도 고양에서 살고 있는 김영춘의 아들 김무술(55) 씨는 "노래는 너무 유명했고 지금도 많은 사람이 부르고 있지만, 정작 가수의 이름은 잊혀져가고 있다. 아버지가 김해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도 많다"면서 "아버지는 고향 김해에 대한 애착이 많았다. 늘 고향 이야기를 하셨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김해를 수차례 다녀왔다. 고모님과 사촌 형들이 김해에 살고 있다"고 전했다.
■ '홍도야 우지마라' 발표 당시 원본 가사(발표 당시의 표기법으로 소개한다.)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직히랴는
순정의 등불 홍도야 우지 마라 오빠가 있다
안해의 나갈 길을 너는 직헤라
구름에 싸힌 달을 너는 보왔지 세상은 구름이오
홍도는 달빛 하늘이 믿으시는 네 사랑에는
구름을 걷어 주는 바람이 분다
홍도야 우지 마라 굿세게 살자 진흙에 핀 꽃에도
향기는 높다 네 마음 네 행실만 놉게 가즈면
즐겁게 우슬 날이 찾어오리라
"노래만큼이나 너그럽고 따듯했던 오빠 어려운 이들에겐 모든 걸 내줬지요"
"'홍도야 우지마라' 노래를 들으면 오빠 생각이 나고 눈물이 나서…." 가수 김영춘의 여동생 김복득(88·부원동) 씨는 말끝을 잊지 못했다. 아직도 먼저 간 오빠를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다. 김 씨는 어방동 본가에서 태어나 부원동에서 한 평생을 살았고, 지금도 부원동에서 살고 있다. "부모님이 일곱 남매를 낳았는데 위로는 어려서 세상을 떠났고, 오빠와 언니 그리고 나, 삼남매가 자랐습니다. 제가 막내이지요." 김영춘은 막내 여동생을 특히 아꼈다고 한다. "'홍도야 우지마라'라는 노래 한 곡으로 이 땅의 수많은 누이들을 위로했던 김영춘의 여동생 이름은 홍도가 아니라 복득이었군요"라고 하자, 김 씨는 그제서야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김영춘의 여동생 김복득 씨는 연극 '사랑에 울고 돈에 속고'도, 영화도 본 적이 없다. 그 연극과 영화를 보러 가기에는, 당시의 김해에서 경성은 너무 멀었다. 여성의 처지에 그 먼 길을 나서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노래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복득 씨는 김영춘이 조용한 성격이었다고 회고했다.
"오빠가 어려서부터 노래는 잘 했대요. 그랬으니 가수도 되었겠지요. 하지만 나서서 까불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말 수도 적고 점잖은 분이었지요. 성격도 그럴 수 없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마음이 너무 좋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걸 다른 사람이 안 가지고 있으면 바로 내주었습니다. 입던 옷도 벗어주고 들어올 정도였습니다. 돈도 잘 벌어서 어려운 친구들 일에 발 벗고 나서서 좋은 일을 많이 했지요." 복득 씨의 마음 속에는, 점잖은 성격에 너그럽고 따듯했던 오빠 김영춘이 아직도 가득했다.
청년 시절의 김영춘은 부산과 일본을 오가며 일을 했고, 그러면서 가수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래서 복득 씨의 기억에서 오빠는 늘 바빴던 사람으로 남아 있다. 가수로 데뷔한 후에는 경성을 중심으로 활동했기에, 멀리서 소식만 들을 뿐이었다. 극장이 미어터지고, 레코드판이 불티난 듯 팔리는 그 화려한 인기 속의 오빠를 곁에서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김해에서도 유명세는 느낄 수 있었다.
서예가 허한주(81)씨는 "당시 김해 인구가 12만여 명이었습니다. '홍도야 우지마라'를 모르는 사람도, 못 부르는 사람도, 김영춘을 모르는 사람도 없었지요. 지금 김해에서는 김영춘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여전히 제 18번은 '홍도야 우지마라'입니다"라고 당시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복득 씨가 길을 나서면 김해사람들은 '저기, 가수 김영춘 여동생이 온다'면서 인기가수의 여동생을 둘러싸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는 오빠가 너무 자랑스러워 가슴이 벅찼지요." 지금도 나이든 김해 어르신들 중에는 "가수 김영춘 동생이 아니냐"며 알아보는 이가 더러 있다. "그럴 때면 오빠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직 있구나 하는 마음에 기분이 좋지요." 복득 씨의 마음 속에서 오빠 김영춘은 여전히 최고의 자랑이었다.
김영춘은 첫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을 두지 못했는데, 후사를 이을 걱정을 한 부모님의 뜻에 따라 박옥순 씨와 재혼했다. 박옥순 씨는 연극배우 출신으로, '사랑에 울고 돈에 속고'에서 주인공 홍도 역을 맡은 차홍녀 씨의 이종사촌 언니이다.
현재 경기도 고양시에 살고 있는 김영춘의 아들 김무술 씨는 "아버지가 고향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고 회고했다. "저도 5살 무렵까지는 김해에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김해에 대한 애착이 많았습니다. 소년기를 보냈던 고향에 대한 향수를 많이 얘기하셨지요."
무술 씨는 언제나 젊은 청년 같았던 아버지 김영춘을 기억했다. "아버지는 젊게 사셨습니다. 신문도 늘 보시고 책도 읽으시고, 세상 일에도 밝으셨어요. 후배들이나 젊은 사람들하고 대화를 나눌 때도 마치 청년처럼 깨어있는 의식으로 소통하셨습니다. 노인이 아니셨습니다."
연예인 본인은 인기에 싸여 있지만 그 가족은 어느 정도 힘이 들게 마련이라면서도 무술 씨는 "아버지는 늘 멋진 양복을 입고 계셨지요. 저보다 옷이 많았던 것 같은데, 모습도 생각도 젊고 멋진 아버지가 보기 좋았습니다"라며 웃었다.
김영춘은 데뷔곡 '항구의 처녀설'과 대히트곡 '홍도야 우지마라'를 비롯하여 '국경특급' '당신 속을 내 몰랏소' '북국천리' '동트는 대지' '나그네 황혼' '청춘마차' '장장추야' '희미한 달빛' '향수천리' '타향에 운다' '버들닢 신세' '인정사정' '남국의 달밤' '비연의 청춘항' '유랑써커쓰' '항구의 항등' '포구의 여자' '잘 있거라 인풍루' '청노새 극장' '타향사리 목선' '사막의 환호' '바다의 풍운아' '사륜마차' '항구야 잘 있거라' '동아의 여명' '아류산 천리' '목란의 자랑' '의주에 님을 두고' '성황당 고개' '항구의 전야' 등 30여 곡을 불렀다.
김영춘은 6·25 전쟁 당시에는 국군 위문 공연을 다닌 한 예술지원대의 단장을 맡아 활동했다. 김영춘은 후배 연예인들을 데리고 전선을 다니며 위문공연을 한 공적을 인정받아 참전용사로 등록되어 있다. 80세라는 노령에도 후배들과 함께 지방공연도 다녔다.
김영춘은 명절이면 선산이 있는 김해를 찾아왔고, 노년에는 일 년에 수차례씩 김해를 찾아왔다. 그 때마다 만사를 제쳐놓고 김영춘을 모신 사람이 장영수(64) 씨다. 장 씨는 김영춘의 조카이다. "외삼촌은 한 눈에 보기에도 잘 생긴 분이었습니다. 할 말만 하시고, 신중한 품성이셨습니다. 담배는 즐겨 피우시는 편이었지만, 술은 입에도 안 대셨어요. 후에 담배도 건강 때문에 딱 끊으셨죠."
장 씨는 김영춘이 김해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사랑했는지를, 직접 모시고 다니면서 지켜보았다. "외삼촌이 살던 부원동 일대가 너무 변해버린 것을 보면서, 옛 모습을 그리워 하셨어요. 김해에 계신 친구 분들도 만나시고, 고향 김해의 곳곳을 눈여겨 보시곤 했습니다."
▲ 데뷔 60주년 기념공연 후 김해시로부터 받은 공로패.
김영춘은 가수 데뷔 60주년 기념공연도 김해시문화체육관(봉황동 소재)에서 열었다. 1938년 11월 '항구의 처녀설'(처녀림 작사, 김송규 작곡)로 데뷔한 지 60년만인 1998년이었다. 김해에서 열린 이 공연에는 동료연예인인 원로 가수들이 함께 참여했다. 공연준비를 옆에서 도왔던 조카 장 씨는 "그때 외삼촌 형편이 좋지 않아 공연에 참가한 가수들이 분장실에서 김밥을 먹고 무대에 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도 외삼촌은 고향에서 60주년 기념 공연을 한다는 사실을 기뻐하셨지요. 공연을 마친 뒤 모두들 서울로 올라갔는데, 외삼촌은 우리 집에서 하루를 더 머물렀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공연을 기념해 김해시는 김영춘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그 내용은 이렇다. '귀하께서는 우리 고장 출신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인기가수로서 수많은 국민애창곡을 불러 우리 고장을 빛내었으며 '홍도야 울지마라' 60주년 기념공연을 우리 고장에서 개최하여 시민 정서 함양에 이바지 한 바 크므로 이에 심심한 감사의 뜻을 이 패에 새겨 드립니다. 1998년 11월 20일 김해시장 송은복.'
김해시의 공로패 외에도, 후배가수 가수분과위원회 감사패(1979), 국방위원장 공로패(1995),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 공로패(1984), ㈔한국연예협회 공로패(1987)를 받았다. 제3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 연예발전공로상(1996), 제35회 가수의 날 KBS 공로대상(2001)도 수상했다. 2004년에는 제4회 연예예술인 스승에 추대됐다.
한 시대를 풍미했고, 한국대중가요사에 큰 획을 그은 김영춘의 '홍도야 우지마라'는 73년이 지나도록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노래이다. 긴 세월이 흐르면서 이 노래는 한국인의 기억 속에서 슬픈 이야기의 원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
▲ 김영춘이 마지막으로 만들어 친구와 친지들, 가요계 관련자들에게 선물했던 한정판 대표곡 테이프의 앞면(위)과 뒷면. 조카 장영수 씨가 <김해뉴스>에 선물했다.
이번 취재 중에 장 씨는 김영춘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테이프를 선물했다. 대표곡 16곡을 모아 한정판으로 만든 이 테이프는 친구와 친지들, 가요계 관련자들에게 전달됐는데, 그 중 하나를 <김해뉴스>에 증정했다. 포장지도 뜯지 않은 귀한 테이프, 김해의 진짜 18번 '홍도야 우지마라'를 고맙게 받았다.
※ 2006년 2월 22일 홍도야 울지 마라 역사 속으로
요즘은 그런 곳이 거의 없지만 낡은 나무 테이블 위에서 젓가락 두드리며 뽕짝을 합창하던 추억은 언제 떠올려도 슬몃 미소를 머금게 만든다. 두만강만 강이냐 소양강도 강이다로 시작해서 전국의 강이란 강은 죄다 섭렵하고 천동산 박달재부터 연락선 돌아드는 오륙도까지 헤집고 나면 목들이 잔뜩 쉬어 있곤 했다. 그때 부르던 노래 중의 하나 “홍도야 울지 마라.” 홍도오오야아아 울지 마아라아아아아 오빠아아아가 이이이이이이있다.... 누군가 이 익숙한 가락을 구성지게 부르면 백코러스랍시고 오빠가 있다~~ 오빠가 있다~~ 누군가 깝쳐서 깔깔대게 했던 노래. 그 노래의 가수 김영춘씨가 2006년 2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여든 여덟살. 장수도 하셨고 가수 생활도 오래 했지만 그는 천상 “홍도야 울지 마라”의 가수였다. 이로써 “홍도야 울지 마라”와 연이 얽혔던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행적을 더듬어 보자.
우선 배구자라는 여자. 그는 구한말 유명했던 팜므 파탈 배정자의 조카였다. 무용가로서 입신하여 꽤 잘 나갔는데 최승희라는 불세출의 인물이 등장하자 그만 기가 꺾이고 만다. 이후 그녀는 흥행의 귀재였던 홍순언과 함께 악극단을 조직해서 성공을 거두고 동양극장이라는 극장을 설립하게 된다. 회전무대까지 갖춰진 본격 연극용 극장이었다. 1936년 여름 ‘단종애사’ 같은 작품을 띄웠다가 이왕직 즉 구 조선 왕실측의 요청으로 일찍 간판을 내린 후 무슨 연극을 올려 볼까 고민하던 연출자 박진 앞에 홍순언이 대본 하나를 내민다.
“이거 한 번 고려해 보라우.” 그는 평안도 의주 출신이었다.
연출가 박진이 보아하니 얼마 전 입단한 배우 겸 작가 임선규가 자신에게 보였던 대본이었다. 신파란 신파는 다 들어가 있는 유치찬란에다가 제목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요즘 말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내용이었던지라 고개를 크게 내저었지만 홍순언도 뭔가 생각하는 것이 있는 듯 했다. “기럼 이케 극장을 공으로 돌릴 거가. 함 해 보자마.”예나 지금이나 사장이 까라면 까야 하는 게 고용인의 도리. 하지만 제목만큼은 도무지 참아줄 수 없었다. 그래서 제목은 이렇게 바뀐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내용은 그야말로 신파였다.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이 된 홍도. 오빠의 친구이자 부잣집 아들 광호는 집에서 정해 준 약혼자가 있었음에도 홍도를 사랑한다. 둘의 사랑을 인정한 시아버지 덕분에 홍도는 광호와 결혼하게 되지만 시어머니 자리와 약혼자를 빼앗긴 옛 약혼녀 혜숙은 홍도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다. 남편 광호가 유학을 간 틈을 타서 시어머니와 시누이, 혜숙은 온갖 방법으로 둘을 이간질하고 부정한 아내로 몰아부친다. 마침내 돌아온 남편도 홍도를 외면하자 홍도는 분노를 못이겨 혜숙을 비녀로 찌른다. 아 이때 홍도의 뒷바라지로 순사가 되어 있던 오빠가 그 앞에 나타나고 혜숙은 손을 내밀며 울부짖는다. “오빠 어서 나를 잡아가시우”
여주인공은 스물 갓 넘은 차홍녀가 맡았고 오빠 역은 황철이 맡았다. 연극은 대성황을 이뤘다. 뭣보다 기생들이 떼로 몰려와서 보고 또 보고 울고 또 울었다. 오빠와 남동생 또는 많은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해 웃음을 팔고 술을 따라야 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던 그녀들에게 홍도의 슬픔은 너무나도 쉽게 공유됐고 기생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건달들도 기생들 따라 왔다가 꺼이꺼이 울고 돌아갔다. 사람들은 엄청나게 몰려 들었다. “현금만 받음” 팻말을 붙여 놨어도 보리 한 주머니 들고 와서 보여 달라고 떼를 쓰는 이도 있었고 급기야 서대문경찰서 형사들이 출동해서 몽둥이를 휘두르며 질서를 잡기도 했다.
이 흥행을 계기로 영화도 만들어졌는데 역시 차홍녀가 주연을 맡았지만 영화 흥행은 신통치 않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불세출의 명곡 하나가 주제가로 스크린을 흐른다. 바로 우리가 아는 “홍도야 울지 마라”였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의 이서구가 작사하고 가수 김영춘이 부른 그 노래. 이 주제가가 또 빅 히트를 하면서 다시 연극 흥행에 불이 붙었다. 무대에서 오빠가 “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를 부르면 온 관객이 다 따라 불렀다. 그러면서 누구나 홍도가 되고 그 오빠가 되어 펑펑 울다가 눈두덩이 부푼 채로 극장을 나갔다. 가수 김영춘은 콜롬비아 레코드 회사의 으뜸 가수로 우뚝 섰다.
여배우 차홍녀도 스타가 됐다. 홍도 한 번 보고 가겠다는 사람들이 어디든 장사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배역처럼 불운했다. 북부 지역 순회 공연을 마쳤을 때 무대 뒤에서 쓰러질만큼 지쳐 있었던 그녀는 철원역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다가 엎드리고 있는 한 거지에게 적선을 한다. 유달리 마음씨가 고왔던 그녀는 그 짧은 접촉으로 천연두를 옮고 만다. 서울에 돌아왔을 때 이미 그녀는 중태에 빠져 있었다. 그녀를 키운 연출가 박진이 통곡하는 가운데 그녀는 스물 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많은 거지들이 훌쩍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고 전한다. 저 고운 배우가 우리 같은 사람 돕다가 저렇게 됐다고.
남자 배우 황철과 극작가 임선규는 해방 공간에서 이북을 택했다. 황철은 1948년 월북했고 전쟁 중에는 팔을 잃었다. 의수를 하고서 계속 연기 생활을 했고 북한 최초의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으며 이 홍도의 오빠가 죽었을 때 북한 정권은 사회장으로 그를 예우한다. 극작가 임선규의 경우는 좀 기구했다. 해방 후 친일행각 때문에 수세에 몰려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남로당 활동을 하면서 다시 활동을 하게 되는데 역시 테러와 체포의 위협에 시달리다가 아내와 함께 월북을 택한다. 아내의 이름이 인민여배우로 이름 높은 문예봉이었다. 하지만 수십년 간 만인의 여동생인 홍도를 만들어낸 이 신파극 작가는 살벌한 혁명과 생경한 구호를 그 예술적 기질에 담아내기에는 무리였던지 아내에 비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삶을 살다가 죽었다.
‘홍도야 우지 마라’에 얽힌 사람들 가운데 가장 최근까지 생존했었던 사람이 영화 주제가를 부른 가수 김영춘이었다. 이후에도 많은 노래를 불렀지만 ‘홍도야 우지 마라’를 능가하는 히트곡을 내지는 못했다. <홍도야 우지 마라> 노래비가 세워진 것은 그의 고향이 아니라 작사가의 고향인 경기도 시흥이었다. 그의 말년은 지극히 쓸쓸했다고 전한다. 하루 하루 지리할만큼 긴 하루를 깎아 나가면서 그는 “홍도야 울지 마라”를 불러 대스타로 두둥실 떠오르던 시절을 추억하고, 그때 조우했을 차홍녀의 앳된 얼굴, 폐병쟁이 임선규의 허연 얼굴, 귀공자 스타일의 황철 등등의 면면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2006년 2월 22일 김영춘을 마지막으로 홍도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