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백화점에 ‘남편방’을 만들어주세요

seongsoo 2012. 6. 12. 19:54

백화점에 남편방을 만들어주세요

벌써 세 시간째다. 발바닥에 불이 난 것 같고 허리도 아파온다.

이거 어때? 괜찮지?”

피팅룸에서 나온 아내가 한 바퀴 돌면서 남자에게 묻는다. 그는 안면근육을 조작해 감탄하는 표정을 짓는다.

잘 어울리는데! 그걸로 하자.”

 

솔직히, 뭐가 뭔지 모른다. 이쯤에서 적당한 타협과 구매가 이뤄지길 바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피곤하다. 전문가들이 남녀의 쇼핑 패턴을 조사한 결과 남성들이 한 곳에만 들러 평균 6분 만에 쇼핑을 마치는 반면에 여성들은 여러 곳을 다니며 평균 3시간 26분을 쓴다는 분석이 있었다. 남녀가 함께 쇼핑을 할 경우 대략 72분이 남성이 참을 수 있는 한계라는 얘기도 있다.

 

남자는 아내를 사귀던 시절부터 쇼핑하면 강제노역을 떠올리곤 했다. 한낮에 백화점에 들어가면 밤이 되어서야 풀린 걸음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평소엔 가까운 거리도 안 걸으면서 백화점에선 굽 높은 구두로도 끄떡없는 그녀가 불가사의였다.

여성들이 쇼핑에 강한 이유는 그렇게 진화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사냥꾼의 후예인 남성이 목표물에만 집중하게 된 것과는 달리 채집 담당이었던 여성은 여러 가지를 두루 살피는 능력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

남자는 인류사에서 남녀가 함께 쇼핑하게 된 것 이상의 비극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내에게는 그런 생각을 말해본 적은 없다.

 

아내 앞에선 백화점에 불만이 많다. 매장마다 조그만 의자라도 놓아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몇 시간 동안 끌려다니며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돈까지 내야 하는 남성들을 위해서.

남자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호주의 어떤 매장에 남편 맡기는 곳이 생겼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잡지를 보거나 게임을 하면서 아내를 기다리라고 마련한 곳인데 대성황이라는 거였다.

 

남자는 다른 매장으로 향하면서 아내에게 백화점에 제안을 해 보겠다고 자랑을 했다. 아내가 통박을 했다. “뭘 얼마나 돌아다녔다고 그래? 백화점 같이 온 게 그렇게 못마땅해?”

남자는 발끈했다.

누가 그렇대? 그럼 당신도 내일 나랑 새벽에 낚시 가자.”

아내가 강하게 나왔다.

가자. 누가 못 갈 줄 알고?”

남자는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낚시터의 침묵계율을 아내가 어떻게 지킬 수 있겠는가. 여자들이 살찌는 것 다음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입 다물고 버티는 건데. 낚시 친구들의 얼굴에 나타날 뜨악한 표정이 눈에 선했다. 진퇴양난이었다.

아내가 쩔쩔매는 그에게 쇼핑백을 안기며 선심을 썼다. “됐어. 안 갈 테니까 이거나 들어.”

 

한상복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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