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_법륜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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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48페이지 펴주세요. 금강경 제7째 시간이 되겠습니다.
제7 무득무설분
無得無說分 얻을 바도 없고 설할 바도 없다. 깨달음도 얻는다 할 것도 없고 법을 설한다 할 것도 없다 이런 얘기요. 5분에서 수보리가 거룩한 부처님의 형상을 보고 보살이 복덕을 지어서 그 과보를 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렇게 거룩한 부처님의 상호가 있을 수 있느냐? 이렇게 생각했을 때 부처님께서 이 몸의 모양이 부처냐? 이렇게 해서 형상에 집착하는 것을 깨뜨렸습니다. 모든 형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다. 모든 법은 다 공하다.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 여래지 이것이 부처다라고 할 그 어떤 것이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또 6분에서는 부처님께서 법이다 할 것도 없다. 이것이 법이다. 이것은 법이 아니다. 할 것도 없다 이렇게 말을 하니까 부처라 할 것도 없고, 법이라 할 것도 없다면 그럼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최상의 깨달음을 얻으셨고 어떻게 수많은 법을 설하셨는가? 이런 의심이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거기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을 하고 있다.
須菩提 於意云何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如來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번역하면 무상정등각 또는 무상정변지라 그랬죠? 쉽게 말하면 최고의 깨달음, 최상의 깨달음. 최고의 진리. 이렇게 말 할 수가 있겠습니다.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이거야. 여래가 이것이 최상의 깨달음이다라고 하는 어떤 정해진 법이 있고 그 법을 여래가 얻었느냐? 이 말이에요.
如來有所說法耶 여래께서 이것이 법이다. 할 것이 있어서 그런 법을 설했느냐? 이 말이오.
법을 설한 바가 있느냐? 즉 수보리가 그런 의심을 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바로 되물으셨다. 그러자 수보리가 금방 자신이 또 망상을 피운다. 또 한 생각에 사로잡혔구나 하는 것을 금방 깨닫고
須菩提言 수보리 말하되.
如我解佛所說義 부처님의 설하신바 그 뜻을 내가 알기로는. 누가? 수보리가 알기로는
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정한 법이 이것이 법이다라고 그런 정한 법이 있음이 없음을 그 이름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하며. 이것이 법이다 할 것이 없다 하는 그것을 이름하여 뭐라고 한다? 최상의 깨달음이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이 최상의 깨달음이다라고 이름 할 그 어떤 정해진 법도 없다.
亦無有定法如來可說 이것이 법이다라고 설할, 여래가 설할 그 어떤 정해진 법도 없다.
수보리언 수보리가 말하되
여아해불소설의 제가 부처님의 설하신바 그 뜻을 이해하기로는.
무유정법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역무유정법여래가설 이랬어요.
고대로 직역하면 이것이 법이다라고 할 정한 법이 있지 않다 이 말이오. 없다. 이 말이죠? 그런 법이 없다. 없음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 하며. 또한, 이것이 법이다라고 정해진 그런 법이 없음을 여래가 가히 설한다. 그것을 조금 더 부드럽게 말하면 이것이 최상의 깨달음이다라고 할 어떤 정해진 법도 없으며 이것이 내가 설하는 법이다라고 정할 그 어떤 법도 없다.
何以故 어찌한 까닭이냐
如來所說法 여래가 설한바 법이, 여래가 설하는 법은
皆不可取不可說非法非非法 가히 취할 수 없으며, 가히 말할 수 없으며, 법도 아니며, 법 아닌 것도 아니니.
所以者何一切賢聖皆以無爲法而有差別 모든 현인과 성인이 모두 이 무위법으로써 흔적이 없는, 함이 없는 이 법으로서, 갖가지 차별이 있다. 이렇게 돼 있어요.
자~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수보리 어의운하오.: 수보리야 너의 뜻이 어떠하냐?
여래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야: 부처님께서 최상의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을 얻었느냐?
여래 유소설법야: 여래께서 법을 설하신 바가 있느냐?
수보리언: 수보리가 말하되.
여아해불소설의: 제가 부처님의 설하신바 그 뜻을 이해하기로는
무유정법 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것이 최상의 깨달음이라고 할, 이름 할 그 어떤 정해진 법도 없으며
역무유정법 여래가설: 또한 여래가 가히 설할만한 정해진 법도 없다.
하이고: 어찌한 까닭이냐?
여래소설법: 여래가 설하신바 그 법은
개불가취 불가설 비법 비비법: 모두 다 가히 취할 수 없고, 가히 설할 수 없고, 법도 아니며 법 아닌 것도 아님이니
소이자하 일체현성 개이무위법 이유차별: 이런 연유로 일체 현상은 모두 함이 없는 이 무위법으로서 갖가지 차별이 있게 된 것이다. 뜻이 전달이 잘 안 돼요?
자~ 비유를 들어서 한 번 볼게요.
여기 거울이 있습니다. 맑은 거울이 있다. 거울 앞에는 수많은 물체들이 오고 갑니다. 그럴 때 마다 거울은 그 물체를 비춰주죠? 즉 그림을 그린다 이거야. 컵이 오면 컵을 그리고, 사람이 오면 사람을 그리고, 갖가지 모양을 그리게 된다. 이럴 때 이 거울은 물건을 얼마나 그릴 수가 있느냐? 얼마나 많은 그림을 그릴 수가 있느냐? 한량없는 많은 그림을 그릴 수가 있다고 말 할 수도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 거울은 한 그림도 그리지 않는다. 이렇게 말 할 수도 있고. 물체가 오면 비추고 가면 사라지게 된다. 거울은 어떤 물체가 와도 다 비춰준다. 그러나 거울 그 자체는 한 물건도 그리지를 않습니다.
여래가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음이냐? 이렇게 말하는 것은 여래는 나라고 하는 이것이 나다 하는 것이 사라져 버렸다 이거야. 즉 거울과 같다 이거야. 그러기 때문에 어떤 것이 그 앞에 오든지 오는 대로 비춘다. 중생의 근기 따라 갖가지 방편을 설하신다. 이것이 법이다 라고 정해진 것이 있어서 너는 요게 맞고, 너는 요게 맞고, 너는 요게 맞고, 너는 요게 맞고, 너는 요게 맞고. 요렇게 하나씩 법을 설하는 게 아니에요.
중생의 병을 치료하는 약 처방이 만 가지가 있는데. 부처님께서 만 가지를 다 통달하셔서 중생의 병 따라 처방을 하나씩 주느냐? 아니다. 부처님은 정해진 아무런 처방도 갖고 계시지 않는다.
다만 중생의 병 따라 그때그때 처방이 나온다. 이것이 저 사람에게 맞는 처방이다. 이렇게 정해져 있지가 않다. 그 사람의 병 따라 처방이 나오는 거다. 이것이 법이다. 이것이 처방이다. 이렇게 정해진 법이 없다. 이것을 뭐라고 한다? 무유정법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다시 비유를 들어서 말을 하면, 늘 하는 얘기에요. 서울을 우리가 최상의 서울을 최상의 깨달음.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라고 말하고, 우리가 각각이 지방에 살고 있다. 이것이 중생의 처지다 이거야. 인천사람이 서울 가는 길을 물으면 동으로 가라 하고, 수원 사람이 서울 가는 길을 물으면 북으로 가라 하고, 춘천 사람이 서울 가는 길을 물으면 서로 가라 그런다. 이 말이오. 바로 이 동으로 가라, 북으로 가라, 서로 가라가 바로 부처님의 설법이다.
서울로 가는 길이 어떤 방향이라고 정해져 있어서 그 법을 부처님께서 깨달으셨느냐? 서울은 어느 쪽으로 간다하는 그 길이 있고. 그 길을 부처님께서 찾으셨느냐? 아니다 이거야.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바는 바로 서울과 그리고 사람들의 각 사는 지역을 통틀어서 저 허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이 그렇게 훤히 내려다보고 있다. 반야심경 표현대로 하면 조견이다. 확 비춰본다 이거요. 비춰보니 서울 가는 길이 어느 쪽 길이다 이렇게 정해져 있지가 않아. 서울 가는 길은 공해. 그것은 정해져 있지가 않아.
그런데 인천사람은 동으로 가고 춘천사람은 서로 간다. 그것은 중생의 근기 따라 그때그때 서울 가는 방향이 정해진다. 최상의 깨달음이라는 것은 뭐냐? 동쪽으로 간다. 서쪽으로 간다. 이게 아니다 이거야. 최상의 깨달음이라는 것은 이 세계를 환하게 봐 버리는 거다. 어떤 것이 서울 가는 길이다 하는 어떤 것을 깨달은 게 아니다. 이거야. 서울 가는 길은 정할 수가 없다. 그 정할 수가 없다는 말은 서울 가는 길이 없다는 말도 아니고, 아무렇게나 가도 서울 간다는 얘기도 아니다.
그것을 금강경에서는 이름 하여 뭐라고 한다? 무유정법이라 한다. 이 정해져 있지 않는 이 법을 이름 하여 뭐라고 한다? 최상의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말한다. 또 다른 말로는 최상의 깨달음. 서울 가는 가장 바른길이라고 하는 그런 정해진 길은 없다. 인연을 따라서 인연을 따라서 동이다, 서다, 북이다. 이렇게 인연을 따라서 갖가지 법이 생겨난다.
그러니까 맨 마지막에
一切賢聖 모든 현인과 성인은
皆以無爲法 모두 이 차별이 없는 함이 없는 이 법. 무유정법으로부터
而有差別 갖가지 차별법이 나온다. 동이다 서다 동북이다 동남이다 서남이다 서북이다. 이런 갖가지 법이 나오게 된다. 그러니 여래가 법을 설한다 하지마는 가히 설할 게 없다. 이거야. 다만 중생의 근기 따라 거울에 물건이 비추듯이 그냥 설해지는 거죠. 그러니 중생의 근기 따라 중생의 번뇌가 한량이 없으니 부처님의 설법 또한 한량이 없죠.
그러나 사실은 부처님께서 법을 설한다 하지마는 그것은 중생이 부처의 거울에 비췄을 때 그냥 비춰진 모습일 뿐이지 거울이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다 이거야. 사람들이 길을 물으면 부처님이 동북이다. 서다. 너는 동이다. 너는 북이다. 할 때 부처님이 갖가지 법을 갖고 계셔서 갖가지 법을 설해 주는 게 아니다. 중생이 서 있는 위치 따라 자동적으로 방향이 나오는 거다 이거야.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한 법도 설한바가 없다. 부처님은 한 법도 설한 바가 없지만은 한량없는 많은 법을 설하고 있고, 한량없는 많은 법을 설했지마는 진실로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 여기서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는 것은 이것이 법이다라고 어떤 정해진 법 그런 것은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 이거야. 어려운 거 같지마는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이 맞죠. 이게 세상의 있는 그대로의 이치에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냥 말 할 수 없어요. 여러분들이 수행은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말 할 수가 없다 이거야. 물어보죠. 뭐 때문에 수행하려 그러냐? 뭣 때문에 그 일을 하려고 그러냐? 그에 따라서 그가 하는 일이 때로는 옳을 수도 있고, 때로는 그를 수도 있어. 그냥 하는 그 행위 자체를 가지고는 옳다 그르다 할 수가 없단 말이오. 제가 지금 동쪽으로 가라는데 옳습니까? 이러면 옳은지 그른지 알 수가 없어. 그건 옳은 것도 아니고 그른 것도 아니야.
제가 서울 가는데 지금 동쪽으로 가는 게 맞습니까? 이러면 그 사람이 서 있는 위치를 보니까 인천에 있다. 오 그래 그러면 돼. 춘천에 있으면 야~ 동쪽으로 가면 안 돼. 서쪽으로 가. 이렇게 말한다 이거야. 여기서 금강경에서 제일 중요한 하나의 단어. 무유정법이다. 이것이 법이다라고 할 만한 그런 법은 없다. 이러니까 이것은 대승의 다른 용어를 말하면 뭐요? 법도 공하는 거요? 안 공하다는 거요? 공하다. 법무아. 법에도 실체가 없다. 법공. 법도 공하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아쇼카 숲이 아쇼카 나무로 이루어진 큰 숲을 만났어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그 가운데서 아쇼카 나무 가지를 하나 딱 꺾어가지고는 아난존자에게 물었어요. 아난아. 이 나뭇가지에 나뭇잎이 많으냐? 적으냐? 했어. 예. 매우 많습니다. 이랬어. 아쇼카 잎이 길죽길죽한게 많이 달렸단 말이오. 그러면 내 손에 쥔 아쇼카 나뭇잎하고 저 숲에 있는 아쇼카 나뭇잎하고 어느 게 더 많으냐? 아이고 부처님 물론 저 숲이 헤아릴 수 없이 훨씬 더 많죠. 이랬어.
그렇다 아난다여. 내가 여태까지 너희들에게 설한 법은 내 손에 있는 아쇼카나무 가지에 달린 잎과 같다면 내가 너희에게 설하지 않은 법은 저 아쇼카 숲에 있는 나뭇잎만큼 된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8만 4천 법문을 설했지만은 그것은 부처님이 설할 수 있는 법에 비해서는 어때요? 아주 조금에 불과하다 이런 얘기요. 뭘 말하느냐? 부처님의 설할 수 있는 법에 비유해서 설한 법이 너무 작으니까. 왜 작을까? 그렇게. 아무리 거울에 물건이 만개가 비춰가지고 많이 비췄다 해도 앞으로 이 거울에 비출 가능성이 있는 것에 비하면 그건 아주 작은 거죠.
거울에는 무수한 물건이 비칠 수가 있다. 왜냐? 거울은 한 그림도 그리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러니까 부처님은 수많은 법을 앞으로도 더 설할 수가 있어요? 없어요? 있어. 그러면 설할 법이 어떤 게 정해져 있어요? 아니에요. 중생의 근기 따라 법이 설해진다. 부처님 당시에는 인천사람 수원사람 춘천사람밖에 없어서 동으로 가라, 북으로 가라, 서로 가라만 얘기를 했는데. 지금은 의정부에도 사람이 살아서 물으러 오면 뭐라고 할까? 남으로 가라고 설하실 거다. 그러니 부처님은 한량없는 법을 설했다 해도 맞고 한 법도 설한 법이 없다 해도 맞다 이거야. 정 반댄데 그게 같은 말이에요.
자~ 이런 말이 있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또 다른 한 문장은 그는 많은 말을 했다. 정 반대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많은 말을 했다. 이래도 말이 됩니까? 안됩니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많은 말을 했다. 의미 전달이 되요 안 돼요? 되죠. 다시 말하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마는 그의 몸에서 곳곳에서 풍기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많은 것을 느꼈다면 그는 많은 말을 했다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정 반대되는 것도 연결하면 함께 또 의미가 전달이 돼요.
부처님은 한 법도 설하지 않으셨다. 부처님은 한량없는 많은 법을 설했다. 이것도 연결되는 거요. 거울은 한 그림도 그리지 않았다. 그러나 거울은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반대로 거울은 수많은 그림을 그렸지마는 사실은 거울은 한 그림도 그린 바가 없다. 부처님은 중생의 근기 따라 8만 4천 법문을 하셨지마는 사실은 부처님은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 왜 그럴까? 무유정법이기 때문에 그렇다. 법이 공하기 때문에 그렇다.
26:04
옛날에 어떤 조사스님이 계시는데, 이 금강경을 탁 공부한, 금강경을 엄청나게 읽고 공부를 많이 한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물었어요. 이 지금 수행자는 글자를 잘 모르는 사람인데, 많은 사람에게 법을 설한다 하니까 이 금강경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이해가 안 된다. 이 말이오. 그는 사이비 아닌가? 싶어서 찾아와서 물었다 이거야. 선사한테.
당신은 어떤 법으로 다른 사람을 가르칩니까? 이렇게 물었단 말이오. 어떤 법으로 가르치느냐 이거야. 당신 무엇으로 남을 가르치느냐 이거야. 그러니까 그 선사가 저는 어떤 법으로도 남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랬어. 나는 어떤 법으로도 남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붕 떴단 말이오. 그 사람은 많은 사람을 가르치는데. 그 가르친다는 소리를 듣고 이게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가르치나 해서 물었단 말이오. 당신은 어떤 법으로 사람들을 가르칩니까? 하니까 나는 어떤 법으로도 사람들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래.
이 사람으로서는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된단 말이오. 그래 멍해 있으니 선사가 물었어. 당신은 어떤 법으로 사람을 가르칩니까? 그러니까. 저는 금강경으로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이래. 그래서 이 선사가 금강경은 누가 설한 겁니까? 이래. 그래 이 사람이 바보 같은 놈. 금강경을 누가 설한지 모르다니 말이야. 의아하지마는 그래도 대답을 했죠. 네. 금강경은 부처님께서 설하셨습니다. 그래 선사가 또 물어. 금강경에 보면 부처님께서는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 그랬는데 누가 이 법을 설했습니까? 이렇게 묻는 거요. 그래 이 사람이 앞뒤가 꽉 막혀버렸어.
자~ 부처님이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고 그랬는데 부처님이 법을 설했다 하면 금강경의 내용에 위배가 되죠. 그래 안 그래요? 그러지. 그럼 부처님께서 이 금강경을 안 설했다 하려니까 분명히 이 경 제일 서두에 부처님이 설했다고 나와 있어요? 안 설했다고 나와 있어요? 설했다고 나와 있지. 그러니까 금강경을 부처님이 안 설했다 함은 부처님을 저기 뭐야 금강경을 비난하는 게 되죠. 금강경을 욕하는 거 아니오. 금강경은 부처님이 설한 게 아니야 이러면 금강경을 비난하는 게 되죠.
부처님께서 금강경을 설했어. 이러면 누구를 비난하는 게 됩니까? 부처님을 비난하는 게 됩니다. 왜? 부처님은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 그랬단 말이야. 그러니까 콱 막혀 버렸단 말이야. 이래도 못하고 저래도 못하고. 이래도 대답 못하고 저래도 대답 못한단 말이야. 이게 선에서 책만 보고 하는 사람에게 던지는 질문이란 말이야. 이 앞뒤가 꽉 막히죠. 아는 거란 늘 이런 거란 말이오. 뭘 안다 하는 거는. 그러니 책을 덮어놓고 이 도리를 터득해야 되겠죠. 이 도리를 터득해야 된다. 그 속에 모순이 있다 이 말이오. 어제 말씀드린 데로 부처님을 불에 땠다고 난리다가 금방 자기 입으로 뭐라 그래요. 그게 어디 부처냐? 나무토막이지 이런단 말이오. 그런데 깨닫기 전에는 그 말이 두 가지 모순인 것을 알 수가 없어. 이렇게 질문을 탁 안 던지면 아무 문제가 이제까지 없었는데 이렇게 탁 뒤집어서 질문을 던지니까 자기가 생각해도 할 말이 없다. 이 말이야.
도대체 이게 뭘까? 부처님은 한 법도 설한 바 없다 그러니 부처님께서 금강경을 설했다 하면 부처님을 비방하는 게 되고. 금강경은 부처님께서 설한 게 아니다 하면 금강경을 비난하는 게 된단 말이오. 그러니까 입이 딱 벌어져 안 다물어진단 말이오. 거기로부터 공부가 시작된다 이 말이오. 그 뭐하고 같으냐? 서울 가는 길은 정해져 있지 않다 이러면 우리는 어떤 생각이 드느냐? 서울 가는 길은 없다 이렇게 생각이 든다. 없는 게 아니야 정해져 있지 않다니까. 정해져 있지 않다니까? 아~ 그럼 아무렇게나 가도 된다는 얘깁니까? 이렇게 생각이 자꾸 미친다. 이 말이오.
우리가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보면 그냥 정해진 법이 없다. 이러면 법이 없다는 얘기인가? 정해진 법이 없을 뿐이지 법이 수많이 많다는 것인가? 이러게 생각이 자꾸 미친단 말이오. 그러나 서울 가는 길이 정해져 있지 않다. 할 때는 보세요. 서울 가는 길이 없다는 뜻이에요? 아니죠. 아무렇게나 가도 서울 간다는 얘기에요? 아니죠. 수많은 길이 서울 가는 수많은 길이 있죠? 그러나 거기에 수많은 길이 있다 해서 아무렇게나 서울 가는 게 아니란 말이오. 그러니까 정해져 있지 않다. 공하다 하는 것은 없다는 얘기도 아니고.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얘기도 아니란 말이오. 인연을 따라서 법이 정해지죠. 그러나 법이 정해진다 해서 거기에 이것이 법이다 라고 할 만한 고정된 법은 없다 이거야.
여러분들은 누군가? 이거야. 누구라고 할 수가 없어. 왜? 여러분들은 인연을 따라서 어머니를 만나면 딸이라고 불리고, 남편을 만나면 아내라고 불리고, 자식을 만나면 어머니라고 불리고. 절에 오면 보살이라 불리고, 전철을 타면 승객이라 불리고, 물건을 사러 가면 손님이라 불리고. 수도 없이 불린다 이거야. 몇 가지로 불릴까? 한량없이 불릴 수가 있겠죠. 이렇게 인연을 따라서 나타나는 거요. 그러면 나는 그 모든 것이냐? 모든 것이라고 할 것이 없어. 나라고 할 만한 게 없기 때문에. 이렇게 인연을 따라서 나타나는 거다.
그것을 법성게에서는 뭐라고 한다고요? 불수자성 수연성(不守自性 隨緣成).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아니한다. 이 말이 모든 법은 공하다. 자성이 없다. 무아다. 이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수연성. 인연을 따라 이루어진다. 인연을 따라서 갖가지 법이 드러난다. 한량없는 법이 드러났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실체가 없고 영원한 것도 아니고. 그래서 아무것도 없느냐? 아니다 이거야. 텅 비었다 하는 것은 거기로부터 갖가지 법이 일어날 수가 있다. 이거야. 그래서 맨 마지막에 뭐라 그랬어요? 개이무위법 이유차별이다.
옛날에 어떤 스님이 열심히 기도했는데. 이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찾았는데. 한 번도 관음의 진신을 친견하지 못했어요. 즉 관세음보살님을 만나본 적이 없다 이거야. 그래서 낙산사 가서 말이야. 동해 낙산사 아시죠? 고 밑에 가면 홍련암 있죠? 거기가 뭐요? 관음의 진신이 있다는데 아니요. 거기 가서 3년을 기도했어. 소원이 관음의 진신을 친견하는 거요.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는데 3년 기도가 거의 끝날 무렵. 관세음을 부르고 있는 중에 비몽사몽간에 무슨 소리가 들렸어. 저 금강산 밑에 어디를 가면 관음의 진신을 친견할 수 있다.
얼마나 기뻤겠어요. 야~ 드디어 기도에 응답이 있구나. 이래서 바랑을 짊어지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고생고생을 해서 도달했다. 이 말이오. 그래 그 얘기한 어떤 지역에 도달해서 동굴이 하나 있는데 안에 들어가서 불러보니 아무도 없단 말이야. 그래 계속 사람을 부르니까 어떤 영감이 하나 나타났어. 그래서 물었어. 제가 관음의 진신을 친견하러 왔는데 관음의 진신이 어디 있습니까? 그 영감이 니깟 놈이 무슨 그따위 신심으로 관음의 진신을 친견 하냐고 가라는 거요.
아니라고 나는 출가해서 10년간 계율을 청정히 지키고 공부를 해 왔는데. 이번에 천일동안 관음의 진신을 친견하기 위해서 지극정성으로 기도했더니 여기 가면 친견할 수 있다. 그래 왔다는 거요. 글쎄다. 너 같은 신심 그 보잘것없는 신심 갖고 관음의 진신을 친견할 수 있을까? 마, 가지! 아닙니다. 전 꼭 친견할 거라고. 그러면 여기서 저 산을 몇 개 넘고 어느 골자기를 넘고 그 위로 올라가면 어떤 영감이 하나 있을 텐데. 거기 가서 물어보라는 거요. 그래 또 물을 건너고 고개를 넘고 해서 또 그 깊은 산 속 찾아갔어.
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조그마한 움막 같은 게 하나 있어요. 드디어 찾았다. 하고는 땀을 뻑뻑 흘리면서 숨을 몰아쉬면서 계시오. 계시오. 하니까 누구세요? 하고 나오는데. 아주 아리따운 처녀가 나오는 거요. 깜짝 놀란 거요. 이 깊은 산 속에서. 그래 자기는 관음의 진신을 친견하러 여기까지 찾아왔지만 웬 처녀가 오두막집에서 혼자서 딱 나오니까. 이 젊은 중이 놀랐단 말이오. 그래 자기가 이러이러한 노인을 만나러 왔다. 그러니까. 그 처녀가 아~ 그러세요? 저희 아버님이시니까. 지금 나무하러 가셨으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는 거요.
그래서 찾긴 찾았구나 하고 있으니까. 땀은 흐르고 목은 마르고 그러니까. 물 좀 달라고 그러니까. 그 처녀가 물을 떠서 이 스님한테 줬어. 그래 그걸 받아먹으려 받으려는데. 갑자기 누가 벽력같은 소리를 지르면서 작대기를 갖고 대갈통을 때리는 거요. 이 불안당 같은 놈이 어디 젊은 아녀자를 희롱하느냐 이러면서 막 두드려 패는 거요. 얼마나 억울해요. 물 얻어먹었죠. 언제 희롱한 적 있느냐고. 요즘 말하면 희롱했다 추행했다. 이러고 두드려 패니까.
아니라고 변명을 하려니까. 입 뻥끗할 때마다 두드려 패는 거요. 굉장히 중요합니다. 맞으면서 아니라고 하려고 하는데 두드려 팬단 말이오. 변명하려면 두드려 팬단 말이오. 그래서 실컷 두드려 맞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실컷 맞고도 또 거꾸로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랬단 말이오. 그러니까 그만 두드려 패는 거요. 그래 왜 왔느냐? 그래 관음의 진신을 친견하러 왔다는 거요. 그러니까 또 작대기를 갖고 또 두드려 패는 거요. 이런 불안당 같은 놈이 네깟 놈이 무슨 관음의 진신을 친견 하느냐고. 당장 가라고 두드려 패는 거요.
그래 막 손이야 발이야 닮도록 빌었어. 어르신이 보기에 제가 신심이 부족한 거 같지만 전 정말 친견하고 싶기 때문에. 어르신이 시키는 건 내가 뭐든지 할 테니까 좀 가르쳐 달라는 거요. 그러니 너 정말 뭐든지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예. 죽으라면 죽겠습니다.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래? 이러더니 그러면 여장을 풀어라. 그러는 거요. 그래 이제 살았다 싶어서. 이제야 내 소원이 성취됐구나 하는데. 영감이 불러서 나갔더니. 너 내 딸하고 결혼해라 이러는 거요. 이 산속에 사니까 혼자 있어서 시집도 못 가고 지금까지 있었는데. 마침 잘됐다. 네가 왔으니까 둘이 결혼해라 이러는 거요. 이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리요.
아니 10몇 년을 출가 정진해서 정진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결혼하라니 이 산속까지 와가지고. 그래서 어르신 그건 안 된다고. 절대로 그것만은 안 되다고. 다른 건 내 시키는 대로 다 하지만 그것만은 안 된다는 거요. 그러니까 작대기로 또 두드려 패는 거요. 이놈의 자식 한 입으로 두 말 한다고 또 두드려 패는 거요. 조금 전에 야, 이놈아. 니 뭐든지 다 한다고 그랬지 않았냐고. 아이고 제가 뭐든지 다 한다는 것은 관음의 진신을 친견하기 위해서 내가 어떤 고통이라도 이겨내겠다는 얘기지. 결혼하겠다는 얘기는 아니라는 거요.
야, 이놈아 니, 내 시키는 대로 다 한다고 그랬지 않았냐? 이거야. 뭐든지 시키십시오. 하겠다 이거야. 너 이놈아. 한 입으로 그러게 두말하기냐고. 너 뭐든지 다 한다고 그래놓고는 결혼하라니까 왜 안하냐는 거요. 아이 그건 내가 중이니까 할 수가 없다는 거요. 그거 빼놓고 다른 건 다 하겠다는 거요. 그래서 니 깟놈의 거짓말쟁이 같은 건 놔 놓을 필요가 없다. 이런 건 패 죽여야 된다고. 두드려 패고 가라는 거요. 그래 이제 양단에 걸린 거요. 관음의 진신을 친견하려면 결혼을 해야 되고. 결혼을 안 하려면 결혼 안 하고 계율을 청정히 지키려면 친견 못하고 가야 된단 말이오. 그 이거를 진퇴양난이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래서 결심을 한 거요. 관음의 진신을 내가 그렇게 친견하려고 했으니.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수는 없다고. 결혼하겠다고. 이렇게 해서 그 딸하고 세워놓고 영감이 찬물 한 그릇 떠 놓고 너희들은 오늘부터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백년해로해라 하고. 탁 그 십 몇 년을 지켜온 그 계율이 그냥 일분도 안돼서 깨져버린 거요. 얼마나 허무하겠어요. 얼마나 많은 처녀들이 집에서 또 권유하고 했는데도 다 뿌리치고 여기까지 왔는데. 관음의 진신을 친견하러 왔다가 친견은커녕 계율만 파하고 죽도 밥도 안 돼 버렸어. 그래도 관음의 진신을 친견하게 해 준다니까 그걸 위안을 삼고 있었어.
그래 이제 신혼 방을 차려서 자라는데 잠이 오겠어요? 안 오겠어요? 잠이 안 오죠. 자기가 여지까지 살아온 과거의 그 기도하던 걸 생각하니 정신이 하나도 없는 거요. 어쩌다 내가 이꼬라지가 됐나 싶은 게. 그래 멍하니 앉아 있으니 부인이 하는 말이. 여보,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이미 결혼식까지 해 버렸는데. 지나간 거 후회하면 뭐하냐 이거야. 여기 와서 편히 잠이나 주무시라는 거요. 그 얘기를 가만히 보니 그래.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지금 뭐 걱정해봐야 뭐하겠어? 안만 옛날 얘기해봐야. 이미 차 지나간 뒤에 손들기지. 에라 모르겠다 싶어 요 밑에 들어와서 잔단 말이오.
이왕지 결혼을 했으니 어떻게 됐어요? 거 뭐 계율은 이미 깨진 거고 하니까. 부부의 정이라도 나눠야 될 거 아니오. 그래서 여자를 껴안으니까. 여자가 자꾸 몸을 빼는 거요. 껴안으니까 또 몸을 빼고, 껴안으니까 또 몸을 빼고, 껴안으니까 또 몸을 빼고, 이렇게 이불 밑에서 밤새도록 밀고 당기고 싸움이 벌어진 거요. 그러면서 이 스님은 몸에 열이 확 달아오른 거요. 그러고 하는 중에. 그래서 완전히 어떤 성적인 그런 욕망이 머리끝까지 달아올라서 불덩어리가 돼 있는 그런 찰나에. 자꾸 빼고 당이고, 빼고 당기고, 손이 점점점점 가슴으로 해서 점점 내려가서 아랫도리 가서 딱 닿았는데 벌떡 일어나 버렸단 말이오. 아이~ 여자가 여자가 아닌 거요. 고녀라 그러죠. 그래 앉아서 한숨을 푹~ 쉬는 거요.
왜? 결혼까지 해서 파계까지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또 여자도 아니오. 그러니 이게 인생이 뭐가 되는 거요? 신세 완전히 버린 거 아니오. 그래 낙담을 탁하고 있단 말이오. 그래 부인이 또 위로했어. 여보 여보, 이왕지 이렇게 된 거 어떻게 하느냐고. 내가 당신을 속이려고 그런 것도 아니고, 내 몸이 이런 걸 어떡하느냐고. 그렇게 부인이 따뜻하게 달래주니 또 그것도 엎질러진 물인데 어떡해. 물리지도 못하고. 그래서 살게 됐어. 그런데 영감이 일을 엄청나게 시키는 거요. 도저히 견뎌내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시키고 그 나무를 지고 저 30리 길에 마을에 가서 팔아서, 그걸 양식을 사 와서 먹여 살리는데.
관음의 진신을 친견하기는커녕, 계율은 파하고, 그다음에 그렇다고 부부의 정도 못 나누고, 죽도 밥도 안 되고 뼈 빠지게 일만 하고, 그러니까 이 두 부녀를 먹여 살리는 완전히 종이야. 머슴이야. 그렇게 참았는 이유는 오직 관음의 진신을 친견하기 위해서. 이 과정에서 몇 번의 아까처럼 그런 고비들이 있었는데. 그걸 어쨌든 이 부인의 얘기를 듣고 또 뉘우치고 뉘우치고 해서 그렇게 해서 넘어갔어. 일년지나 갈려고 했는데. 일 년만 더 기다려 본다 하고 또 일 년 지나고, 이년 지나고 갈려다가 삼 년만 해서 그때는 완전히 갈려니까 부인이 또 뭐라 그래서 참아서 삼 년까지가 됐는데.
이 사람이 결심을 딱 했어. 이번에 삼 년이 되도 안 가르쳐 주면 이제는 가는 수밖에 없겠다. 이렇게 딱 결심을 했어. 아무리 말려봐라. 부인 아니라 영감 아니라, 뭐라고 꼬셔도 이제는 나 다시는 안 속는다. 이 많이 속았으면 됐지. 딱 결심을 해서 삼 년이 딱 돼서 아무 소식이 없기에 인사를 하고 가겠다고 그랬단 말이오. 자기는 또 잡으면 잡을 거에 대비해 갖가지 결심을 하고 갔는데. 아 그러냐고 잘 가라고 이러는 거요. 하나도 안 잡는 거요. 부인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 가라고 그러는 거요.
그러니까 마음이 억수로 섭섭한 거요. 사람이 이럴 수가 있느냐 이거야. 삼 년이나 같이 살았는데. 섭섭한 마음 하나 안 내고 그냥 나뭇가지 바람 지나가듯이 그냥 지나가는 거요. 결국은 내려오면서 자기는 정이 들어서 그 참 고통도 겪었지마는 어느덧 정이 들어서 돌아보고 돌아봤는데 아무 그런 뭐 반기는 것도 없고 환송도 없고. 그래 쓸쓸한 가슴을 안고 내려왔어. 내려와서 그 입구에서 만난 노인을 만난 거요. 그래 노인이 하는 말이 관음의 진신은 잘 친견을 했는가? 이래.
그러니 관음의 진신을 친견하기는커녕, 계만 파하고, 뚜드려만 맞고, 일만 뼈 빠지게 하고, 세월만 보내고, 죽도 밥도 안 되고 신세만 조졌다. 이거야. 그래 불평을 했어. 그랬더니 그 영감이 주장자를 갖고 대가리 통을 딱 때리면서 이 멍청한 놈, 너 같은 놈은 눈이 있어야 볼 줄도 모르고, 귀가 있어야 들을 줄도 모르는 놈, 너 같은 놈은 죽는 게 낫다. 네가 살면 뭐하냐고. 야 이놈아 네가 3년 동안이나 관음의 진신하고 같이 살면서도 관음의 진신을 못 봤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는 거요. 아이 그 얘기를 들으니까 정신이 번쩍 든 거요.
그럼 그 영감은 누구냐? 그 영감이 문수보살이라는 거요. 그럼 당신은? 나는 보현보살이다. 그러고 휙 가버리는 거요. 그래서 이 스님이 또 기어 올라갔어. 기어 올라가 봤더니 아무것도 없는 거요. 흔적이 없는 거요. 그래서 딱 이렇게 실망을 해서 앉아 있으니. 자기 부인이 저 아래 냇가에서 빨래하고 있어. 얼마나 반가워. 막 달음질을 쳐 냇가에 갔더니. 또 없어져 버렸어. 파랑새가 돼서 펄펄펄펄 날아가는 거요. 그래서 그 파랑새를 따라서 절벽을 절벽을 절벽을 절벽을 기어 올라가니까. 파랑새가 어떤 굴속으로 쑥~ 들어가는데.
거기를 올라가 보니까 조그마한 동굴에 불상이 딱 모셔져 있는데 보니까 관세음보살상이오. 보니까 자기 부인하고 얼굴이 똑 같애. 그리고 옆에 보니까 거기 일기책이 있어. 그 일기책을 이렇게 넘겨보니까. 신라시대에 보덕이라고 한 스님이 관음기도를 하면서 관음의 진신을 친견하려고 간절한 기도 발원을 하고 해 놓은 그런 글이 쓰여 있는 거요. 그런데 이 스님은 고려시대 때 얘기거든요. 5백 년 뒤에 다시 태어나서 온 거요. 여기를.
그래서 이 신라시대 때 그 스님 이름이 보덕이오 보덕. 그래서 이 이런 내용이 들어있는 게 보덕각시전이에요. 보덕각시전인데 이게 보덕암이에요. 금강산에 가면 지금도 이게 있습니다. 절벽이 있기 때문에 굴이 기둥을, 옛날에 외기둥을 세워 그 위에다가 절벽하고 이래 연결시켜 집을 지어 놓은 거요. 금강산 가면 이거 꼭 봐야 돼.
이게 뭘 말합니까? 자기는 관세음보살이다. 하면 관세음보살은 이런 사람이다 하는 자기상을 그려놓고 찾았죠? 그러니까 관세음보살이 나타나도 그건 관세음보살이 아니죠. 그러니까 이 상을 깨뜨리는 과정에서 벌써 많이 깨뜨려 주잖아. 그죠? 뭐든지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 그래놓고. 죽으라면 죽겠다 그래놓고. 결혼하라니까 안 하겠다. 자기를 고집하죠. 그래서 왜 안 하려 그러냐? 나는 계율을 지켜야 되기 때문에 안 하겠다. 이렇게 우겼단 말이오. 그래서 계율을 지키라고 뭘 만들어 줬다? 부인을 고녀로 만들어 줬죠?
그러니까 탁 손을 대 보고 벌떡 일어나서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야~ 결혼도 하고 계율도 지키고 팔자 피었구나. 이래 생각해야 되는데. 결혼한 거에 또 그전에는 계 지킨다는데 집착을 해서 결혼을 거부했다가, 이번엔 결혼했다는 거에 집착해서 여자가 여자기술을 못 한다는 거에 신세 한탄을 했단 말이오. 이게 그 내용 중에 중간에 계속 그런 게 나옵니다. 이런 모순이. 그런데 그 부인이 그럴 때마다 위로해서 깨우칠 기회를 줘도 이 중은 도대체 깨우치는 거 하고는 거리가 먼 거요. 이게 집착이죠. 이쪽으로 가라 하면 저쪽에 가서 탁 붙고, 이쪽으로 가라 하면 이쪽에 가서 탁 붙고. 그러니까 놔버려야 하는데 놓지를 못한다.
자~ 이런 얘기들도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무유정법이 뭐냐? 이거야. 이것이 법이라고 정해져 있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법이 없다는 것도 아니고, 함부로 해도 된다는 얘기도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중생의 이익을 따라 즉, 중생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인연을 따라서 갖가지 몸을 나퉈서 중생을 구제한다. 이 얘기는 아마 우리 모두에게 해당될 거요. 그죠? 어머니가 없으면 어머니가 없다고 울고, 있으면 있다고 잔소리한다고 시비하고, 처녀 때 혼자 살 때는 결혼할 대상 없다고 찡찡대다가, 결혼해놓고는 못살겠다고 징징대고, 또 애기 없다고 징징대다가 낳아 놓으면 원수 낳아 놨다고 징징대고. 늘 그러죠. 집에 있을 때는 저 산에 어디 가서 좀 했으면 좋겠다 하고, 산에 가면 또 파리 모기 때문에 못살겠다고 집에 가야 되겠다고 그러고. 늘 그래요 우리는, 혼자 있으면 혼자 있어서 좋고, 둘이 있으면 둘이 있어서 좋고, 산에 가면 산이 좋고, 집에 오면 집이 좋아야 된단 말이오.
제가 옛날에 봉암사 부목으로 있을 때 거기 장작 패고, 밭 매고 불 때고 이러고 있으면 신도님들이 차를 탁 몰고 오지 않습니까? 오시면 저는 그때 딱 목표가 뭐냐 하면요. 이 돈을 현금을 내가 안 가지고 있는다. 그리고 때 아닌 때에 먹지 않는다. 이렇게 결심을 하고 공부를 하는데. 내 공부를 위해서 말이오. 왜냐하면, 도회지에 살면 돈이 호주머니에 없으면 늘 불안하죠. 그리고 또 도회지 살면 뭐 커피 마시고 뭐 마시고 중간 중간에 과일 먹고 자꾸 군것질하게 됩니까? 안 합니까? 하죠. 알게 모르게 한단 말이오. 그래서 딱 정해진 밥만 먹고 그다음에 일체 돈 없이 산속에 사니까 가능하죠. 그때.
그렇게 하려고 하고 있는데, 오셔가지고는 “아이고 처사님은 좋겠다. 좋겠다. 이렇게 경치 좋고 공기 좋은데. 극락이 따로 있나? 여기가 극락이지.” 이래요. 그러면 자기 집은 뭐라는 애기요? 봉암사를 극락이다 하는 사람들은 자기 집은 지옥이다. 서울은 지옥이다. 부산은 지옥이다. 이런 얘기란 말이오. 사실은. 그런 얘기하는 거 보면 아~ 저 사람은 집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겠구나. 안단 말이오. 그리고 또 뭐 쥬스다, 담배다, 또 돈이다. 이런 걸 안 받겠다는데 받으라고 굳이 갔다 넣어 준단 말이오.
그럴 때 제가 참 느꼈죠. 아~ 이게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게 다 누구 생각이다? 자기 생각이다. 그걸 불쌍히 여기는 거는 참 따뜻한 마음이고 좋지마는 그것이 상대가 헤아려져서 도움이 필요로 한 걸 도와주는 게 아니고 필요 없다는데 막 억지로 준단 말이오. 그러니 우리가 다 좋은 생각마저도 뭐다? 자기상이다. 그러니까 보살이 화작을 한다는 것은 인연을 따라서 필요에 의해서 쓰이는 거지. 우리는 어떠냐 하면. 전부 자기 식대로 해요.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든 관계없이. 얻는 것도 자기 식이고. 주는 것도 자기 식이란 말이오. 여러분이 남편에게 늘 얻으려고만 할 거요. 또 여러분은 줄 때도 자기 식으로 줘요. 그래서 애들이 싫다는데도 자꾸 줘서 애들이 엄마 때문에 못살겠다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가출을 하죠. 안 줘서 가출하는 게 아니오. 너무 줘서 못살겠다고. 그러니까 이게 자기식이다. 이게 다 상이다. 이 상을 벗어나게 되면 필요에 의해서 우리가 쓰일 수가 있다.
자~ 그래서 우리는 마치 물이 본래 모양이 없으니까. 그릇 따라 모양이 정해지듯이. 본래 정한 바가 없기 때문에 인연을 따라 나투게 되죠. 그런데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해놓고 있기 때문에, 즉 상을 지어놓고 있기 때문에 인연을 따라 나툴 수가 없어. 고집하게 된다 이거야. 그 형상을 고집하게 된다. 자~ 그럼 무유정법이 뭔지 이해하시겠어요? 예. (01:00:36)
제8.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_법륜스님
buddhastudy.egloos.com/3931079
01:00:36
제8 의법출생분
依法出生分. 모든 과거의 부처님과 보살이 불보살이 이 법에 의지하여. 이 법이라는 게 뭐요? 무유정법이라는 거요. 이 법에 의지하여 출생했다. 탄생했다. 이 말이오. 반야심경에는 어떻게 나옵니까? 과거의 모든 보살과 과거의 모든 부처가 반야바라밀다. 깨달음에 의지해서 뭐다? 모든 고해의 바다를 건너고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 이렇게 나오죠? 그 반야, 깨달음이라는 게 뭐요? 훤하게 비춰보는 그 깨달음은 곧 제법이 공한 것을 깨닫는 거죠. 그러니까 이 게 같은 말이라는 거요. 여기서는 무유정법. 이 정함이 있음이 없는 무유정법에 의지하여 모든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신다.
須菩提於意云何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뜻이 어떠하냐?
若人滿三千大千世界七寶以用布施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서 삼천 대천 세계에다가 칠보로 가득히 채워서. 이용보시. 보시를 하게 되면
是人所得福德寧爲多不 이 사람이 얻은바 복덕이 많으냐? 많지 않느냐?
삼천대천세계가 뭔지 알아요? 예.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 중에 가장 큰 것을 세계라 그래. 제일 적은걸 뭐라고 한다. 그랬어요? 티끌, 미진이라 하고 제일 큰 거를 세계가 그래. 세계보다 더 큰 것은 경험의 세계에서는 없습니다. 경험의 세계에서 가장 큰 거를 뭐라고 하니까? 세계라고 하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가 경험의 밖에 더 넓은 우주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는 이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고 또 다른 세계가 있고, 또 다른 세계가 있고, 또 다른 세계가 있다 이런 얘기에요. 수많은 세계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천개모여서 이루어진 세계.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천 개나 있다. 이 말이야. 이것을 소천세계라 그러고. 그런 천 개의 세계가 또 천 개 있고 천 개가 있다. 이것을 중천세계라 하고. 이런 중천세계가 다시 천 개가 있다. 이것을 대천세계다 이렇게 말하니. 대천세계는 세계가 한량없이 많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 대천세계를 천이 세 번 반복이 됐기 때문에 삼천대천세계다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이 말이오.
이 삼천대천세계에다가 칠보로 가득히 채웠다 이 말은. 칠보라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귀한 거죠. 금이나 은이나 옥이나 이런 것 7가지를 칠보라 그러잖아 그죠? 그러니까 칠보는 가장 귀한 거라는 것은 적어도 값이 많이 나간다 이 말이오. 그런데 그런 값진 것을 또 삼천대천세계에다 가득히 채웠으니까 질이 아주 값진 거에다가 양도 어마어마하게 많으니까 그 전체의 값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런 얘기요.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히 채워서 보시를 행한다. 이걸 남을 준다 이 말이오. 그럼 공덕이 많으냐? 많지 않느냐? 얻은 복이 많으냐? 많지 않느냐? 많아요? 많지 않아요? 많겠죠.
須菩提言甚多世尊 수보리 말하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何以故 어찌한 까닭이냐 하오면
是福德卽非福德性 是故如來說福德多 이 복덕이 곧 복덕이라 할 성품이 아닐세. 이런 까닭으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 하십니다. 이랬어. 복덕이라고 할 것이 없을새. 복덕이 많단다. 이런 얘기요. 이게 지금 무슨 말이냐 이거요. 어찌한 까닭이냐 하면 이 복덕이 복덕이라고 할 만한 성품이 아닐세. 이런 까닭으로 여래께서 말씀하시되 복덕이 많다고 한다 이거야.
若復有人 만약에 다시 어떤 사람이 있어서.
於此經中 이 경 가운데에
受持乃至四句偈等爲他人說 수지는 받아 지닌다. 받는다는 것은 법문을 딱 듣고 아~ 옳거니! 맞아! 이렇게 탁 받아들인다 이거요. 지니는 거는 그때만 옳거니 하고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그걸 계속 가슴속에 세기고 있는 게 지니는 거요. 이 경 가운데에 사구게 등을. 즉 이 경전을 다하면 더 좋고. 뭐를? 사구게만이라도 이 말이오. 사구게가 뭐요? 범소유상이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죠. 이 사구게 등을 받아 지녀. 위타인설. 남을 위하여 연설하여 주면.
其福勝彼 그 복은 저 복보다. 저 복은 앞에 거를 말하는 거요. 저 보다 더 성하다. 저가 뭐에요? 삼천대천세계에다가 칠보로 가득히 채워 남을 위하여 보시하는 것보다 더 공덕이 크다. 이 말이오.
何以故須菩提 하이고 어찌한 까닭이냐 수보리야
一切諸佛及諸佛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皆從此經出 수보리야. 일체의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이 경을 따라 놔왔느니라. 이 세상에 출현하신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이 깨달으신 그 최상의 법이라는 것이 다 어디를 쫒아서 나왔다고? 이 경을 쫓아서 나왔다. 그러니 이 경의 가르침은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깨달으신 법에 어머니와 같다 이거야. 여기로부터 다 나오게 됐다 이거야. 그러니 이 경을 수지 독송한다는 것은 바로 부처가 되는 거고. 부처의 최상의 깨달음에 이르는 거다. 그러니 어찌 저 유루복인 칠보로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히 채워서 보시하는 것과 비교를 할 수 있겠느냐? 이 말이야.
須菩提所謂佛法者卽非佛法 수보리야. 소위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불법이 아니다. 불법, 이것이 불법이다 하면 이미 불법이 아니다. 이것이 불법이다 라고 정하면 상을 지으면 이미 그것은 불법이 아니다. 왜 그럴까요?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그 어떤 상도 지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어떤 정해진 법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자 어떤 사람이요. 부모가 야단을 치는데 꾹 참고 받아들였어. 부모님의 얼토당토 않는 소리를 하는데도 아이고 부모님이니까 내가 어떻게. 하고 꾹 참고 받아 들였단 말이야. 그걸 보고 사람들은 뭐라 그래요? 아이고 효자다. 잘도 참는다. 잘도 참아. 잘도 참는다. 잘도 참아. 어떻게 저렇게 잘도 참을꼬. 나 같으면 못 참을 텐데. 이렇게 말한다 말이오. 이렇게 참을 것이 있어서 참는 것은 사실은 참으로 참는다고 할 수가 없어요. 왜? 이것은 언젠가 터진다. 이거야.
그런데 부모님 말씀을 들으면, 무슨 얘기를 해도 부모님 말씀을 들으면 내 마음이 어떠냐? 아이고 옳거니, 옳거니. 그래야 되겠네. 그러는 게 좋겠네. 이런 생각이 들어서. 부모님 말씀이 틀렸다 이런 생각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어떨까? 참을 것이 있어요? 없어요? 참을 것이 없지. 그럼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잘 참아요? 참을 것이 있는 사람이 잘 참아요? 참을 것이 없는 사람이 잘 참아요? 참을 것이 없는 사람이 잘 참아요. 진짜 참는다라고 하려면 참을 것이 없어야 되요. 참을 것이 있어서 참는 것은 그건 진짜 참는다고 할게 못 되요.
그러니 복덕이라 할 것이 있어서 그것을 복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많다 적다고 할 수가 없다 이 말이야. 복이라고 할 것이 없어. 왜 복이라고 할 것이 없을까? 본질로 돌아가면요 이 세상에 천하 만물은 누구의 것입니까? 누구의 것도 아닙니까? 누구의 것도 아니지. 무소유란 말이오. 누구의 것도 아니야. 누구의 것도 아니니까. 어떻게 주더라도 그게 공덕이 될 수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 깨달음의 세계에서 그건 공덕이 안 돼. 그러니 삼천대천세계가 아니라 갠지즈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히 채워서 준다 하더라도 본래 이 물건이 누구의 것도 아닌 줄을 알면 아무런 공덕을 지은 바가 없어. 그러니 이것이 복이다 할 성품은 없는 거요. 본래는. 다만 이름하여 뭐라 한다? 복덕이 있다. 복덕이 많다. 이렇게 이름 할 뿐이다.
어찌한 까닭이냐? 이 복덕이 곧 복덕이라고 할 만한 성품이 없을 새. 이런 까닭으로 여래께서 말씀하시되 복덕이 많다고 할 뿐이다. 그러니 이 사구게를 수지독송 위타인설한다는 건 이 사구게를 받아들인다는 건 뭘 말해요? 이 세상, 일체의 존재에 성품이 있다는 거요 없다는 거요? 없다는 거요. 그걸 깨쳐버린 사람이오. 즉 제법이 공함을 깨달은 거다. 사구게를 받아 지녔다 이 말 자체가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임을 뭐했다? 깨달았다 이 말이오. 내가 그걸 깨닫고 또 남에게 연설했다는 말은 뭐요? 남도 깨닫게 했다 이 거야.
그 공덕은 바로 어떤 모양 지어지고 형상 지어진 그런 복하고는 비교가 될 수가 없는 거다. 그러니 우리가 앞에서 유루복은 많다고 하지만은 무루복하고는 비교가 될 수가 없고. 그 무루복은 중생의 소견으로 볼 때는 뭐다? 복이라 할 것이 있는 것 같지만은 사실은 깨달음의 눈으로 볼 때는 복이라 할 것이 없어. 그러나 다만 부처님께서 뭐 한다? 이름하여 복이라고 한다. 이거야.
옳고 그른 것이 본래 있어요? 없어요?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옳고 그른 게 없죠. 다만 인연을 따라서 그때 그때 상황 속에서 옳고 그른 것이 잠시 잠시 번갯불처럼 나타나요? 안 나타나요? 나타나지. 그러니까 옳고 그르다 할 본래의 성품이 본래 없기 때문에 인연을 따라 옳고 그른 것이 나타나서.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그때그때 이름 하여 옳다. 그르다 이렇게 말한단 말이오.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깨달으신 그 법이 다 이 도리로부터 나왔다. 이런 얘기요. 그러니 불법이라고 하면 이것이 불법이다 하면 이미 불법이 아니다. 이 말이오.
우리 흥부 놀부 얘기 한 번 보세요. 자~ 제비 다리가 딱 부러졌죠. 불쌍하죠. 그래서 치료를 해 줬어. 그랬더니 박씨를 하나 물어다 줬단 말이오. 그래 심었더니 박 바가지에서 온갖 보물이 나왔어. 놀부가 그걸 딱 보고 아 고거 괜찮다 싶었어. 그래 자기 따라 했죠. 했어요? 안 했어요? 고대로 따라 했어. 그런데 제비 다리가 부러진 게 없어서 하나를 부러뜨렸어. 그래 자기도 똑같이 매어서 날려 보내고, 씨 하나 받아서 심었는데. 박이 똑같이 열렸는데 깨보니까 엉뚱하게 나왔단 말이오.
그러니 여기에 핵심이 뭐요? 흥부는 바라는 마음이 없었지. 다만 제비다리 부러진 거를 보고 자비심을 냈죠. 아무런 바라는 게 없었단 말이오. 그러니 한량없는 공덕이 돌아왔고. 놀부는 바라는 마음을 내서 바라는 마음을 냈죠. 돈에 집착을 했다 이 말이오. 그런데 그 바라는 것을 채우기 위해서 흥부를 본받았다 이거야. 이름 안 쓰고 무기명으로 복 지으면 뭐에요? 아무 복 더 받는다 하니까. 자기도 고대로 따라 했단 말이오. 왜? 많이 받으려고. 아시겠어요? 제비 살려주면 뭐 한다고? 복 받는다 이래서 자기도 살려 줬단 말이오. 기어이 부러뜨렸단 말이오. 그러니 바라는 마음이 있으니까 이렇게 되는 거요.
이게 흉내 낸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이거야. 거기에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거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다 흉내 내잖아. 끊임없이 그 바라는 마음을 중심으로 해서 돈 벌려고 하다가, 권력 잡으려고 하다가, 명예 얻으려고 하다가, 그게 안 채워지니까 에라 모르겠다. 도 닦자. 이렇게 자꾸 얻으려는 마음이 이동한단 말이오. 그러니까 공하다 해도 어때요? 또 공한 상을 탁 만들고 상을 늘 짓기 때문에. 그래서 우린 지금 마음가짐이 심보가 뭐 같다? 놀부 같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아무리 흥부 흉내를 내도 결과는 내 안 돼. 마음을 흥부같이 써야 된단 말이오. 흥부같이 쓴다는 게 뭐냐? 바라는 마음이 없는 거다. 이런 얘기요.
부설거사 들어봤어요? 예. 부설거사 하면 역시 마찬가지인데. 부설거사 수행을 보면 말이오. 이 분은 원래 수행자였어요. 출가한 스님이었어요. 그래 세 사람이 이 수행자 세 사람이 열심히 도반끼리 공부를 하다가 정말 우리 용맹정진 한 번 하자. 이래서 깊은 산속으로 인적이 없는 데로 들어갔단 말이오. 들어가다가 마지막 마을. 그 이상은 가면 뭐가 없다? 사람이 없어요.
그 마지막 마을에 도착을 했어. 그래서 거기 그 촌장 집에 잤는데. 마침 그 거사가 아주 독실한 불교 신자 이었어요. 그래서 밤에 와서 법을 묻고 스님들이 대답을 하고 너무너무 기뻐서 갈려는 스님들을 잡고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해서 자기 불법에 대한 공부를 했단 말이오. 그런데 그 집 딸이 있었는데 딸도 어때요? 공부를 같이 곁에서 들었단 말이오. 그런데 그 중에서 이 부설거사의 법문은 너무나 조리가 있고 깊이가 있고 좋아서 그 딸이 반해버렸어.
이제 이렇게 며칠을 잡혀 있다 보니까 이래서는 안 되죠. 그래서 잡는 걸 놔두고 간다 하고 갔단 말이오. 그런데 이 딸이 상사병이 걸린 거요. 그래서 몸져누워서 이 스님이 가면 자긴 목 메달아 죽겠다 했단 말이야. 그러니 이 거사가 제발 비는 거요. 외동딸인데 죽이면 안 된다고. 제발 좀 살려 달라 라고. 그러나 출가한 스님들이 뭐 부모도 버리고 온 사람들이 그런 거 생각할 필요가 없잖아 그죠? 간다.
그런데 그때 이 스님이 생각했단 말이야. 옛날에 부처님은 전생에 호랑이 새끼들 죽어가는 거 살리려고 어떻게 했다? 자기 몸을 새끼 밥을 줬다. 이런 거 나오죠. 또 비둘기가 쫓겨 가니까 매에게 자기 허벅지 살을 베어 줬다. 이런 얘기 나오잖아. 그죠? 보살은 중생을 위해서 그 몸을 양식으로 만들고 약을 만들어서 구호를 한다. 그렇게 하는데 나 때문에 죽겠다는 사람을 죽게 만들고 내가 어떻게 보살행을 할 수 있겠느냐? 보살행을 하지 못하면 어떻게 대승의 큰 깨달음을 얻겠느냐? 그래서 우선 사람 목숨부터 살려야 되겠다. 이래서 거기에 남았단 말이야.
그래서 두 친구들이 야 이 바보 같은 놈아. 여기까지 와서 여자 때문에 수행을 포기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이렇게 해서 밀고 당기다가 에이고 너 타락해서 안 되겠다고. 그래 둘이는 갔단 말이오. 그래 두 분 스님은 산속에 가서 오랫동안 정진을 하고 이 부설거사는 이 처녀하고 결혼을 해서 서당선생을 하면서 애 낳고 거기서 농사짓고 살았단 말이오. 낮에 가서 일하고 저녁에 돌아와서 밥 먹고 자려면 부인이 그래요. 여보, 당신은 목숨을 걸고 수행한다. 그래 놓고 자면 어떡하냐는 거요.
그러니까 자기는 목숨을 걸고 수행을 하겠다고 맹세하고 이 깊은 산속에 들어왔는데. 이 여인을 만남으로 해서 자기는 뭐했다 생각한다? 수행을 포기했죠. 에이고 뭐 끝나 버렸다. 이게 우리 중생 마음이란 말이오. 한 번 결심을 딱 했으면 엎어지든 자빠지든 지속을 해야 되는데 이게 경계 따라 틀어진 거죠. 그러니까 여인을 만난 건 만난 거고, 공부는 공부고. 이렇게 나가야 되는데. 여인을 만남으로 해서 공부는 끝나 버렸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요. 그걸 누가 깨우쳐 주느냐? 여인이 깨우쳐 준단 말이오.
당신 훌륭한 수행자라서 결혼을 했고, 당신한테 반했지. 수행 포기하고 범부로 사는 남자를 내가 뭣 때문에 좋아하겠느냐는 거요. 여기서 크게 깨달은 거죠. 그래서 일하고 들어와서도 탁 용맹정진을 했단 말이오. 그래 그 삼 년이 지나서 그 스님들이 내려왔단 말이오. 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아이고 이놈의 새끼 결혼해서 애나 낳고 완전히 중생 속에 물이 들었겠지. 우리 가서 좀 놀려 주고 가자. 이래. 그래 떡 내려와서 방문을 했단 말이오. 그래 얘기를 다하면 길어지니까. 도술 내기를 해단 말이야. 그런데 누가 이겼겠어? 예. 부설거사가 이겼겠죠.
그러니 공부라는 것은 이 사로잡히면 안 돼. 한 생각을 잘 못쓰면 안 된단 말이오. 그런데 감옥에 떡 있어보면 제가 옛날에 법회하고 다닐 때는 소원이 세끼 밥 먹는 거 하고, 잠 한번 실컷 자는 거였어요. 하도 온 천지를 차를 타고 다니니까. ‘아이고 나도 언제 한 번 세끼 밥 다 찾아 먹고 잠이나 한 번 푹 자 볼까?’ 다른 사람이 보면 너무 쉬운 거 같은데 그걸 못하고 헤매고 다녔단 말이오.
그런데 어쩌다가 감옥을 가게 됐어. 그런데 여기야 말로 세끼 밥을 먹기 싫어도 꼬박꼬박 시간 마쳐 들어오고. 잠을 안 잘라 그래도 안 잘 수 없도록 10시에 불을 꺼버리고 6시에 불을 켜고. 8시간 자야 된단 말이오. 그러니까 일주일인가 한 열흘 지나니까요. 몸무게가 5키로 불읍시다. 얼마나 편했든지. 남은 고생이라지만 나는. 그랬는데 행복했느냐? 이거야. 그 소원성취를 했는데. 행복하지가 안았어요.
그러니 못 먹을 때는 먹으면 행복할거 같고, 못 입을 때는 입으면 행복할 거 같고, 잠 못 잘 때는 잠만 자면 소원이 없을 거 같은데. 사실은 그것으로 인해서 행복해 지는 게 아니에요. 좀 못 먹고 좀 못 입고 잠 좀 못 자고 해도 사람은 역시 자기가 세운 원을 쫓아서 인간이 움직일 때 그 때 생에 보람이 있는 거요. 그런데 제가 절에 들어와서 물론 입고 먹고 자는 거 크게 많이 걸리지는 않았지마는 이 경험을 통해서 내가 많이 놔버렸어요.
그러니까 그 다음부터는 먹고 입고 자는 문제는 별로 중요한 거 아니다 이거야. 오히려 제가 입맛 같은 게 까다로운 편이에요. 그런데 인도에 가서 아무거나 잘 먹거든요. 그러면 사람들이 다 나보고 그래요. 아 ~스님은 인도 체질인가 봐. 그래요. 전 사실은 빵도 한 조각 안 먹는 사람이오. 밥하고 김치밖에 안 먹는 완전 토착인데. 거기 가면 거기대로 살아야죠. 아무거나. 그러니까 그게 다른 사람이 생각하듯이 체질이 그게 맛있어서 먹는 게 아니라. 그냥 맛이 있고 없고 상관없이 주는 대로 먹는 거요.
그런데 ‘여려 개 있는 중에 골라 먹어라.’ 그러면 누가 빵 먹겠어? 밥 먹겠지. 빵밖에 없으면 그거라도 먹어야 되죠. 그런데 그런 먹는 걸 갖고 먹는 것 때문에 못 견디겠다. 어떻겠다. 저떻겠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거요. 여기 우리 jts에 파견 간 어떤 보살이 한 사람 있어. 내가 가면 어렵다 그러면 저는 괜찮아요. 군대에서 훈련을 받아서 여군 출신인데. 그래 갔는데 열흘 만에 나가 버렸다는 거요. 왜? 이렇게 먹고 어떻게 사느냐는 거요? 이렇게 먹고는 못산다는 거요. 그런데 잘 먹고 살 수가 없어요. 우선 잘 먹어 봤자지만 그 가난한 거지동네에서 봉사하면서 잘 먹으면 그 동네 사람하고 융화가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안 돼.
학교에 수많은 가난한 애들이 오는데. 아이들까지 맛을 음식을 다 맛있게 해 주면. 게들은 학교 음식에 맛 들여 놓으면 집에 가서 먹을 수 있어요? 없어요? 없어. 그러면 애들은 형편없이 주고 자기만 따로 해 먹을 수가 없죠. 우리가 상식으로 생각하면 거기는 인도사람이고 나는 한국 사람이지 않느냐? 예. 그렇게 생각하면 벌써 동사섭이 안 되는 거요. 우리가 생각할 때는 걔들은 날 때부터 그래 먹었으니 되고. 우리는 잘 먹었으니까 잘 먹어야 되지 않냐? 이게 부자 논리란 말이오. 가난한 사람의 논리를 보면 우리는 이제까지 못 먹었으니 앞으로 잘 먹어야 되고, 너는 이제까지 잘 먹었으니 좀 못 먹어도 되지 않냐? 이렇게 논리를 세우면 논리가 되요? 안 돼요? 된단 말이오.
※ 동사섭(同事攝)이란 말은 불교의 사섭법(四攝法 : 布施攝 · 愛語攝 · 利行攝 · 同事攝)중의 한 개념이다.
사섭법이란 보살이 중생을 향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베풀고(보시섭) 경우에 따라서는 자애어린 말로 더불고(애어섭) 또는 이로운 일로 도와주고(이행섭) 나아가 그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하는(동사섭) 삶의 태도를 말한다.
그런 데서 우리가 공부를 어떻게 하느냐? 공부라는 건 꼭 책만 보고 하는 게 공부가 아니란 말이오. 어떤 자기가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상황으로부터 자각하는 거요. 그러니 옛 선사들이 깨달았거나 이런 분들의 얘기 속에서 쭉~ 보면 다 자기가 크게 잘못했거나, 자기가 쥐가 쥐약을 먹듯이 어리석게 군것을 돌이켜서 깨닫고 자기를 본다. 이 말이오. 그때. 원효대사도 아침에 해골바가지 물보고 구역질을 했으니 잘한 거요? 잘못한 거요? 잘못한 거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 해골바가지 물 담긴 거 보고 구역질을 뭣 때문에 해? 그러나 그런 구역질을 함으로서 도리어 깨우쳤단 말이오. 아~ 어제는 그렇게 맛있더니, 똑같은 물인데. 아~ 이게 마음에서 일어나는 거구나. 이렇게.
내가 그렇게 관음의 진신을 친견하겠다고 하면서 시키는 대로 하겠다. 관음의 진신을 친견하기 위해서는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해 놓고. 금방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서 시키는 대로 안 하죠. 그렇게 계율 지키겠다고 발버둥을 치고 난리를 펴놓고는, 여자가 아니라고 실망을 한단 말이오. 다 자기 식대로 생각한단 말이오. 우리는. 이것이 일체유심조라. 그런대도 늘 뭐라고 생각하느냐? 바깥이, 남이, 다른 사람이. 이렇게 문제를 삼는다 이거요.
남 탓하려면 끝이 없어요. 오늘날 우리 사회도 한 번 보세요. 남한 사람은 북한 탓하고, 북한 사람은 남한 탓하고 그러죠? 전라도 사람은 경상도. 노동자는 정부나 기업 탓하고, 정부나 기업은 노동자 탓하고. 남자는 여자 탓하고 남자는 여자 탓하고. 젊은 애들은 어른 탓하고 어른은 애 탓하고, 선생은 학생 탓하고 학생은 선생 탓하고. 신도님들은 늘 입만 띄면 스님들 탓하고, 스님들은 신도들에게 기독교처럼 보시도 잘 안하고, 조직도 안 되고, 봉사도 안하고, 스님들한테 물어봐라. 신도들에 대해서 불만이 얼마나 많은지. 신도들한테 물어보면 스님에 대해서 불만이 많단 말이오.
이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는 게 없어요. 이게 다 뭐냐?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다는 도리를 믿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기 때문에 오는 거요. 그러니 우리가 불교를 공부한다 하는 것은 얼마나 이 습관이 오래 배어 있나 하면요. 불교 공부를 하면서, 이런 가르침을 공부 하면서도 이게 또 뭐가 된다? 분별의 잣대가 되죠. 부처님이 요렇게 살라 했는데 스님들은 왜 요렇게 삽니까? 요기 요렇게 하지 마라 그랬는데 왜 저 사람은 요렇게 합니까?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직 누구에게만 향해야 된다. 그랬어요? 오직 자기에게로만 향해야 된다. 자기에게로 향해서 보면 다 온갖 것들이 다 해결이 될 수 있는 만병통치약처럼 무궁무진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 건데. 이 잣대를 자기에게 적용을 안 하고 자꾸 남에게 적용을 한다 이거야. 대화를 한 번 해 봐요. 다 남에게 적용하지. 자기가 지키지 않는 것을 보고 참회하고, 자기가 욕심내는 걸 보는걸 보면서 남 욕심내는 걸 이해하고, 남 욕심내는 걸 보고서 욕심을 안내야 되겠다고 자기가 뉘우치고 이러면. 부닥치는 것마다 다 공부거리가 된다 이 말이오.
그런데 우리는 자기는 욕심내면서 남 욕심내는 거 비난하고, 이렇게 살기 때문에 남보고 정직하라 그러면서 자기는 정직하지 않고. 이렇게 살기 때문에 세상살이 속에서 배우는 게 없다 이거야. 그러니 우리가 불보살은 인연을 따라서 늘 화현하기 때문에 지금 여러분들의 아내나 남편이나 부모나 자식이나 형제나 이웃 사람 중에도 불보살이 화현해 있는지 알 수가 없죠. 왜? 불보살이 불보살이라는 간판 걸고 나옵니까? 아니겠죠. 그런데 그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튀어야 된다 이거야.
내 눈이 맑아지면 세상이 다 불보살로 보인다. 그러잖아요. 그 불보살로 보일 때 내가 공부가 되는 거요. 이거도 문제고 저거도 문제고, 이것도 문제고 저거도 문제고. 이런 한은 뭐다? 공부는 멀었다. 이거야.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공부가 돼 있는지 안 돼 있는지 점검은 간단하다니까. 여러분하고 같이 사는, 가까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느껴지느냐? 그걸 갖고 뭘 해라? 수행을 점검해라. 스님한테 와서 제 공부가 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이렇게 물을 필요가 없어.
저는 어떻게 여러분이 자꾸 물으면 대답해 줄 수 있느냐? 남편 데리고 오시오. 내가 남편한테 요새 보살 어때요? 요새 많이 좋아졌어요. 그러면 아~ 공부가 좀 됐나 보다 이렇게 생각하고. 뭐 좀 좋아진 거 같더니 도로아미타불이에요. 음. 그럼 또 안됐나 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맞는다고 할 만큼. 자신이 변해야 되는 거요. 아직도 상대에게 문제가 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누가 병들어요? 자기가 병들어요. 이걸 확실히 여러분들이 깨달아야. 여러분도 행복하고 불법의 위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거야. 자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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