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불교 일반

각자의 자리를 알아야

seongsoo 2012. 1. 24. 14:16

□ 각자의 자리를 알아야

승원스님 2006-04-23

 

법회를 하러 오는 길에 꽃들이 피어있는 모습을 보며 ‘산산수수각완연(山山水水各宛然)’이란 글이 새삼 떠올랐다. 산과 산 물과 물 이 모든 존재들이 각각 모두 부처님과 같은 완전한 모습이더라는 뜻이다.

본인이 좋아하는 말 중에 ‘삼라만상개오사(森羅萬象皆吾師)-세상 모든 것이 다 스승이다’는 말이 있다. 배우려고 하는 마음만 있다면 어디든 배울 것이 있는데, 배우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배우지 못하는 것이다.

고산 지원법사 께서는 ‘만경삼열(萬境森列)에 각유소장(各有所長)이라. 오실득사이(吾悉得師而) 학지(學之)하노라.’라고 하셨다. 세상 모두가 제각각의 장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스승으로 삼아서 배운다는 뜻이다.

사실 봄이라는 계절은 참 어려운 계절이다. 새싹과 꽃잎들이 돋아나는 봄이 좋다고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우리의 마음을 산만하게 하고, 욕심나게 만들고, 혼란하게 만드는 계절이 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봄은 좋은 반면 자신을 지키기가 어려운 계절이다.

불가에서도 봄을 공부하기도 좋고 놀기도 좋은 계절이라고 한다. 이러한 봄철에 자기 자신을 추스리고 지킨다고 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다.

법회를 하면서 이런 말을 자주하였다. 불자라면 항상 내 자신이 어디에 있는가를 늘 점검하면서 살아야 한다. 수행은 자기를 보고 자기를 지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내 자신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어느 책을 읽다가 ‘각재기소(各在其所)’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어떤 존재이던 각각 있어야 할 자리가 있다는 뜻이다. 모든 물건, 모든 사람은 제 자리에 있어야 아름답고, 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아무 곳에나 놓여서는 안된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들의 마음자리이고 출가자인 본인의 마음자리라고 생각한다. 세간살이든 부엌 가구든 제 각각 놓일 자리가 있으므로 아무렇게나 놓아서는 안된다.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아무렇게나 놓아둔다면 그 가치를 잃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중용에서도 ‘군자시중(君子時中)’이란 글이 있다. 군자는 때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밥을 먹을 때 먹어야 하고, 울 때는 울어야 한다. 이것이 사람노릇을 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도(道)이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좋은 자리에 있고 싶어 하기에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억지로 앉으려 한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아야만 앉을 자리를 알게 되는 것이다. 결국 무슨 물건이며 어디에 쓰는 것인지를 모른다면 아무데도 놓일 수 없고 아무것에도 쓸 수 없다. 근본으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강북에 가면 탱자가 되고 강남에 가면 귤이 된다.’는 말이 있다. 그 물건 혹은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가치가 드러나기도 하고 가치가 없어지기도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내 자리가 아닌데도 앉아있는 경우도 있고, 남의 자리를 탐내는 경우도 있고, 전혀 분수에 맞지 않는 과욕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과연 누구이고 어떤 물건이고 우리가 놓일 자리가 어디이고 어떤 용도에 쓰여야 할 것인가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는 것이 불자의 자세일 것이다.

작은 그릇이 필요한 곳에 큰 그릇을 가져다 쓸 수 없으며, 큰 그릇이 필요한 곳에 작은 그릇을 쓸 수 없다. 사람그릇의 크기와 용도는 누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이 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마음을 크게 쓰면 세상에 크게 쓰일 것이고 작게 쓰면 작게 쓰일 것이다.

내가 주인이 되어서 그 크기를 정하고 쓰이는 곳도 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이고 진리이다. 역대 조사나 부처님께서 바로 이 말씀을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원래 완전한 모습이고 완전한 그릇인데 행동과 마음, 모양새를 그렇게 갖춤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쓰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각종 재일에 불자들이 앉아있어야 할 곳은 어디이겠는가? 바로 법당일 것이다. 스스로 원을 세우고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초발심자경문에 ‘일기진락(一期進樂)이여 부지낙시고인(不知樂是苦因)이로다 - 한때 즐거움을 추구했던 것이 괴로움의 원인이 됨을 알지 못한다.’ 이라는 글이 있다.

사람은 마음을 많이 쓴 쪽, 행동을 많이 한 쪽으로 결국 쏠리게 되어있다.

우리가 업이라는 말을 많이 하게 된다. 부처님은 아함경에서 “모든 중생은 업(業)의 상속자이다.”라고 말씀 하셨다. 여기서 업이란 과거의 행동이나 생각을 이야기 한다. 즉, 모든 사람들은 과거의 행동이나 생각의 제약속에서 살고 있다.

유식에 업식(業識)이라는 말이 있다. 업식이란 과거의 생각과 행동했던 것들이 인식이 되어져서 다시 현재에 인연을 만나서 나타나는 인식작용이다. 그래서 업식은 무명이나 인연의 힘에 의해서 기동이 되는데 마음 깊숙한 곳에 갈무리되어 있기 때문에 종자라고 한다. 이것을 이름하여 업식종자라고 하는 것이다.

씨가 맺히면 종자가 된다. 좋은 종자는 살려야 겠지만 나쁜 종자는 씨가 맺히지 않게 하여야 한다. 그것이 우리 마음에 김을 매는 작용인 수행, 기도 등이다. 마음에서 나쁜 종자인 원한심, 분별심, 시비심, 집착심 등을 비워내야 한다. 그래서 자기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설자리를 못 찾는 것이다.

업식이라는 말과 비슷한 습식(習識)이라는 말이 있다. 습관이 익어서 인식되는 것이다. 어떤 행동을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하게되면 습관이 되고 또 인식이 된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아직 종자까지 되지는 않았다. 업식이 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습식이 오랜 세월 굳어지면 완전한 업식으로 변하게 된다. 짧은 기간 동안에 이루어진 것은 습식이고, 긴 세월을 통해 이루어진 것은 업식이 된다.

이 업식이 바로 팔식(八識)인 아뢰야식(阿賴耶識)으로 마음 깊숙한 곳에 저장이 된 것이다.

우리는 거의 과거의 업과 현재의 습으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불가에서 중생은 업력소생이고 보살은 원력소생이라고 한다. 세상에 올 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온 사람은 모두 업력소생이고 정신을 차리고 온 사람은 원력소생이라 하겠다.

비유하자면 저녁에 아무런 생각 없이 잔 사람은 오늘과 같은 내일을 맞게 되지만(業力) 내일을 이러저러한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잠을 잔 사람은 그것을 하기위해 일어나고자 한 시간에 일어나게 되고 그 일을 해내게 된다(願力).

전생에 아무런 생각 없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태어나더라도 정신없이 태어나게 된다. 수행이나 기도나 원력으로 또렷한 정신으로 죽음을 맞이하여야 할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것이 업력이고,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원력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신을 제어할 수 없게 살고 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길은 큰 용맹정진이나 큰 원력, 포행 등이 아니면 어렵다.

수행은 무엇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나 자신의 모습에서 쓸데없이 붙어있는 군더더기를 떼어내는 작업이다.

거울은 물건을 비추이는 성질이 있다. 그러나 거울에 때가 끼었다고 해서 거울이 아닌 것은 아니다. 다만 때가 끼어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수행이나 성불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시시각각 다가오는 업식과 습식으로 인해서 붙어있는 그 군더더기를 떼어내어야만 자신의 자리에 편안히 앉을 수 있는 것이다.

위산 대원선사의 경책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곡천작비(縠穿雀飛)라 식심수업(識心隨業)이 여인부채(如人負債) 강자선견(强者先牽) 심서다단이나(心緖多端) 중처편추(重處偏墜)’

비단이 뚫어지니 참새가 날아간다. 우리의 마음이 업을 따라가는 것이 빚진 사람을 힘센 사람이 먼저 끌고 간다. 마음에 많은 갈래가 있으나 무거운 것이 먼저 땅에 닿는다.

곡천작비(縠穿雀飛)란 말은 병 속으로 참새가 한 마리 들어와서 그 병의 입구를 비단으로 막아두었다. 그런데 비단이 낡아지니 참새가 구멍을 뚫고 날아갔다는 이야기에서 나왔다. 여기서 참새는 우리의 아뢰야식(阿賴耶識)인 마음에 비유하고 병은 우리의 몸에 비유한 것이다. 비단은 우리의 수명을 비유한 것이다.

그 참새를 어떻게 순화시키는가 하는 것이 수행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의 업식으로 몸에 익숙하고 좋은 것만 추구하려고 한다. 먹고 노는 것은 과거에도 많이 했던 것이라 계속 하려하고 공부하고 정진하는 것은 많이 하지 않았던 것이라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익숙한 것을 익숙하지 않게 하고 익숙하지 않았던 것을 익숙하게 하는 것이 수행이다.

영명 연수(永明 延壽)스님은 일찍 출가를 하였는데, 7세에 법화경을 줄줄 외웠다고 한다. 7세의 아이에게 그것을 외우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생에서 익숙해왔던 것은 쉽게 되어지는 것이다.

본인은 평소 가지고 있는 지론이 있다. 대게는 누군가가 ‘잘 됐다.’ ‘성공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괜히 배아파 하는데, 불자라면 ‘그 사람은 무슨 복을 지었거나, 전생에 지어놓은 복이 있을 것이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영명 연수(永明 延壽)선사께서는 또 이런 말을 하셨다.

‘약봉진정도사(若逢眞正導師)어든 절수근심친근(切須勤心親近)할지니 가사참이미철(假使參而未徹)하여 학이미성(學而未成)이라도 역재이근(歷在耳根)이면 영위도종(永爲道種)하야 세세(世世)에 불낙악취(不落惡趣)하고 생생(生生)에 부실인신(不失人身)하며 출두래(出頭來)에 일문천오(一聞千悟)하리라 - 만약 참되고 바른 스승을 만나거든 간절히 모름지기 부지런한 마음으로 친하고 가까이 할지니, 가령 참구해서 깨닫지 못하여 배워서 이루지 못하더라도 귀로 한번 들으면 영원히 도의 종자가 되어서 세세생생토록 악취에 떨어지지 않고 세세생생토록 사람의 몸을 잃지 않으며, 다시 태어나서는 하나를 들으면 천을 깨달을 것이리라.’

강하고 간절한 믿음이 마음에 박히면 자신을 지키고 내 자리에 앉게 하고 그 자리를 굳건하게 만드는 종자가 되고 힘이 된다.

수행은 가장 단순하고 간단한 것이다. 어떤 행위든 어떤 생각이든 그것은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매일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 수행이다.

우리는 제자리에 앉기도 힘들고 제자리에 서기도 힘들다. 제자리에 앉고 제자리에 서있는 사람이 바로 부처다. 가장 아름답고 안락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수행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몇일 후면 부처님 오신 날이다. 이러한 선각자가 계심으로 인해서 우리는 그 길을 따라가려고 하는 용기도 생기고 길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길을 제시해 주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런 길을 찾을 수 있었겠는가?

언젠가 ‘야야포불면(夜夜包佛眠) 조조환공기(朝朝環共起) - 밤마다 부처님을 안고 잠이 들고 아침마다 부처님과 함께 일어난다.’ 라는 말씀을 전한적이 있다. 이렇게 부처님을 놓지 않고 사는 삶이 바로 나 자신을 놓지 않고 사는 삶이다.

지금의 이 시기가 바로 가장 포교하기 좋고 부처님께 인도하기 좋은 시기라고 생각한다. 초파일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초파일을 맞아서 절을 찾을 수 있게 하고, 등을 밝힐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이 언젠가는 절을 찾을 수 있는 인연을 심어주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인연을 심어주는 역할을 여러분들이 해주었으면 한다. 그것이 바로 각재기소(各在其所), 불자로서의 자리일 것이다.

늘 부처님의 지혜와 복덕이 충만한 부처님 오신날을 맞이하시기를 바란다.

 

 http://www.ibuddha.tv/vod/vod_view.asp?pk_idx=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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