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정문과 액막이
삼청동은 옛 한양 도성 안에서 제일경치 좋은 곳으로 꼽혔다. 삼청동이라는 지명은 예전에 태청(太淸), 상청(上淸), 옥청(玉淸)의 도교 3위를 모신 삼청전(三淸殿)이라는 곳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삼청동을 거쳐 지금의 성북동 골짜기 지금의 삼청각 옆 능선을 타고 올라가면 도성 4대문의 하나인 숙정문(肅靖門)이 나온다. 이 숙정문은 북문으로도 부르는데 서울 정북에 위치한 문으로 양주와 고양으로 통하는 문으로 태조 5년(1396년)에 창건하였다.
숙정문은 백악산에 자리 잡고 있다. 백악산은 백악동천이 있듯이 하늘의 신선들이 내려와 놀다 가는 곳이다. 즉, 하늘과 통하는 문이 있다는 곳이다.
백악산에는 매봉우리라는 뜻의 응봉(鷹峯)과 부엉이 바위라는 휴암(鵂岩)이, 그리고 영수도인이 살았다는 백련봉이라는 큰 바위가 있다. 그 외에 칠성을 의미하는 성제우물(星祭井)이 있으며, 그 외 민바위, 구덩이 바위 등이 있어 그 풍광이 매우 빼어난 곳으로 여름철에는 많은 선비를 비롯한 시인, 묵객들과 부녀자들이 넘쳐 났다고 한다.
숙정문은 태종 때 촤양선이 경복궁의 양팔이 되는 창의문과 숙정문으로 사람이 통행하는 것은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상소를 올리자 조정에서 이 두문을 폐쇄하고 소나무를 울창하게 심어 통행을 금지 시켰다. 그러나 태종 16년(1416년) 심한 가뭄이 들자 비를 오게 하기 위하여 숙정문을 열고 남대문을 닫았다고 한다. 이러한 행위는 음양오행설에 의하여 북은 음이요 곧 수(水)를 의미한다. 남은 양을 의미하므로 남문인 숭례문을 닫는 것은 양의 기운을 누르고 북문으로 음의 기군 즉, 비가 오게 기원한다는 뜻이다.
또 숙정문을 열어두면 북쪽의 음기가 그 문으로 들어와 도성의 부녀자들이 음란하게 된다고 하여 항상 그 문을 닫아두었다.
<동국세시기>에 「숙정문 골짜기는 매우 맑고 그윽하여 정월 보름 전에 민간의 부녀자들이 세 번 이곳을 다녀오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를 액막이-도액(度厄)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즉 정월보름 전에 세 번 숙정문을 다녀와야 그해의 액을 예방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 숙정문과 쌀바위
조선시대 한양도성에는 궁궐을 중심으로 방향과 성벽을 따라 남대문인 숭례문, 서대문인 돈의문, 그리고 동대문인 흥인지문과 함께 북문인 숙정문이 있었다. 그 중 평지에 있는 동대문이나 남대문, 서대문과 달리 북문인 숙정문은 궁궐 북쪽 산줄기에 걸쳐 있는 고갯마루에 서있어 주변 풍광이 아름다웠다. 처음에는 숙청문이라고 불렸는데 까닭은 알 수 없지만 숙정문으로 이름이 바뀌어 중종 이후의 실록에는 모두 숙정문으로 기록되고 있다. 숙정문은 4대문 사이사이에 있는 4소문 중의 하나인 창의문과 함께 경기 북부지역인 양주와 고양 지역으로 왕래하는 주요 통로로 이용되었다.
조선 초기의 기록을 보면 당시 유행하던 풍수설과 음양설에 따라 숙정문을 닫아 두었던 때가 많았다. 한 예로 태종 13년(1413) 6월에 최양선이라는 풍수가가 궁궐의 양팔 격인 창의문과 숙정문을 백성들이 통행하게 하는 것은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리자 숙정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의 통행을 금지시켰다. 그 후 태종 16년에는 기우절목(祈雨節目)을 만들어 가뭄이 심하면 숙정문을 열고 남대문을 닫았으며, 비가 많이 내리면 숙정문을 닫고 남대문을 열게 하였다. 이것은 북쪽은 음(陰)이요, 남쪽은 양(陽)인 까닭에 날씨가 가물면 양을 억제하고 음을 부양하는 음양오행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종 때에도 나라에 가뭄이 들면 종로의 시장을 구리개(을지로 입구)로 옮기고 남대문을 닫은 다음 북문, 즉 숙정문을 열어놓고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 풍수설과 음양오행설로 문이 자주 닫힌 숙정문
한편 조선시대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숙정문을 열어 놓으면 서울 장안의 여자들이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아 두었다고 전한다. 또 '동국세시기'에는 상원(음력 정월 대보름) 전에 민가의 부녀자들이 숙정문에 가서 세 번 놀다오면 그 해에는 재액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이 전해온다고 하였다. 모두 조선시대에 유행하던 풍수설과 음양오행설에서 비롯된 풍습이었다.
- 쌀바위 전설
그런데 이 숙정문 밖에는 인간의 탐욕을 경계하는 전설 하나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때는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좌를 차지한 세조의 시절, 숙정문 밖 산골 마을에 효심이 깊은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논밭 한 뙈기 가진 것이 없는 집안 형편에 젊은 나무꾼은 장가도 들지 못하고 숙정문 밖에 있는 산에서 나무를 하여 성 안 저자거리에서 팔아 노부모를 부양하는 처지였다.
어느 봄날, 이날도 젊은이는 산에서 나무를 하여 지게에 짊어지고 숙정문으로 향했다. 아침도 변변히 먹지 못한 그는 땔감 무게에 짓눌려 온몸에서 진땀이 흘러내렸다. 그런데 오르막길을 허위허위 올라 숙정문에 이르자 문이 또 닫혀 있었다. 망연자실한 나무꾼은 터덜터덜 내려오다 길가에 있는 커다란 바위 옆에 잠시 몸을 쉬었다.
“싸르르르 싸르르르.” 너무 지쳐 깜박 잠이 들었었던 걸까? 꿈결처럼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젊은이는 눈을 살며시 뜨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바로 자신이 기대어 잠이 들었던 바위에서 하얀 쌀이 조금씩 흘러내리는 것이 아닌가. 나무꾼은 재빨리 자신의 머리에 둘렀던 땀수건을 펴들고 흘러내리는 쌀을 받았다. 그렇게 흘러내린 쌀은 한 됫박쯤 흘러내리고야 멈췄다.
젊은이는 가슴 가득 기쁨이 차올랐다. 이만큼의 쌀이면 노부모님께 맛있는 쌀밥을 지어드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지게를 짊어지고 집으로 달려가 쌀밥을 지어 부모님 앞에 올렸다. 굶주렸던 부모님이 쌀밥을 맛있게 먹는 모습에 눈시울이 촉촉이 젖어오기까지 했다. 젊은이는 다시 저녁때가 되자 혹시 하는 마음에 바가지 한 개를 손에 들고 쌀이 흘러내린 바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녁밥을 지을 무렵이 되자 바위에서 다시 쌀이 흘러내리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도 딱 한 됫박 분량이었다.
끼니 때마다 한 됫박씩만 흘러내리는 쌀, 혹시나 하던 나무꾼은 그만……
그렇게 나무꾼은 쌀바위에서 날마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흘러내리는 한 됫박씩의 쌀을 받아 부모님을 부양했다. 나무를 하던 일은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렇게 석 달여의 세월이 흐르자 젊은이는 슬그머니 욕심이 생겼다. 끼니 때마다 한 됫박씩만 받아오는 게 너무 감질났기 때문이다.
“옳지.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젊은이는 다음날 아침 커다단 쌀자루 세 개를 들고 쌀바위를 찾아갔다. 세 개의 쌀자루에 쌀을 가득 채우면 세 식구가 반년 동안 넉넉하게 먹을 수 있다. 그러나 바위 밑에 쌀자루를 벌리고 앉아 기다렸지만 쌀은 여전히 아침, 점심, 저녁때에 맞춰 한 됫박씩밖에 흘러내리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을 기다려 커다란 자루 하나가 겨우 찼을 때 흘러내리던 쌀이 별안간 그쳐버렸다.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노부모님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은 생쌀이라도 먹으며 기다렸지만 늙은 부모님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무꾼은 쌀자루를 둘러메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굶주림으로 탈진한 부모님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나무꾼은 털썩 주저앉아 통곡을 했지만 부모님은 다시 살아날 수 없었다. 효심 깊었던 젊은이의 욕심이 결국 부모님을 굶주려 죽게 만든 것이다. 이때부터 이 쌀바위에서 다시는 쌀이 흘러내리지 않았다. 성북구 성북동 숙정문과 쌀바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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