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관광객들에게 일본 쓰시마의 덕혜옹주 결혼 봉축기념비를 설명하는 송양순 할머니. 그는 “정략 결혼을 한 덕혜옹주가 1931년 시댁인 쓰시마를 방문했을 때 조선인 근로자들이 세운 비석으로 망국의 한이 서려 있다”고 했다. [쓰시마=송봉근 기자]
일본 전문 관광 가이드 송양순(85·부산 아주관광) 할머니는 요즈음도 매달 서너 차례 쓰시마(對馬島) 안내에 나선다.
그는 한국관광공사에 등록된 관광 통역안내사 2만여 명 가운데 현역 활동 중인 최고령자다. 1974년 당시 교통부 장관으로부터 ‘일본어 통역안내사’ 자격을 받고 가이드로 나섰으니 올해가 40년째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부산에서 일본 본토쪽으로 가는 우리 관광객들과 부산으로 들어오는 일본인들의 한국내 안내를 주로 맡았다. 조금씩 힘에 부치자 부산에서 뱃길로 쓰시마를 찾는 관광객들만 안내하고 있다.
젊은 가이드들도 배를 타는 것을 힘들어 하지만 할머니는 지금까지 멀미를 해본 적이 없다. 쓰시마 에보시다케(烏帽子岳)전망대를 젊은 관광객들보다 빨리 오르고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꼿꼿하게 서서 설명을 할 정도로 건강하다. 할머니는 “‘손님은 신(神)이다’ 생각하며 항상 긴장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1928년 충남 논산에서 대지주의 딸로 태어난 송 할머니는 46년 3월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사범학교 졸업 뒤 여고 교사로 4년간 일하다 결혼하면서 남편을 따라 부산으로 왔다. 일본어 학원을 운영하다가 일본어를 배우러 온 여행사 임원의 권유로 가이드를 시작했다.
그동안 일본 거물 정치인도 안내해봤고 한국과 일본내 단골도 많이 생겼다.
10여 년 전에는 호소가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전 총리와 이와쿠니 데쓴도(岩國哲人) 민주당 국회의원을 포함한 일본 정치인들의 경주 관광을 안내했었다. 서울의 한 여행사가 서울 회의를 마치고 경주 관광을 하려는 호소가와 총리 일행을 안내할 사람을 찾다가 송 할머니의 명성을 듣고 부탁을 한 것이었다. 송 할머니는 “경주관광을 마친 뒤 호소가와 총리가 ‘어떻게 그렇게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꿰뚫은 설명을 할 수 있느냐’고 말한 게 기억이 난다”고 했다.
한번이라도 할머니의 안내를 받아본 일본인들은 그를 계속 찾는다. 일본 역사연구회가 대표적이다. 일본내 역사연구학자와 동호인들로 구성된 이 모임은 30년 전에 시작한 한국내 임진왜란 유적지 안내를 지금도 송 할머니에게 부탁한다. 할머니의 해박한 지식과 성실한 안내를 높이 사기 때문이다. 할머니 집에는 일본인들이 보낸 감사편지가 수백 통이 있다. 이 단체는 학술지 ‘역사연구’ 2000년 6월호에 할머니를 우수한 통역안내원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일본 역사연구회원들이 한국역사에 대해 꾸준히 공부하는 것을 보면 무서울 정도입니다. 우리도 일본의 나쁜 점만 보고 일시적으로 흥분하지 말고 일본을 조용히 공부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할머니는 한국 관광객의 일본 여행 인솔도 많이 했다.
95년부터 2005년까지 10여 년간 지역언론사 등이 주관한 ‘부산 소년의 배’ 안내도 맡았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게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이해시키고 일본의 전통문화를 체험케 하는 행사였다. 할머니는 귀국길에는 꼭 쓰시마 이즈하라(嚴原)항 단골 서점에 들러 일본 시사지를 구입한다. 일본내 최신 흐름을 파악해 관광객 안내에 활용하기 위해서란다.
송 할머니의 ‘가이드 원칙’은 엄격하다. 배가 떠나기 2시간30분 전부터 부산 국제여객터미널에서 인솔할 관광객을 기다린다. 고객 맞춤형 안내를 위해 하루 전 명단을 받아 나이·직업 등을 파악한다. 여행이 끝난 뒤엔 관광객에게 전화해 불편한 점이 없었는지를 꼭 물어본다. 다음 안내 때 참고하기 위해서다.
수십 명을 인솔하면서 할머니는 깃발을 들고 다닌다. “요즈음 젊은 가이드들은 귀찮다고 깃발을 들지 않고 관광객에게 배지를 달게 합니다만, 그건 아니죠. 깃발을 드는 게 거북하더라도 관광객이 가이드를 쉽게 찾도록 당연히 들어야죠.” 할머니는 젊은 시절엔 정장 차림으로 가이드를 했지만 지금은 화려하지 않은 단정한 옷차림을 한다. 아웃도어 차림을 한 후배 가이드를 보면 나무란다. 후배 가이드들이 잘못할 경우 현장에서 바로 지적한단다. 부산~일본을 오가는 가이드들이 그를 ‘왕언니 가이드’라 부르는 이유다.
“관광가이드 일이 쉬운 것 같지만, 민간외교관 역할을 하는 까다로운 일이다. 외국 관광객은 가이드의 말과 품격을 보고 그나라 문화 수준을 평가한다. 이세상에서 마지막 가이드를 잘 마치고 며칠 뒤 죽는 게 꿈이다. 그 다음엔 하늘나라에서 가이드를 해야지. 하하.”
송 할머니 좌우명은 ‘한화동복(閑禍動福), 명불허전(名不虛傳)’ 이다. ‘한가하면 화가 미치고 움직이면 복이 온다. 명성이나 명예가 헛되이 퍼진 것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무대에서 죽고 싶다는 어느 프랑스 배우의 꿈처럼 할머니는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관광객 안내를 할 참이다.
쓰시마=김상진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