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여자와 남자 사이에 우정이 존재할까

seongsoo 2011. 8. 22. 16:20

[김지현의 에로틱칵테일]

□ 여자와 남자 사이에 우정이 존재할까

 

최근 나에게 동갑내기 남자친구가 생겼다. 애인이 아니라 성별이 '남자'인 친구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약간의 호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는 평범한 듯하면서도 이미지 좋은 청년이었고 내가 하는 말을 척척 알아듣고 센스 있게 대답하는, 꽤 말이 잘 통하는 남자였으니까.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을 놓았고 잠깐의 설렘 이후 나는 그를 '친구'로 규정지었다. 나를 편하게 생각한 나머지 개인적인 연애사와 실없고 푼수 같은 모습이나 여자보다 더 섬세하고 예민한 취향 같은 것들을 너무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이다.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는 사람, 더 이상 호기심이 들지 않는 사람에게 싫증을 느끼는 건 남자나 여자나 다 마찬가지인가 보다. 나에게 그는 '게이친구' 같은 느낌이었고, 그 역시 나를 그렇게 규정지은 것 같았다. "난 술 잘 먹는 여자는 싫더라" "난 자아 강하고 자기 고집 센 여자보다는 순진하고 여성스러운 여자한테 끌려" "여자 좀 소개시켜줘" 같은 말들을 내 앞에서 수시로 했으니 말이다.

 

이성 친구는 동성 친구와 다른 많은 장점을 갖고 있다. 여자들의 만성적인 남자 고민에 대해 남자 입장에서 솔직하게 충고해주고, 화장법이나 다이어트에 대해 운운하지 않고,, 옆에 있으면 든든하고 왠지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런 이성친구와의 관계는 두고두고 즐길 만했다.

 

그런데 문제는 아주 갑자기 터졌다. 새벽까지 야근하던 어느 날, 그는 우리 회사 근처에 마침 약속이 있었다며 나를 태우러 왔다. 거의 집 앞까지 왔을 때 그가 문득 "이야기나 더 하고 들어가자" 하며 차를 세우는 것이다. 시간도 늦었는데 빨리 집에 가자며 그를 마주본 순간, 앗, 그 눈빛, 긴장된 어깨, 약간 내 쪽으로 기울인 몸, 애매한 위치의 손……. 이 나이 정도 되면 알게 된다, 저 자세가 무엇을 뜻하는지!

 

당황한 내가 재빨리 말했다. "난 너처럼 마음 맞는 친구가 생겨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우린 사소한 설렘이나 욕망 같은 걸로 어렵게 얻은 '친구'를 잃지 말자."

 

"넌 정말 남자와 여자 사이에 우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정색하며 그가 물었다. "남자들이 여자한테 연락해서 놀아주고 받아주는 이유는 단순해. 너랑 사귀고 싶든지, 아니면 자고 싶든지."

 

그의 말에 따르면, 내가 실연의 고통을 토로할 때나 들들 볶는 상사 욕을 할 때나 남자친구와 싸워서 속상할 때 술잔 나눠들고 토닥토닥 등 두드려주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남자'친구'들이 속으로는 '어떻게 하면 얘랑 잘 수 있을까, 어느 시점에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하면 좋을까, 그나저나 얜 오늘 따라 왜 이렇게 말이 많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너는? 넌 나를 순수하게 친구라고 생각했던 거야? 정말 순수하게?"

 

아. 그러고 보니 나는 그 동안 그가 하루에 몇 번씩이나 보내오는 문자에 성실하게 답하고, 그가 들르라는 술자리에 거의 무조건 참석했고, 얼굴 보자고 하면 바로 달려 나갔다. 일주일에 두어 번은 그랬다. 그건 가장 친한 동성친구와도 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내내 생각했다. 어쩌면 나도 그의 진심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남녀 사이의 미묘한 성적 긴장을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말 끌리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친하게 지내지는 않지 않았을까? 나는 정말 남녀 사이에 '순수한 우정'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었던 것일까. 아니면 '순수한 우정'이라고 믿고 싶었던 것일까.

 

남녀 사이에 우정이 존재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

 

지난주에 쓴 칼럼, 그러니까 남녀 사이에 우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한 글에 대하여 독자 한 명이 의견을 붙여왔다. "사실 당신도 그를 친구로 생각했다기보다는, 그 친구에 대한 확실한 끌림이나 사건, 계기가 없었기에 순수한 우정이라 믿고 싶었던 것 아닌가요? 저 또한 주위에 여자 친구들이 있는데, 두 부류입니다. 같은 방에 있어도 절대로 만지고 싶은 충동이 안 드는 친구, 그리고 그냥 친구인 척하는 친구. 후자의 경우 가질 수 없거나 관계를 발전시키기엔 뭔가 애매하다 보니 아직은 '친구'로 두는 거지요."

 

그의 지적이 맞다. 이제는 서로 마주치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피해 다니는 '그'와 '나'를 보고 있노라니 그동안의 그와 나의 관계가 명확하게 보이고 있다. 꼭 남녀 관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떤 관계에서든 '좀더 노력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먼저 연락하고, 먼저 약속을 잡고, 더 챙겨주는 사람. 내게는 그 친구가 그랬다. 물론 처음부터 이성적으로 좋아해서 '친구'를 가장하여 접근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분명 나에게 남녀를 뛰어넘는 인간적인 매력을 발견했거나 말이 잘 통하거나 만만하거나 등의 이유로 나와 조금씩 더 가까워졌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서로 외로운 처지에 어느 시점부터 없으면 허전하고 좀 더 같이 있고 싶고 다른 사람과 공유하기도 싫어졌을 것이다.

 

정말 나를 사랑했던 건지, 자고 싶었던 건지, 진정한 친구는 성욕도 달래줄 수 있다고 생각했었던 건지…… 그 친구의 속내를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 '차인' 그가 더 불쌍한 입장이 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일주일에 서너 번, 하루에 서너 시간 이상 수다를 떨던 사람을 잃은 나의 상실감도 만만치 않다. 그토록 편하고 즐거웠던 사람, 동성 친구에게는 하지 못했던 특별한 대화를 나누던 다정하고 속 깊었던 매력적인 친구를 잃어버린 나 역시 참으로 공허하고 쓸쓸한 일상을 보내는 중이다. 그 허전한 마음으로 주변의 남자들을 둘러보고 있자니, 문득 이성 간에 예외적으로 '진짜 친구'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에게는 본 칼럼의 소재를 무한정 솔직하게 제공하는 남자 지인들을 비롯하여 오래된 이성 친구 혹은 이성 선배들이 있다. 매일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어야 직성이 풀리는 A선배나 내 모든 속내와 경험을 총괄(?)하고 있는 S선배, 멀리 있긴 하지만 마음은 '베프'인 H군, S후배, K군, J선배…… 그들의 공통점은 한때 내가 짝사랑했거나 혹은 나를 짝사랑했다는 것이다.

 

그 일방적이고 당황스러운 고백 후, 한참을 어색해하며 서로를 피해 다닌 이후, 우리 중 하나는 (그게 힘겨웠든 쉬웠든, 혹 그게 진심이었든 아니든) 서로에 대한 마음을 접고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때부터 '진짜 친구'가 되었다.

 

결국 남녀 간의 진정한 우정이란, 그 혹은 그녀가 나를 다시는 이성으로 좋아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생겼을 때 이루어진다. 관계를 풍성하게 만드는 이성 간의 긴장감, 그 아슬아슬하면서도 짜릿한 감정을 완전히 버렸을 때 가질 수 있는 게 '이성 친구'다.

 

오늘도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보며 나는 기도했다. 시간아, 흐르고 흘러라, 더 빨리 흘러라. 우리가 이번엔 '진짜 친구'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자의 유혹을 거부하는 남자들?  (0) 2011.09.28
事務室 配偶者  (0) 2011.08.31
으악새의 유래  (0) 2011.06.16
나는 재일교포다  (0) 2011.06.14
[스크랩] 지구위에 사람들이 사는모습들  (0) 2011.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